카테고리 없음

[영성 칼럼]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이사야 5:13)

knowledgeplatform100 2026. 8. 5. 08:22

 

영적 무지가 어떻게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가?(이사야 5:13-17)

탐욕과 향락보다 더 깊은 죄, 영적 무지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이사야 5:13)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이사야는 두 가지 들포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첫째는 탐욕이었습니다.

둘째는 향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탐욕과 향락 자체보다 더 깊은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영적 무지입니다. 13절은 매우 의미 있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לָכֵן, 라켄)

 

성경에서 "그러므로"는 결과를 의미합니다. 유다가 포로가 되는 이유는 국제정세 때문이 아닙니다.

앗수르가 강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인 문제가 역사적인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이사야는 역사를 단순한 정치나 경제의 결과가 아니라 언약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1. 성경이 말하는 무지는 지식 부족이 아닙니다.

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오늘날 우리는 무지를 교육의 부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무지는 다릅니다.

히브리어 '다아트(דַּעַת)' 는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삶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4장 6절도 동일하게 선언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언약적 지식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성전도 있었습니다.

제사도 드렸습니다.

절기도 지켰습니다.

율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무지입니다.

오늘날의 영적 무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공부는 많이 합니다. 신학도 공부합니다. 설교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말씀보다 세상을 더 의지합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위험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에 대한 정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지식은 삶을 변화시킵니다. 머리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2. 하나님 없는 욕망은 결국 사람을 삼킵니다.

14절입니다.

"스올이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이 표현은 매우 강렬합니다. 앞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땅을 원했습니다. 더 많은 술을 원했습니다. 더 많은 즐거움을 원했습니다.

욕망의 입은 끝없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큰 입이 등장합니다. 바로 스올(죽음) 입니다. 사람은 욕망으로 세상을 삼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죽음이 사람을 삼켜 버립니다.

 

얼마나 강력한 역설입니까? 욕망은 결코 "이제 충분하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 채가 두 채가 되고, 두 채가 열 채가 되고, 열 채가 백 채가 되어도 마음은 여전히 공허합니다.

전도서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얻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헛됩니다.

C. S. 루이스의 통찰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약해서 문제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을 얻을 수 있는데 잠시의 즐거움에 만족해 버립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진흙놀이를 하며 바다 여행을 거절하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사야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욕망은 결국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교만을 낮추십니다.

15절입니다.

"천한 자도 낮아지고 귀한 자도 굴복하며."

 

이 말씀은 이사야 2장에서 이미 선포된 주제를 다시 반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도, 부자도, 권력자도, 학자도, 모두 동일합니다. 교만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사람이 차지하려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바벨탑에서도 인간은 하늘까지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도 "이 큰 바벨론은 내가 세운 것이 아니냐." 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두 낮추셨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인간을 낮추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이야기입니다.

4. 하나님의 거룩함은 정의와 공의로 나타납니다.

16절은 이사야 전체의 핵심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심으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심으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거룩을 죄를 멀리하는 것, 깨끗한 삶, 예배의 엄숙함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거룩을 훨씬 더 넓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정의를 세우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억울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강한 자의 ظلم(억압)을 심판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크리스토퍼 J. H. 라이트는 구약의 정의는 단순한 법적 판결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를 하나님의 질서 안으로 회복시키는 사역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거룩하다면, 예배만 아름다운 공동체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5. 폐허 속에서도 하나님의 질서는 회복됩니다.

17절입니다.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이 장면은 얼핏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심판 이후의 모습입니다.

탐욕으로 독점했던 땅이 폐허가 되었고, 그 자리에 양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 회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탐욕이 만든 질서를 무너뜨리고, 창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시는 장면입니다. 인간은 소유를 절대화했지만, 하나님은 다시 자신의 세상을 바로 세우십니다.

신약에서 이루어진 완전한 회복

이사야의 심판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며, 동시에 선한 목자이십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죄는 심판받았고, 죄인은 용서받았습니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셨고, 동시에 죄인을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로마서 3장 26절은 하나님께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사야 5장의 정의와 공의는 결국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이사야는 오늘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욕망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거룩을 말로만 찬양하는가,

아니면 정의와 사랑으로 살아내고 있는가?

참된 신앙은 단순히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세상의 욕망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상 속에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들포도의 실체, 탐욕과 향락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불렀는가

본문 : 이사야 5:8-12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 홀로 거주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8)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성껏 가꾸신 포도원이 왜 실패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심으셨지만, 포도원은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이제 이사야는 그 들포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은 두 번의 "화 있을진저"(הוֹי, Hoy)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화 있을진저"는 단순한 저주의 말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향해 애도할 때 부르던 장송곡의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은 "너희는 아직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음의 길을 걷고 있다." 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들포도의 정체를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탐욕입니다.

둘째는 향락입니다.

놀랍게도 이 두 죄는 오늘날 현대 문명을 가장 잘 설명하는 죄이기도 합니다.

1. 탐욕은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입니다.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겉으로 보면 부동산 투자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돈이 아닙니다.

언약을 파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땅은 개인의 절대적인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모든 땅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관리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희년 제도를 주셨습니다. 50년마다 모든 토지는 원래 가문으로 돌아갑니다.

 

왜입니까?

가난한 사람이 영원히 가난하게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 집안이 영원히 생존 기반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했습니까?

 

힘 있는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의 토지를 계속 사들였습니다. 빚진 사람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결국 모든 재산이 소수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경제 문제가 아니라 언약을 파괴하는 죄라고 선언합니다.

탐욕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땅 가운데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

 

참으로 무서운 표현입니다. 탐욕은 단순히 많이 가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살아갈 공간까지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자신만 안전하면 된다는 마음입니다. 자신만 풍요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라고 선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소유가 하나님보다 더 큰 안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창고를 더 크게 짓고 "내 영혼아 평안히 쉬자." 라고 말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하나님 없는 풍요는 결코 안전이 아닙니다.

교회도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날 탐욕은 반드시 부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 더 인정받으려는 마음.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 더 큰 영향력을 얻으려는 마음.

이 모든 것이 탐욕의 다른 얼굴입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을

"우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공장(factory of idols)"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탐욕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문제입니다.

2. 하나님은 탐욕의 결말을 선언하십니다.

9~10절에서 하나님은 매우 충격적인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큰 집은 비게 됩니다. 넓은 포도원은 거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많이 심었는데 거의 거두지 못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심판입니다. 죄에 상응하는 심판입니다.

평생 모았지만 사용하지 못합니다. 평생 넓혔지만 누리지 못합니다. 전도서가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하나님 없이 모은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3. 두 번째 들포도는 향락입니다.

11절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르며..."

 

이 사람들은 하루를 술로 시작합니다. 밤늦게까지 술로 끝냅니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쾌락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술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포도주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삶의 중심인가입니다.

음식.

취미.

여행.

문화.

스포츠.

성공.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선물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지는 순간 우상이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무질서한 사랑(Disordered Love)'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죄란 나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4. 향락은 영적 분별력을 빼앗습니다.

12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은 생각하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이것이 향락의 가장 무서운 결과입니다. 향락은 눈을 멀게 합니다.

술 때문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기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말씀을 읽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욕망만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무감각입니다. 

존 오스왈트는 이 부분을 설명하며 "죄는 인간을 먼저 즐겁게 만들지만, 결국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영적 실명으로 이끈다."

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담은 먹는 것으로 넘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도 사탄의 시험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태복음 4:4)

 

이것이 참된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만족보다 아버지의 뜻을 더 기뻐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사람은 탐욕보다 나눔을 선택하고, 향락보다 거룩한 기쁨을 추구하게 됩니다.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열매 (이사야 5:1-17)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요 15:5)

 

이사야 5장은 매우 무거운 심판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포도원을 가꾸셨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은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정의를 기대하셨지만 포학이 나타났고, 공의를 기대하셨지만 억눌린 자들의 부르짖음만 들렸습니다.

결국 포도원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인간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구약 전체가 보여주는 대답은 분명합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사사 시대도 실패했습니다. 왕들도 실패했습니다. 제사장도 실패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의 왕조도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구약은 새로운 포도원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라."

이 한마디는 이사야 5장 전체를 완성하는 선언입니다.

1. 예수님은 실패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신 참포도나무입니다.

이사야의 포도원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True Vine) 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되다(ἀληθινός)'는 단순히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완전한, 궁극적인, 실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실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지만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지만 넘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찾던 정의와 공의를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알렉 모티어(Alec Motyer)는 이사야서를 해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에서 메시아가 참된 이스라엘이 되신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사의 흐름입니다.

2. 좋은 열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의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

"더 많이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요 15:4)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열매'가 아니라 '거하라(μένω, 메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거하다'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고, 기도 안에 거하고, 성령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열매는 억지로 만들어 붙이는 장식이 아닙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결되어 있으면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은 구원의 모든 은혜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라고 말합니다.

칭의도,

성화도,

영광도,

모두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시작됩니다.

3.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참된 열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흥미로운 점은 성경이 '열매들(Fruits)'이라고 하지 않고 '열매(Fruit)'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맺으시는 하나의 생명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5장의 들포도와 비교해 보십시오.

들포도성령의 열매
탐욕 사랑
향락 절제
포학 온유
교만 겸손
억압 자비
불신앙 충성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인의 성품까지 변화시킵니다.

4. 열매는 개인의 경건을 넘어 공동체의 정의로 이어집니다.

이사야 5장에서 하나님께서 찾으신 것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었습니다.

정의였습니다. 공의였습니다. 약자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야고보도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약 2:17)

 

참된 열매는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나타납니다. 직장에서 나타납니다. 경제생활에서 나타납니다.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용서하는 삶에서 나타납니다. 정직한 거래에서 나타납니다. 

 

교회는 예배당 안에서만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토퍼 J. H. 라이트는

"성경의 구원은 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전체를 하나님의 정의 아래 회복시키는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5. 오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

이사야 5장의 질문은 오늘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오래 믿었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많은 직분을 가졌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었는지도 먼저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를 물으십니다.

우리의 삶에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에는 은혜가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은 화평을 이루고 있습니까?

우리의 교회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통해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 5장은 단순한 심판장이 아닙니다. 

이 장은 우리를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우리도 실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열매를 맺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맺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세상 속에 정의와 공의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때 이사야 5장에서 하나님께서 찾으셨던 그 열매가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끝까지 거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풍성했지만, 그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향락, 교만과 무관심을 성령께서 깨뜨려 주옵소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날마다 거하게 하시고, 우리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