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칼럼]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

눈에 보이는 현실인가, 임마누엘의 약속인가? (이사야 7장 1~9절)
「위기의 순간 하나님은 무엇을 보라고 하시는가」
들어가는 말씀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자주 흔들립니다.
건강이 흔들리고,
경제가 흔들리고,
가정이 흔들리고,
교회가 흔들리고,
나라가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쉽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위기 속에서 드러납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나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내가 가장 먼저 붙드는 것이 무엇인가가 곧 나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이사야 7장은 바로 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가장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앞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오늘 본문은 단순히 한 왕의 실패를 기록한 역사가 아닙니다.
오늘도 위기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 이사야 7장의 역사적 배경
이사야서는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5장까지는 왜 하나님의 심판이 오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공의를 버렸고 우상을 섬겼으며 가난한 자를 압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포도원 비유(사 5장)를 통해 좋은 포도 대신 들포도를 맺은 백성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죄인이었던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을 받고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여기까지가 "하나님은 어떻게 죄인을 사용하시는가" 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7장부터는 질문이 달라집니다. 이제 하나님은 "부르심 받은 백성이 누구를 의지하며 살 것인가?" 를 묻기 시작하십니다.
시대적 상황
때는 BC735년. 역사에서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Syro-Ephraimite Crisis) 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당시 급속도로 세력을 넓히던 아수르 제국에 맞서기 위해 동맹을 맺습니다.
그리고 남유다에게도 동맹에 참여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거절합니다.
그러자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단순한 국경분쟁이 아닙니다. 다윗 왕조를 무너뜨리려는 전쟁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삼하 7:12-16)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정치적 사건인 동시에 언약을 둘러싼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예루살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사 7:2)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거대한 숲이 폭풍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숲 전체가 흔들립니다. 나라 전체가 공포에 빠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두려움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도 두려워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두려워했고 모세도 두려워했고 엘리야도 두려워했고 다윗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깊은 고민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문제는 두려움이 누구를 의지하게 만드는가입니다.
2. 하나님은 먼저 환경이 아니라 마음을 다루신다
아하스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본문은 그가 윗못 수도 끝에서 물을 점검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군사 전략을 세우고 물을 확보하고 성을 방어하려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군사 전략보다 먼저 그의 마음을 다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삼가며 조용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사 7:4)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군대를 더 모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기를 더 만들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조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두려움이 사람의 판단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불안은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먼저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10)
가만히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기도보다 걱정을 먼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뉴스보다 말씀을 먼저 듣는 것입니다. 환경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르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유다를 삼킬 거대한 불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
라고 부르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사람은 거대한 전쟁을 봅니다.
하나님은 꺼져가는 장작을 보십니다. 사람은 강대국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미 끝난 존재를 보십니다.
왜입니까?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민족들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이사야 40:15)
또한 시편은 선언합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시편 2:1-4)
인간은 자신의 계획으로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왕이십니다.
국가도, 경제도, 권력도, 전쟁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Sovereignty of God)입니다.
장 칼빈은 『이사야 주석』에서 이 본문을 해설하며, "성도는 눈에 보이는 위협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확실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이야말로 언약 백성의 기초임을 보여 줍니다.
4.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은 이사야 7장 9절입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 7장뿐 아니라 이사야 전체의 중심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믿다"(아만, אָמַן)와 "굳게 서다"는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은 바다를 보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습니다(출 14장).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거인을 보았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삼상 17:45)을 보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은 실패를 보았지만, 부활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음을 드러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세상의 계산입니까, 아니면 임마누엘의 약속입니까?
5. 하나님은 믿음을 위해 표징까지 허락하신다
이사야 7장의 두 번째 단락은 매우 놀라운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아하스는 이미 하나님보다 아수르를 의지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하스를 그냥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믿을 수 있도록 먼저 다가오십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이사야 7:11)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도 매우 특별한 장면입니다. 보통 성경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신명기 6:16)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표징을 구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아하스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믿을 근거를 주십니다.
성경에서 언제나 믿음은 막연한 긍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에 대한 응답입니다.
6. 아하스의 거짓 경건
그러자 아하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사야 7:12)
겉으로 보면 매우 신앙적인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말은 순종이 아니라 거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구하라." 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거절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불순종입니다.
불신앙은 경건한 말 속에 숨기도 한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표징을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결정을 끝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몰래 아수르 왕에게 사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왕하 16:7-9).
다시 말하면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불신앙의 가장 무서운 모습입니다. 노골적인 우상숭배보다 더 위험한 것은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는 불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모습을 가장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태복음 15:8)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말씀보다 계산을, 기도보다 데이터를,
순종보다 손익을 먼저 따질 수 있습니다.
입술은 하나님께 있지만 마음은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다.
7. "다윗의 집이여"
이사야는 갑자기 호칭을 바꿉니다.
"다윗의 집이여." (이사야 7:13)
왜 아하스를 "왕"이라고 하지 않고 "다윗의 집"이라고 부를까요? 여기에는 깊은 언약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아하스 개인만 문제가 아니라 다윗 언약을 맡은 왕조 전체가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지금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바로 그 언약을 끊어버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7장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언약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언약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언약을 실패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의 핵심입니다.
8.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표징
아하스가 거절하자 하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이사야 7:14)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친히"입니다. 인간이 거절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순종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계속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디모데후서 2:13)
9. 임마누엘의 표징
드디어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 가운데 하나가 등장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임마누엘" 이는 히브리어 עִמָּנוּ אֵל(Immanu-El) 로, 직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단순한 위로의 문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선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언약과 연결됩니다.
-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셨습니다.
- 광야에서는 성막 가운데 함께하셨습니다.
- 솔로몬 성전에서는 영광으로 함께하셨습니다.
- 그리고 신약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 1:14).
임마누엘은 하나님 구속사의 핵심 주제입니다.
10. 처녀(알마)의 의미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처녀"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의 히브리어는 알마(עַלְמָה)입니다.
'알마'는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성을 가리키며, 당시 역사 속에서 태어날 한 아이를 통한 표징이라는 직접적인 의미를 먼저 갖습니다. 이후 이사야서 안에서 그 '아이'의 약속은 9장의 왕으로 태어날 아기와 11장의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왕으로 발전하며, 마태복음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적용합니다.
따라서 이사야 7장 14절은 두 층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성취
아하스 시대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표징입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두 왕은 곧 사라질 것이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람은 아수르에게 멸망하고 북이스라엘도 BC722년에 멸망합니다.
두 번째 성취
마태복음은 이 예언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마태복음 1:22-23)
아하스 시대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상징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
11. 임마누엘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임마누엘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 다 잘될 것이다." 라는 의미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훨씬 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는 의미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지만 완고하게 거절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아하스가 바로 그 예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계셨지만 아하스는 그 임재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에게 위로가 아니라 불신앙을 드러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한 질문 앞에 섭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입술로만 고백하면서 실제 삶의 중요한 결정은 세상의 힘에 맡기고 있습니까?
- 하나님은 믿음을 위해 표징까지 허락하셨다.
- 아하스는 경건한 말로 불순종을 감추었다.
-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에도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 임마누엘은 역사 속에서 부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위로일 뿐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언약의 선언이다.
12. 아하스가 선택한 구원자는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되었다
성경은 매우 역설적인 진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구원해 줄 무언가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경력을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의지합니다.
아하스가 선택한 것은 아수르 제국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아수르가 우리를 살려 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강대국의 군대를 더 현실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수르 왕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에 임하게 하시리라." (이사야 7:17)
이 얼마나 역설입니까?
아하스는 아수르를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수르를 심판의 도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업로드하신 자료에서도 이 부분을 매우 강조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더 위험해 보였기 때문에 아수르를 붙들었지만, 결국 자신이 붙든 그 아수르가 유다를 황폐하게 만드는 심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13. 하나님은 역사의 절대주권자이시다
18절에는 놀라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끝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하나님은 애굽을 파리로, 아수르를 벌로 비유하십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두 제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거대한 제국조차 부르시면 오는 곤충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이사야서가 계속 선포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이사야 40장은 말합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사 40:15)
시편 기자도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시편 33:10)
사람은 역사를 정치가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합니다.
국가도,
경제도,
전쟁도,
권력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며 "세상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사건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평안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14. 하나님께서 빌려 쓰신 삭도
20절은 매우 충격적인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여기서 "세내어 온 삭도"는 돈을 주고 빌려 온 면도칼을 의미합니다. 아하스는 돈을 주고 아수르를 고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네가 고용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사용하는 도구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삭도가 누구를 깎습니까? 아하스 자신입니다. 머리털, 발털, 수염까지 모두 밀어버립니다.
고대 근동에서 머리와 수염을 깎이는 것은 최고의 수치였습니다.
결국 아하스는 자신을 지키려고 붙든 것이 오히려 자신의 존엄과 나라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5. 우상은 반드시 우리를 지배한다
성경에는 반복되는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다스립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사람의 인정을 더 의지하면 평생 사람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권력을 절대화하면 권력을 잃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 됩니다.
아하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아수르를 의지했습니다. 결국 아수르가 그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신뢰하는 그것이 당신의 하나님이다."
이 말은 이사야 7장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16. 남은 자 (Remnant) 의 신학
21절부터는 전쟁 이후의 모습이 나옵니다. 본문은 소와 양 몇 마리만 남고, 사람들은 젖과 꿀로 연명한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젖과 꿀"은 축복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여기의 "엉긴 젖과 꿀"은 약속의 땅의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 기반이 무너진 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먹는 생존의 음식입니다. 즉, 풍요가 아니라 심판 이후의 생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도 "남은 자(Remnant)"를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이사야 신학의 핵심입니다.
이사야의 아들 이름도 스알야숩(שְׁאָר יָשׁוּב), 곧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약을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9장에서 이사야를 인용하며 "남은 자" 사상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과 연결합니다.
17. 포도원이 가시덤불이 되다
23절부터 마지막까지 포도원이 황폐하게 됩니다. 가시와 찔레가 자랍니다.
이 장면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사야 5장의 포도원 노래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좋은 포도원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울타리를 허무시고 황폐하게 하셨습니다.
7장은 그 심판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즉, 5장은 예언이고, 7장은 그 예언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말씀하신 것을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합니다.
18.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
오늘날 우리는 아수르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아수르'는 있습니다.
- 돈이 나의 아수르가 될 수 있습니다.
- 학벌이 나의 아수르가 될 수 있습니다.
- 건강이 나의 아수르가 될 수 있습니다.
- 기술이 나의 아수르가 될 수 있습니다.
- 정치나 권력이 나의 아수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도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큰 신뢰의 대상이 되는 순간,
도구는 우상이 됩니다. 그리고 우상은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지배합니다.
아하스의 실패는 단순히 한 왕의 정치적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더 믿은 신앙의 실패였습니다.
- 하나님보다 의지한 것은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되었다.
- 하나님은 강대국조차 사용하시는 역사의 절대주권자이시다.
- 우상은 언제나 인간을 지배한다.
-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신다.
19. 이사야 7장은 결국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 7장을 읽으면서 아하스 왕에게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한 사람의 실패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더 크게 보여줍니다.
아하스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왕은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복음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이야기입니다.
20. 임마누엘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선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임마누엘" 하면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라는 위로의 문장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훨씬 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언제나 언약(Covenant) 과 연결됩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 (창세기 28:15)
모세에게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출애굽기 3:12)
여호수아에게도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수아 1:5)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언약백성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21. 성막에서 성전으로, 그리고 예수님께로
구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계속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직접 함께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에덴을 떠난 이후에는 성막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더 큰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거하시매" 라는 단어는 원문으로 장막을 치셨다 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성막이 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건물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사야 7장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22. 아하스와 예수님의 놀라운 대조
이사야는 의도적으로 두 왕을 비교하게 만듭니다.
아하스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도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셨습니다.
아하스는 세상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셨습니다.
아하스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아하스는 다윗 왕조를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다윗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가 기다리던 참된 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23. 십자가는 실패처럼 보였다
이사야 7장은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을 비교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실패라고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탄도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었습니다.
24. 부활은 하나님의 현실이 인간의 현실보다 크다는 선언이다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현실보다 더 궁극적인 현실이라는 선언입니다.
아하스는 눈에 보이는 군대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약속이 더 확실한 현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식시장은 흔들립니다. 경제는 변합니다. 건강도 변합니다. 인간관계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베드로전서 1:24-25)
25. 오늘 우리의 아수르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아하스를 비난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아수르는 무엇입니까?
혹시 통장이 나의 아수르입니까?
학력이 나의 아수르입니까?
인맥이 나의 아수르입니까?
직장이 나의 아수르입니까?
건강이 나의 아수르입니까?
아니면 내 경험과 지식입니까?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큰 신뢰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의 마음을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공장(factory of idols)"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 7장을 읽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26. 믿음은 선택의 기준이다
믿음은 감정이 아닙니다. 지식도 아닙니다. 교회 출석도 아닙니다.
믿음은 선택의 기준입니다. 위기 앞에서 무엇을 먼저 붙드는가. 그것이 믿음입니다.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세상을 더 신뢰한다면 우리는 아하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확실한 현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오늘의 적용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① 지금 나를 가장 흔드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경제입니까?
질병입니까?
자녀입니까?
미래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삼가며 조용하라."
먼저 말씀 앞에 머무르십시오.
②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내가 만든 아수르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우상을 내려놓으라고 부르십니다.
③ 나는 정말 임마누엘을 믿고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현실로 믿고 살아가느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 7장은 결국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큰 현실이다."
아하스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같은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두려움을 따라 살 것입니까? 아니면 임마누엘을 따라 살 것입니까?
세상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게 서지 못하리라."(이사야 7:9)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히브리서 13:8), 우리의 환경보다 크시고, 우리의 두려움보다 강하시며, 우리의 미래를 붙드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7. 이사야 7장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다섯 가지 질문
이사야 7장은 약 2,700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하스의 문제는 정치가 아니었습니다. 경제도 아니었습니다.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을 가장 현실이라고 믿었는가였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나는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무엇을 붙드는가?
갑작스러운 질병이 찾아오면 무엇을 가장 먼저 찾습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먼저 어디를 바라봅니까?
사람입니까? 돈입니까? 정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편 20:7)
믿음은 위기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기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허락만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하스는 이미 아수르를 선택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저는 표징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결론은 끝났습니다. 기도는 형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결정했으니 축복만 해 주세요."
그러나 참된 기도는 내 계획을 하나님께 승인받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 계획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
세 번째 질문
나의 아수르는 무엇인가?
아수르는 오늘날로 말하면 내가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혹시 재산입니까?
직장입니까?
연금입니까?
자녀입니까?
건강입니까?
명예입니까?
SNS의 인기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가장 의지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주인이 됩니다.
네 번째 질문
나는 정말 임마누엘을 믿는가?
임마누엘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적혀 있는 문장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직장에서 함께 계십니다. 병원에서도 함께 계십니다. 실패 가운데도 함께 계십니다.
죽음의 골짜기 에서도 함께 계십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4)
성도의 평안은 문제가 없어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데서 옵니다.
다섯 번째 질문
나는 말씀을 현실로 믿고 있는가?
오늘 본문의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이사야 7:9)
.
"믿음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가 더 근본적인 현실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 7장의 결론입니다.
29. 오늘의 영적 결단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하스처럼 살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 살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로 믿을 것입니까?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가장 확실한 현실이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결론
오늘 이사야 7장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두려움은 죄가 아니지만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놓치는 것은 죄입니다.
둘째,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지배합니다.
셋째,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삼가며 조용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사야 7장 9절의 말씀으로 우리 모두를 초청하십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눈에 보이는 현실로 끌어당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리게 합니다.
오늘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두려움보다 크시고, 우리의 문제보다 크시며, 우리의 미래를 붙드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대표 기도문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하스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을 더 크게 바라보며 살아왔던 우리의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위기 앞에서 사람과 돈과 세상의 힘을 먼저 붙들었던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확실한 현실로 믿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심을 잊지 않게 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보다 약속을,
계산보다 순종을, 세상의 힘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다음 세대가 세상의 아수르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며,
날마다 말씀 위에 굳게 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