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죄는 불처럼 번지고 공동체를 삼킨다 (이사야 9:18-21)

knowledgeplatform100 2026. 8. 6. 11:05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 부르는 심판" (이사야 9:8-10:4)

하나님 없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영적 독립선언

제1부. 하나님은 왜 같은 말씀을 네 번 반복하시는가?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 가운데 매우 엄숙한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이사야 9장 1절부터 7절에서는 놀라운 소망이 선포되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

 

어둠 가운데 빛이 비치고, 평강의 왕이 오시며, 다윗의 왕위가 정의와 공의로 영원히 세워질 것이라는 놀라운 메시아 예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평강의 왕을 노래하던 본문이 갑자기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약속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 약속을 거절하는 인간의 현실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항상 먼저 선포되지만, 복음을 거절하면 심판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복음과 심판은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조차 심판이 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같은 복음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오늘 본문 역시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구조

오늘 본문에는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같은 문장이 네 번 반복됩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이 구절은 9:12 9:17 9:21 10:4 에서 반복됩니다. 성경에서 반복은 우연이 아닙니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반복이 가장 강한 강조법입니다.

 

마치 종이 계속 울리듯이 하나님께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회개하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왜 계속 펴져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기만 하는 분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번 경고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계속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징계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펴진 손"은 단순히 심판의 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은 구원하기도 하고 인도하기도 하며 징계하기도 합니다. 

출애굽에서는 능력의 손이었고

시편에서는 보호하시는 손이었으며

이사야에서는 회개를 촉구하는 손입니다. 칼빈은 『이사야 주석』에서 이 반복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파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는 인간의 완고함 때문에 심판이 계속될 뿐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표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히 12:6)

 

징계는 버림받았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부모도 사랑하는 자녀를 훈계합니다. 무관심한 부모는 훈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계속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징계가 아닙니다. 징계를 받고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마음입니다.

본문도 바로 이것을 강조합니다.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신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사 9:13)

 

이 한 절이 오늘 본문의 중심축입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동일한 원리

이 원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합니다.

노아 시대에도 사람들은 홍수를 보기 전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도 열 번 이상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도 불평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죄를 짓고 징계를 받고 부르짖고 회복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하나님은 새벽부터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백성은 듣지 않았습니다(렘 7:25-26).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하나님은 심판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어려움을 만나면 먼저 환경을 바꾸려 합니다.

직장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고, 경제를 회복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물으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 일을 통해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워졌는가?"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내 힘만 의지하고 있는가?"

 

본문은 어려움 자체보다 그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오늘의 교회도 동일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많아졌지만 회개는 깊어지고 있는가?

건물은 커졌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함께 자라고 있는가?

사역은 확장되었지만 복음 앞에서 겸손해지고 있는가?

이사야는 우리에게 "무엇을 세웠는가?"보다 "누구에게 돌아왔는가?"를 묻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9장 8절부터 시작되는 심판의 서곡을 살펴보았습니다.

반복되는 "그럴지라도"는 하나님께서 쉽게 분노하신다는 선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백성을 향한 오래 참으심의 외침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손을 펴고 계십니다. 그 손은 죄를 심판하는 손인 동시에 죄인을 돌아오게 하시는 은혜의 손입니다.

 

 

제2부. 교만한 회복은 하나님 없는 재건이다 (이사야 9:8-12)

본문은 네 개의 심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락의 마지막마다 동일한 문장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이 반복은 하나님의 분노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이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언약적 선언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단락인 이사야 9장 8절부터 12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의 핵심은 한 단어로 말하면 교만(Pride)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교만은 단순히 자신감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영적 독립선언입니다.


1.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을 보내셨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사 9:8)

 

이 한 절은 심판보다 먼저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심판보다 먼저 말씀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홍수보다 먼저 방주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심판 전에 약속을 주셨습니다.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도 먼저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회개하라." 는 말씀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없이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사야는"말씀이 임하였다." 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다바르(דָּבָר) 는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이사야도 후에 말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사 55:11)

 

사람은 말씀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성취는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반드시 성취됩니다.


2. 이스라엘의 문제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무너진 이유를 모른 것이었다

9절과 10절은 북이스라엘의 유명한 선언입니다.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이것은 패배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자신감 있는 선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더 크게 만들겠다."

"더 좋은 재료를 쓰겠다."

"더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긍정적인 말입니다.

 

오늘날식으로 표현하면 

"다시 일어나자."

"재도약하자."

"더 크게 성공하자." 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3. 회복보다 먼저 회개가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무너진 원인을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징계하셨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더 좋은 돌" "더 좋은 나무" 만 생각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지적합니다.

회개 없는 회복은 참된 회복이 아니라 죄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비슷합니다.

사업이 실패하면 방법부터 바꿉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환경부터 바꿉니다. 교회가 어려워지면 프로그램부터 바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네 마음이 돌아왔느냐?"를 물으십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왕위를 회복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베드로도 사역을 회복하기 전에 먼저 통곡했습니다. 탕자도 재산을 회복하기 전에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회복보다 회개를 먼저 말합니다.

4. 하나님 없는 재건은 바벨탑 신앙이다

창세기 11장을 기억해 보십시오. 바벨탑 사람들도 말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기술을 믿었습니다.

자기 능력을 믿었습니다.

자기 조직을 믿었습니다.

 

오늘 북이스라엘도 같습니다.

"우리가 다시 세우겠다."

"우리가 다시 강해지겠다."

주어가 계속 '우리' 입니다.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칼빈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자신을 돌아보라는 부르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힘을 과시할 기회로 삼았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본성입니다. 죄인은 실패를 만나도 하나님께 돌아가기보다 더 강한 자기 자신을 만들려고 합니다.

5. 하나님께서는 외부의 적을 사용하신다

11절과 12절은 매우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람과 블레셋을 일으키십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가 강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중요한 신학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였고(사 10:5), 바벨론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으며,

고레스 역시 하나님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역사는 우연히 움직이지 않습니다. 열방의 흥망성쇠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6. 가장 두려운 적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이스라엘은 아람을 두려워했습니다. 블레셋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짜 문제는 밖이 아니라 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세속 문화가 아닙니다. 경제도 아닙니다. 정치도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힘을 더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복음으로 연결되는 메시지

놀랍게도 이사야는 바로 앞에서 평강의 왕을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시 나라를 세우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다른 왕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왕은 무력을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첫 번째 아담은 높아지려다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도 높아지려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참된 회복은 내가 나를 더 크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왕이 되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첫 번째 심판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무너진 현실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너지고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마음입니다.

 

벽돌을 다듬은 돌로 바꾸는 것이 회복이 아닙니다. 뽕나무를 백향목으로 바꾸는 것이 회복이 아닙니다.

회개 없는 재건은 결국 더 큰 심판을 준비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삶의 무너짐 앞에서 먼저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 돌아왔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이사야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3부. 회개하지 않는 백성과 타락한 지도자는 함께 무너진다 (이사야 9:13-17)

지난 시간에는 첫 번째 심판의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원인을 하나님 앞에서 찾지 않고, 더 좋은 돌과 더 좋은 백향목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다시 세우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를 교만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심판 단락으로 들어갑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제 교만의 결과가 어떻게 지도자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결국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리는지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은 바로 13절입니다.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신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이 한 절은 이사야 9장 8절부터 10장 4절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1.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회개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버림의 표시가 아니라 회복으로 초대하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맞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을 치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히브리어 "돌아오다"(שׁוּב, 슈브)는 단순히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께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회개는 단순한 감정적 후회가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예레미야도 동일하게 외칩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호세아도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성경의 모든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2. 죄인은 하나님보다 환경만 바라본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전쟁을 보았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보았습니다. 정치적 혼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징계의 도구만 보았지 징계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을 탓합니다.

환경을 탓합니다.

정권을 탓합니다.

경제를 탓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묻습니다. "이 일을 통하여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고난은 자동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집니다.

본문 역시 징계가 회개를 자동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회개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시작됩니다.

3. 하나님은 머리와 꼬리를 함께 끊으신다

14절과 15절에서 하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이 표현은 단순한 시가 아닙니다. 국가 전체가 무너지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본문은 머리를 장로와 존귀한 자 라고 설명합니다. 꼬리는 거짓을 가르치는 선지자 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가 동시에 타락한 것입니다. 국가가 건강하려면 정치와 영성이 함께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도, 귀족도, 선지자도 모두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4. 거짓 지도자는 언제 만들어지는가

본문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갑자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원하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사람들은 회개를 선포하는 선지자보다 축복만 말하는 선지자를 좋아했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말씀보다 듣기 좋은 설교를 선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예언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지도자가 타락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백성이 진리보다 위로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시대도 오늘날도 본질은 같습니다.

5. 지도자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16절은 놀라운 균형을 보여줍니다.

"이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먼저 하나님은 지도자의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따르는 백성도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특히 칼빈은 성도는 말씀을 기준으로 지도자를 분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맹목적인 추종은 성경적 신앙이 아닙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설교까지도 성경으로 확인했습니다(행 17:11).

성숙한 신앙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6. 공동체 전체가 무너질 때

17절은 청년과 고아와 과부까지 심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약자를 미워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의미는 국가 전체가 너무 깊이 타락했기 때문에 전쟁의 참화를 누구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는 개인의 영역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정으로,

교회로,

사회로,

국가로

확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동체 전체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신약에서 완성되는 메시지

이사야는 거짓 지도자들을 보여주지만 신약은 참된 목자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고 선언하셨습니다. 거짓 지도자는 자신을 위해 양을 이용합니다. 참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미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 잃은 양을 찾아오셨습니다.

거짓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큰 목자" 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적용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를 듣고 있는가?

아니면 듣기 좋은 말만 찾고 있는가?

나는 지도자를 우상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으로 분별하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지도자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인정만 구하는 지도자인가?

그리고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로서,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편안함만 추구하는가?

교회는 뛰어난 지도자 한 사람으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세워질 때 건강해집니다.

 

제4부. 죄는 불처럼 번지고 공동체를 삼킨다 (이사야 9:18-21)

 

지금까지 우리는 이사야가 보여주는 심판의 점진적인 발전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교만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너진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돌아가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려 했습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타락한 지도력이 등장했습니다.

지도자는 백성을 미혹했고, 백성은 진리를 버리고 거짓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지도자와 백성은 함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 번째 단락에서 이사야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죄는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죄는 불처럼 번지고 공동체 전체를 태우며, 결국 서로를 삼키게 만듭니다.

1. 죄는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다

본문은 매우 인상적인 비유로 시작합니다.

"대저 악행은 불타오르는 것 같으니." (사 9:18)

 

이사야는 죄를 불에 비유합니다. 불은 처음에는 작습니다. 

담배꽁초 하나, 불꽃 하나, 작은 불씨 하나가 거대한 산을 태우기도 합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거짓말입니다.

작은 교만입니다.

작은 시기입니다.

작은 탐욕입니다. 그러나 죄는 결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죄의 성장

신약에서도 같은 원리를 말합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약 1:15).

죄는 생명처럼 자랍니다. 처음보다 점점 커지고, 점점 깊어지고, 점점 넓어집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 오웬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죄를 죽이라. 그렇지 않으면 죄가 너를 죽일 것이다."

 

죄를 방치하면 죄는 반드시 우리를 지배합니다.

2. 죄는 개인에서 공동체로 확산된다

본문은 가시와 찔레에 붙은 불이 숲 전체를 태우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죄의 사회성을 말합니다.

현대인은 죄를 매우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데 왜 남이 피해를 보지?"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인류 전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간 한 사람의 탐욕이 이스라엘 전체를 패배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수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성경에서 죄는 언제나 공동체적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의 작은 타협이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무너뜨립니다.

성도의 작은 분열이 공동체 전체를 흔듭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죄는 절대로 혼자 끝나지 않습니다.

3. 죄는 사람을 끝없이 배고프게 만든다

19절과 20절은 인간의 탐욕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오른쪽에서 움켜쥐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왼쪽을 먹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죄의 본질은 결핍이 아니라 왜곡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공허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주를 위하여 지으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쉬기까지 안식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돈으로도, 명예로도, 권력으로도, 쾌락으로도 영혼의 공허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 가지려고 합니다. 더 빼앗으려고 합니다. 더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만족은 오지 않습니다.

4. 형제가 경쟁자가 되는 사회

21절은 가장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둘은 요셉의 두 아들입니다.

같은 조상, 같은 언약, 같은 민족입니다. 그런데 서로 싸웁니다. 그리고 함께 유다를 공격합니다.

죄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무너뜨립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형제가 갈라지고, 교회가 분열되고, 민족이 서로 미워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갈라디아서의 경고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 5:15)

놀랍게도 이사야와 갈라디아서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경쟁자로 봅니다. 도구로 봅니다. 이용 대상으로 봅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사랑을 잃고 생존 경쟁만 남게 됩니다.

5. 하나님 없는 공동체는 내부에서 무너진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부의 죄가 더 무섭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은 외적보다 먼저 내부에서 무너졌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로마 제국은 외적보다 내부의 부패가 먼저였습니다. 이스라엘도 앗수르보다 먼저 영적 타락이 있었습니다.

 

교회도 박해보다 죄와 분열이 더 위험합니다. 사탄은 교회를 밖에서만 공격하지 않습니다.

안에서 시기하게 만들고, 비교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고, 용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스스로 자신을 삼키게 됩니다.

복음 안에서 완성되는 회복

이사야는 죄가 공동체를 태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성령의 불은 공동체를 살린다고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불의 혀 같은 것이 임했습니다. 

 

죄의 불은 사람을 태웁니다. 성령의 불은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죄의 불은 공동체를 나눕니다.

성령의 불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불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감당하심으로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을 허무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선포합니다.

참된 공동체의 회복은 인간의 화해 기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혹시 작은 시기와 질투를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작은 말 한마디, 작은 비난, 작은 오해가 불씨가 되어 공동체를 태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경쟁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 가야 할 지체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분열시키지만, 복음은 반드시 하나 되게 합니다.

 

제5부. 죄는 결국 제도가 되고, 하나님은 사회의 정의를 심판하신다 (이사야 10:1-4)

지금까지 이사야는 죄가 어떻게 점점 깊어지는지를 매우 치밀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개인의 교만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회개의 기회로 삼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더 크게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지도자의 타락이 나타났습니다.

지도자는 진리를 버리고 백성을 미혹했고, 백성 역시 말씀보다 사람을 따르며 함께 무너졌습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죄가 불처럼 번져 공동체 전체를 태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개인의 죄가 공동체의 분열과 탐욕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락에서 이사야는 죄의 최종 단계를 보여 줍니다.

 

죄가 제도화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개인의 욕심이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지도자의 거짓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폭력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죄는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합법화됩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1. 하나님은 왜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시는가

본문은 매우 강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사 10:1)

그리고 하나님은

"화 있을진저."

 

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화 있을진저"(히브리어 הוֹי, 호이)는 단순한 감탄사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법정을 대신하여 선포하는 언약적 심판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즉,

이사야의 "화 있을진저"와 예수님의 "화 있을진저"는 동일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2. 죄는 제도가 될 수 있다

본문을 보면 놀라운 사실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단순히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법 자체를 불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단계입니다.

 

법은 원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죄가 깊어지면 사람은 법을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

모세율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객을 압제하지 말라."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

"가난한 자의 송사를 굽게 하지 말라."

 

하나님의 율법은 언제나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죄는 그 반대로 갑니다. 강자는 법을 이용하여 더 강해지고, 약자는 법 때문에 더욱 약해집니다.

이것이 타락한 사회의 특징입니다.

3.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보시는 사람

본문은 가난한 자, 과부, 고아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왜입니까? 성경에서 이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권력자의 자리보다 약자의 자리를 먼저 보십니다.

출애굽기에서도 신명기에서도 시편에서도 예레미야에서도 같은 원리가 반복됩니다.

야고보서도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만 평가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진정성을 드러냅니다.

4. 하나님은 예배보다 공의를 원하신다

이사야서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1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무수한 제사를 무엇하러 하느냐."

그리고 이어서

"선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이사야 10장은 바로 그 말씀의 연장선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는 드렸습니다. 절기도 지켰습니다. 성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보다 먼저 삶을 보셨습니다. 

현대 교회에 주는 질문

오늘날도 예배는 드리지만 직장에서는 정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지만 약자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지만 불의한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열심과 삶의 공의를 결코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5. 심판의 날에는 무엇이 남는가

3절과 4절에서 하나님은 질문하십니다.

"징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누구에게로 도망하겠느냐?"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평소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심판의 날에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권력을 믿었습니다. 재물을 믿었습니다. 군대를 믿었습니다. 법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오자 그 어느 것도 그들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그들은 포로 가운데 엎드리고 죽임당한 자 가운데 쓰러집니다. 이것이 인간 권력의 한계입니다.

6. 복음은 가장 약한 자에게서 시작된다

이사야는 과부와 고아를 말합니다. 예수님도 과부를 돌보셨습니다.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문둥병자를 만지셨습니다. 맹인을 고치셨습니다. 죄인을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도 강한 자가 아니라 회개하는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 나라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고 초청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불의한 세상의 법정에서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하여 정죄받으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적용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내 자리에서 공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내가 가진 권한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인가,

아니면 나의 이익을 지키는 수단인가?

나는 사회적 약자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예배와 삶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예배당 안에서만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교회에서, 힘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십니다.

 

 

제6부. "그럴지라도"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 심판 속에 숨겨진 은혜 (이사야 9:8-10:4)

지금까지 우리는 이사야 9장 8절부터 10장 4절까지 네 개의 심판 단락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교만의 죄였습니다.

두 번째는 타락한 지도자의 죄였습니다.

세 번째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였습니다.

네 번째는 제도화된 죄였습니다.

이 네 단락은 모두 동일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이 한 문장이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으며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진노만 하시는가?"

"왜 심판을 계속하시는가?"

 

그러나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면, 이 반복은 하나님의 분노를 강조하는 문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문장입니다.

1. "그럴지라도"는 하나님의 포기가 아니라 인간의 완고함이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반복되는 심판보다 더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입니다.

특히 13절은 본문의 중심축입니다.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신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전쟁도 허락하셨습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허락하셨습니다. 외적의 침입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심판이 계속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비가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손은 심판의 손인 동시에 회복의 손이다

본문은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다." 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은 여러 의미를 갖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구원의 손입니다. 시편에서는 보호하시는 손입니다. 이사야에서는 징계하시는 손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손이 아닙니다. 모두 언약의 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신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징계도 언약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파괴가 목적이 아니라 회복이 목적입니다.

3. 언약신학이 보는 이사야 9장

이사야 전체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구조가 나타납니다.

9장 1~7절은 메시아의 왕국입니다. 9장 8절~10장 4절은 이스라엘의 심판입니다. 10장 후반은 앗수르의 심판입니다.

11장은 메시아 왕국의 회복입니다. 이 구조는 우연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인간 왕국의 실패와 하나님의 왕국의 완성을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다윗 왕조는 흔들릴 수 있지만, 다윗의 참된 후손이신 메시아의 나라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4. 인간은 계속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신다

성경 전체가 이것을 반복합니다.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노아도 실패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넘어졌습니다. 모세도 실패했습니다. 사울도 실패했습니다.

 

다윗도 죄를 지었습니다. 솔로몬도 우상을 섬겼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남유다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도, 아브라함 언약도, 다윗 언약도, 끝까지 이어집니다.

왜입니까? 언약의 성취는 인간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5. 심판은 복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오늘 본문만 떼어 놓고 보면 심판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 단락을 기억하십시오.

이사야는 먼저 평강의 왕을 소개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사 9:6)

이후 심판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메시아 왕국을 말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구조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냅니다.

심판은 죄의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을 살립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심판은 사람들을 메시아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6. "펴진 손"은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펴져 있다." 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우리는 또 다른 펴진 손을 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두 손이 온 세상을 향하여 펼쳐졌습니다. 그 손은 못 박힌 손이었습니다.

죄인을 정죄하기 위한 손이 아니라, 죄인을 품기 위한 손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이사야 9장의 심판은 이사야 53장의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에게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 대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더 완고해지는가?

아니면 더 겸손해지는가?

어려움을 만날 때 환경만 바꾸려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먼저 돌아가는가?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손을 펴고 계십니다.

그 손은 회개하는 자를 밀어내는 손이 아니라, 돌아오는 자를 품으시는 아버지의 손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먼저 달려가 안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제7부(최종 결론). 심판의 끝에서 만나는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9:8-10:4)

 

지금까지의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심판

이스라엘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다시 세우리라."

 

하나님은 회개를 원하셨지만 사람들은 재건만 원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무너진 삶을 고치려고 하지만

무너진 영혼은 하나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회복은 참된 회복이 아닙니다.

두 번째 심판

지도자들이 무너졌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백성을 미혹했습니다. 백성은 말씀보다 듣기 좋은 소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머리와 꼬리를 함께 끊으셨습니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공동체도 함께 무너집니다.

세 번째 심판

죄는 불처럼 번졌습니다. 탐욕은 탐욕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고, 형제가 형제를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결코 혼자 머물지 않습니다. 죄는 반드시 가정으로, 교회로, 사회로, 나라로 번져 갑니다.

네 번째 심판

죄는 마침내 법이 되고, 제도가 되었습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할 법이 오히려 약자를 억압했습니다.

하나님은 고아를 기억하셨고, 과부를 기억하셨으며, 억울한 자들의 눈물을 기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힘 있는 자 중심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사람 중심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이 모든 심판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본문을 읽다 보면 전쟁이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도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도 문제가 아닙니다. 앗수르도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마음입니다. 13절은 본문의 중심입니다.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신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이 한 절이 이사야 9장 전체를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 역시 어려움을 만나면 먼저 환경을 바꾸려고 합니다. 

사람을 바꾸려고 합니다.

직장을 바꾸려고 합니다.

경제를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왔는지를 물으십니다.

기도가 회복되었는가?

말씀이 회복되었는가?

예배가 회복되었는가?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이 회복되었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이사야는 왜 바로 앞에서 평강의 왕을 소개했을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먼저 평강의 왕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심판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메시아 왕국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복음의 구조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라도, 경제도, 정치도, 종교도, 인간의 죄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사 9:6)

 

이 아이가 심판을 끝내시는 왕입니다.

십자가는 이사야 9장의 해답이다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손이 계속 펴져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펴진 손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두 손이 온 세상을 향해 펼쳐졌습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었습니다.

다른 한 손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은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심판의 끝에서 우리는 구주를 만낙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 큰 성공입니까?

더 많은 재산입니까?

더 좋은 환경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돌아옴을 원하십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먼저 달려가 그를 안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아직 은혜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삶에 적용해야 할 세 가지 결단

첫째, 나는 문제보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겠습니다.

환경을 탓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겠습니다.

 

둘째, 나는 회복보다 회개를 먼저 선택하겠습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기 전에 무너진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셋째, 나는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소망으로 붙들겠습니다.

세상의 권력도, 재물도, 사람도 영원한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심판 가운데 피난처가 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 9장 8절부터 10장 4절은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외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심판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용서를 받고, 새 생명을 얻으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결단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 저는 제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의지합니다. 저는 오늘 다시 주님께 돌아갑니다."

 

마무리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주님의 경고를 들었지만, 때로는 회개보다 자신의 힘을 의지했고, 말씀보다 세상의 지혜를 따르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의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와 순종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죄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로 새로워지게 하시고, 정의와 공의, 사랑과 긍휼이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평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소망으로 붙들게 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 먼저 돌아오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고, 마지막 날까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주이시며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