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칼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이사야 40장)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여호와를 앙망하라 (이사야 40장 1–31절)
― 위로받은 자가 다시 일어서는 믿음 ―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40장입니다. 이사야 40장은 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전환점입니다.
이사야 1장- 39장까지는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40장에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심판의 시대를 지나 이제 위로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현실을 부정하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괜찮아질 거야.” “다 잘될 거야.” “조금만 힘내.” 이런 인간적인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이사야 40장이 주는 위로는 훨씬 깊습니다. “너의 상황보다 하나님이 크시다.” 이것이 이사야 40장의 위로입니다.
내가 처한 환경이 변해서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됨으로써 위로받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사야 40–55장은 바벨론 포로라는 미래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포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위로하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보라 너희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상황이 하나님보다 커 보일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보라.”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세 가지 질문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왜 우리를 위로하시는가?
둘째, 우리는 왜 하나님을 다른 것과 비교하는가?
셋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가?
1. “너희는 위로하라” — 하나님의 위로는 심판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사야 40장 1절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기에서 놀라운 표현이 나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결국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한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 이것이 언약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은 그들의 의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하나님의 언약을 폐기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하나님의 징계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돌이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0장의 위로는 “너희가 잘했기 때문에 이제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너희가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신실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위로는 감정적인 위로가 아니라 “왕의 귀환”이다
이사야 40장 3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 말씀은 단순히 도로 공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광야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0장 이후의 구원은 흔히 “새 출애굽”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됩니다.
이사야 40–55장은 애굽에서의 첫 출애굽을 배경으로 바벨론 포로에서의 새로운 구원을 바라보고 있으며,
결국 메시아의 구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위로는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길을 찾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찾아오신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구원의 출발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이 말씀이 세례 요한에게 적용됩니다.
요한복음 1장 23절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에서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그렇다면 질문해야 합니다. 요한은 누구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사야 40장의 놀라운 신학적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사야 40장에서 길을 예비하는 대상은 여호와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그 길을 준비하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방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위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사야 40장의 위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 위로의 중심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사야 40장 5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환경이 좋아진다”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바라보라. 그러면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병이 없어야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인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성공해야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잘되어야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에 의해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 가운데 오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위로입니다.
4.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 영원하지 않은 것을 붙들지 말라
이사야 40장 6절부터 8절은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대조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그리고 8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 말씀은 단순한 인생무상에 대한 철학이 아닙니다.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신앙의 선언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권력도 변합니다.
경제도 변합니다.
건강도 변합니다.
시대도 변합니다.
기술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실패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건강이 내일의 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확신보다 말씀에 대한 확신입니다.
5. “보라 너희 하나님!” —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작게 보는 것이다
이사야 40장 9절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여기서 이사야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문제를 보고 있습니까?
사람을 보고 있습니까?
경제를 보고 있습니까?
자녀의 미래를 보고 있습니까?
세상의 권력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까?
믿음은 현실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6. “누가 손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 인간은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다
12절부터 하나님은 질문을 쏟아내십니다.
“누가 손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누가 하늘을 뼘으로 재었으며.” “누가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이 질문의 목적은 인간의 무지를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을 측량할 수 있습니다.
돈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거리를 잴 수 있습니다. 시간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으로 엄청난 데이터를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측량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하나님은 우리의 계산 안에 들어오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해보다 크신 것이지, 우리의 이해가 하나님보다 큰 것이 아닙니다.
7. 하나님을 작게 만드는 순간 우상이 시작된다
이사야 40장의 두 번째 핵심은 우상에 대한 폭로입니다.
18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우상은 단순히 나무나 돌로 만든 조각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의 본질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상은 존재합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직장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사역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도구가 어느 순간 하나님보다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과 연결하여, 물질과 자녀와 대학과 직장과 사회적 성공에 삶의 전부를 거는 태도를
현대의 우상숭배로 성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문제는 돈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돈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자녀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녀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공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성공이 나의 정체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8. 하나님과 우상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
우상은 내가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만드셨습니다.
우상은 내가 통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통치하십니다.
우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적 그 자체이십니다.
우상은 나에게 맞춰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내가 맞춰져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다른 신을 믿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내 욕망에 맞춰 사용하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주세요.” “하나님, 이렇게 해 주세요.” “하나님,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세요.”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내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은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9. 그런데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사야 40장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다가 갑자기 인간의 삶으로 내려옵니다. 27절입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이것은 포로 백성의 질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 우리의 길이 보이십니까?”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왜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하나님, 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28절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지칩니다.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처음과 끝을 보십니다. 우리는 한 장면을 봅니다.
하나님은 전체 이야기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10.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 하나님은 강한 사람만 사용하지 않으신다
29절입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사람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경은 자주 약한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바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러므로 내가 약하다는 사실이 반드시 절망의 이유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 지혜가 끝났을 때, 하나님의 지혜가 시작됩니다.
내 힘이 다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1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 믿음은 기다리는 힘이다
그리고 이사야 40장의 절정에 이릅니다. 31절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여기서 “앙망한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기다림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즉시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즉시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즉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렸습니다. 요셉도 기다렸습니다. 다윗도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도 바벨론 포로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지금 기다립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죽음이 사라지고 죄가 사라지고 눈물이 사라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믿음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기다림 자체가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사야 40장의 기다림의 신학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 사이의 시간 속에서 소망으로 살아가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12.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 새 힘의 본질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31절을 자주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내가 슈퍼맨처럼 강해진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새 힘은 내가 하나님 없이 강해지는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다시 걸어갈 수 있는 힘입니다.
31절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올라갑니다. 달립니다. 그리고 걷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순간도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날에는 그냥 걸어야 합니다. 신앙은 매일 기적적인 감정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도 걷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이 늦어도 걷는 것입니다.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걷는 것입니다.
눈물이 나도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씩 걷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13. 하나님의 위로는 “목자”에게서 완성된다
이사야 40장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새끼 있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두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10절에서는 강한 팔을 가진 왕이자 용사로 나타나십니다. 11절에서는 양을 품으시는 목자로 나타나십니다.
이 두 모습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능력만 있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두려울 것입니다.
사랑만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욕망에 맞추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전능하시면서 동시에 자비로우시고, 거룩하시면서 동시에 사랑하시며, 왕이시면서 동시에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의 강함은 우리를 억누르는 강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약함을 붙드는 강함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파괴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품어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사야 40장의 목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분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용사와 목자의 모습이 하나가 됩니다.
14. 이사야 40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다
이사야 40장을 단순히 “힘내라”는 자기계발 메시지로 읽으면 본문의 깊이를 놓칩니다.
본문의 중심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으로 성취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온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깨뜨리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0장의 위로는 과거 이스라엘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복음의 구조로 연결됩니다.
죄로 무너진 사람에게 위로가 있습니다.
길을 잃은 사람에게 목자가 있습니다.
지친 사람에게 새 힘이 있습니다.
우상에 묶인 사람에게 자유가 있습니다.
죽음 앞에 있는 사람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15.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오늘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 봅시다. 혹시 지금 너무 지쳐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혹시 미래가 두렵습니까? 미래를 붙들려고 하지 말고 미래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자녀 때문에 마음이 무너집니까?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혹시 돈 때문에 불안합니까? 돈이 나를 지켜줄 것처럼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혹시 사람의 인정이 필요합니까? 사람에게 인정받아야만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혹시 성공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성공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 우상을 발견했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상을 내려놓는다고 인생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회복하십니다.
16.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자유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사람의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인생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분이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권력도 아닙니다.
질병도 아닙니다.
실패도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0장이 선언하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크신 하나님입니다. 열방도 그 앞에서는 한 방울 물과 같습니다.
권력자들도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피곤하지만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지혜는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지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7. 결론 — “너희 하나님을 보라”
오늘 이사야 40장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깊습니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우리가 문제만 바라보면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사람만 바라보면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돈만 바라보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자유가 생깁니다.
우리가 미래만 바라보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을 바라보면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면 새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0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그리고 이렇게 끝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이 두 말씀 사이에 이사야 40장의 모든 신학이 들어 있습니다.
위로의 근거는 하나님입니다.
구원의 주체도 하나님입니다.
회복의 능력도 하나님입니다.
말씀의 영원성도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새 힘의 근원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마지막 질문은 “내가 얼마나 강한가?” 가 아닙니다.
“내 상황이 얼마나 좋아질 것인가?” 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인정하는가?” 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풀은 마릅니다. 꽃은 시듭니다. 사람은 늙습니다. 권력은 사라집니다. 돈도 사라집니다. 시대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섭니다.
그리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지친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길을 잃은 양을 품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백성을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렇게 고백합시다.
“나는 상황보다 하나님을 보겠습니다.”
“나는 세상의 우상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다.”
“나는 내 힘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앙망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날만 은혜가 아닙니다. 달려도 지치지 않는 날만 은혜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붙들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어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께서 지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쳐도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흔들려도 하나님의 말씀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길을 잃어도 우리의 목자는 길을 잃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기다리던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눈을 들어 “보라 너희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이 약속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지친 영혼을 다시 일으키시고, 여러분의 가정을 붙드시고, 여러분의 사명을 회복시키시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이 너무 자주 문제를 바라보았음을 고백합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돈을 바라보고, 세상의 힘을 바라보고, 우리의 능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을.” 주님,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 가두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만들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모든 우상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물질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시며,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더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이 다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시고, 우리의 지혜가 끝날 때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지쳐 있는 성도들에게 새 힘을 주옵소서.
넘어진 자를 일으켜 주시고,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시며, 길을 잃은 자에게 목자가 되어 주옵소서.
우리에게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힘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달려도 지치지 않는 힘과 걸어가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능력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를 소망하게 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미래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게 하옵소서.
오늘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 하신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끝까지 구원하시는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