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칼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방에 정의를 베푸는 종 (이사야 42장)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은 어떤 종을 통해 세상을 바꾸시는가?
세상은 힘 있는 사람을 기억합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 영향력이 큰 사람, 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42장은 전혀 다른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고 정의를 세우실 때, 세상이 기대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한 종을 세우십니다.
그 종은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방에 정의를 베풉니다.
“이방에 정의를 베푸는 종 —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와 구원을 이루시는가?”
하나님은 힘으로 사람을 눌러 정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워진 종을 통하여 정의를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42장의 종은 신약성경에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됩니다.
마태복음은 이사야 42장 1–4절을 직접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므로 이사야 42장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자”는 교훈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 역시 그분의 방식으로 세상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종입니다
이사야 4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여기에는 종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세 가지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붙드는 자, 기뻐하는 자, 택한 자로 이 종의 사역은 자기 야망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서 출발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명을 이야기할 때 먼저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 능력이 무엇인가?” “내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
그러나 성경은 먼저 묻습니다. “누가 너를 부르셨는가?” 사명의 출발점은 능력이 아니라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의 근거는 내가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신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깊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가장 깊은 안정감은 내 믿음의 강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옵니다.
이사야 42장의 종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종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성령은 단순히 능력을 주는 힘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사야 42장의 종과 예수님의 세례 장면이 연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의 힘과 폭력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이루셨습니다.
2. 하나님의 정의는 세상의 방식과 다릅니다
본문 1절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이방”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모든 민족을 향합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사야 42장은 바로 이 약속의 확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종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종이 아니라 이방의 빛이 되는 종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정의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2절입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세상은 힘을 과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힘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상대를 제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상한 자를 회복시킵니다. 세상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폭력적 힘의 과시가 아니라 사랑의 섬김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3.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사야 42장 3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 갈대는 약합니다. 쉽게 휘어집니다. 그리고 이미 상했다면 사람들은 쓸모없다고 생각합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빛이 약해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끄고 새 불을 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사람이 버리고 싶은 것을 하나님은 붙드십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끝났다”고 말하는 인생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세리와 병든 자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예수님은 상한 사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2장의 종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강력한 구원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력하시지만 그 강력함을 상처 입은 사람을 파괴하는 데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능력은 살리는 능력이었습니다.
4. 그러나 온유함은 약함이 아닙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균형이 필요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고 해서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온유함과 정의. 자비와 진리. 긍휼과 거룩함.
하나님의 종은 약해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기 때문에 꺾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예수님은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분의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그 힘을 내려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무능력의 상징이 아니라 자기희생적 능력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누르는 정의가 아닙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약한 자를 살리는 정의입니다.
5. 이 종은 “이방의 빛”입니다
6절과 7절에서 하나님은 종에게 놀라운 사명을 주십니다.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그리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여기에는 구원의 세 가지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눈을 밝히는 것. 감옥에서 풀어내는 것. 흑암에서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 개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어둠은 죄와 죽음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사야 42장의 “이방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죄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죽음의 어둠에서 생명의 빛으로 옮기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단순히 “힘내십시오”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어둠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빛이 찾아왔다는 선언입니다.
6.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9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 새 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에게 출애굽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더 큰 구원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신약의 빛에서 우리는 그 새 일이 무엇을 향하는지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을 건너는 구원입니다.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보다 더 깊은 해방이 있습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해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나님은 지금도 새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마지막 문장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처가 하나님의 마지막 문장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마지막 문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마지막 문장이 됩니다.
7. 그런데 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는가?
여기서 본문은 갑자기 어두워집니다. 21절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고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세우시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두려운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보고 있는가?”
교회를 오래 다니는 것이 반드시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반드시 말씀을 듣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영적 상태는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상태입니다.
8. 하나님의 백성이 눈멀 때 일어나는 일
23절에서 하나님은 묻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뒤에 올 일을 삼가 듣겠느냐.”
그리고 24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약탈을 당했습니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충격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본문은 그 원인이 단순히 국제정세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났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죄를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면서도 죄인을 회복시키십니다.
징계도 사랑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답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9. 하나님의 종은 정의와 긍휼을 함께 품어야 합니다
이사야 42장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말할 때 쉽게 분노합니다.
불의를 보면 화를 냅니다. 잘못을 보면 정죄합니다. 악을 보면 공격합니다. 물론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종의 방식이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질문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정의를 세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분노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싶은 것인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교회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면서 사람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섬기는 주님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10.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사야 42장이 완성됩니다
이사야 42장의 절정은 결국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세상의 왕좌에서 빛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빛났습니다. 그분은 상한 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상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여기에서 놀라운 역설이 나타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종이 오히려 우리의 죄 때문에 상하십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상하셨습니다.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이끄시기 위해 자신이 어둠을 통과하셨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묶이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자신이 담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도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긍휼도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11.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종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사야 42장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먼저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종의 모델이 되기 전에 예수님이 완전한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노력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그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나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상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상한 사람을 봅니까?
직장에서 지친 사람을 봅니까?
교회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을 봅니까?
그 사람을 더 꺾지 마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가가십시오.
때로는 한마디의 정죄보다 한 번의 경청이 더 큰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어둠 가운데 빛을 가져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빛은 어둠을 욕하지 않습니다. 빛은 그냥 빛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우리의 가정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온라인에서도 빛이 되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를 할 때도,
댓글 하나를 달 때도,
누군가를 평가할 때도,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정의를 세우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세상은 너무 거대해 보입니다. 악은 너무 강해 보입니다. 내가 하는 작은 선행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종은 결과를 자기 힘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씨를 뿌립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2.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질문
이사야 42장을 마치면서 우리 자신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첫 번째 질문,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일을 보고 있습니까?
혹시 눈은 열려 있지만 영적인 눈은 닫혀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읽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제 눈을 열어 주십시오.”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질문, 나는 상한 갈대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내 주변에 상한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무심코 꺾어버린 사람은 없습니까?
나의 말 때문에 낙심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바라보신다면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상처 입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세 번째 질문, 나는 하나님의 정의를 나의 방식으로 세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방식은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겸손의 방식입니다.
섬김의 방식입니다.
용서의 방식입니다.
진리와 사랑이 함께 가는 방식입니다.
결론 — 하나님은 오늘도 상한 갈대를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 42장은 세상의 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종은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그 종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 종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 종을 통하여 이방에 정의를 베푸십니다.
그 종은 소리치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마침내 온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종이 누구인지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외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복음은 이것입니다.
“나는 상한 갈대처럼 보일지라도 주님께 버림받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면 나 역시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보내십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절망한 사람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빛을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정의는 십자가를 통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도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것.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것.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회복시키는 것.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것.
이것이 이사야 42장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의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관계 속에서
이사야 42장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사람.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사람.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는 사람.
진리와 사랑으로 정의를 세우는 사람.
그리고 끝까지 낙심하지 않는 사람.
왜냐하면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깁시다.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리고 이 약속을 붙듭시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정의를 세우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상한 갈대와 같은 자신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마십시오.
꺼져가는 등불처럼 느껴져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종은 결코 하나님의 손에서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붙드신 한 사람을 통해
어둠 가운데 빛이 비치고,
상처 입은 사람이 회복되고,
갇힌 사람이 자유를 얻고, 마침내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42장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사야 42장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종이 누구인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귀를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셨던 주님의 긍휼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우리도 세상 가운데 이방의 빛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를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흘러가게 하소서. 우리의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소서.
십자가의 길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진리와 사랑을 함께 붙들게 하시며,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우리의 상처와 연약함도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우리의 참된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부활로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