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헵시바와 쁠라 (이사야 60-6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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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8. 20. 13:36

버림받았다는 이름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가장 오래 기억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자기에게 붙여진 이름일 때가 많습니다.
“너는 안 된다.” “너는 실패자다.” “너는 이미 끝났다.” “너는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말은 한순간에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삶의 방향까지 흔듭니다.
어떤 분은 오래된 상처 때문에 자기 자신을 사실상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가정은 반복되는 갈등 때문에 “회복될 수 없는 집”이라고 여깁니다.
어떤 교회는 작아짐과 약함을 보며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하나님은 이사야 62장을 통하여 전혀 다른 이름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시온을 향하여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겠고,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새 이름을 주십니다. 헵시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 또 쁠라, ‘혼인한 땅’입니다.
상처가 붙인 이름보다 하나님의 선언이 더 마지막 말이 된다는 복음입니다.
이사야 62장은 죄와 심판 때문에 황폐해진 시온을 하나님이 자기 은혜로 회복하시고, 새 이름과 새 사명을 주셔서 세상 앞에 빛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낡은 낙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정체성으로 살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쉬지 않는
중보와 길을 여는 사랑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약속은 값싼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현실을 모르는 위로도 아닙니다.
이사야 62장은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백성이 포로와 귀환의 아픔을 지나며, 땅도 공동체도 상처 입은 자리에서 선포됩니다.
그래서 “의가 빛같이 나타난다”는 말은 어두움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어두움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빛을 켜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본문을 따라 세 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첫째, 시온의 의가 빛같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새 이름은 우리에게 어떤 복음입니까?
셋째, 파수꾼과 왕의 대로는 오늘 교회가 감당할 어떤 사명입니까?
폐허 한가운데서 선포된 회복의 약속
이사야 60장부터 62장은 영광스러운 시온의 회복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이미 모든 문제가 끝난 뒤에 불린 승리의 노래가 아닙니다.
무너진 예루살렘과 포로 생활의 기억, 귀환 이후에도 계속된 가난과 불안, 신앙과 공동체의 상처가 배경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회복은 추상적인 천국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도시·땅·일상의 관계를 다시 세우시는 구원입니다.
본문의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이는 하나님 자신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의 중보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해석자들 사이에는 화자의 세부 동일성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틀림없이 보여 주는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의 회복을 침묵 속에 방치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도 그 약속을 위해 침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으면 먼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라고 묻습니다. 성경은 이 질문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62장은 그 질문보다 더 깊은 선언을 들려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다 보지 못하는 때에도,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실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무너진 백성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은 어떤 국가나 집단의 정치적 번영을 무비판적으로 보증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또 특정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지워 버리고 곧바로 다른 대상으로 대체하는 본문도 아닙니다.
역사적 첫 자리에서 이 약속은 상처 입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입니다.
그 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열방을 부르셔서 한 백성을 이루시고, 마침내 새 예루살렘의 소망으로 이 약속의 지평을 넓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의 이스라엘을 존중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에게 열어 주신 구원의 충만함을 바라봅니다.
첫째, ‘시온의 의’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명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구원입니다
1절은 말합니다.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여기서 ‘의’는 단순히 개인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의와 구원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시온의 의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옳게 판명하시고, 억눌린 현실에서 건져 내시며, 관계와 공동체를 바로 세우시는 구원의 공적 드러남입니다.
이사야 62장의 ‘의’는 사적인 체면 회복이 아니라, 열방과 왕들이 볼 만큼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적 정의입니다.
빛은 감출 수 없습니다. 횃불은 어두움을 논쟁으로만 이기지 않습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여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나님은 “열방이 네 공의를, 왕들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시온이 스스로를 과시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결과입니다.
여기서 복음의 순서를 놓치지 마십시오.
본문은 “너희가 먼저 빛이 될 만큼 의로워져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겠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구원을 횃불처럼 나타내시고, 그 은혜가 백성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삶을 낳습니다.
신약은 이를 더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입니다(롬 3:24).
우리의 선행은 구원의 대가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열매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도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그 후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의가 빛같이 나타난다”는 말씀을 들을 때, 두 가지 유혹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 의의 유혹입니다.
내가 잘해서, 우리 교회가 대단해서, 우리의 신앙 이력이 좋아서 빛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절망의 유혹입니다.
내가 너무 부족하니 빛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둘 다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자랑할 의가 없지만,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그분의 구원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무엇으로 빛나야 하겠습니까?
화려한 성취나 다른 사람보다 나은 이미지가 아닙니다. 정직이 손해처럼 보여도 진실을 선택하는 자리에서 빛납니다.
약한 사람을 이용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그를 보호할 때 빛납니다.
가정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용서와 책임을 배우는 자리에서 빛납니다.
교회가 자기 이름을 높이는 데 몰두하지 않고, 상처 입은 이웃을 품고 공의를 구할 때 빛납니다.
빛은 “나는 빛이다”라고 외칠 때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날 때 더 선명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뒤,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14–16).
시온의 의가 빛처럼 나타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드러나는 것입니다.
둘째, 헵시바와 쁄라: 하나님은 수치를 최종 이름으로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본문 2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을 약속하십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정체성과 소명, 관계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시몬이 베드로가 된 것은 단지 별명이 바뀐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 사람의 과거를 넘어 새로운 미래를 여신 사건이었습니다.
시온의 옛 이름은 “버림받은 자”, “황무지”였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아수바와 스마마입니다.
이 이름들은 단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전쟁과 포로, 죄와 심판, 관계의 단절이 남긴 처절한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처가 시온의 영원한 정체성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새 이름을 주십니다.
헵시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 쁄라, “혼인한 자, 결합된 땅.”
이사야 62장의 혼인 이미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사랑, 곧 버리지 않고 다시 품으시는 관계의 회복을 보여 줍니다. 이 이름들을 사후의 천국 지명처럼 축소하기보다, 먼저 황폐해진 예루살렘과 땅을 다시 사랑하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약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목회적으로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의 혼인 은유는 인간 결혼의 모든 현실을 아무 설명 없이 그대로 신성화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특히 폭력, 통제, 학대의 관계에 있는 성도에게 “참고 견디라”는 말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시온의 관계를 말하는 이 은유의 핵심은 강압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버림받은 이를 기뻐하시고 회복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더 큰 수치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 수치의 이름을 새 이름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결과와 버림받음의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활하신 주님은 죄인이었던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10절은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자기 마음에 붙어 있는 낡은 이름을 주님 앞에 가져오십시오.
실패, 이혼, 중독의 과거, 관계의 파탄, 수치스러운 선택, 사람들의 평가가 여러분의 최종 이름이 아닙니다.
물론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은혜는 회개를 부릅니다. 은혜는 책임을 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을 과거의 감옥에 영원히 가두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은 ‘정죄받은 자’가 아니라 ‘용서받은 자’,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쓸모없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면류관’입니다.
3절은 “너는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왕관은 우리가 하나님을 장식하는 물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손에 붙들어 귀히 여기시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시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삶의 가치는 세상이 매긴 시장 가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시고,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붙드시는 데서 나옵니다.
셋째, 파수꾼의 기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믿음
이제 6절과 7절로 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네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그들이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아니하리로다.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 말씀은 종종 오해됩니다. 하나님이 잘 잊어버리시는 분이니 우리가 계속 알려 드려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언약을 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잊었던 정보를 제공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따라 구원 행동을 나타내시기를 간구하는 언약적 기도입니다.
파수꾼은 성벽 위에 섭니다. 성벽 위는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위험을 먼저 보아야 하고, 밤에도 깨어 있어야 하며, 성 안 사람들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구약에서 파수꾼은 위험을 알리고 공동체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62장의 파수꾼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적군의 움직임만 살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본질을 배웁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늘에 반복해서 전달하여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에 내 삶과 공동체를 맡기는 믿음의 참여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하여 중보했고,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뒤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히 7:25).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십니다(롬 8:26).
그러므로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몰아붙이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조종하려 하지 말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응답이 지연될 때에도 기도의 자리를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새벽에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깨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되, 자녀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도록 기도하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되, 우리 교회의 숫자와 명성만이 아니라 회개와 거룩, 약한 자를 향한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가 필요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되, 내 편의 승리만이 아니라 정의와 화해, 생명을 살리는 정책과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우리 가정이 단지 갈등을 덮는 집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회복되는 집이 되게 하소서.
주님, 우리 교회가 자기 보존에 몰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버림받은 이들을 찾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주님, 이 땅에 거짓과 착취가 아니라 진실과 공의가 세워지게 하소서.” 이것이 시온의 파수꾼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넷째, 왕의 대로: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거룩과 정의의 사명
10절은 갑자기 힘 있는 동사들을 쏟아 냅니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아라. 큰 길을 수축하라,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하나님이 오시는 구원의 약속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확신은 오히려 백성이 돌아올 길을 닦게 합니다.
‘길을 닦으라’는 말은 먼저 영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길에 놓인 죄와 우상, 편견과 교만의 돌을 치우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영혼만의 문제로 좁히지 마십시오.
앞선 8절과 9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수고하여 거둔 곡식과 포도주를 더 이상 원수와 이방인이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십니다. 하나님의 회복에는 예배의 회복만이 아니라, 노동의 열매를 정당하게 누리는 회복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만 거룩합니까? 아니면 일터의 임금, 거래의 정직, 돌봄 노동의 존엄, 장애와 가난으로 밀려난 이웃의 접근성까지 돌아보게 합니까?
성도 여러분, 왕의 대로를 닦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신앙 여정을 가로막는 돌을 치우는 일입니다.
새로 온 사람이 교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소외되지 않도록 돕는 일입니다.
상처 받은 사람이 정죄의 두려움 없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안전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입니다.
청년과 이주민, 장애인과 독거 어르신이 교회의 주변이 아니라 형제자매로 환대받도록 길을 내는 일입니다.
노동하는 이의 정당한 대가가 무시되지 않도록, 내가 소비하고 고용하고 투표하고 말하는 방식에서 공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복음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사회운동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찬송받는 성읍’의 모습입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적어도 문제를 외면하며 신앙을 핑계로 불의를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완전한 왕국을 지상에서 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실 왕의 나라를 미리 맛보이며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구원자가 오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어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약속
11절은 선언합니다.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이사야서 전체에서 구원은 막연한 기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구원자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요 1:14),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십자가와 부활로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름을 받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눈물과 전쟁과 불의와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62장의 약속은 단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소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계 21:2, 9–10).
또 주님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표현은 이사야 62장 11절의 언어와 깊이 울립니다.
하지만 이 종말의 소망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을 충성스럽게 살게 합니다. \
새 예루살렘을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의 도시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 우는 사람 곁에 앉습니다.
하나님이 정의를 완성하실 것을 믿는 사람은 오늘 불의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버림받은 자를 찾은 바 된 자라 부르실 것을 믿는 사람은, 지금 주변에서 잊힌 사람을 찾아갑니다.
12절의 마지막 이름들을 들으십시오.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찾은 바 된 자라, 버림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최종 정체성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소비자, 성과, 실패, 계층, 출신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백성,
찾으신 백성, 버리지 않으시는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결단과 기도: 침묵하지 말고, 쉬지 말고, 길을 닦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 앞에서 세 가지로 결단합시다.
첫째, 낡은 이름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의 새 이름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상처와 실패가 실제였다는 것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최종 이름이라는 거짓말도 믿지 마십시오.
주님은 헵시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파수꾼의 자리에 서십시오. 한 사람, 한 가정, 한 교회, 이 땅을 품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 기도하십시오.
결과를 조급하게 조종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쉬지 말고 구하십시오.
셋째, 왕의 대로를 닦으십시오.
내 마음의 돌을 치우고, 누군가가 주님께 돌아오는 길을 막는 교만과 무관심을 버리십시오. 정의로운 일터, 환대하는 교회,
약한 이를 보호하는 가정으로 복음의 길을 내십시오.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스스로 붙들고 있던 버림받음과 실패의 이름을 내려놓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새 이름을 믿게 하소서.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셔서 가정과 교회와 이 땅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시고, 복음의 길을 막는 돌을 치우게 하소서.
우리의 말과 일과 관계를 통하여 주님의 공의와 사랑이 빛처럼 드러나게 하소서.
마침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