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칼럼] 자기 의의 감옥에 갇힌 '멈춤'이 없는 사람들 (사사기 20–21장)

왕이 없어서가 아니라 왕이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20–21장)
말씀을 잃어버린 공동체와 하나님의 침묵 속에 나타난 은혜
여러분, 한 공동체가 무너지는 가장 무서운 순간은 언제일까요?
전쟁이 일어날 때일까요? 경제가 어려워질 때일까요? 지도자가 실수할 때일까요?
사사기 20장과 21장을 보면 더 무서운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이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말씀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장 25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단순히 이렇게 읽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에 정치적인 왕이 없어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물론 정치적 왕권의 부재도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더 깊이 보여주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문제는 왕이 없었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삶의 왕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가정의 최종 결정권자는 누구입니까?”
“교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까?”
오늘 사사기 20장과 21장은 우리에게 아주 불편하지만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을 들려줍니다.
말씀이 사라진 공동체에서는 죄를 제거하려다가 더 큰 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는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1. 죄 하나가 공동체 전체의 죄가 될 때
사사기 20장은 사사기 19장의 끔찍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한 레위인의 첩이 기브아에서 밤새 폭력을 당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은 그녀의 시신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보냅니다.
이스라엘은 미스바에 모입니다. 성경은 놀라운 표현을 반복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 회중이 일제히…” “온 백성이…” 무려 40만 명에 이르는 군대가 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멈추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우상과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40만 명이 순식간에 모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얼마나 빨리 모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는 자리에는 얼마나 빨리 모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형제 지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하나가 되었지만, 자기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확대해서 보고, 나의 죄는 축소해서 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정의를 요구하면서, 나의 잘못에는 사정을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원칙을 적용하면서, 나에게는 상황을 적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마태복음 7장 5절입니다. 여러분, 자기 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은혜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의의 감옥 안에 갇힌 사람입니다.
2. 왜곡된 증언은 공동체를 전쟁으로 끌고 갑니다
사사기 20장 4절부터 7절에는 레위인의 증언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의 증언은 완전한 거짓말이라기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사실이지만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된 진실입니다.
그는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첩을 밖으로 내보냈다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증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비겁함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을 피해자로만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이야기를 듣고 분노합니다. 결국 그 분노는 전쟁이 됩니다.
레위인의 증언은 큰 그림에서는 사건을 말하고 있지만 자신의 책임을 제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 역시 그 왜곡을 분별하지 못한 채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다고 느끼는 순간 진실보다 자기 의를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잠언 18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
한쪽 이야기만 듣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특히 신앙 공동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그랬습니까?” “다른 측면은 없습니까?” “내가 들은 것이 전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실까요?”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20장의 이스라엘에게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비극입니다. 하나님께 묻기는 했지만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으로 묻지 않았습니다.
3. 하나님께 묻는 것과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사기 20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세 번 하나님께 묻습니다.
첫 번째 전쟁 전에 묻습니다. 두 번째 전쟁 전에 묻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전쟁 전에 다시 묻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통찰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질문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하려고 하는데 언제 하면 됩니까?” “하나님, 제가 이 사람과 싸우려고 하는데 승리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종교적 승인 요청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베냐민과 싸우기로 결정한 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뜻을 구하는 분으로 대하기보다 자신들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수단처럼 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과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진짜 기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답을 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것이 제 뜻과 달라도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장 39절입니다. 기도의 최고점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4. 세 번의 전쟁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도 다루셨습니다
이스라엘은 40만 명입니다. 베냐민은 훨씬 적습니다. 군사적으로 보면 결과는 너무나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합니다. 두 번째 전쟁에서도 패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이미 자신들의 판단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냐민의 죄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도 다루고 계십니다.
베냐민은 기브아의 악을 옹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과도한 복수와 파괴로 나아갔습니다.
한쪽은 죄를 방어하고, 다른 한쪽은 죄를 심판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이 전쟁에는 진정한 승자가 없습니다. 베냐민이 무너졌지만 이스라엘도 상처 입었습니다.
한 지파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죄와 복수가 충돌한 자리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지도력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공동체적 분별이 상실될 때 정의를 추구하는 행동 자체가 또 다른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이런 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이기려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이기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상대방을 이겼는데 관계가 죽었다면 그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는데 한 영혼이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승리인지 물어야 합니다.
5. 더 무서운 문제 — 죄를 해결하려다가 죄를 더 만듭니다
사사기 21장은 더 충격적입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남자는 600명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갑자기 슬퍼합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그런데 여러분,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자기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전쟁을 결정했습니다. 자기들이 베냐민 성읍을 공격했습니다. 자기들이 남녀와 성읍을 진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셨습니까?” 이것이 죄인의 자기기만입니다.
내가 만든 결과를 하나님께 책임지우는 것입니다.
사사기 21장의 이스라엘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베냐민을 살리기 위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런데 해결책이 또 다른 죄입니다.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처녀 400명을 데려옵니다. 그것으로 부족하자 실로에서 여인들을 납치하게 합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사사기 19장의 기브아 사건과 구조적으로 연결됩니다.
사사기 19장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한 여인을 내어주었습니다.
사사기 21장에서는 공동체 전체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을 희생시킵니다.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의 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운 속성입니다. 죄는 결코 나 하나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분노가 가정에 영향을 줍니다.
지도자의 교만이 공동체에 영향을 줍니다.
한 사람의 거짓말이 관계를 파괴합니다.
한 사람의 탐욕이 조직의 문화를 바꿉니다.
한 사람의 영적 무관심이 다음 세대의 신앙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개인의 죄만 말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죄도 말합니다.
6. 가장 위험한 상태는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21장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악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방법을 찾았습니다.
맹세를 지키면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해결책은 결국 죄를 합리화하는 방식이 됩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핵심입니다. 목적이 옳다고 해서 방법까지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을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함부로 다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사랑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정의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긍휼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마태복음 9장 13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종교적 행동의 양을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7. “왕이 없었다”는 말의 진짜 의미
그리고 사사기의 마지막 절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학계에서도 이 구절은 중요한 논쟁의 대상입니다.
일부 연구는 이 반복구가 사사시대의 혼란을 지적하면서 왕정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친왕권적 기능을 가진다고 봅니다.
반면 다른 연구는 단순히 “인간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으며, 이스라엘의 진짜 문제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언약적 순종의 붕괴였다고 봅니다.
이 두 관점을 함께 놓고 보면 더 깊은 메시지가 보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정치 지도자 한 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공동체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왕이 생긴다고 자동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실패합니다. 다윗도 범죄합니다. 솔로몬도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마지막은 우리를 단순히 인간 왕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실 참된 왕을 기다리게 하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그 왕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8. 사사기의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은 인간의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는 인간의 실패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실패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구원 계획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사사기의 전체 주제는 말씀 없이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죄악과 동시에, 그런 백성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인간은 계속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인간은 약속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인간은 왕이 되어 서로를 다스리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된 왕을 보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다윗을 거쳐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구원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순한 정치적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자기 의에서 건져내시는 왕입니다.
사사기에서 사람들은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사사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사사기에서 한 여인의 죽음이 공동체의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복음서에서 한 분의 죽음은 모든 민족에게 생명을 가져옵니다.
이 차이를 보십시오.
사사기의 인간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지만,
복음의 왕 예수님은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십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것이 참된 왕입니다.
9. 그런데 왜 사사기 21장에서는 하나님이 침묵하십니까?
사사기 20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1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울고, 제사를 드리고, 계획을 세우고, 회의하고, 해결책을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침묵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죄악을 그대로 승인하지 않으시는 거룩한 침묵이며,
동시에 그들을 즉시 멸절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은혜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언제나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심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게 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을 즉시 막지 않으시면서 그 결과를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먼저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그보다 먼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알고도 순종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10. 회개했는데 왜 같은 죄를 반복합니까?
사사기 21장의 이스라엘은 슬퍼합니다. 베냐민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런데 울었다고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눈물 뒤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도 다시 인간적인 해결책을 찾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감정적인 후회와 성경적인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는 결과를 슬퍼합니다. 회개는 죄 자체를 슬퍼합니다.
후회는 “왜 이런 일이 생겼지?”라고 말합니다. 회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후회는 문제를 없애고 싶어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 17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닙니다.
깨진 마음입니다. 자기 의가 무너진 마음입니다.
“하나님, 제가 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하기 전에 제 죄를 보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회개입니다.
11.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춤’입니다
잠시 멈추는 습관입니다.
분노하기 전에 멈추십시오. 결정하기 전에 멈추십시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멈추십시오. 말을 보내기 전에 멈추십시오.
교회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멈추십시오. 가정에서 배우자에게 말하기 전에 멈추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주님, 제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제가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제 안에 어떤 죄가 있습니까?”
“이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합니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것입니까?”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잠시 멈추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습관이 경솔함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멈춤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멈춘다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오늘 우리 시대의 “왕이 없음”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왕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있습니다. 법도 있습니다. 제도도 있습니다. 교회도 있습니다. 목회자도 있습니다. 신학교도 있습니다. 성경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사기의 문제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가지고 있지만 말씀의 통치를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기 소견대로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자기 뜻을 관철하려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자기 의를 중심으로 살 수 있습니다.
신학을 말하면서도 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도 긍휼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없다”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들려야 합니다. “너의 삶에서 실제로 왕 노릇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자존심입니까?
내 경험입니까?
내 감정입니까?
내 성공입니까?
내 상처입니까?
내 정치적 생각입니까?
내 경제적 계산입니까?
내가 옳다는 확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13. 말씀은 정보가 아니라 나를 다스리는 왕의 음성입니다
사사기의 문제는 단순히 성경책이 없었다는 의미의 “말씀 부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 뜻 아래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은 내 생각을 장식하는 정보가 아닙니다. 말씀은 내 길을 결정하는 빛입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은 더 직접적으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여러분, 말씀을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의해 멈추는 것입니다.
말씀 때문에 분노를 멈추십시오.
말씀 때문에 복수를 멈추십시오.
말씀 때문에 정죄를 멈추십시오.
말씀 때문에 욕심을 멈추십시오.
말씀 때문에 내 계획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말씀 때문에 다시 걸어가십시오.
14. 사사기 20–21장의 가장 깊은 질문
사사기 20장과 21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누가 옳았는가?” 레위인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베냐민입니까? 누가 더 잘못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왜 하나님 없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느냐?”
사람들은 계속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 커집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뿌리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는 순간,
내 생각이 진리가 되고,
내 감정이 정의가 되고,
내 욕망이 선이 되고, 내 복수가 심판이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 21장 25절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표현은 단순한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도덕의 기준을 하나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 옮겨버린 인간의 영적 반역입니다.
15. 그렇다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멈추십시오.
결정하기 전에 멈추십시오.
분노하기 전에 멈추십시오.
판단하기 전에 멈추십시오.
내가 옳다고 확신할수록 더 멈추십시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이 한마디가 교만을 깨뜨립니다.
둘째, 말씀 앞에 서십시오.
내 감정을 기준으로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말씀으로 내 감정을 해석하십시오.
내 상황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상황을 해석하십시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은 나를 변호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나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좋은 인간 지도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소견대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네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네가 복수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참된 왕이 이미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 어둡습니다.
사람들은 싸웠습니다.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복수했습니다.
사람들은 맹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성경은 말합니다. “왕이 없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왕이 없었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왕이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 왕의 통치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기준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약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마지막은 절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복음을 기다리게 합니다. “참된 왕이 필요하다.”
그 왕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기 의를 무너뜨리시는 왕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왕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복수를 십자가에서 끝내시는 왕입니다. 그분은 무너진 공동체를 화해시키시는 왕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왕입니다.
그리고 그 왕이 다스릴 때,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인생이 끝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인생이 시작됩니다.
[마무리 기도]
주님,사사기의 이스라엘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죄를 보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기 전에 내 안에 있는 교만과 분노와 자기 의를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묻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은 내가 정한 길을 하나님께 허락받으려 했던 우리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가정에 왕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의 교회에 왕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의 생각에 왕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의 감정에 왕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의 말과 선택과 관계 속에 왕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가 더 이상 “내가 옳다”를 붙들지 않게 하시고, “주님,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습니까?”라고 묻게 하옵소서.
분노하기 전에 멈추게 하시고, 판단하기 전에 기도하게 하시고, 결정하기 전에 말씀 앞에 서게 하시고,
행동하기 전에 주님의 뜻을 구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으니 그 말씀을 듣는 데서 끝나지 않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물이 단순한 후회가 되지 않게 하시고 참된 회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회개가 인간적인 해결책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회복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사사기의 마지막처럼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 가운데 말씀이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판단하고, 말씀이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고,
말씀이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말씀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실패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