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도움의 돌” (사무엘상 6–8장)

knowledgeplatform100 2026. 8. 27. 13:23

익숙한 하나님을 버리고 왕을 구하는 마음 (사무엘상 6–8장)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익숙하게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서서 회개하고,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6–8장은 한 가지 무서운 영적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보다 내가 원하는 왕을 찾고 있는가?” 

오늘 이 질문 앞에 우리의 신앙을 세워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익숙해지는 대상이 아니라 경외해야 할 분이십니다

사무엘상 6장은 매우 독특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블레셋 땅에 들어간 지 무려 7개월이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자신들의 신 다곤의 신전 곁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을 무너뜨리셨고, 블레셋의 여러 지역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상 6장의 영적 비극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제사장과 복술자들을 불러 언약궤를 어떻게 돌려보낼지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했지만,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구절을 많이 암송한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에 익숙해지고, 찬송에 익숙해지고, 기도에 익숙해지고, 교회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이것입니다. 거룩한 것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기도가 익숙해지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배가 익숙해지면 예배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익숙해지면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익숙해지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8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적 습관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분은 왕이시고 우리는 백성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분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거룩한 재판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편안하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것입니다.

 

2. 언약궤가 돌아왔다고 하나님이 자동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6장에서 언약궤는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보고 기뻐합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장면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무엘상 6장 19절은 말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사…”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있습니다. 거룩한 것은 거룩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언약궤는 부적이 아니었습니다. 언약궤가 있다고 하나님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사무엘상 4장에서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패배했습니다.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상징물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니니까 괜찮겠지.” “기도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성경책이 집에 있으니까 괜찮겠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아닙니다. 신앙은 종교적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적 도구보다 훨씬 크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종속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에 종속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 주는 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마태복음 26:39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하나님, 제 뜻을 이루어 주세요”에서 “하나님, 제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로 넘어가는 것. 그것이 성숙입니다.

 

3. 하나님은 익숙함에서 우리를 깨워 회개로 부르십니다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기간이 무려 2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무엘이 다시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7장 3절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여기서 회개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회개는 단순히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회개에는 반드시 행동이 따릅니다.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습니까?

 

첫째, 버렸습니다.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했습니다.

 

둘째, 모였습니다.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셋째, 구했습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원고에서도 사무엘의 회개운동을 “버리는 것, 모이는 것,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방향 전환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여기서 끝나면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러므로 이것을 버리겠습니다.”

“이제 이 길에서 돌아서겠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은 말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러므로 회개에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버려야 할 우상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사람의 인정입니까? 성공입니까? 자녀입니까? 자존심입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나의 우상입니다.

 

4. 미스바의 기적은 전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회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공격해 옵니다. 이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대응은 놀랍습니다. 무기를 먼저 들지 않습니다.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그리고 사무엘은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립니다. 기도하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사무엘상 7장 10절입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십시오.

전쟁에서 승리한 것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우상을 버렸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싸우셨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의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물론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의 싸움은 자기 힘을 절대화하지 않는 싸움이라는 뜻입니다.

 

5. 그리고 사무엘은 돌 하나를 세웁니다 — “에벤에셀”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돌 하나를 취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부릅니다.

사무엘상 7장 12절입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에벤에셀. “도움의 돌.”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승리 기념비가 아닙니다.

에벤에셀은 은혜의 기억 장치입니다.

 

이스라엘은 기억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군사력이 강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우리의 왕이 강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성도에게는 기억해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에벤에셀이 있습니다.

죽을 것 같았는데 살아난 순간이 있었습니까?

길이 막혔는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 적이 있습니까?

기도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은 떠났지만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셨던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곳이 여러분의 에벤에셀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만이 아닙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미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2절은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왜 우리는 낙심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억은 영적 훈련입니다. 에벤에셀을 세우십시오.

 

6. 그런데 놀랍게도 7장 다음에 8장이 옵니다

여기서 사무엘상 6–8장의 구조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6장에서는 하나님께 익숙해진 백성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7장에서는 회개하고 회복합니다. 그리고 8장에서는 다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다시 다른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는데도 다른 의지처를 찾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신데도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7.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 이것이 8장의 핵심입니다

사무엘상 8장 5절입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고 20절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가장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이 말이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른 나라와 다르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처럼 되고 싶습니다.” 오늘 교회도 이 유혹을 받습니다. “교회도 세상처럼 해야 합니다.” “성공한 기업처럼 운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다른 교회가 하는 것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물론 문화와 기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방법이 아닙니다. 누가 주인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지만 세상의 가치가 교회의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공이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숫자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평가가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도 왕이 아닙니다.

교회 조직도 왕이 아닙니다.

성도도 왕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왕이십니다. 

 

8. 이스라엘의 문제는 왕을 요구한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떤 왕”을 원했느냐였습니다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것 자체를 단순히 죄라고 말하면 본문의 전체 성경신학을 놓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신명기 17장 14–20절에서 이스라엘이 장차 왕을 세울 가능성을 전제로 왕에 관한 규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으로도 신명기 17장의 왕권 규례와 사무엘상 8장의 왕 요구 사이의 연관성은 널리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단순히 “왕을 요구했느냐?” 가 아닙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처럼” 왕을 원했습니다.

 

즉 그들의 왕 요구에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불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사무엘상 8장 7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 말씀이 사무엘상 8장의 심장입니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

이스라엘의 문제는 정치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예배의 문제였습니다. 왕권의 문제가 아니라 왕좌의 문제였습니다.

누가 그들의 마음의 왕좌에 앉아 있는가?

 

9. 하나님께서 “예”라고 하셨다고 항상 축복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매우 두려운 영적 원리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계속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결국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축복의 허락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허락은 우리의 고집에 대한 심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을 주셨지만, 사무엘은 그 왕이 가져올 대가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아들들을 데려갑니다. 딸들을 데려갑니다. 토지를 요구합니다. 소산을 요구합니다. 십분의 일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백성은 왕의 종이 됩니다. 

 

사무엘상 8장 18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이것은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것이 반드시 복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고집하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만 주세요.” “하나님, 반드시 이것을 이루어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나의 고집 때문에 허락된 것인가?”

 

10. 하나님이 주시는 “아니오”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믿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라고 하실 때만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니오”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길이 은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연시키시는 시간이 은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빼앗으시는 것이 은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를 보호하는 은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잠언 3장 5–6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신앙은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든 주지 않으시든 하나님이 옳으시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1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은 누구입니까?

여기서 사무엘상 8장은 신약으로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인간 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은 우리에게 참된 왕을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왕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원했던 왕과 정반대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울 왕” 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를 위해 싸우셨습니다. 그러나 칼과 창으로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원한 왕은 백성에게 세금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원한 왕은 백성의 아들들을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죽음의 자리로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원한 왕은 백성의 것을 가져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의 왕은 백성을 이용합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세상의 왕은 백성에게 자기 생명을 바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의 왕은 왕좌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12. 결국 사무엘상 6–8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6장에서는 무엇을 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7장에서는 무엇을 봅니까?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

7장 후반에서는 무엇을 봅니까? 여기까지 도우시는 하나님.

8장에서는 무엇을 봅니까? 인간 왕을 구하는 인간의 마음.

 

그리고 성경 전체를 보면 그 모든 갈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왕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왕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성경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이 필요합니다.

 

13. 오늘 우리 마음의 왕좌에는 누가 앉아 있습니까?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8장은 먼 옛날 이스라엘의 정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것만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주세요.” 그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합니다. 

 

“하나님, 성공하게 해주세요.” 성공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집니다.

“하나님, 인정받게 해주세요.” 사람의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보다 더 중요해집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왕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은 반드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존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14.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첫째, 익숙함을 버리고 경외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배에 익숙해졌습니까? 다시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기도에 익숙해졌습니까?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성경에 익숙해졌습니까?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 오늘 저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으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이며 순종입니다.

둘째, 미스바의 회개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전심입니다. 부분적인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우상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알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랑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의지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두려워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셋째, 에벤에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이 우리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힘들었던 날도 은혜였습니다.

기다렸던 날도 은혜였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던 시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신 시간이었습니다.

막힌 문도 은혜였습니다.

열린 문도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은 내일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15.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

사무엘상 8장의 이스라엘은 말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왜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느냐?” “내가 너의 왕이면 충분하지 않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더 가져라. 더 높아져라. 더 인정받아라. 더 성공하라. 더 강해져라. 더 유명해져라. 그러나 복음은 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로 충분하다. 은혜로 충분하다. 하나님의 통치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께 내 인생의 운전대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왕이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론 —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사무엘상 6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을 익숙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무엘상 7장은 묻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까? 에벤에셀은 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사무엘상 8장은 묻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왕좌에는 누가 앉아 있습니까? 그리고 복음은 마지막으로 선언합니다.

 

참된 왕이 오셨습니다. 그 왕은 우리의 것을 빼앗으러 오신 왕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러 오신 왕입니다. 그 왕은 우리를 종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죄의 종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 왕은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고백합시다.

“예수님, 나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내 욕망이 왕이 되지 않게 하소서.”

“돈이 왕이 되지 않게 하소서.”

“사람의 평가가 왕이 되지 않게 하소서.”

“성공이 왕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내 자아가 왕이 되지 않게 하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나의 왕이 되어 주옵소서.”

 

그리고 오늘 우리의 마음에 에벤에셀 하나를 세웁시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내가 내일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일도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십시오.

우리의 왕은 세상의 왕이 아닙니다. 우리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면 충분합니다.

 

마치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익숙하게 생각했던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고, 기도하면서도 우리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만 했으며,
말씀을 읽으면서도 순종하지 않았던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주님,

 

우리 마음속의 우상을 보여 주옵소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했던 것을 보여 주옵소서. 미스바의 회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게 하옵소서.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시고, 돌아설 곳에서 돌아서게 하시며, 다시 하나님께로 전심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 에벤에셀을 세우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고백하게 하시며,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우리 마음의 왕좌에서 우리가 내려오게 하시고, 세상의 가치가 내려오게 하시며, 사람의 인정이 내려오게 하시고,

돈과 성공과 명예가 내려오게 하옵소서.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의 왕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교회의 왕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자녀의 왕이 되어 주시며,

우리의 일터와 미래와 모든 삶의 왕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셨음을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죄를 이기셨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셨으며,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하시며, 우리의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이라는 세상의 소리를 따르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내일도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