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칼럼] 보고 듣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사도행전 4장 1–31절)

보고 들은 것에서 힘이 나온다 (사도행전 4장 1–31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이상합니다.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잘됩니다.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사업도 잘되고, 자녀도 잘되고, 건강도 괜찮고, 교회에서도 인정받습니다.
그때 우리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구나.”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찾아옵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건강의 문제를 만나고,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고, 열심히 섬겼는데 오히려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은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형통과 고난은 반드시 서로 반대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통 가운데에도 고난이 있을 수 있고, 고난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과 형통이 동시에 온다.” 고난을 바라볼 때에도 그 고난의 반대편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도행전 4장 4절은 말씀합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얼마나 놀라운 부흥입니까? 그런데 이상합니다. 부흥이 일어났는데 곧바로 핍박이 시작됩니다.
기적이 일어났는데 감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믿기 시작했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붙잡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현실은 부흥과 핍박, 기쁨과 고난, 형통과 어려움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1. 인생은 한쪽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양쪽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한쪽만 봅니다. 고난이 오면 고난만 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습니까?”
“왜 다른 사람은 잘되는데 나는 이렇게 힘듭니까?”
반대로 형통하면 형통만 봅니다.
“이제 내 인생은 완전히 안정되었습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30편에서 다윗은 형통할 때 오히려 위험한 말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그런데 곧이어 다윗은 깨닫습니다. 내가 굳게 서 있었던 것이 내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형통할 때도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고난만 보면 절망합니다. 형통만 보면 교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면 균형을 찾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환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고난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형통을 무조건 축복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렸습니다. 노예가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전체를 알고 보면 압니다.
그 고난이 요셉 인생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요셉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체 계획이 아닙니다.
오늘 눈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길이 막혔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을 멈추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깊은 일을 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2. 그러나 진짜 힘은 환경이 아니라 ‘보고 들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보고 들은 것에서 힘이 나온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는 아닙니다. 내가 느낀 감정이 모두 진리는 아닙니다.
내가 경험한 모든 기적이 복음의 본질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사도들이 말하는 “보고 들은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상이나 주관적인 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가 권력자들 앞에서 말하는 핵심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며, 그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선언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힘을 얻는 근거는 “나는 이런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가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힘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분의 복음을 들었으며, 그분의 은혜를 믿습니다.” 여기에 있습니다.
3. 베드로와 요한에게 힘이 있었던 이유
권력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봅니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담대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권력자 앞에서도 복음을 말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랍니다. 왜 놀랐습니까?
성경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학력을 보고 예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고 예수님을 발견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있는 사람은 삶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정말 만난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 사람은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들은 사람은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들은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힘만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신앙의 힘은 말솜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성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시간에서 나옵니다.
4.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권력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명령합니다.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마라.”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께 사로잡힌 증인의 언어입니다.
사도들은 “말해야 하니까 말한다”가 아닙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이 그들에게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책 속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 눈앞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한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침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의 본질입니다.
5. 복음은 정보가 아니라 증언이 될 때 사람을 움직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지식이 부족해서만 복음 전도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성경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삶에서 복음의 능력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들은 것이 삶으로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변화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경우,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교회에서 영적으로 보고
경험해야 할 것을 보지 못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좋은 영화를 본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맛있는 식당을 발견한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좋은 책을 읽은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에게 실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한 번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보고 들었는가?” “복음이 정말 내 삶의 실제가 되었는가?”
6.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하고 듣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의 본질을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말씀을 듣는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반드시 보고 들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다”는 것은 단순한 초자연적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상처받았지만 다시 일어나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를 보아야 합니다.
가난하면서도 나누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복수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실패했지만 다시 말씀을 붙드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가시적 증거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반복해서 듣는 말에 의해 영혼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7. 고난 속에서도 보고 들은 것이 있으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장의 놀라운 점은 사도들이 기적을 경험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기적 다음에 고난이 왔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있었다고 고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흥이 일어났다고 핍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했다고 모든 문제가 즉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했다고 인생에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고난을 통과합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고난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서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고난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실제로 아픕니다. 눈물이 납니다. 힘듭니다. 때로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고난보다 더 큰 것이 있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고난이 없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고난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8. 약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의 요구대로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여기서 복음의 역설이 나타납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강해야 한다.” “약점을 숨겨라.” “성공을 보여라.” “실패를 감춰라.”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
바울에게 가시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붙들어 주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도 제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하나님은 그 약함 가운데서 “내가 너의 힘이다” 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9. 초대교회가 위기 가운데 한 일은 회의가 아니라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계속 읽어 보면 더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난 뒤 교회 공동체로 돌아갑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정치적인 전략을 세우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복수할 방법을 찾지 않습니다.
기도합니다. 세상의 방식은 문제가 생기면 사람을 모아 회의하지만, 초대교회는 위기 가운데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놀랍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편하게 해주세요.”
“우리에게 아무런 핍박도 오지 않게 해주세요.” 이렇게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이것이 성령 충만한 기도입니다.
문제를 없애 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도 사명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1절은 기도가 끝났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고, 그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 충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담대함입니다. 말씀입니다. 증언입니다. 복음 전파입니다.
10. 보고 들은 것이 기도의 힘이 되고, 기도의 힘이 다시 증언의 힘이 됩니다
여기서 오늘 말씀의 구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보고 들음 → 믿음 → 기도 → 성령 충만 → 담대함 → 증언 → 다시 사람들이 보고 들음 이것이 초대교회의 영적 순환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핍박이 왔습니다. 교회가 기도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다시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힘은 건물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사람의 숫자에만 있지도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재정의 규모에도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진짜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들이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1. 세상의 권세보다 하늘의 권세를 바라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말합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
그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도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자신의 권세를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이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의 이름에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목회자의 이름에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경험에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2.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를 매일 점검하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최근에 무엇을 보았습니까?”
세상의 뉴스만 보았습니까?
사람들의 실패만 보았습니까?
다른 사람의 약점만 보았습니까?
내 통장의 숫자만 보았습니까?
내 문제만 보았습니까? 아니면 그 문제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질문입니다. “나는 무엇을 들었습니까?”
세상의 불안한 소리를 들었습니까?
사람들의 평가를 들었습니까?
나를 낙심시키는 말을 들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여러분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느냐에 의해 방향을 잡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세상을 보는 눈보다 하나님을 보는 눈이 커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13. 그리고 반드시 누군가에게 전하십시오
보고 들은 사람은 결국 전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4장 20절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전도의 출발점입니다.
전도는 내가 성경의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학박사이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말을 잘하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내 안에 예수님에 대한 실제가 있는가? 입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용서받았습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나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음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나는 실패했지만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사람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14. 가장 강력한 전도는 변화된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만 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봅니다.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견디는지 봅니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봅니다.
우리가 가족을 어떻게 대하는지 봅니다.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대하는지 봅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봅니다.
우리가 성공했을 때 교만해지는지 겸손해지는지를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복음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서 권력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서 “예수와 함께 있던 자”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증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난다.”
“저 사람은 어려운데도 이상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저 사람은 상처를 받았는데도 미워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성공했는데도 교만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손해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한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의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15.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고난을 없애 주십시오.” 물론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병을 고쳐 주십시오.” 물론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물론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초대교회처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상황 가운데서도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님, 제가 보고 들은 복음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
“주님, 형통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형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옵소서.”
“주님, 저에게 다시 복음을 전할 담대함을 주옵소서.”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결론 ―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에 의해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참으로 보고 들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고난이 있습니까? 고난만 보지 마십시오. 그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형통합니까? 형통만 보지 마십시오. 그 형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시오.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만 보지 마십시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사람의 말을 많이 듣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들으십시오.
세상의 소리에 흔들립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다시 들으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힘은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도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도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힘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성령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이렇게 살아갑시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초대교회처럼 성령의 충만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전하십시오. 내가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이 “보고 들은 것이 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을 보고 말씀을 듣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부모의 말만 들은 세대”가 아니라 “예수님을 삶으로 경험한 세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왔다” 라고 증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4장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고백도 이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는 주를 섬기는 일에 후회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앞장설 때는 앞장서고, 내 이름을 드러낼 때는 뒤로 물러서며, 사람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고,
세상의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보고, 형통 중에도 하나님을 보고,
마침내 우리의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의 간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성 깊은 마침기도
거룩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눈앞의 환경만 바라보았습니다.
고난이 오면 고난만 보았고, 문제가 생기면 문제만 보았으며,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만 바라보았습니다.
형통할 때에는 우리가 잘해서 된 것처럼 생각했고, 조금 평안하면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교만했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보이는 현실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
고난 가운데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시고, 눈물 가운데 함께 우시는 주님을 보게 하시며,
막힌 길 가운데서도 새로운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
형통할 때에도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시고, 높아질 때에도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며,
사람의 칭찬을 받을 때에도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귀도 열어 주옵소서.
세상의 소리에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크게 듣게 하옵소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을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힘으로 담대하게 하지 마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담대하게 하옵소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세상의 권세 앞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맡기신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우리도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보고 들은 것이 있게 하옵소서.
예배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말씀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 주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하시며,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에서 예수님이 보이게 하시고, 우리의 말에서 예수님이 들리게 하시고,
우리의 행동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상처를 받았을 때 용서하게 하시고, 손해를 보았을 때에도 정직하게 하시고,
억울할 때에도 하나님께 맡기게 하시며, 성공했을 때에는 더욱 낮아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교회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사람을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며,
사람의 박수를 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기도할 때 하늘의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우리 다음 세대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내가 들었다”에서 끝나지 않고 “내가 보았다”라고 고백하게 하시며,
“내가 보았다”에서 끝나지 않고 “내가 증거하겠다”는 세대로 세워 주옵소서.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와도 낙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고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현재의 고난보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해짐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의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인생 마지막 날에 “나는 성공했습니다”가 아니라, “나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