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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칼럼] '말씀'의 근육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 (사도행전 14장)

knowledgeplatform100 2026. 9. 8. 09:26

말씀의 근육을 키우라 (사도행전 14장)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의 근육을 키우라” 사도행전 14장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말씀으로 강하게 하고, 믿음으로 일으키며, 자기 영광을 내려놓게 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향해 계속 걸어가게 한다.”

 

이고니온에서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박해가 일어납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숭배하려 합니다.

 

조금 전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신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을 돌로 칩니다.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도망가서 쉬지 않습니다.

다시 성으로 들어갑니다.

다음 날 더베로 갑니다.

 

그리고 더베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그 길을 다시 돌아갑니다.

루스드라로, 이고니온으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굳게 합니다.

 

마지막에는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4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일으키실 때 반드시 말씀과 믿음의 과정을 통하여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1. 이고니온 — 말씀에는 근육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1절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얼마나 단순합니까? 말하니 믿더라. 바울과 바나바가 무엇을 했습니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 생깁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인간의 긍정적인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근육을 키우려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육체의 근육도 사용하지 않으면 약해집니다. 영적인 근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말씀을 붙들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영혼은 점점 약해집니다.

반대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면 환난을 견디는 힘이 생깁니다. 시험을 이기는 힘이 생깁니다. 유혹을 거절하는 힘이 생깁니다.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힘이 생깁니다.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 믿음의 힘을 만들어 냅니다.

 

2. 그런데 말씀의 근육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말씀을 약하게 만드는 두 가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욕심이 들어오면 말씀을 내 욕망에 맞게 해석합니다. 두려움이 들어오면 말씀을 알고도 침묵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2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욕망에 맞추어 변형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인간의 두려움 때문에 축소되어서도 안 됩니다. 복음은 복음 그대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보여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핍박이 왔습니다.

그런데 3절은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말하니.”

 

여기 세 단어가 중요합니다.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이 세 가지가 영적 근육의 원리입니다.

 

3. 첫 번째 근육 — 오래 견디는 근육

 

신앙은 인스턴트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기도 한 번 했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 한 번 들었다고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고, 넘어지고, 다시 주님을 붙드는 과정에서 믿음의 근육이 생깁니다.

로마서 5장 3–4절은 말씀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이라는 환경을 사용하여 우리 안에 인내라는 근육을 만드십니다.

그래서 오래 믿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쉽게 흥분하지 않습니다.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칭찬받았다고 하늘을 날지도 않고, 사람에게 비난받았다고 땅속으로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으로 단련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4. 두 번째 근육 — 주를 의지하는 근육

본문은 “주를 힘입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신앙의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강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강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왜 질그릇입니까? 우리의 연약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나는 할 수 있다” 가 아닙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 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내가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시간입니다. 

 

5. 세 번째 근육 — 담대함의 근육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말하니.”  담대함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경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수라고 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학교에서 혼자 믿는다고 해서, 직장에서 혼자 신앙생활한다고 해서, 가정에서 혼자 기도한다고 해서,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는 것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6. 루스드라 —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이제 루스드라로 가겠습니다. 사도행전 14장 8절입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9절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고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놀랍습니다.

그는 먼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순서가 있습니다. 듣고 — 믿고 — 일어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7. 예배는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말씀 앞에 세우는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 자꾸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저 말씀은 우리 남편이 들어야 하는데.”

“우리 아들이 들어야 하는데.”

“우리 며느리가 들어야 하는데.”

“저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인데.”

 

그런데 그렇게 듣는 순간 말씀은 나를 통과해 버립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렇게 들으십시오.

“주님, 이 말씀이 바로 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순간 말씀이 우리 영혼을 찌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말씀은 죽은 문장이 아닙니다.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죽어 있던 믿음이 살아납니다.

절망했던 마음이 살아납니다. 기도가 살아납니다. 사명이 살아납니다.

 

8.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리고 바울이 선언합니다. 사도행전 14장 10절입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일으킵니다. 

죄 가운데 쓰러진 사람을 일으킵니다.

절망 가운데 쓰러진 사람을 일으킵니다.

실패 때문에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킵니다.

상처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었던 영혼을 살립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뼈가 움직입니다. 힘줄이 생깁니다. 살이 붙습니다. 그리고 생기가 들어갑니다.

마침내 큰 군대가 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은 마른 뼈를 군대로 만듭니다. 말씀은 앉은 사람을 걷게 합니다.

 

말씀은 죽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9. 그런데 일어난 사람에게 또 다른 시험이 찾아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합니다.

 

바나바는 제우스,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부릅니다. 

이 반응에는 당시 루스드라의 종교적·문화적 배경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갑자기 바울을 높입니다.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합니까?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에게 시선을 모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10.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실패했을 때만이 아닙니다. 성공했을 때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는 하나님을 붙듭니다. 그런데 일이 잘되면

“내가 잘해서 그렇지.”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지.”

“내가 준비를 잘해서 그렇지.”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셨다면 우리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셨다면 우리는 전달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면 우리는 섬기는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칭찬받을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우리를 높일 때 더 빨리 하나님께 무릎 꿇어야 합니다.

 

11. 신앙의 진짜 자기부인은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부인은 자기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부인은 내 삶의 중심에서 내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 영광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신으로 높이자 그들은 즉시 자기부인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12.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조금 전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돌로 칩니다. 

 

사도행전 14장 19절입니다.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조금 전까지 “신이다!” 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죽여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군중심리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를 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반응에 자신의 정체성을 걸지 않았습니다.

칭찬받을 때도 사명을 했고, 돌에 맞을 때도 사명을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13. 벌떡 일어난 바울

그리고 오늘 본문의 가장 강력한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0절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 짧은 한 절에 엄청난 영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죽은 줄 알았습니다.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돌에 맞았습니다. 성 밖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디로 갑니까?

다시 성으로 들어갑니다. “벌떡 일어나십시오.”

단순히 육체적으로 일어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실패에서 일어나십시오.

상처에서 일어나십시오.

두려움에서 일어나십시오.

사람의 평가에서 일어나십시오.

과거에서 일어나십시오.

죄책감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14. 상처가 흔적이 될 때

바울은 훗날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여기서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입니다.

 

바울의 몸에는 복음 때문에 생긴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은 바울을 멈추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흔적이 있습니다.

실패의 흔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눈물의 흔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흔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역의 흔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상처가 반드시 인생의 마지막 단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상처가 흔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15. 고난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가는 통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돌에 맞은 직후 무엇을 합니까?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사도행전 14장 22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이 말씀은 현대 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말씀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 믿으면 모든 고난이 사라진다” 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의 신앙은 고난 없는 신앙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는 신앙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1–23절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선교적 성공이 아니라, 새로 세워진 공동체를 다시 찾아가 믿음 안에 머물도록

굳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에 환난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진짜 양육입니다.

 

16. 양육이란 무엇입니까?

양육은 “예수 믿으면 잘될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양육은 “힘들어도 믿음 안에 머물러라.” 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환난이 와도 떠나지 마라.”

“사람이 떠나도 예수님을 떠나지 마라.”

“기도의 응답이 늦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라.”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말씀을 붙들어라.” 이것이 믿음의 근육입니다.

 

17. 그래서 바울은 교회마다 장로를 세웁니다

사도행전 14장 23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웁니다. 그런데 그냥 세우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는 명예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고난이 올 때 앞장서야 하는 자리입니다. 교회를 지켜야 하는 자리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을 세울 때 능력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말 잘하는 사람만 세워서도 안 됩니다.

 

세상적인 성공만 보아서도 안 됩니다. **말씀에 뿌리내린 사람, 자기 영광을 내려놓은 사람,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18. 사도행전 14장의 마지막은 “은혜”입니다

이 모든 사역을 마치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무엇을 보고합니까? 

 

자기들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7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에 복음 사역의 마지막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했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르쳤지만 하나님께서 성장시키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겼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사역자는 결국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19.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명령

오늘 말씀을 세 가지 명령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말씀을 먹으십시오.

말씀의 근육을 키우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말씀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 보십시오. 말씀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둘째, 다시 일어나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어디에 주저앉아 있습니까?

실패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상처입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입니까?

가정의 문제입니까?

사명의 포기입니까?

사람에게 받은 상처입니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루스드라의 사람에게 하셨던 그 명령처럼, 바울에게 역사했던 그 생명의 능력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일으킵니다.

셋째,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바울은 돌에 맞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다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다시 교회를 세웠습니다. 다시 일꾼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어난 사람의 목적은 일어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다시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걸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결론 — 말씀의 근육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오늘 사도행전 14장은 우리에게 네 가지를 보여줍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으십시오. 그러면 일어납니다.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다시 사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바울과 바나바는 높아졌을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낮아졌을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이 박수칠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사람이 돌을 던질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신앙이 아닙니다. 깊은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간적인 뜨거움만이 아닙니다. 오래 견디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의 칭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이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과 함께 걷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인생이 아닙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말씀의 근육을 가지고 일어나십시오.

믿음의 근육을 가지고 일어나십시오.

기도의 근육을 가지고 일어나십시오.

인내의 근육을 가지고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걸어가십시오.

상처가 있습니까? 그 상처를 예수님의 흔적으로 바꾸십시오.

고난이 있습니까? 그 고난을 믿음의 연단으로 받으십시오.

사람이 인정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로 충분하십시오.

사람이 높입니까?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리고 오늘도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왜냐하면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마른 뼈가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돌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일어납시다.

그리고 걸어갑시다.

우리의 가정으로,

우리의 직장으로,

우리의 교회로,

우리의 다음 세대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로. 

 

말씀의 근육을 가지고,

자기 영광을 내려놓고,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며,

벌떡 일어나 끝까지 걸어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도행전 14장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말씀의 근육이 생기게 하여 주옵소서.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말씀을 붙들 뿐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으켜 주옵소서.

실패 때문에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주시고,

두려움 때문에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주시고,

상처 때문에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주시고,

사람의 말 때문에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주시고, 사명의 길에서 지쳐 주저앉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 주옵소서.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믿음을 주옵소서.

사람이 칭찬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사람이 비난할 때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사람이 우리를 높일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게 하시고, 사람이 우리를 공격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상처가 예수님의 흔적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고난이 믿음의 연단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눈물이 기도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사명이 되게 하시며,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고,

전도하고,

양육하고,

제자로 세우며, 다음 세대를 믿음으로 세워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으로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게 하옵소서.

오늘도 말씀으로 일어나게 하시고,믿음으로 걷게 하시며, 사명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늘도 벌떡 일어나는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