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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칼럼] 복음에 인간의 조건을 더할 때 (사도행전 15장)

knowledgeplatform100 2026. 9. 8. 09:55

복음에 무엇을 더하고 있습니까? 은혜로 구원받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교회 (사도행전 15장)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 사도행전 15:11

 

사도행전 15장은 초대교회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왜 중요할까요?

단순히 초대교회가 한 번의 회의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만 믿으면 되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무엇인가를 더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도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전통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는 되어야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은 중요합니다.

순종도 중요합니다.

기도도 중요합니다.

봉사도 중요합니다.

헌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조건인가,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열매인가?

 

이 차이를 놓치면 복음은 은혜가 아니라 종교가 됩니다.

행위와 율법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복음의 뿌리는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복음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아무것도 더할 수 없고,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더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5장이 우리에게 주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1. 복음에 인간의 조건을 더할 때 교회가 흔들립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이 말은 상당히 그럴듯합니다. 왜냐하면 할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표지가 본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었는데, 어느 순간 할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표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무서움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예수님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순간 복음이 변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 인간의 공로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문제를 매우 강하게 다룹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 갈라디아서 2:16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행위는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거룩하게 살아야 구원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기도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봉사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이 순서를 절대로 뒤집지 마십시오. 은혜가 먼저이고 행위가 나중입니다. 복음이 뿌리이고 거룩한 삶은 열매입니다.

 

2. 베드로는 구원의 문을 다시 은혜로 엽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성경은 “많은 변론”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일어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고넬료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 사도행전 15:8–9

 

여기에서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무엇으로 마음이 깨끗해졌습니까?

 

할례가 아닙니다. 율법 준수가 아닙니다. 혈통도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느냐?”
— 사도행전 15:10

그리고 11절에서 복음의 정수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도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이방인도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목회자도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장로도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평신도도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신앙생활 오래 한 사람도 은혜로 구원받고, 처음 예수 믿는 사람도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과 오늘 처음 나온 사람의 구원의 근거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똑같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이신칭의의 핵심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근거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누구도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3. 복음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만 은혜는 방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사도행전 15장은 율법주의를 거부하지만 거룩한 삶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고보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몇 가지를 권면합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균형을 발견해야 합니다. 구원의 조건과 공동체의 거룩한 삶을 구별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 “이것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랑의 질서를 제시합니다.

특히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식탁 교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 이라기보다 복음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기 위한 공동체적 권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R.C. 스프로울도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을 설명하면서 영원한 복음의 원리와 당시의 문화적·공동체적 관습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본질에는 타협하지 말고, 비본질에서는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이것이 성숙한 교회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형식, 찬양의 스타일, 문화적인 방식, 사역의 방법, 개인의 선호와 취향까지 

모두 절대적인 진리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싸우는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복음의 본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4. “성령과 우리는” — 교회의 결정은 성령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회의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 가운데 하나가 사도행전 15장 28절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이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성령과 우리는.”

교회는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 앞에서 함께 듣고, 함께 분별하고, 함께 순종하는 공동체입니다.

 

먼저 성령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성령과 나가 아니라 성령과 우리입니다. 

 

개인의 확신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말씀 앞에 모이고, 기도하고, 논의하고, 서로의 증언을 듣고, 성경을 살피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회론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갈등이 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갈등 속에서도 성령의 통치를 받는 교회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의견 차이가 생깁니다. 그러나 의견 차이가 생겼다고 해서 반드시 분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 됨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5. 복음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놀라운 성경해석을 합니다. 아모스 9장을 인용합니다.

“그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지금 일어난 이방인들의 구원을 단순히 새로운 사건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이미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고, 그 결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오래된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민족을 품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사도행전 15장은 바로 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교회의 문턱을 넘어 열방을 향해 확장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열린 공동체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

우리와 문화가 다른 사람,

우리와 세대가 다른 사람,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6. 그런데 사도행전 15장 마지막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제 교회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겠구나.” 그런데 아닙니다.

36절 이하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문제 때문에 크게 다툽니다.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성경은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라고 기록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교회 전체가 “성령과 우리는”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사도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초대교회도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죄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바울도 부족했습니다. 

바나바도 부족했습니다.

마가도 부족했습니다.

베드로도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부족한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졌지만 복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팀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갔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갔습니다. 한 팀이 두 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족함을 승인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인간의 부족함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 자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부족함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동역과 복음의 확장을 이루어 가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7. 실패한 마가가 다시 유익한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마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는 한때 바울에게 신뢰를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나중에 골로새서 4장에서 마가를 동역자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한때 “데리고 가지 말자” 했던 사람이 나중에는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회복을 봅니다. 사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가 그 사람의 마지막 이름은 아닙니다.

 

한 번 넘어졌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실수했다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폐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다시 세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너무 빨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실패만 보고 그 사람의 내일을 결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하실 일을 우리가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게도냐로 인도하십니다

사도행전 16장으로 넘어가면 바울은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경험을 합니다.

바울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막으십니다. 그리고 드로아에서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말합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환상에서 본 사람은 남자였는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은 루디아라는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루디아는 복음을 듣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집이 복음의 거점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이 계획하지 않았던 길로 바울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바울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복음을 확장하셨습니다.

 

바울이 계획했던 아시아 선교의 길이 막히고 마게도냐로 인도되었으며,

환상 속 인물과 실제 만남의 대상이 달랐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을 막으실 때도 하나님의 뜻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이 닫히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닫힌 문이 새로운 사명의 문을 여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9.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 나는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면 충분한데

예수님 + 나의 공로를 붙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 나의 신앙 경력,

예수님 + 나의 봉사,

예수님 + 나의 직분,

예수님 + 나의 헌금,

예수님 + 나의 기도,

예수님 + 나의 경건함을

구원의 근거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둘째, 나는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하고 있습니까?

복음의 본질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취향을 복음의 본질로 만들면 안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예배 방식이 하나님의 유일한 예배 방식은 아닙니다.

내가 익숙한 교회 문화가 성경의 유일한 문화도 아닙니다.

내가 선호하는 사역 방식이 성령께서 일하시는 유일한 방법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는 굳게 서고, 사람에게는 넓어지겠습니다.”

셋째, 나는 성령께서 일하실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방법이 맞습니다.”

“내 생각이 옳습니다.”

“내가 경험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성령께서 일하실 공간을 닫아버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논쟁이 있었지만 말씀을 들었습니다.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성경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함께 결정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10.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사랑은 그 자유를 절제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 안에서 자유하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로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지 마십시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서 말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이것이 복음적 자유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내 권리를 주장하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내 권리를 내려놓을 줄 아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복음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비우는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맺는말 — “은혜로 구원받고, 사랑으로 하나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행전 15장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외부의 박해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복음에 인간의 조건을 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한데 무언가를 더합니다. 

은혜만으로 충분한데 공로를 더합니다. 

십자가만으로 충분한데 자랑을 더합니다.

그러면 복음의 자유가 사라지고 사람의 멍에가 생깁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의 말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주 예수의 은혜로.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본질에는 굳게 서되, 비본질적인 문제에서는 서로를 배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이 갈라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계획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문이 닫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져도 복음은 전진했습니다. 마가가 실패해도 다시 세워졌습니다.

바울의 길이 막혀도 마게도냐의 문이 열렸습니다. 

 

바울이 남자를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루디아를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님, 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게 하소서.”

“주님, 복음에는 타협하지 않되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대하게 하소서.”

“주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길에서도 성령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 나의 실패와 부족함까지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완벽해서 쓰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은혜받았기 때문에 쓰임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서고,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가며,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도행전 15장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 구원받았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붙들게 하옵소서.

혹시 우리의 마음속에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고 있었다면 오늘 내려놓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 경력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봉사를 자랑하지 않게 하시며,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교회가 성령과 함께 걷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복음의 본질에는 굳게 서게 하시고, 비본질적인 것에는 사랑으로 양보하게 하시며, 나와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품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닫힌 문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의 계획이 무너질 때에도 하나님의 계획은 무너지지 않음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간적인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게 하옵소서.

실패한 마가를 다시 세우셨던 하나님, 우리도 다시 일으켜 주옵소서.

 

상처받은 사람을 회복시키게 하시고,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화해하게 하시며, 복음 때문에 하나 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하옵소서.

 

오늘도 “성령과 우리는” 이라고 고백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을 통해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