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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칼럼] 막막한 곳에서도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사도행전 16장)

knowledgeplatform100 2026. 9. 9. 09:05

막막한 길에서도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사도행전 16장)

만남과 진로의 고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막막한 길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순간 가운데 하나는 고난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더 힘든 것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는 것입니다. 

길이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이 보이지 않으면 두렵습니다.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녀를 어떻게 인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결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직장을 계속해야 하는지 옮겨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내 인생을 어디에 걸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막막함입니다. 막막함은 단순히 힘든 감정이 아닙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상황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길이 계속 막힙니다.

 

아시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예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드로아까지 내려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이 막힌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길이 막혔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보내시기 위해 지금 가려는 길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보다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과 7절은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리고 7절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굉장히 이상한 장면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하려고 했습니까?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선한 계획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한 지역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한 대륙을 보십니다.

 

우리는 오늘을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보십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일어날 수많은 사람을 보십니다.

 

바울은 아시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게도냐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에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섭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내가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 승인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 앞에 내 계획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9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여러분, 계획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계획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준비하십시오.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계획했지만 제 걸음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2. 길이 막힐 때 하나님은 다른 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바울이 드로아에 있을 때 밤에 환상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6장 9절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그리고 10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은 자기 계획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여기서 원자료가 강조한 아주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말씀과 내 진로를 묶어 버리는 것.” 진로가 따로 있고 신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 선택이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교육이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에서 살고, 누구와 만나고, 무엇을 하고,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 달라” 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님,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보여 주시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3. 성령의 인도하심은 말씀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저 사람과 결혼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사업을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의 느낌을 무조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는 반드시 성경이라는 검증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성령을 “진리의 성령” 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진리를 거스르도록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대한 영적 민감성이 필요하지만, 그 인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성경을 가까이합니다. 기도합니다. 공동체의 지혜를 구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점검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를 질문합니다.

 

4.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엇을 만났습니까?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입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진리가 있습니다.

바울이 루디아를 만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루디아의 마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로 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마게도냐에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가 처음 만나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먼저 준비해 놓으신 만남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만남의 축복”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행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목적을 위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시는 섭리적 만남입니다.

루디아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집이 세례를 받았으며, 바울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5절입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그리고 이 한 사람의 집이 훗날 빌립보 교회의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은 루디아와 간수의 이야기를 서로 대응시키면서, 서로 다른 계층과 성별과 사회적 배경의 사람들이 한 복음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세상에서는 서로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만납니다.

세상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복음 때문에 한 가족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나를 채워줄까?” 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누구를 살리기를 원하시는가?” 를 묻는 것입니다.

 

5. 그런데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도행전 16장이 놀랍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게도냐에 왔습니다.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모든 것이 잘 풀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러자 주인들이 돈벌이가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고발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들어간 사람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다 →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길이 어렵다고 틀린 길이 아닙니다. 고난이 있다고 하나님의 인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는 통로가 됩니다.

 

6. 깊은 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닙니다. 몸은 매를 맞았습니다. 발에는 차꼬가 채워졌습니다.

감옥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는 무엇이 나옵니까?

원망이 아닙니다. 기도입니다. 절망이 아닙니다. 찬송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환경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환경이 좋아서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은 감옥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예배당에서만 믿음이 좋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힘은 고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26절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간수가 자결하려 하자 바울이 소리칩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여기서 복음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복음은 나만 탈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나를 살리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7. 하나님은 감옥을 열어 바울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간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장면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키셨습니다.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바울을 감옥에서 꺼내는 것” 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간수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간수가 묻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가족 중 한 사람이 믿으면 자동으로 모든 가족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32절을 보면 바울이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믿으며 세례를 받습니다. 

즉 구원은 혈통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믿음이 가정 전체에 복음의 문을 열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간수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람을 감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씻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갑니다.

음식을 대접합니다. 그리고 온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믿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주인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8. 사도행전 16장의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인생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6장을 자세히 보면 아주 놀라운 구조가 있습니다.

루디아가 있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힌 여종이 있습니다. 빌립보 간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여성입니다.

한 사람은 아무런 사회적 권리가 없는 노예입니다.

한 사람은 로마 체제의 하급 관리입니다. 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합니다.

모두가 은혜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구원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은 단순히 “바울이 유럽에 갔다”는 선교 여행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간의 모든 경계를 넘어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이야기입니다.

루디아의 집,

여종의 해방,

간수의 가정,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이 모여 빌립보 교회를 이루어갑니다.

루디아와 간수 이야기가 믿음, 세례, 가정, 환대라는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서로 평행을 이루며, 빌립보 공동체가 남녀, 종과 자유인, 유대적 배경과 이방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함께 묶는 공동체였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주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9. 진짜 위대함은 초라한 시작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보 교회는 처음부터 거대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조직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처음에는 기도하던 소수의 사람들, 루디아 한 사람, 그리고 한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작은 시작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사용하십니다. 다윗은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의 목자였습니다.

기드온은 가장 작은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도 작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내 삶이 작아 보인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작은 기도가 큰 역사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작은 순종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한 가정을 살리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의 믿음이 한 교회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10. 그러므로 막막할수록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장 실제적인 적용은 이것입니다.

막막할 때 기도하십시오.

바울도 막막했습니다.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방향을 발견했습니다.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곳에서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간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막막함은 끝이 아닙니다.

막막함은 기도를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초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하나님, 무엇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하나님, 지금 이 고난 속에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1. 그리고 끝까지 가십시오

중도에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만남이 아직 오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길이 아직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루스드라까지 갔습니다. 그곳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7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로 소개하고,

빌립보서 2장 22절에서는 그가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수고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계속 걸어가게 하셨고, 그 길 위에서 필요한 사람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그러므로 조금 늦어도 괜찮습니다. 길이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내 계획과 달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12. 하나님께서 닫으신 문도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문이 열리면 감사하지만 문이 닫히면 불평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은 우리에게 다른 믿음을 가르칩니다.

닫힌 문도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습니다.

아시아의 문이 닫혔습니다. 비두니아의 문이 닫혔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루디아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귀신에게 눌린 여종이 해방되었습니다. 간수가 구원받았습니다. 그의 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훗날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서 1장 3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한때는 막막했던 그 도시가 나중에는 바울에게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의 막막함이 내일의 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닫힌 문이 내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눈물이 내일의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 내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길을 여십니다

사도행전 16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의 길은 언제나 쉬운 길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목적지까지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바울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방향을 바꾸셨습니다. 바울은 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서는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옥 문을 여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간수를 만났습니다. 간수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집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왜 길이 막혔습니까?” 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내가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다.” 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고난이 옵니까?” 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해 누군가를 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막막합니까?” 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기도의 자리로 나오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답을 미리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모든 길을 미리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씩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막막하십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까?

누구를 만나야 할지 모르겠습니까?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길이 막혀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붙드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닫힌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문을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필요한 디모데를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여러분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게도냐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때 여러분의 인생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인생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인생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감옥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의 막막함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의 실패가 끝이 아닙니다.

오늘의 닫힌 문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찬송하십시오.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한 걸음 더 걸어가십시오.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43장 19절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우리의 눈에는 길이 없어도 하나님께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끝처럼 보여도 하나님께는 시작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막막함이지만 하나님께는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제 길을 제가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걷겠습니다.
닫힌 문 앞에서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막막할수록 기도하겠습니다.
고난 중에도 찬송하겠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만남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진로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가정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교회를 인도하시고,

마침내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막막한 길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아멘.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길을 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계획한 길이 막힐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하시고 그 닫힌 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진로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루디아처럼 마음이 열리게 하시고, 디모데처럼 신실한 동역자가 되게 하시며,
바울과 실라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기도하고 찬송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감옥을 열어 주시는 것만 구하지 말게 하시고 그 감옥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날마다 인정하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선택을 검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삶을 하나로 묶어 주옵소서.

 

오늘도 막막하지만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길이 보이지 않아도 한 걸음 순종하게 하시고,
끝까지 주님과 함께 걷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이 구원받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길을 아시며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