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칼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베뢰아 사람들 (사도행전 17장)

기적이 없어도 말씀으로 이기는 힘 (사도행전 17장 1–34절)
오늘 말씀은 “기적이 없어도 버티는 힘,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기적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병이 낫기를 원합니다. 막힌 길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자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사업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했을 때 즉시 응답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기적이 없을 때도 나는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기도했는데 상황이 그대로입니다. 예배를 드렸는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붙들었는데 고난은 계속됩니다.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때 우리의 믿음은 무엇으로 버틸 수 있습니까? 오늘 사도행전 17장은 아주 중요한 답을 줍니다.
기적이 없어도 버티는 힘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만난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
복음을 붙들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합니다.
1.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습니까?
사도행전 17장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가운데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아덴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세 도시는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복음을 들었지만 강한 저항이 있습니다. 베뢰아에서는 사람들이 말씀을 간절하게 받고 성경을 날마다 살폈습니다.
아덴에서는 지식인들과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어떤 사람은 조롱하고 어떤 사람은 더 듣겠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는 곳마다 똑같은 반응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지만 바울이 전한 말씀은 남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지나갑니다.
돈도 지나갑니다.
건강도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성공도 지나갑니다.
실패도 지나갑니다.
박수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이사야 40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것이 인생의 영원한 법칙입니다. 풀은 마릅니다. 꽃은 시듭니다. 그러나 말씀은 서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 가 아닙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뿌리내렸는가?” 입니다.
2.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붙든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절을 보면 바울은 자기 관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성경을 가지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바울의 메시지는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십자가였습니다.
부활이었습니다.
구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 전체의 중심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7절입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성경은 단순한 종교 정보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의 큰 구속사의 흐름이 있습니다.
창조가 있고, 타락이 있고, 언약이 있고, 출애굽이 있고, 왕국이 있고, 포로가 있고, 회복이 있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있습니다.
출애굽은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그림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그 모든 구원의 그림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죽음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중심은 단순히 “잘 살아봅시다.” 가 아닙니다.
“착하게 살아봅시다.” 도 아닙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도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3. 그래서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좋아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믿음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병이 나으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기적에만 묶어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믿음을 시작하게 할 수 있지만,
말씀에 뿌리내리지 않은 믿음은 기적이 지나가면 함께 흔들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씀에 뿌리내린 사람은 기적이 없어도 견딥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상황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형성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의 뿌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은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말씀을 붙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4. 데살로니가 교회의 능력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데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여기 세 가지가 나옵니다. 능력. 성령. 큰 확신. 복음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실제로 역사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입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여기서 아주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말씀은 들었다고 자동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잘 설교해도, 성도가 그것을 단순히 사람의 의견으로 들으면 그 말씀이 마음속에서 역사하기 어렵습니다.
부족한 설교자를 통해서라도 “하나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제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라고 받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살아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설교자가 유명해졌을 때가 아닙니다.
말씀이 화려해졌을 때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저를 고쳐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을 순종해야 합니까?”
이렇게 말씀 앞에 서는 순간,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5.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오직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5절에서 매우 엄격하게 말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아첨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설교자와 모든 복음 전도자에게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설교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의 인기를 구하면 복음이 흐려집니다.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면 복음의 날카로움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자기 생각을 말씀처럼 포장해서도 안 됩니다. 설교자는 자기 뜻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내 경험보다 예수님이 앞서야 합니다.
내 철학보다 예수님이 앞서야 합니다.
내 정치적 견해보다 예수님이 앞서야 합니다.
내 성공담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앞서야 합니다.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야 합니다. 오직 예수.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설교였습니다.
6. 베뢰아 사람들은 열린 마음과 분별력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베뢰아로 가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은 오늘 말씀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있습니다.
첫째는 받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검증하는 마음입니다.
말씀을 간절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지는 않았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살폈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무조건적인 감정도 위험합니다. 무조건적인 회의도 위험합니다.
성경적 신앙은 열린 마음과 깨어 있는 지성을 함께 갖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사도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확인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주된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이 성경의 전체 문맥과 일치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열정과 함께 말씀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7. 지성과 영성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통찰을 얻습니다. 진짜 영성은 지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짜 지성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뜨거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적이었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이 균형입니다.
마르틴 로이드 존스가 설교를 설명하면서 유명하게 사용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logic on fire”, 곧 “불붙은 논리”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참된 설교는 단순한 감정 자극도 아니고 차가운 지적 강의도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명료하게 이해하면서 성령께서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원리입니까?
차가운 지성만 있으면 사람이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뜨거운 감정만 있으면 사람이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기초한 지성과 성령께서 주시는 영성이 함께하면 깊이 있으면서도 뜨겁고, 뜨거우면서도 바른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조건 뜨거운 교회” 만도 아니고, “무조건 공부 많이 하는 교회” 만도 아닙니다.
말씀 때문에 뜨겁고, 말씀 때문에 깊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8. 말씀은 우리를 설득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나는 그냥 믿어.”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무지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복음의 진리 앞에 굴복시키십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아, 이것이 진리였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씀을 계속 듣고,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대로 살아보고, 기도하면서 순종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말씀이 우리에게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말씀이 내 삶의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9. 그래서 박해가 와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에서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핍박했던 사람들이 베뢰아까지 따라왔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언제나 저항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단순한 종교적 정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왕권의 문제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가 ‘주’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 주권자가 누구냐는 고백입니다.
돈이 주인이 아닙니다.
권력이 주인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의 삶을 뒤집습니다.
사도행전 17장 6절에서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복음이 세상을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 세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인간의 가치가 회복됩니다.
가정이 회복됩니다.
정직이 회복됩니다.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성에 대한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돈을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왕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10. 아덴에서 바울은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을 건드립니다
이제 바울은 아덴으로 갑니다. 아덴은 당시 지성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곳에서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화를 냈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영적으로 방황하는 현실을 보고 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철학이 있었습니다.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지식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인간의 가장 깊은 질문은 남아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나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바울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11. “알지 못하는 신”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으로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얼마나 인간적인 모습입니까?
“혹시 내가 모르는 신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리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여기에서 바울은 신앙의 출발점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잡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인생의 출발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내가 누구에게서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연에서 나온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내가 사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십니다.
내가 호흡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호흡을 주십니다.
내가 오늘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면, 내 인생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서 4장 17절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
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보고 상황을 해석하십시오.
12. 하나님은 창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어 놓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섭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섭리주이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명도 선물입니다.
시간도 선물입니다.
가족도 선물입니다.
직업도 선물입니다.
재능도 선물입니다.
물질도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소유자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인생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진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돈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공 때문에 교만하지 않습니다.
실패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바울은 결국 예수님의 부활과 심판을 선포합니다
아덴에서 바울의 설교는 창조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말한 다음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 갑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여기에 기독교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창조가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세상은 종종 기독교에서 좋은 이야기만 가져가려고 합니다.
사랑하자.
봉사하자.
용서하자.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복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죄가 있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복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합니다.
돈으로 죽음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학벌로 죽음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명예로 죽음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죽음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14. 아덴에서는 모든 사람이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어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 전도의 현실을 봅니다.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충실하게 전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삶으로 복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15. 기적이 없어도 버티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적이 없어도 버티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말씀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환경보다 말씀을 믿습니다.
사람보다 말씀을 믿습니다.
감정보다 말씀을 믿습니다.
오늘의 상황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둘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처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내 생각을 바꾸고, 말씀이 내 습관을 바꾸고, 말씀이 내 가치관을 바꾸고, 말씀이 내 인생을 바꿉니다.
셋째, 베뢰아 사람처럼 말씀을 날마다 살피는 사람입니다.
한 번 은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성경을 봅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합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합니다.
시편 1편 2절의 사람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넷째, 고난을 복음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행전에서 고난은 복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빌립보의 감옥도 복음의 통로였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박해도 복음의 통로였습니다.
베뢰아의 추격도 복음의 통로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을 만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에서 끝나지 말고, “하나님, 이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고 계십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16.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보다 뿌리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뿌리입니다.
나무가 바람을 이기는 것은 가지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뿌리가 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고난을 견디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없어서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어도 말씀의 뿌리가 깊기 때문에 견딥니다. 폭풍이 오면 뿌리가 드러납니다.
고난이 오면 믿음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실패하면 믿음의 뿌리가 드러납니다. 질병이 오면 믿음의 뿌리가 드러납니다.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믿음의 뿌리가 드러납니다. 그때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라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17. 마지막으로 우리 인생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은 후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집이 남습니까?
자동차가 남습니까?
통장이 남습니까?
명예가 남습니까?
사람들의 칭찬이 남습니까?
언젠가는 다 지나갑니다. 이사야 40장 8절처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 인생에 말씀을 남기겠습니다.”
내 자녀에게 말씀을 남기십시오.
내 가정에 말씀을 남기십시오.
내 교회에 말씀을 남기십시오.
내 직장에 말씀의 정신을 남기십시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의 흔적을 남기십시오.
내가 떠난 자리에 “그 사람이 참 성공했다.” 라는 말보다 “그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 라는 흔적이 남게 하십시오.
그것이 영원히 남는 인생입니다.
결론 — 기적이 없어도 버티는 힘
오늘 사도행전 17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기적이 없어도 버티는 힘은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이 있었습니다.
베뢰아에서도 핍박이 따라왔습니다.
아덴에서도 조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믿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죽음을 이겼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기다리는 믿음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십시오.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 되십시오.
응답이 없어도 말씀을 붙드십시오.
문이 닫혀도 말씀을 붙드십시오.
사람이 떠나도 말씀을 붙드십시오.
건강이 흔들려도 말씀을 붙드십시오.
경제가 흔들려도 말씀을 붙드십시오.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말씀을 붙드십시오.
왜냐하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말씀 하나를 깊이 새기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를 붙드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가 나를 구원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누가 지금 나를 붙들고 계시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적이 없어도 됩니다.
상황이 흔들려도 됩니다.
세상이 변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