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재정원칙 제3장 2편] 하나님은 왜 당신의 백성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가? 복 받은 형통한 인생이란?

하나님은 왜 당신의 백성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가?
형통의 목적은 축적이 아니라 흘려보냄이다
본문: 신명기 8:18, 시편 1:1-3, 마태복음 6:19-24, 고린도후서 8:9, 9:8-11
1.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할 질문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깊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백성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가?”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까 복을 주시는 것이겠지.” 맞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를 돌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9절부터 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때로는 물질로 공급하시고,
때로는 사람을 통해 공급하시고,
때로는 기회를 통해 공급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필요를 줄이심으로 공급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이 기도는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주시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돈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사업의 기회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과 건강과 지혜와 인맥과 시간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에게 머물러 있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흘러가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형통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사용하느냐” 에 더 가깝습니다.
2. 먼저 ‘형통’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형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형통을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잘 먹고 잘사는 것” 으로 정의한다면 성경의 형통을 지나치게 축소하게 됩니다.
형통에는 영적·심적·환경적·재정적 영역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돈과 동일시하는 데에는 신학적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에서 형통은 훨씬 넓습니다.
시편 1편 3절을 보십시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런데 시편 1편의 형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사람입니까? 사업이 확장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즉 성경적 형통의 출발점은 경제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돈이 많다고 반드시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돈이 적다고 반드시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풍부할 때도 있었고 궁핍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말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이것이 성경적 형통입니다.
풍부할 때 하나님을 잃지 않는 것. 궁핍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 많을 때 교만하지 않는 것. 적을 때 절망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형통은 환경의 크기보다 하나님 안에서의 영혼의 방향입니다.
3. 하나님은 복의 공급자이십니다
형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형통을 통하여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한 방향입니다.
우리는 돈을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공급을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공급을 통해 공급자를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쓸 것”보다 먼저 나오는 말입니다. “나의 하나님.”
바울은 돈이 공급자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공급자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공급자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공급자이십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질문이 바뀝니다.
“하나님, 얼마를 주실 겁니까?” 에서 “하나님,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기 원하십니까?” 로 바뀝니다.
“얼마나 더 벌 수 있습니까?” 에서 “얼마나 충성되게 관리할 수 있습니까?” 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 사람에게는 더 많이 주셨습니까?” 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은 무엇입니까?” 로 바뀝니다.
이것이 소유자의 신앙에서 청지기의 신앙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4.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시편 24편 1절은 선언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 말씀 앞에서 “내 것”이라는 개념은 상대화됩니다.
내 집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직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사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재능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시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건강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내 능력으로 벌었다”고 말하는 그 능력조차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단순히 재물을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얻을 능력 자체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경제관은 소유권의 신학이 아니라 청지기직의 신학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능과 자원을 하나님의 위탁물로 이해합니다.
그는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도록 맡겨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소유자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재정관의 출발점입니다.
5. 그러나 형통에는 아주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 형통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형통 자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면 돈이 목적이 되고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역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말씀하신 문제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돈 자체를 악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돈이 주인이 되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돈은 좋은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종이면 우리가 돈을 사용합니다.
돈이 주인이 되면 돈이 우리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돈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돈이 나를 소유하고 있는가?”
6. 맘몬은 돈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입니다
많은 사람이 맘몬을 “돈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맘몬의 문제는 돈의 양이 아니라 돈에 대한 마음의 지배입니다.
100만 원을 가진 사람도 돈의 노예가 될 수 있고,
100억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로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100억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100만 원을 가진 사람이 돈을 우상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얼마를 가지고 있느냐?” 가 아니라 “누가 내 마음의 주인인가?” 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기부인을 설명하면서 인간에게는 부와 명예를 끊임없이 축적하려는 욕망과 가난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풍부함과 궁핍 어느 쪽에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돈이 내 마음에서 얼마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7. 성경은 부를 악이라고 하지 않지만 부를 신뢰하는 것을 경고합니다
이 균형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물질을 악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적 필요도 돌보십니다. 일의 열매도 선한 것입니다. 정당하게 얻은 재산도 선한 것입니다.
저축도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사업도 하나님의 일반은총 안에서 선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부에 대한 매우 강력한 경고를 줍니다. 디모데전서 6장 9-10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그리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중요한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 격언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손에 있어야지 마음의 왕좌에 있어서는 안 된다.”
8. ‘얼마면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500이면 충분합니까? 700이면 충분합니까? 1,000이면 충분합니까? 1,100을 벌었을 때 그 100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 질문은 재정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영성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충분함의 기준이 없으면 욕망은 계속 커지기 때문입니다.
100을 벌면 120을 원합니다. 500을 벌면 700을 원합니다. 700을 벌면 1,000을 원합니다. 1,000을 벌면 1,500을 원합니다.
그리고 결국 “얼마면 충분합니까?”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됩니다. 잠언 30장 8-9절에서 아굴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왜 이런 기도를 했습니까? 부유함이 하나님을 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대단히 성숙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무조건 많이 주세요.” 가 아닙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잃지 않을 만큼 주십시오.” 입니다.
9. 칼빈의 ‘절제’는 가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칼빈의 재정관이 매우 중요합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0장에서 현세의 재화를 사용하는 방법을 다룹니다.
그는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합니다.
하나는 금욕주의적 극단입니다. “물질은 나쁘다. 좋은 것을 누리면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육체적 방종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마음껏 누리자.”
칼빈은 이 둘 사이에서 절제와 감사와 청지기직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피조물의 좋은 것을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이 사치와 허영과 탐욕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되,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그리고 풍부함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절제를 요구하고, 궁핍한 사람에게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는 풍부함과 가난 어느 한쪽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10. ‘다친 원’은 성경적 자족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원문에서 말하는 ‘다친 원’, 곧 우리 가정의 재정적 경계를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얼마가 필요합니까?
의무적으로 지출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이상의 소득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소득이 늘어날 때마다 소비도 함께 늘어나면, 우리는 평생 충분함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득이 늘어나면 집을 넓히고, 차를 바꾸고, 여행을 늘리고, 소비 수준을 높이고, 생활수준을 높이고, 다시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수준의 인플레이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원의 크기”를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재정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의 바깥으로 들어오는 것은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을 더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흘려보낼 것인가?”
11. 형통은 염려를 없애기도 하지만 염려를 만들기도 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서 염려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염려합니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 살지?” 걱정합니다.
돈이 많으면 “이 돈을 어떻게 지키지?” 걱정합니다.
돈이 없으면 “더 벌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고,
돈이 많으면 “잃으면 어떡하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형통하면 염려가 사라진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형통이 염려를 더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형통이 염려에서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실제로는 형통 때문에 염려가 늘어날 수 있다는 긴장을 제기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돈이 많아지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옵니다.
12. 바울은 풍부와 궁핍을 모두 배웠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13절을 다시 보십시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그리고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마지막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은 흔히 성공의 구호처럼 사용되지만 문맥에서는 풍부와 궁핍을 모두 통과하는 능력입니다.
바울에게 능력은 “무엇이든 성공시키는 능력” 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그리스도를 붙드는 능력” 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형통입니다.
13. 형통의 목적은 ‘흘려보냄’입니다
이제 오늘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고린도후서 9장 8절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넘치게 주시는 목적은 내가 더 많이 쌓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넘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은 저수지의 복이 아니라 수로의 복입니다.
저수지는 물을 저장합니다. 수로는 물을 흘려보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14. 칼빈의 청지기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납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와 자원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도록 맡겨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신자가 가진 것이 하나님의 “신적 위탁물”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그것을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며 결국 청지기로서 결산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관점입니다.
내 돈을 가지고 “이것은 내 것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한다.” 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이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지기 정신은 헌금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월급을 받을 때도 필요합니다.
돈을 소비할 때도 필요합니다.
저축할 때도 필요합니다.
투자할 때도 필요합니다.
사업할 때도 필요합니다.
부동산을 살 때도 필요합니다.
자녀에게 물려줄 때도 필요합니다.
모든 재정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 행위입니다.
15. 돈이 많아야 관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넘어야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입니다.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놀랍습니다. 극심한 가난인데 풍성하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관대함은 단순히 소득의 크기에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정적 여유가 있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대함의 출발점은 돈이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셨습니다. 금액은 작았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컸습니다. 그러므로
“관대함의 크기는 금액만으로 측정할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16. 그러나 이것을 또 다른 율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가난한데도 많이 드려야 진짜 믿음이다.” 이렇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더 많이 헌금하면 더 큰 복을 받는다.” 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헌금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고린도후서 9장 7절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성경적 헌금은 강요가 아니라 자원함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거래가 아니라 예배입니다. 공로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돈을 사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고백하는 예배입니다.”
17. 하나님께 더 달라고 기도할 때 반드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더 많이 벌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그 기도 뒤에는 반드시 이것이 따라와야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이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제 사업을 확장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확장된 사업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살리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수입을 늘려 주십시오.” 그리고 “수입이 늘어날수록 탐욕은 줄어들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재정적으로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형통해도 하나님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성숙한 기도입니다.
18. 헌금이 많아지는 것보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핵심은 단순히 “몇 퍼센트를 드리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기쁨으로 나누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나 헌금에 관한 논의를 하더라도 “얼마가 최소인가?” 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내 마음이 하나님께 열려 있는가?” 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마음이 돈에 묶여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형편에서 정성껏 드리면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액수만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19. 재물은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 재정이 필요합니다.
선교사에게 후원이 필요합니다.
교회 개척에 재정이 필요합니다.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데 재정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재정이 필요합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을 돕는 데 재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돈은 중요하지 않다.” 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돈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의 신앙적 오만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복음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돈으로 구매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은 선교의 주인이 아니라 선교의 도구입니다.
20. 하나님 나라의 경제는 ‘주는 경제’입니다
세상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내가 얼마나 가질 수 있는가?” 를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경제는 “내가 받은 것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를 묻습니다.
세상은 “축적하라.” 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더 많이 가지면 안전하다.” 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에 기독교 재정관의 핵심이 있습니다. 생명은 소유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21. 어리석은 부자의 문제는 부자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를 보십시오.
그 사람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농사가 잘되었습니다. 소출이 많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그는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는 계속해서 “내가” 가 나옵니다.
내 곡간.
내 곡식.
내 재산.
내 영혼.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문제는 곡식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하나님인데 자기가 주인이라고 착각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맘몬의 본질입니다.
22. 그러므로 재정은 영성의 거울입니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우리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돈을 어디에 쓰는가?
무엇을 위해 저축하는가?
무엇을 위해 소비하는가?
얼마나 나누는가?
돈을 잃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돈이 많아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것을 보면 우리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돈의 문제는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23. 그러므로 저축은 하되, 저축을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성경은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가르칩니다. 잠언은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우라고 합니다.
요셉은 풍년 때 흉년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축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보험을 드는 것도 무조건 불신앙이 아닙니다.
사업을 확장하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순간입니다.
저축은 안전을 준비할 수 있지만, 구원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보험은 위험을 분산할 수 있지만, 미래를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돈은 선택지를 늘릴 수 있지만,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하되 의지하지 않고, 저축하되 집착하지 않고, 소유하되 지배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24. 칼빈의 ‘현세의 재화 사용’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0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현세의 좋은 것들을 지나치게 거부하는 것도 옳지 않고, 반대로 그것에 빠져 방종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화를 감사함으로 누리되 절제·검소·자족·사랑의 원리 아래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을 살 수 있는가?” 보다 먼저 “이것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재정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것인가?”
를 물어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을 살 수 있는가?” 가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반드시 가져야 하는가?” 를 물어야 합니다.
“더 벌 수 있는가?” 가 아니라 “더 벌어야 하는가?” 를 물어야 합니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 가 아니라 “더 많이 가진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재정 지혜입니다.
25. 가난도 형통도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만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유함도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가난할 때는 “하나님, 왜 나에게 이것을 주셨습니까?” 라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부유할 때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30장의 아굴은 가난도, 부도, 둘 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것이 균형입니다.
칼빈 역시 풍부함에서는 절제를, 궁핍에서는 인내를 배우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집착하지도 말고, 가난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도 말며, 하나님께서 주신 처지에서 부르심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 아니고, 부유한 사람은 자동으로 성공한 사람도 아닙니다.**
26. 물질적 형통을 영적 형통의 척도로 삼지 마십시오
이 부분은 오늘날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신앙이 “믿으면 부자가 된다.”
“헌금하면 더 많은 돈이 돌아온다.”
“성공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라고 가르친다면 반드시 성경 전체와 대조해야 합니다.
로잔 신학위원회도 번영복음에 관한 성명에서 물질적 복의 성경적 측면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영적 복을 물질적 복으로 측정하거나 부를 항상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로 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가난이나 질병을 항상 저주나 믿음 부족의 증거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균형이 필요합니다. 물질을 부정하지 않되 물질을 우상화하지 않는 것. 이것이 성경적 균형입니다.
27. 헌금을 하나님과 거래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씨를 뿌리면 반드시 더 큰 돈을 거둔다.” 라는 식의 기계적인 공식은 복음의 은혜를 시장의 거래 원리로 바꿀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심고 거두는 원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하나님께 돈을 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많은 돈으로 갚으셔야 한다.”
라는 공식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투자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28. 복음의 가장 깊은 경제학은 십자가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오늘 본문의 절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기를 내어주셨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적 풍요의 비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해진 사람은 자신만 부요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기독교 재정관의 중심입니다.
십자가는 “얼마나 더 받을까?” 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를 묻게 합니다.
29. 가장 위대한 형통은 ‘복을 받은 사람’에서 ‘복이 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서 핵심은 마지막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복을 가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의 구조입니다. 하나님 → 나 → 이웃 → 세상
복이 하나님에게서 나에게 왔다면, 그 복은 나에게서 다시 세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는 것보다 더 큰 복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30. 우리의 재정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이제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져봅시다.
나의 돈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나의 돈이 오직 나의 편안함으로만 흘러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족을 살리고, 자녀를 세우고, 교회를 섬기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선교를 지원하고, 다음 세대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까?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금액을 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동일합니다. 우리 모두는 청지기입니다.
적게 맡은 사람도 청지기이고,
많이 맡은 사람도 청지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충성입니다.
31. 하나님은 ‘얼마를 맡겼느냐’보다 ‘어떻게 사용했느냐’를 보십니다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서로 다른 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칭찬은 동일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왜입니까?
주인은 “왜 너는 다섯 달란트를 받지 못했느냐?”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각자 맡겨진 것에 대한 충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남보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얼마나 충성되게 사용했느냐입니다.
32. 그러므로 형통을 소망하되 형통을 숭배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오늘 말씀을 가장 짧게 요약한 표현입니다.
형통을 소망하십시오. 그러나 형통을 숭배하지 마십시오.
재정적 안정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재정적 안정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마십시오.
사업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사업의 성장이 신앙의 성공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더 많이 벌기를 원하십시오. 그러나 더 많이 버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고 해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더 많이 벌었다면 물으십시오. “하나님, 이제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기 원하십니까?”
33.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할 다섯 가지 질문
이제 오늘 말씀을 실제적인 삶으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첫째, 나의 ‘충분함’은 얼마입니까?
우리 가정의 기본적인 필요를 정리하십시오. 의무적인 지출, 필요한 지출, 원하는 지출을 구별하십시오.
둘째, 수입이 늘어나면 소비도 자동으로 늘어납니까?
소득이 10% 늘었을 때 소비도 10% 늘어납니까? 아니면 나눔도 함께 늘어납니까?
셋째, 내가 가진 돈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높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돈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을 덜 찾게 됩니까?
넷째, 나의 재정은 누구에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나에게만 머무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족, 교회, 이웃, 가난한 자, 선교, 다음 세대에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다섯째, 내가 가진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붙들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합니다. 돈을 잃는 것은 큰 손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손실입니다.
34.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형통은 무엇입니까?
이제 오늘의 질문에 답해봅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형통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넷째, 필요한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다섯째, 가진 것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충성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가난한 자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받은 것을 기쁨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아홉째,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열째,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형통입니다.
35. 결론 — 형통의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백성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복을 주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기 때문에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 안에 갇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흘러가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벌되 돈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부를 누리되 부를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저축하되 저축을 구원자로 만들지 마십시오.
사업하되 사업을 정체성으로 삼지 마십시오.
성공하되 성공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헌금하되 하나님과 거래하지 마십시오.
나누되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받은 복보다 복을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네 문장을 기억하십시오.
첫째, 하나님은 복의 공급자이십니다.
둘째, 나는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셋째, 형통은 축적의 목적이 아니라 섬김의 기회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복은 나에게 머무르지 않고 나를 통하여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기도를 이렇게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많이 주세요.” 이 기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하나님, 많이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형통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형통해도 하나님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부요함 속에서도 자족하게 하시고, 넘치는 것을 기쁨으로 흘려보내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복음적 형통입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때를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돈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시간도 주님의 것이며,
우리의 직업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사업도 주님의 것이며,
우리의 재능도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미래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로 살게 하옵소서.
돈이 많아질 때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돈이 적어질 때 절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풍부할 때 자족하게 하시고, 궁핍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맘몬에게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허락하시되, 우리에게 “얼마가 충분한가”를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의 소비에 절제를 주시고,
우리의 저축에 지혜를 주시며,
우리의 투자에 정직을 주시고,
우리의 사업에 공의를 주시며,
우리의 헌금에 기쁨을 주시고,
우리의 나눔에 사랑을 더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재정이 우리에게만 머무르지 않게 하옵소서.
가난한 자에게 흘러가게 하시고,
상처받은 자에게 흘러가게 하시며,
선교지에 흘러가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흘러가게 하시며,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 흘러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하게 하옵소서.
돈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돈이 우리의 안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심을.
돈이 우리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우리의 정체성임을.
주님,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그 복이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게 하시고, 형통을 주시되 그 형통이 우상이 되지 않게 하시며,
재물을 주시되 그 재물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복을 받은 사람을 넘어 복이 되는 사람,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사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충성된 청지기,
그리스도의 사랑을 물질과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충성했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주님, 주님의 것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을 통해
가정이 복을 받고,
교회가 세워지고,
이웃이 살아나며,
선교가 확장되고,
다음 세대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복이 우리에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흘러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