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칼럼] 교회는 세상의 차별이 멈추는 곳,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교회의 거룩입니다.(야고보서 2장)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
야고보서 2장이 보여주는 살아 있는 믿음의 사람
야고보서 2장은 아주 불편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당신의 믿음은 정말 살아 있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교회에 다닙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합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찬양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묻습니다.
“그 믿음이 당신의 사람을 대하는 방식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내가 돈이 많은 사람을 대할 때와 돈이 없는 사람을 대할 때 태도가 다르다면 어떻습니까?
힘 있는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힘없는 사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어떻습니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는 먼저 인사하면서, 외롭고 가난하고 상처 입은 사람은 외면한다면 어떻습니까?
말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을 능력과 재산과 지위로 평가한다면 어떻습니까?
야고보는 그것을 단순한 성격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연결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삶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의 핵심을 “믿음은 관계”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신념은 혼자 가질 수 있지만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 관계는 결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단순한 인간적 친절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1. 교회는 세상의 차별이 멈추는 곳이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은 교회 안에 두 사람이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은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두 사람을 다르게 대합니다. 부자에게는 말합니다.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말합니다.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든지 하라.”
야고보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4절입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져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많으면 좋은 자리를 얻습니다. 권력이 있으면 목소리가 커집니다. 유명하면 사람들이 먼저 다가옵니다.
성공하면 사람들이 주변에 모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새로운 질서를 선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외적인 조건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고 사도행전 10장 34절에서 베드로는 깨닫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도 사람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는 것. 이것이 교회의 거룩입니다.
2. 차별의 첫 번째 이유 —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람을 차별합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부자에게 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사람에게 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사람에게 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으면 나도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의 뿌리에는 이것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이것이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질문을 바꿉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입니다.
시편 146편 3절은 말씀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예레미야 17장 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사람을 의지하면 사람의 가치가 나에게 주는 이익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람이 달라 보입니다.
부자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입니다.
성공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실패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
유능한 사람도,
연약한 사람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3. 다윗에게 붙여 주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무엘상 22장을 보면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환난당한 사람, 빚진 사람, 마음에 원통함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윗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담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다윗에게 붙여 주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맡기시기 전에 약한 사람을 품는 마음을 훈련시키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강한 사람만 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대가를 줄 수 없는 사람을 품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마태복음 5:46
그리고 누가복음 14장 13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왜 입니까?
복음은 보상받을 수 없는 사랑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4. 차별의 두 번째 이유 —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여기서 야고보는 놀라운 가치 전환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돈이 많으면 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무엇이 진짜 부요함인가?”
돈이 많아도 믿음이 없으면 가난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아도 마음이 공허할 수 있습니다.
명예가 많아도 영혼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부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더 받아야 만족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의 작은 차이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할 이유가 있습니까?
5.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감사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없는 것을 바라봅니다. 열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 없는 것을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받은 것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영성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시선을 바꿉니다.
없는 것을 바라보면 사람을 경쟁자로 보게 됩니다.
있는 것을 바라보면 사람을 이웃으로 보게 됩니다.
없는 것을 바라보면 비교합니다.
있는 것을 바라보면 감사합니다.
비교는 차별을 만들어냅니다.
감사는 사랑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러분, 감사는 차별을 치료하는 영적 약입니다.
내가 이미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알면 다른 사람을 내려다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모든 인간은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6. 차별의 세 번째 이유 — 내가 긍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은 오늘 말씀의 절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중심을 만납니다. 나는 긍휼로 구원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과 5절은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충분히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디도서 3장 5절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그렇다면 긍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7. 긍휼은 단순히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안됐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과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기서 야고보가 공격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닙니다. 가짜 믿음입니다.
말만 믿음이라고 부르는 믿음입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입니다.
긍휼이 없는 믿음입니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8.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원수가 아니라 뿌리와 열매입니다
야고보서 2장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통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을 서로 싸우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나무의 뿌리와 열매를 생각해 보십시오. 뿌리가 살아 있으면 열매가 나옵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뿌리와 열매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관계”이고, 그 믿음은 행함과 연결되어 있으며, 믿음과 행함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연결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마태복음 7:16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로 아나니.” — 누가복음 6:44
그러므로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이 둘을 혼동하면 복음이 무너집니다.
9.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야고보서 2장의 가장 어려운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야고보서 2장 24절입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에베소서 2장 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로마서 3장 28절도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렇다면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모순됩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공격하는 것은 “내가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라는 인간의 자기 의입니다.
반면 야고보가 공격하는 것은 “나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라는 죽은 믿음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학문적 연구에서도 바울과 야고보의 칭의 언어가 서로 모순되기보다 서로 다른 문맥과 문제를 다룬다는 해석이 제시됩니다.
10. 칼빈도 이 문제를 같은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 문제를 매우 정교하게 설명합니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근거를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에 둡니다.
그러면서도 참된 믿음이 선행과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칼빈은 야고보서의 “의롭다 하심”을 바울이 말하는 칭의의 근거를 뒤집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참된 믿음이 실제 삶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맥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믿음은 행위로 나타납니다.
행위가 구원의 뿌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행위는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 대 행위” 라는 싸움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믿음인가, 죽은 믿음인가?” 를 묻습니다.
11.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지식만 많다고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아는 것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진짜 믿음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삶을 바꿉니다.
로마서 10장 9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한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정보가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12.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움직입니다
원문의 표현을 빌리면, 믿음은 일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은 역사합니다. 사랑은 수고합니다. 소망은 인내합니다. 즉,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납니다.
진짜 믿음은 움직입니다.
진짜 사랑은 수고합니다.
진짜 소망은 기다립니다.
진짜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13. 아브라함 — 믿음이 순종으로 증명된 사람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기서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장에서는 창세기 22장의 사건을 가져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사건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은 말합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행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시험과 순종을 통하여 실제적인 믿음으로 드러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행위가 믿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믿음이 행위를 만들어냈습니다.
14. 라합 — 믿음이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또 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라합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아브라함과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행동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여호수아 2장 11절에서 라합은 고백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 믿음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정탐꾼을 숨겨 줍니다. 그리고 다른 길로 도망하게 합니다.
즉, 고백이 행동이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5절은 이것을 믿음의 행함으로 설명합니다.
라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믿음은 입술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선택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용기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 되었습니다.
15.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서 야고보서 2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뒤에서는 믿음과 행함이 하나라고 합니다. 이 둘은 사실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사람의 가치를 하나님에게서 보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약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세상의 경제적 가치와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상처 입은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품습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상처 입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16.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곳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교회에 왜 옵니까?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장소인데, 교회의 사람들이 오히려 복음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와 회복과 생명을 얻는 곳인데, 성도들의 차별과 판단이 오히려 그 만남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막는 사람인가?”
내 말 때문에 누군가가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습니까?
내 판단 때문에 누군가가 마음을 닫지는 않았습니까?
내 차별 때문에 누군가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이 질문 앞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17.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되십시오
물론 여기서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를 포기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성경적 사랑은 진리를 버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라고 말합니다.
진리와 사랑이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잘못을 바로잡되 사람의 존엄을 파괴하지 않아야 합니다. 훈계하되 회복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말씀합니다.
“어떤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바로잡되 온유하게. 진리를 말하되 사랑으로.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18. 긍휼은 사람을 다시 일으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말 한마디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긍휼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12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여러분의 혀가 양약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말이 상처가 아니라 치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표정이 거절이 아니라 환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아직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라고 느끼게 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19.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흘려보냅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샘에서 물이 나오면 흘러갑니다.
생명이 있으면 움직입니다.
은혜가 있으면 흘러갑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합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합니다.
긍휼을 받은 사람은 긍휼을 베풉니다. 이것이 복음의 열매입니다.
20. 그래서 야고보서 2장은 결국 우리에게 한 가지를 묻습니다
“네 믿음은 살아 있느냐?” 교회에 오래 다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를 얼마나 오래 했느냐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삶에서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입니다.
내 믿음이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더 감사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더 긍휼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더 오래 참게 만들고 있습니까?
더 용서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더 약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게 만들고 있습니까?
더 사람을 차별하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21. 세 가지 질문으로 오늘 말씀을 정리합시다
첫째, 나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 유명한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특별히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 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가 가진 것보다 없는 것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받은 은혜, 하나님의 자녀 된 은혜, 십자가의 은혜,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셋째, 나는 긍휼로 구원받은 사람답게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 있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고 있습니까?
22. 진짜 믿음은 사람을 살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이미 충분히 사람을 평가합니다.
얼마나 돈이 있는지 평가합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평가합니다.
어느 직장에 다니는지 평가합니다.
얼마나 성공했는지 평가합니다.
얼마나 유명한지 평가합니다.
얼마나 예쁜지 평가합니다.
얼마나 건강한지 평가합니다.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평가합니다.
그런데 교회까지 똑같이 사람을 평가한다면, 세상과 교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외로운 사람이 가족을 발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죄인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곳이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곳이어야 합니다.
부자가 자신의 돈을 자랑하지 않는 곳이어야 합니다.
젊은 사람이 늙은이를 존중하고, 늙은 사람이 젊은이를 품어 주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세워 주고,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곳이 교회입니다.
23.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리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죄인들과 식사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정죄하는 군중 앞에서 그녀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품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24. 결론 — 믿음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사랑으로 사람에게 연결됩니다
오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그 관계에서 나온 믿음은 반드시 사랑과 긍휼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행함과 연결됩니다.
또한 참된 믿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풉니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믿음은 죽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을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의 손과 발과 말과 표정과 선택을 통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부자를 만나도 같은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을 만나도 같은 사랑으로,
강한 사람을 만나도 겸손하게,
약한 사람을 만나도 따뜻하게,
성공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실패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며,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가까이 다가가고,
넘어진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만났을 때
“저 사람은 나를 평가하지 않는구나.”
“저 사람은 나를 이용하려 하지 않는구나.”
“저 사람은 나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구나.”
“저 사람은 나의 아픔을 이해하려 하는구나.”
그리고 마침내 “저 사람을 보니 예수님이 생각나는구나.” 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 2장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받은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긍휼로 구원받았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 교회는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교회가 되고,
우리 가정은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가정이 되고,
우리의 직장은 누구도 함부로 평가받지 않는 공간이 되고,
우리 자신은 누구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그리스도인, 더 정확하게는 사람을 살리고, 세우고, 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마치는 기도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야고보서 2장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주님,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했습니다.
외모를 보았습니다.
돈을 보았습니다.
학벌을 보았습니다.
직업을 보았습니다.
사회적 지위를 보았습니다.
힘과 영향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가고,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무관심했습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차별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옵소서.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붙들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시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죄인이었을 때, 연약했을 때, 하나님을 떠나 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 은혜를 잊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긍휼로 구원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상처받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게 하시고,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넘어진 사람의 손을 잡게 하시고, 실패한 사람을 다시 일으키게 하시고,
가난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하시며, 약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말이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람을 살리는 양약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이 사람의 약점을 찾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눈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손이 움켜쥐는 손이 아니라 나누는 손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발이 높은 곳만 찾아가는 발 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발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입술로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 믿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지식으로만 머무는 믿음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말로만 사랑하는 믿음이 아니라 수고하는 사랑이 되게 하옵소서.
기다린다고 말만 하는 믿음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는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시고, 라합처럼 믿음으로 용기를 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지 않게 하시고, 뿌리와 열매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깊이 연결된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 연결된 생명이 사람에게 사랑으로 흘러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를 만나는 사람이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위로받게 하시고,
정죄받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게 하시며,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환영받게 하시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소망을 품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가정에서 누구도 불편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교회에서 누구도 불편하지 않게 하시며,
우리의 일터에서 누구도 함부로 판단받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나를 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통해 예수님을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업적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나타났는지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사랑하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긍휼히 여기게 하시고, 섬기게 하시고, 낮아지게 하시고, 끝까지 믿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이 행동하게 하시며, 우리의 삶이 복음의 증거가 되게 하옵소서.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 말씀처럼
심판보다 긍휼을,
정죄보다 회복을,
차별보다 사랑을,
교만보다 겸손을,
자기 의보다 십자가의 은혜를 선택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있는 곳마다 사람이 살아나고,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따뜻해지고, 상처 입은 영혼이 다시 일어나며,
세상이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뿌리내리고,
우리의 삶에는 사랑의 열매가 맺히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누구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