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칼럼] 기도는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20절)

고난의 때에는 기도하십시오
야고보는 순서를 바꿉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기도는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첫 번째 반응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태어난 환경도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도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시대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건강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직장의 상황도, 경제적 상황도, 인간관계도, 때로는 가족의 문제도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어떤 사람은 질병과 함께 인생을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만 어떤 사람은 상처와 결핍 속에서 자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환경이 결정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인간의 삶이 환경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환경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에게 환경은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노예로 팔렸습니다. 애굽의 보디발 집에서 종이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환경이 요셉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요셉을 결정했습니다.
요셉은 구덩이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했고, 종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했고, 감옥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환경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1. 환경을 지배한다는 것은 환경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신학적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환경을 지배하는 믿음”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마치 믿음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조종하는 힘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명령하는 주문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바꾸는 기술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아래 복종시키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
여기에 참된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지배하는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환경이 바뀌었다”는 뜻만이 아니라, 환경이 나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질병이 와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실패가 와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억울함이 와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 인생을 소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쁨이 와도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성공해도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경을 지배하는 믿음입니다.
2. 야고보서 5장 13절 — 고난의 때에는 기도하십시오
야고보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이 말씀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우리가 놓치기 쉽습니다.
고난이 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고난이 있으면 먼저 사람을 원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상황을 분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책임인지 찾아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복수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라.” 이것이 야고보의 첫 번째 처방입니다.
고난 앞에서 기도가 사라지면 사람은 쉽게 원망과 불평에 끌려갑니다. 반대로 고난을 기도로 가져가는 순간, 환경이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민수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갑니다. 광야는 쉬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부족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래도 불확실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표적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원망입니다. 불평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 사건을 신약교회에 경고로 사용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 고린도전서 10:10
왜 원망이 위험합니까? 원망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고린도전서 10:12
환경이 힘들다고 해서 믿음이 자동으로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우리를 빚어갑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왜입니까? 시험 자체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고난은 믿음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3. 고난이 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사람에게 갑니다.
전화합니다. 검색합니다. 분석합니다. 걱정합니다. 잠을 못 잡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순서를 바꿉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기도는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첫 번째 반응입니다.
물론 병이 나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약이 필요하면 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의사를 통해 치료받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반은총의 한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냐 병원이냐”를 경쟁시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병원에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치료받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의사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약을 복용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수술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도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최종적인 신뢰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의사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약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죽음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시편 121:2
4. 고난 중에 기도하면 환경보다 하나님이 더 크게 보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사도행전 16장에서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억울했습니다. 그들이 범죄한 것이 아닙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자유롭게 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여종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이 사라지자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6장 25절은 놀라운 장면을 기록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한밤중”입니다. 낮이 아닙니다. 문제가 해결된 뒤가 아닙니다. 감옥 문이 열린 뒤가 아닙니다.
상황이 좋아진 뒤가 아닙니다. 아직 감옥 안에 있을 때입니다.
그들은 환경이 변하기 전에 먼저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옥문이 열립니다. 차꼬가 풀립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간수의 영혼이 열린 것입니다. 간수가 묻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바울과 실라가 대답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여러분, 기도는 환경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사람을 바꿉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감옥을 여십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기적은 감옥을 연 사람이 아니라 감옥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5. 두 번째 믿음 — 즐거울 때 찬송하십시오
야고보서 5장 13절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야고보는 고난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기쁨도 이야기합니다.
고난이 오면 기도하고, 기쁨이 오면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사실 좋은 환경도 믿음의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성공도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하나님을 찾던 사람이 부자가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병들었을 때는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이 건강해지면 기도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예배에 나오던 사람이 문제가 해결되면 예배를 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스라엘에게 반복해서 경고합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신명기 8:12–14
고난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풍요도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지배하는 믿음은 고난 중에는 기도하고, 기쁨 중에는 찬송합니다.
6. 감사는 좋은 환경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야고보서 1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건강도 선물입니다.
가정도 선물입니다.
자녀도 선물입니다.
직업도 선물입니다.
재능도 선물입니다.
시간도 선물입니다.
재정도 선물입니다. 심지어 오늘 우리가 숨 쉬는 것까지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단순한 기분이 아닙니다. 감사는 소유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내 힘으로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좋은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환경을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을 받았지만 돈의 종이 되지 않습니다. 성공했지만 성공의 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았지만 사람의 박수에 자신의 정체성을 걸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7. 하박국의 믿음 —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믿음
이 지점에서 하박국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모델이 됩니다. 하박국 1장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왜 악인이 형통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십니까?”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합니까?”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질문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박국 3장에 가면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의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 하박국 3:17–18
무화과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의 소출도 없습니다. 밭에 먹을 것도 없습니다. 양도 없습니다.
소도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완전히 무너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이것이 환경을 지배하는 믿음입니다.
환경이 나를 웃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나를 울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8. 세 번째 믿음 — 병들었을 때 공동체를 부르십시오
이제 야고보는 질병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혼자 버티지 말라는 것입니다.
병들었을 때 숨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프다고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해졌다고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르십시오.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기도를 요청하십시오.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야고보는 병든 사람을 고립된 개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한 지체로 봅니다.
이것이 신약교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은 말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교회입니다. 혼자 성공하는 곳이 아닙니다. 혼자 고통받는 곳도 아닙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회복되는 곳입니다.
9. 병원과 교회는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이 부분은 오늘날 교회가 매우 중요하게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을 근거로 병원이나 의학을 불신해서는 안 됩니다.
의학적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약을 먹지 않는 것이 믿음의 증거도 아닙니다.
수술을 거부하는 것이 믿음의 증거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하고 여관에 데려가 돌봅니다.
야고보서 5장의 핵심도 의료행위를 금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질병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의사의 손을 사용해 주십시오.”
“의학적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약을 통해 치료해 주십시오.”
“수술을 통해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제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성경적 기도입니다.
10. 기름은 마술적 물질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는 기름을 바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기름 자체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치유의 주체는 기름이 아닙니다. 장로도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의 기름을 마술적 물질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중요하게 제시됩니다.
기름이 능력의 원천이 아닙니다. 기도자의 손이 능력의 원천도 아닙니다. 교회의 건물이 능력의 원천도 아닙니다.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물건이나 장소를 신비화해서는 안 됩니다. 성수 자체에 마술적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특정 장소가 자동적으로 병을 고치는 것도 아닙니다. 특정 사람에게 신비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때로는 기도를 통하여, 때로는 의학을 통하여, 때로는 자연적인 회복을 통하여, 때로는 공동체의 돌봄을 통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11.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을 조종하는 주문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은 말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지금 당장 병이 낫습니까?”
성경 전체를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도 병든 동역자를 남겨 두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위장 문제와 관련된 조언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성도는 죽음을 통과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 주셔야 합니다.” 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 주께서 고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나 주님의 뜻을 신뢰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담대함과 순종이 함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치유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치유의 시기와 방법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기적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요구함으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하지 않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가장 깊은 차원에 도달합니다. 가장 큰 치유는 반드시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구원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요한복음 11:25
그러므로 교회는 병든 성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낫게 하옵소서.”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 고치지 않으신다면 부활의 날 완전하게 일으켜 세워 주옵소서.” 이것이 기독교의 소망입니다.
12. 병든 사람에게 죄를 추궁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5장 15–16절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위험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죄가 있어서 병든 것 아니냐?”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은 단순한 인과관계를 거부하십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을 찾아가서 “당신이 죄를 지어서 아픈 것입니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바로 그 오류에 빠졌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자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치유사역은 정죄가 아니라 복음적 회복이어야 합니다.
13. “서로 죄를 고백하며”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
야고보서 5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모든 죄를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라는 의미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고백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안전한 관계가 필요합니다. 신뢰가 필요합니다. 영적 지도와 목회적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죄를 고백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화해와 회복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한마디가 관계를 살릴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의 “서로 고백”을 병든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죄를 추궁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관계의 회복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죄를 폭로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이 회복되는 공동체입니다. 정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십자가 앞으로 함께 데려가는 공동체입니다.
14.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말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여기서 “의인”은 죄가 전혀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에 기도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커서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오래 해서 하나님께 빚을 지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를 반복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의 능력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인간의 능력을 과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15. 야고보가 엘리야를 예로 든 이유
야고보는 갑자기 엘리야를 등장시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놀라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지쳤습니다. 낙심했습니다. 도망쳤습니다. 그런 사람도 하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왜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을 통해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모세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다윗도 실패했습니다.
베드로도 넘어졌습니다. 엘리야도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16.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는 기도였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단순히 “기도하면 날씨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부터 18장을 보면 바알 숭배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사건은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알의 거짓된 신성을 심판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가 내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분리된 인간의 욕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뜻에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17. 마지막 두 절 — 가장 큰 환경은 “미혹”입니다
야고보서는 놀랍게도 기도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여기서 야고보서 전체의 결론이 드러납니다. 야고보서의 궁극적인 관심은 단순한 육체적 건강이 아닙니다.
영혼의 회복입니다.
병든 사람이 회복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육체의 질병보다 더 심각한 질병이 있습니다. 영혼의 질병입니다.
육체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18. 교회는 미혹된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쉽게 사람을 포기합니다.
“저 사람은 안 돼.” “저 사람은 이미 떠났어.” “저 사람은 믿음을 잃었어.” “저 사람은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러나 야고보는 말합니다. 돌아오게 하십시오.
찾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기다리십시오.
권면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진리로 붙들어 주십시오.
왜냐하면 한 영혼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찾아 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이 하늘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을 버리는 곳이 아니라 돌아오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19. 결국 환경을 지배하는 믿음은 공동체적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부터 20절까지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서로입니다.
기도하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 고백하고,
서로 돌보고, 서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개인주의적 신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서로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전도서 4장 9절은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그리고 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영적 공동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혼자 싸우지 마십시오.
혼자 울지 마십시오.
혼자 병들지 마십시오.
혼자 낙심하지 마십시오.
기도를 요청하십시오.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함께 예배하십시오.
함께 성찬에 참여하십시오.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난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20. 교회의 능력은 “서로”에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닙니다.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행사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예배당이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가 많다는 뜻만도 아닙니다.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아픈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낙심한 사람이 위로받고,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할 수 있고,
길을 잃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고,
고난당한 사람이 기도를 요청할 수 있고, 기쁜 사람이 함께 찬송할 수 있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교회입니다.
21.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환경은 무엇입니까?
이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환경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가정입니까?
직장입니까?
재정입니까?
자녀입니까?
인간관계입니까?
노후입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질병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외로움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에서의 억울함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그 환경이 너의 하나님보다 크냐?”
환경이 하나님보다 큽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환경보다 크십니까?
믿음은 환경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환경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22. 내가 울고 웃는 이유를 점검하십시오
“나는 최근에 무엇 때문에 울었는가?” 그리고 “나는 최근에 무엇 때문에 웃었는가?”
돈 때문에 울었습니까?
사람 때문에 울었습니까?
직장 때문에 울었습니까?
자존심 때문에 울었습니까?
반대로 돈이 들어와서 웃었습니까?
사람에게 인정받아서 웃었습니까?
승진해서 웃었습니까?
좋은 일이 생겨서 웃었습니까?
물론 이런 감정 자체가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전적으로 환경에 매여 있다면 우리는 아직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은 환경의 변화보다 하나님의 뜻에 더 민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배웠다”는 말입니다.
자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됩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하면서 배웁니다. 풍요 속에서 감사하면서 배웁니다. 실패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면서 배웁니다. 성공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배웁니다.
23. 믿음은 환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합니다
요셉에게 감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감옥 안에 계셨습니다.
다니엘에게 사자굴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자굴에 함께하셨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의 추격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감옥은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감옥이 찬송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박국에게 경제적 붕괴는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환경을 바꾸실 수도 있지만, 환경을 바꾸지 않으실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24. 그러므로 “환경을 지배하는 믿음”은 십자가를 통과한 믿음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완벽한 역설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실패였습니다.
예수님은 붙잡히셨습니다. 재판받으셨습니다. 조롱받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부활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환경이 끝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부활을 준비하십니다. 실패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모든 일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질병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배신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죄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선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것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25.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고난의 때에는 기도하십시오.
야고보서 5장 13절입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둘째, 즐거울 때에는 찬송하십시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셋째, 약할 때에는 공동체를 부르십시오.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넷째로, 미혹된 사람이 있다면 돌아오도록 도우십시오.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이 네 가지가 야고보서 5장 13–20절의 큰 흐름입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서로 돌보고, 잃어버린 영혼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26.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돈이 여러분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평가가 여러분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질병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실패가 여러분의 정체성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성공도 여러분의 영혼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과거도 여러분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두려움도 여러분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여러분을 지배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주인은 환경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돈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질병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난이 와도 예수님.
기쁨이 와도 예수님.
건강할 때도 예수님.
병들었을 때도 예수님.
성공할 때도 예수님.
실패할 때도 예수님.
살아 있을 때도 예수님.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님.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빌립보서 1:21
이것이 환경을 지배하는 믿음입니다.
결론 —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단순합니다.
환경에 끌려다니지 마십시오.
고난이 왔다고 믿음을 내려놓지 마십시오.
기쁨이 왔다고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오.
병이 왔다고 혼자 숨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다고 공동체에서 도망치지 마십시오.
미혹된 사람이 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찬송하십시오.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돌아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야고보서의 마지막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칩니다.
참된 믿음은 혼자 강한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약할 때 도움을 요청할 줄 압니다.
참된 믿음은 병들었을 때 기도를 요청합니다.
참된 믿음은 죄를 인정할 줄 압니다.
참된 믿음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참된 믿음은 미혹된 사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환경보다 하나님을 크게 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기억하십시오.
환경이 여러분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여러분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여러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환경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절망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기도하십시오.
고난 가운데 기도하십시오.
기쁨 가운데 찬송하십시오.
병든 가운데 공동체를 찾으십시오.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길을 잃은 영혼을 다시 주님께 데려오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승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치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다시 보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환경이 있습니다.
때로는 질병이 찾아옵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때로는 가정의 문제가 찾아옵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 그때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고난이 올 때 원망하지 말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두려움이 밀려올 때 기도하게 하옵소서.
억울함이 생길 때 기도하게 하옵소서.
눈물이 날 때 기도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시선이 환경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을 때도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성공했을 때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시며, 재물이 많아졌을 때 하나님보다 재물을 사랑하지 않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하나님의 인정이 가장 귀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술에서 감사와 찬송이 끊이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병든 자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몸이 아픈 성도들을 위로하여 주옵소서.
병원에서 치료받는 이들에게 좋은 의료진을 붙여 주시고, 의사와 간호사에게 지혜를 주시며,
약과 치료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께서 친히 만져 주옵소서.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게 하시고, 치유의 방법과 때를 주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고쳐 주시면 감사하고, 기다리게 하셔도 신뢰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잃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육체가 이 땅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부활의 날에 완전한 몸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을 믿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교회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혼자 아파하는 사람이 없게 하옵소서.
혼자 울고 있는 사람이 없게 하옵소서.
혼자 믿음을 잃어가는 사람이 없게 하옵소서.
서로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게 하옵소서.
서로 용서하게 하옵소서.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상처 입은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품게 하시고, 넘어진 사람을 밟지 않고 일으켜 세우게 하시며,
미혹된 사람이 있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진리 가운데 돌아오도록 사랑으로 붙들어 주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신앙이 말에만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찬송이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사랑이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회개가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공동체가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우리로 하여금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고난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시고,
성공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시며,
질병이 우리의 소망을 빼앗지 못하게 하시고,
실패가 우리의 정체성을 빼앗지 못하게 하시며, 사람의 말이 우리의 영혼을 흔들지 못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부활을 바라보게 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고백하게 하옵소서.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린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잃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져도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십니다.”
하박국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시며,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옵소서.
오늘도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환경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시며,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게 하시고,
마침내 모든 환경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삶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