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예수님의 비유 2강]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잃어버린 두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32절)

knowledgeplatform100 2026. 10. 13. 10:08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

잃어버린 두 아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 (누가복음 15장 11–32절)

1. 우리가 탕자라고 부르는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 기록된,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는 방탕하게 살다가 모든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큰 흉년까지 찾아오자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가 끌어안았으며,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흔히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은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더 던져야 합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죄를 지었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그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에게 있습니까?

더 나아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또 다른 아들이 등장합니다.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의 밭에서 열심히 일했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성실했던 큰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화를 내며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단순히 방탕한 사람이 회개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를 떠난 죄인과 아버지 곁에서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 이 두 사람을 향해 나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때문에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만 부르기보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 또는 ‘잃어버린 두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Trevor J. Burke의 「The Parable of the Prodigal Father」와 누가복음 주석 전통에서도 아버지의 관대함과

큰아들의 반응이 이 비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로 다뤄집니다.

 

존 칼뱅 역시 이 본문에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종교적 교만을 함께 지적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세 가지 질문에 답하려고 합니다.

첫째, 인간은 왜 아버지를 떠납니까?

둘째, 인간은 어떻게 아버지에게 돌아오게 됩니까?

셋째, 아버지 곁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왜 오히려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까?

 

이 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둘째 아들의 얼굴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큰아들의 얼굴에서도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두 아들 모두를 향해 문밖으로 나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2. 누가복음 15장의 배경 — 예수님은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까?

먼저 누가복음 15장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기에 이 비유의 중요한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원망에 대답하시기 위해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3절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라고 기록합니다.

이어지는 세 이야기는 서로 분리된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 아래 연결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 한 개를 찾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기뻐합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여인도 기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들을 통해 잃어버린 자가 회복될 때 하나님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은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절에서도 같은 뜻을 반복하십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것이 누가복음 15장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과 다른 방향에 서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 번째 비유에서 큰아들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둘째 아들은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떠난 사람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 머물렀지만,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기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방탕함으로 아버지를 떠났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의와 분노로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말씀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 성경을 잘 알고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이 될 수도 있고,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큰아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3. 첫 번째 장면 — 둘째 아들은 왜 아버지를 떠났습니까?

누가복음 15장 11–12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누어 주었더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합니다.

오늘날에도 자녀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재산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관계보다 아버지가 가진 재산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진 것을 원했지만,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선물은 원했지만, 아버지의 임재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원했지만, 아버지의 다스림은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죄는 단지 몇 가지 나쁜 행동을 저지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죄의 깊은 뿌리에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습니다.

그들의 죄는 단순히 열매 하나를 먹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야 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각기 제 길로 갔다는 말씀은 인간의 근본적인 방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보다 내가 원하는 길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도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삶은 언제나 노골적인 무신론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성공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이 주실 결과에 더 집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재물을 주십시오. 성공을 주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 자녀의 앞날을 열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일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러한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을 더 사랑할 때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하나님 자신보다 더 소중해지면, 신앙은 관계가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해 주시면 감사하고, 내 뜻대로 해 주지 않으시면 원망합니다. 기도가 응답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응답이 늦어지면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그때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먼 나라를 향해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갑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은 그가 그곳에서 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낭비했다고 기록합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떠나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 진정한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 없이 사용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만들 때, 선물은 더 이상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은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도, 지식도, 재물도, 시간도, 건강도, 관계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선물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선물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비유를 들으며 둘째 아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전에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사랑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 뜻을 이루려 하는가?”

“나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아버지의 재산만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 질문이 우리 안에 살아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읽게 됩니다.

 

 

4. 두 번째 장면 — 돼지우리에서 드러난 인간의 실존

누가복음 15장 14–16절은 둘째 아들의 추락을 보여 줍니다.

그가 재산을 모두 탕진했을 때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는 궁핍해졌고, 한 사람에게 의탁하여 돼지를 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경제적 실패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자신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먹을 것조차 마음대로 얻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 비유를 모든 가난과 질병과 고난이 개인의 죄 때문에 발생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의인도 고난을 겪는다고 가르칩니다. 욥기는 고난을 단순한 인과응보로 설명하려는 태도를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돼지우리의 장면은 고난받는 모든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 안에서 둘째 아들이 경험하는 추락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욕망만으로 살아가려는 삶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냅니다.

그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재산도 잃었습니다. 안정도 잃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그는 자신의 실상을 직면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은혜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미래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은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은 보배의 근원이 아닙니다. 보배를 담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자신이 보배라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깨닫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을 우리를 훈련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으로 보내신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붙드시며, 그 고난조차 하나님의 선한 뜻 안에서 사용하실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한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성급한 정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둘째 아들의 돼지우리는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지만, 그곳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그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리에서 새로운 장면이 시작됩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5. 세 번째 장면 — 회개는 무엇이며, 누가 우리를 돌아오게 하십니까?

누가복음 15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개역개정은 “스스로 돌이켜”라고 번역합니다. 이 표현은 흔히 회개의 시작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상황을 직면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하지만, 자신은 굶어 죽을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인간의 의지와 결단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전체는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역사한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자신에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선언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도 회개함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응답하여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회개를 요구합니다. 다만 그 회개가 구원의 대가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회개를 가능하게 하고,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끕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계획을 세웁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여기서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인정합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당연하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들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아버지에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회개는 단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기중심적인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보아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집에 양식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집에는 자신을 품어 줄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아버지를 잔인한 심판자로만 알고 있었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가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집에 자신이 기대할 수 있는 자비가 있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 4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죄인이 절망 속에서 영원히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은혜는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죄인을 죄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깨닫고 계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입니까?

하나님보다 세상의 성공을 더 사랑했다는 사실입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뜻과 내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다는 사실입니까?

 

그 깨달음이 여러분을 절망으로만 이끌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영원히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회개와 믿음과 회복의 길로 이끄시는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은 성령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깨닫는 순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릴 수 있는 순간입니다.

죄를 깨닫되 죄에 갇히지 마십시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되 절망을 최종 결론으로 삼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6. 네 번째 장면 — 아버지는 왜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달려가셨습니까?

누가복음 15장 20절은 이 비유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 아들이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가까이 올 때까지 무관심하게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비유의 중심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준비한 고백을 다 듣기 전에 먼저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는 조건을 따지는 계산보다 아들을 향한 긍휼이 먼저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인정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자비로 받아 주시고,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3절은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 말씀은 오늘 비유의 장면과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때로 차가운 심판자의 모습만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못한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내가 충분히 보상할 때까지 기다리시며, 내가 자격을 갖추어야 비로소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향해 “네가 왜 그런 일을 했느냐?”라고 먼저 추궁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갚기 전에는 내 집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먼저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이것은 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이 아버지의 사랑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회개의 관계를 보아야 합니다. 아들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공로를 계산하여 지급하는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존 칼뱅은 누가복음 15장 주석에서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맞이하고 품는 모습을 하나님의 자비와 연결합니다.

그는 죄인이 회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회개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보다 앞선 인간의 공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순서입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우리를 회개와 믿음으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나아갑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잃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돌아가는 길을 스스로 완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읽을 때 우리는 아들의 결심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들을 품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7. 다섯 번째 장면 —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 그리고 잔치

누가복음 15장 21–24절에서 아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용서받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넘어섭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집 안에 들여놓고 최소한의 생존만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가족의 기쁨 가운데 다시 세우십니다.

 

아들은 품꾼의 하나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품꾼으로만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에는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구원은 단지 형벌을 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은 믿는 자들이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며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15절은 우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자녀의 신분을 선물로 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며 신발을 신깁니다. 이 모든 물건의 세부적인 상징을 하나하나 교리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전체 흐름은 분명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귀환을 부끄러운 실패로만 취급하지 않고, 회복의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선언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은혜의 언어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잃었다가 다시 얻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던 사람이 은혜 안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 갇혀 있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새로운 삶은 과거의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죄가 더 이상 그 사람의 최종 정체성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너는 과거에 실패했으니 영원히 실패자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너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렇다고 은혜가 값싼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은혜는 우리를 죄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순종의 길로 인도합니다.

디도서 2장 11–12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속적인 정욕을 버리고 절제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가르친다고 말씀합니다.

은혜는 죄인을 받아들이지만 죄를 왕으로 섬기게 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용서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이끕니다.

 

 

8. 여섯 번째 장면 — 이 비유 안에서 십자가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이 비유는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 비유가 단순히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돌아오면 용서받는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전체 흐름에서 하나님의 용서는 십자가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물론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는 십자가 사건이 직접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달려가는 장면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일대일로 상징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죄인의 회복은 누가복음 전체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사역,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죄인을 멀리서 평가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구원 사역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어떻게 만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무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죄는 실제로 악이며, 하나님과 이웃과 피조 세계에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버려 두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의 문제를 다루시고, 죄인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21절은 죄를 알지 못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에게 용서하는 법을 가르치신 선생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구주이십니다.

 

이 비유의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 끌어안습니다. 우리는 그 장면에서 죄인을 향해 나아오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봅니다.

그리고 복음서 전체를 통해 그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역사적으로 드러났음을 고백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시는지, 동시에 죄인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빼고 하나님의 용서를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빼고 십자가를 단지 형벌의 장면으로만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십자가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사랑의 사역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궁극적인 소망은 우리의 결심이 얼마나 강한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에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이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이 진리를 균형 있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으며, 선한 일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대가가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은혜를 핑계로 죄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알기에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합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변화된 삶입니다.

 

 

9. 일곱 번째 장면 — 큰아들은 왜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까?

이제 비유의 두 번째 절정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5–28절에는 큰아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큰아들은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다가 집에서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무슨 일인지 종에게 물었더니, 동생이 돌아왔고 아버지가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대답을 듣습니다.

 

그러자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문밖으로 나옵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잔치에 들어오지 않으려는 큰아들을 설득

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큰아들에게도 나아가십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에게도 나아가시고, 아버지의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기쁨을 거부하는 아들에게도 나아가십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욕망을 위해 아버지의 재산을 요구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일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대가를 요구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 머물렀지만, 자신이 받아야 할 보상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은 아버지를 잘 섬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둘 다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둘째 아들은 방탕함을 통해 자기중심성을 드러냅니다. 큰아들은 자기 의와 비교의식, 보상심리를 통해 자기중심성을 드러냅니다. 둘째 아들의 죄는 쉽게 눈에 띕니다. 그러나 큰아들의 죄는 종교적인 성실함 뒤에 감춰질 수 있습니다.

 

큰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9절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다고 주장합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려는 마음보다 자신의 수고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동생을 “내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의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동생을 가족의 관계에서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의의 위험을 봅니다.

 

자기 의는 단순히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범위를 자신이 결정하려는 데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원망했습니다. 큰아들의 분노는 바로 그 태도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이것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교회를 섬기며, 이웃을 위해 수고하는 일은 귀합니다.

문제는 그 성실함을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한 거래로 만들 때 발생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봉사했으니 하나님께서 내 뜻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신앙생활을 잘했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더 인정하셔야 합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큰 죄를 짓지 않았으니 저 사람보다 더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안에 자리 잡으면 신앙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자기 의를 쌓는 일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섭섭합니다. 내가 수고한 만큼 보상받지 못하면 분노합니다. 나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인정받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으려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종교적 성취를 내세우지만,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실함을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성실함의 뿌리를 은혜 안에 두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내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고 순종하기 위해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선한 일을 하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성실함을 변화시키는 방식입니다.

 

10. 여덟 번째 장면 — 큰아들에게도 나아오시는 아버지

큰아들은 잔치에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5장 28절은 아버지가 나와서 큰아들을 권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은지를 봅니다.

하나님은 방탕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눈에 띄는 죄인에게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로움에 갇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에게도 마음을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큰아들은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아들에게도 잔치에 들어오라고 권하십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그리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는 큰아들이 누리고 있는 관계의 풍성함을 다시 일깨우십니다.

큰아들은 자신이 받지 못한 것만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그가 이미 누리고 있는 관계의 선물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큰아들의 분노를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원망을 그대로 승인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동생을 향한 그의 태도를 바로잡으시며, 잃었던 아들을 기뻐하는 일에 참여하라고 초청하십니다.

 

여기에는 교회를 향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교회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그를 영원히 과거에 가두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해야 합니다. 진리를 말해야 하지만, 진리를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복음적인 공동체의 태도입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되, 자신도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기억합니다. 회개를 요청하되, 회복의 가능성을 닫아 버리지 않습니다.

진리를 지키되, 자신을 심판자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큰아들의 문제는 동생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동생의 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죄를 넘어서는 아버지의 긍휼을 기뻐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지 못합니다. 나를 실망시킨 사람이 회복되는 것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새로운 기회를 얻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물론 모든 관계가 즉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악을 묵인하는 일이 아니며, 신뢰의 회복에는 진실한 회개와 책임 있는 변화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안전과 정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회복 가능성을 처음부터 닫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구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은혜를 입는 것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11. 아홉 번째 장면 — 비유의 결말이 열려 있는 이유

이 비유는 특이한 방식으로 끝납니다.

둘째 아들은 돌아왔고, 아버지는 잔치를 열었습니다. 큰아들은 화를 내며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잔치의 의미를 설명하며 함께 기뻐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큰아들이 결국 잔치에 들어갔는지, 끝까지 거부했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결말은 독자에게 질문을 남깁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들어갔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의로움을 고집하며 끝까지 밖에 머물렀을까요?

 

본문은 그 결론을 직접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아들이 반드시 돌아왔다고 단정하거나, 반드시 버림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문맥은 분명한 방향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다는 이유로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큰아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초청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겠느냐?

아니면 너희가 정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계속 배제하겠느냐?”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기쁨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알고 봉사를 많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향한 은혜를 불편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아들의 결말을 우리가 상상해서 완성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까지 나아가 초청하셨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나아가셨습니다. 큰아들이 들어오지 않으려 할 때도 나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이 비유가 보여 주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분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고, 돌아온 자를 회복시키시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자에게도 잔치의 문을 열어 놓으십니다.

그 초청 앞에서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기뻐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2. 열 번째 장면 — 우리 안에 있는 두 아들을 발견하십시오

이제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둘째 아들과 동일시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 용서가 필요한 죄인으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중요한 자기 인식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큰아들의 모습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성실하지만 마음으로는 보상을 요구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욕망을 좇아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큰아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아버지의 기쁨을 거부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도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성실하게 봉사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활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향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종교적 성취를 점검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큰 은사를 가지고 많은 일을 한다 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의 목적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의 죄만 보지 말고, 큰아들의 자기 의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뿐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교만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공로로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 때문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회복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회복시키시는 일을 기뻐합니다.

넷째,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흉내 내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입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복음의 순서입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 은혜가 믿음과 회개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랑과 순종의 열매를 맺습니다.

 

 

13. 결론 — 아버지의 집에는 두 아들을 향한 은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요구하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가 끌어안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얻은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일했지만,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들이는 것을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와 보상을 비교하며 분노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큰아들에게도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잔치에 들어오라고 권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모습에 더 가까이 있습니까?

 

아버지를 떠나 자기 욕망을 좇는 둘째 아들입니까?

아니면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자기 의를 내려놓지 못하는 큰아들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삶의 어떤 순간에는 둘째 아들이고, 다른 순간에는 큰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실패 앞에서는 엄격한 심판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 은혜를 허락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게 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회복을 기뻐하게 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은혜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버지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만 붙들고 아버지를 잊어버렸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또한 제가 성실함과 신앙생활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을 정죄했던 교만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를 받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시고, 다른 사람이 회복되는 것을 기뻐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비유의 중심은 인간의 위대한 결심이 아닙니다. 죄인을 받아들이시고, 잃어버린 자를 회복시키시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에게까지 초청의 손길을 내미시는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 앞에 서십시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아오십시오. 자신의 의로움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답게 다른 사람의 회복을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 갈 때, 교회는 정죄와 비교의 장소가 아니라 회개와 회복이 일어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아버지, 돌아오는 자를 품으시는 아버지, 그리고 잔치 밖에 서 있는 자에게도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사랑이 오늘 우리의 삶과 교회 안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