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예수님의 비유 3강] 욕망의 재정렬, 기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빚다! (누가복음 11장 1–13절)

knowledgeplatform100 2026. 10. 13. 10:18

기도를 가르치는 비유들 (누가복음 11장 1–13절)

1.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는가?

여러분, 우리는 왜 기도합니까?

무언가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까? 질병에서 낫고 싶고,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고,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까?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아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종교적 기술보다 훨씬 깊은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내 욕망에 맞추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마음과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리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은 단순히 기도문 하나를 만들어 달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교제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기도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제자들이 배우고 싶었던 것은 단지 기도의 문장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 안에 담긴 삶의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밤중에 떡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권면을 주셨고, 마지막에는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으로 말씀을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1장 1–13절은 서로 무관한 기도 교훈의 모음이 아닙니다.

주기도문과 비유와 권면과 성령의 약속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중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무엇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가?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따라 기도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2. 주기도문 — 기도는 우리의 정체성과 목적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누가복음 11장 2–4절의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향한 청원과 우리의 일상에 관한 청원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드러나기를 구합니다. 그다음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 시험에서의 보호를 구합니다.

 

이 순서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필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라는 더 큰 목적 안에 놓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의 출발점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흔히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제 계획이 성공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러한 기도 자체가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시편의 기도에도 탄식과 간구가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기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장 42절)

참된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소원을 하나님의 뜻 아래에 둡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에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매일의 필요를 아버지께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시험과 악 앞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돌아보면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성공과 재물과 명예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자라 가게 됩니다.

기도는 단순히 필요를 전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드러나고, 정화되고, 새롭게 정렬되는 시간입니다.

 

 

3. “나라가 임하시오며” —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주기도문의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기도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역사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마가복음 1장 15절).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죄인을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모든 악과 고통을 제거한 완성의 상태로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질병과 죽음, 불의와 죄의 현실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을 기다립니다.

 

히브리서 2장 8절은 아직 만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망과 애통과 아픔을 끝내실 것을 약속합니다.

 

따라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에는 현재의 현실을 넘어서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불완전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때로 묻습니다.

 

“하나님, 왜 세상에는 여전히 악이 존재합니까? 왜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형통합니까? 왜 제 삶은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달라지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러한 질문을 믿음 없는 질문이라고 무조건 정죄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기자들도 같은 질문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의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기도는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의 최종 승리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기다리면서도 순종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세상의 불의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진실과 정의와 자비를 실천합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기도는 우리를 현실에서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현실 속으로 다시 보내는 은혜입니다.

 

 

4.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 — 하나님은 우리의 끈기에 굴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뒤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5–6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한 사람이 밤중에 친구를 찾아갑니다. 여행 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데 자기에게는 먹일 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의 집에 가서 떡을 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집 안에 있는 친구는 이미 문을 닫았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일어나 떡을 내어 주기가 번거로운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질문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7절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이 비유는 오랫동안 기도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8절에 등장하는 표현을 근거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계속 조르면 하나님도 결국 들어주신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귀찮아서라도 응답하신다.”

그러나 이 해석을 기도의 본질로 삼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기도에 지쳐서 뜻을 바꾸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오래 기도해야만 움직이시는 분입니까?

금식기도를 며칠 했는지, 새벽기도를 몇 번 빠지지 않았는지에 따라 응답 여부를 결정하시는 분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그렇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것을 실행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은 하나님께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끈기에 굴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적 열심으로 조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의 횟수와 길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사는 대가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인내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내의 기도와 하나님을 압박하는 기도는 다릅니다.

 

인내의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을 기다립니다. 반면 하나님을 압박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합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비유의 문맥과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고대 지중해와 중동 사회에서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개인의 편의만으로 결정되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일에는 공동체의 환대와 명예가 걸려 있었습니다.

 

이 배경은 비유의 사회적 긴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당시 모든 유대인이 동일하게 행동했다고 단정하거나, 본문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세부 사항을 확정적인 역사적 사실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떡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상황을 통해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누가복음 11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여기서 ‘강청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입니다.

이 단어는 부끄러움 없음, 수치를 개의치 않음, 뻔뻔스러움과 관련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단어 하나만으로 비유의 의미를 완전히 확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이 표현을 끈질긴 간청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해석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강청함’이라는 번역이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단어 하나를 떼어 내어 하나님을 귀찮게 해야 응답받는다는 기계적인 기도 공식으로 만드는 일이 본문의 전체 문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어지는 9–13절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 문맥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친구조차 자신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다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더 선하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비유의 강조점은 하나님을 인간의 무정한 친구와 동일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관계의 사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의 본질이 밝혀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여 내 뜻을 이루는 기술이 아니라, 선하신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5. 일용할 양식 — 육체의 필요와 하늘의 은혜를 함께 구하십시오

밤중에 떡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는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과 연결됩니다.

누가복음 11장 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여기서 양식은 우리의 실제적인 필요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먹고살아야 합니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일터에서 일해야 하고, 병들었을 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육체의 필요를 무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적인 것만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삶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가 생활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질병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가족의 안전과 일터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도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물질을 무한히 축적하려는 욕망과 같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은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며, 안식일 전날에는 다음 날을 위한 만나도 거두게 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 사건은 백성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모든 미래를 자기 손에 움켜쥐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 안에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주기도문의 양식은 이러한 일상의 의존을 기억하게 합니다. 

동시에 신약성경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육체적 양식의 필요를 없애신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양식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육체의 양식만으로 인간의 궁극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일하지만, 먹고사는 것만으로는 존재의 의미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는 오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생명의 은혜입니다.

 

다만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 자체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표현은 실제적인 일상의 필요를 분명히 포함하며, 생명의 떡에 관한 요한복음의 가르침과 연결할 때에는 직접적인 어휘의 동일성보다 성경 전체의 신학적 조화를 근거로 삼는 편이 타당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6장 25절은 먹고 마시는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그 말씀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주기도문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양식을 구하는 것은 아버지께 의탁하는 믿음이며, 양식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잊는 것은 믿음의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식을 구하되 양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되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분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6.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 무엇을 구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비유 다음에 유명한 말씀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11장 9절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리고 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기도에 대한 위대한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할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기도에 대한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도 가르칩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확신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은 잘못된 동기로 구하는 기도를 경고합니다.

 

따라서 기도의 핵심은 단지 얼마나 강하게 구하느냐가 아닙니다.

무엇을 구하며, 누구를 신뢰하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재물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 자체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공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성공은 영적인 유익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끝나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고난을 즉시 제거하시기보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할 힘을 주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응답이 바울이 처음 원했던 방식과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시가 없는 삶 대신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신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이 언제나 관철된다는 보장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은혜를 의지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무엇을 가장 깊이 구해야 하겠습니까?

누가복음 11장 13절이 그 답을 제시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기도의 결론을 성령의 선물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가장 큰 선물은 단지 환경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한 종교적 힘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단지 “하나님, 제 환경을 바꾸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제 욕망을 정결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그리스도를 닮게 해 주십시오. 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주기도문에서 시작된 기도가 성령의 약속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7.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 기도 응답의 중심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1–12절입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예수님은 인간의 부모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인간의 부모는 불완전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욕심 때문에 자녀를 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적인 부모의 선한 마음을 예로 드십니다. 자녀가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거나,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1장 13절)

 

여기서 예수님은 기도 응답의 근거를 우리의 능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품에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은 우리가 완벽하게 기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충분한 공로를 쌓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를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공로를 쌓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은혜로 구원받은 자녀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특권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이것이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기도의 열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내기 위한 대가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나아가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그대로 주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모두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야는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시야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필요를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와 그분의 구속사적 목적을 아십니다.

이 말은 모든 고난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은 끝까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성경도 의인의 고통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는 자녀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환경을 바꾸시고, 때로는 견딜 힘을 주시며, 때로는 공동체의 도움을 통해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기도의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신실하시다는 데 있습니다.

 

8. 기도의 목적 — 하나님은 우리의 뜻을 무조건 이루기보다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도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기도를 명령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6장 8절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필요한 것을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왜 필요합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사실을 알려 드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참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판단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실제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따라서 기도를 단지 마음을 다스리는 심리적 행위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통제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지혜롭고 선하게 응답하십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기도를 서로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동시에 성도들의 기도를 그 뜻을 이루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전능해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그분의 주권적인 섭리 안에서 우리의 기도와 순종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운명을 바꾸기 위한 마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면서도, 동시에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과 다르다면 저를 바로잡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우리는 기쁨으로 간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때는 그 소원을 내려놓을 은혜도 구해야 합니다.

기도의 성숙은 더 많은 것을 얻어 내는 능력만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더 순종하며,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 가는 데서 드러납니다.

 

9. 기도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을 때 — 누가복음 18장의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했는데도 병이 낫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했는데도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가족을 위해 기도했는데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도 오랫동안 씨름해 온 죄와 연약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낙심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제 기도를 들으십니까?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이러한 낙심을 다루십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과, 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과부는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계속 요청합니다. 처음에는 듣지 않던 재판관이 결국 그 요청을 들어줍니다.

 

이 비유 역시 하나님께서 귀찮은 기도를 못 견디고 마지못해 응답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비유 속 재판관과 하나님은 서로 대조됩니다.

 

불의한 재판관조차 결국 과부의 요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외면하시겠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논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7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리고 8절에서 마지막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기도하면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즉시 얻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의 믿음은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으로 현실을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변화를 즉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지연의 이유를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기도에 대해 왜 지금 그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응답의 지연을 믿음의 부족이나 숨은 죄의 증거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고난의 모든 이유를 해명하는 일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과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역시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인내는 하나님을 협박하는 인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보다 더 선하시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인내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도록 돕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다시 붙들게 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에도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믿음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믿음을 지탱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10. 성도의 간구 — 개인적인 복수를 넘어 하나님의 의를 구하십시오

누가복음 18장의 과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개인적인 복수심을 하나님께 정당화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이 사라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보호받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폭력과 착취가 멈추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회복되고 가해자가 회개하며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9–11절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이들이 하나님께 신원해 달라고 부르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의 부르짖음은 단순한 개인적 원한의 표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악을 끝내시고 억울한 자를 vindicate, 곧 옳다고 인정하시며 공의를 세우실 것을 기다리는 호소입니다.

 

창세기 4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자신에게 호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폭력과 불의가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불의를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적인 복수의 권한을 무제한으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칩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에는 두 가지 방향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세상의 불의가 끝나고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불의와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우리 안의 교만과 증오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자기 안의 죄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를 구하면서, 우리 자신도 그 새로움에 참여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기도입니다.

 

11. 기도의 응답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누가복음 11장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셨습니다. 떡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흐름을 통해 우리는 기도의 깊은 목적을 발견합니다.

기도는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목적을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신자들 안에 이루어지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화의 여정은 계속됩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이기심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힘과 계산을 더 신뢰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부릅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살펴 주십시오.

제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지 드러내 주십시오. 제가 주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내려놓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자기혐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회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 절망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갈라디아서 5장 22–23절).

 

기도의 응답은 때로 환경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닫힌 문이 열리고, 질병이 회복되고, 필요한 공급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모든 응답이 우리가 처음 기대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이전보다 더 깊은 평안을 얻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상대방이 바뀌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어떤 때에는 고난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더 깊어집니다.

이 모든 일을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성품을 빚어 가신다는 사실은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옛사람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가 우리 안에서 이루는 중요한 열매입니다.

 

 

12. 성령의 약속 — 기도의 마지막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누가복음 11장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마지막을 재물이나 성공이나 건강에 대한 무조건적인 보장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의 평행 본문은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표현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좋은 선물을 성령과 연결하여 강조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이며, 성령의 임재와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시며, 말씀에 순종하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끄십니다.

 

성령을 구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감정이나 신비한 체험을 반드시 얻어 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시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 안에 이루시도록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위로와 담대함을 주시고, 때로는 특별한 은사로 교회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욕망을 확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시며, 성도들을 거룩함으로 이끄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성령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을 구하는 기도는 자기 과시를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 가운데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성령님, 제 마음을 다스려 주십시오. 제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게 해 주십시오. 제 안의 교만과 탐욕을 다루어 주십시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원수를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기도 실력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자주 흔들립니다. 기도하다가도 의심하고, 결심했다가도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우리 자신의 완전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선하신 아버지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다시 기도합니다. 넘어졌다면 회개하며 다시 나아갑니다. 낙심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섭니다. 이것이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13. 결론 — 기도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1장 1–13절을 통해 기도의 본질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의 욕망에 복종시키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충분한 종교적 열심을 쌓아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내는 거래도 아닙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기도는 오늘 필요한 양식을 아버지께 의탁하는 일입니다. 죄 사함을 구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시험과 악에서 보호해 달라고 간구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마지막에는 성령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낙심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부족합니까? 왜 같은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멀게 느껴집니까?” 

 

그때 기억하십시오.

성화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의 약속처럼 하나님은 시작하신 선한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되 낙심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결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고난이 계속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순종을 실천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고, 정직하게 일하고, 불의에 맞서며, 용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밉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오늘 살아냅니다.

 

우리의 기도는 결국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기도는 우리의 말뿐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기도는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기도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며 이웃과 나누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유혹 앞에서 깨어 있고, 죄와 타협하지 않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의 계획에 끌어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를 믿음으로 기다리며,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아버지를 구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십시오.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로워지고,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그날까지, 믿음으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순종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4. 마무리 기도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기도가 무엇인지 다시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때로 기도를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래 기도하고 많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계획에 맞추려 했던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다시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의 입술로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욕망과 계획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먼저 구하게 하옵소서.

 

오늘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물질과 성공과 세상의 인정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배고픈 자를 돌보며, 외로운 자를 위로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힘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쌓인 분노와 미움과 복수심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게 하옵소서. 불의를 외면하지 않되 악으로 악을 갚지 않게 하시고, 진실과 정의와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기도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침묵처럼 느껴지는 시간에도 주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응답이 지연될 때 믿음을 잃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기대와 다른 길로 인도하실 때에도 주님의 지혜를 신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성령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굳게 붙들게 하시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옵소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새롭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교만을 낮추시고, 탐욕을 다루시며,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고, 인정받기 위해 살던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며, 세상의 성공만을 바라보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넘어지면 회개하고, 낙심하면 다시 기도하며, 두려움이 찾아오면 주님의 약속을 붙들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가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다리며 사랑으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