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성경적 관점] 선교 - 복음의 완성, 선교의 심장 '십자가' 를 이루신 하나님의 열심

선교의 성경적 관점 -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프롤로그. 쓰레기 더미 한가운데서 발견한 하나님의 마음
오늘 우리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선교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왜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십니까?
우리는 선교라고 하면 흔히 해외에 나가는 선교사,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 교회가 지원하는 선교비, 단기선교와 비전트립을 떠올립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교를 이러한 활동들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선교의 열매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뿌리를 놓칠 수 있습니다.
선교의 뿌리는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있습니다.
선교편지에 싣린 필리핀 마닐라의 지역 소식에는 쓰레기와 가난, 열악한 주거 환경,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곳을 떠나지 않고 오랜 시간 섬기는 선교사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모습도 전해집니다.
그 현장을 바라보며 우리는 묻게 됩니다.
‘하나님, 왜 이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서 살아야 합니까?’
‘교회는 이 고통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이 질문 앞에서 선교는 더 이상 교회의 행사나 특별한 사람들의 사역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묻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이 말씀은 선교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십니다. 인간이 구원의 길을 만들어 내기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여십니다.
그렇다면 선교는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명령에서만 시작됩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을 부르신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됩니까?
성경의 더 깊은 흐름을 따라가면, 선교는 창세기 12장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며, 그 세계를 생명과 복으로 채우시려는 뜻에서 출발합니다.
선교를 이해하려면 선교에 관한 몇 구절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고,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증언을 통하여 열방으로 나아가며,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세계를 찾아오시고, 구원하시며, 회복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선교의 출발점입니다.
1부. 선교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 창세기 1장과 창조의 하나님
1. 창세기 12장보다 먼저, 창세기 1장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우리는 이 구절을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 안에는 선교 신학의 중요한 토대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청을 받아 세상을 만드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나서자 그제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존재의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출발입니다.
선교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표현인 미시오 데이(Missio Dei), 곧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의 궁극적인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교회가 선교를 소유하거나 하나님께 선교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사역에 교회가 부름받아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창세기 1장 1절 자체에 ‘선교’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를 선교의 출발점으로 읽는 것은 성경 전체의 창조·타락·구속·새 창조라는 흐름을 통해 얻는 신학적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와 선교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창세기 1장 26~28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우연히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다른 인간과 함께 살아가며, 창조세계를 돌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복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창조세계는 인간의 탐욕을 위해 주어진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생명이 풍성하게 살아가도록 맡겨진 선물입니다.
시편 24편 1절은 선언합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마을, 일터와 가정, 자연과 사회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세상과 무관한 종교적 영역에 사람들을 모으는 일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창조세계를 책임 있게 돌보도록 복음으로 초대하는 일입니다.
2.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선교는 인간의 존엄을 회복합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선교의 현장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의 가치가 재산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교육 수준이나 사회적 지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국적과 인종, 문화와 경제적 생산성으로 결정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쓰레기 더미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전쟁과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도,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존엄을 인정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실제적인 고통을 줄이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에게 말로만 평안히 가라고 하고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 믿음을 비판합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도 사랑을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들은 복음 선포와 이웃 사랑을 서로 경쟁하는 사역으로 보지 않도록 합니다. 참된 복음은 인간의 영혼을 향할 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다고 선교를 사회봉사로만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음식과 주거, 교육과 안전을 제공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기독교 선교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도 있습니다.
복음 선교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전체를 창조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며, 마지막에는 몸의 부활과 창조세계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3. 죄는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창세기 3장 5절에서 뱀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을 던집니다. 인간은 창조주를 신뢰하는 대신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결정하려 합니다.
죄의 핵심에는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반역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단순히 하나의 규칙을 어겼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인간 사이에 수치와 비난이 들어오며, 땅은 고통과 수고의 자리가 됩니다. 창세기 3장 8~19절은 이러한 파괴를 보여 줍니다.
창세기 4장에서는 형제가 형제를 죽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는 세상에 폭력이 가득합니다. 창세기 11장에서는 인간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습니다.
이렇게 죄는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왜곡하며, 권력과 문화와 사회구조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선교는 바로 이 깨어진 현실 한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단지 인간을 지옥에서 건져 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은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 주는 구원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마침내 창조세계의 회복에 참여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로마서 8장 19~23절은 피조물이 탄식하며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의 큰 지평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죄로 무너진 인간과 세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4.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생명의 길을 여십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죄가 얼마나 깊이 퍼질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동시에 심판 속에서도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합니다. 창세기 6~9장에서 하나님은 죄악을 심판하시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존하시고 언약을 세우십니다.
창세기 9장 8~17절의 언약은 노아와 그의 후손만이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생물과도 관련됩니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향해 생명의 약속을 주셨다는 표징입니다.
이후 인간은 다시 바벨탑을 쌓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도시와 하나의 탑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와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 소명은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벨에서는 인간이 자기 이름을 높이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이름을 주시고 그를 통하여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 할 때 관계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선교적 흐름에서 결정적인 장면에 도착합니다.
2부. 복을 받은 사람에서 복이 되는 사람으로 — 아브라함과 열방
5.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는가
창세기 12장 1~3절은 성경 전체의 선교적 흐름을 이해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시며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개인의 성공이나 번영을 약속하는 말씀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절정은 3절에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세기 1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아브라함 자신만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얻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선택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특권이면서 동시에 사명입니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책임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 모든 민족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선교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셔서 한 가정을 변화시키십니다. 한 가정을 통하여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한 공동체를 통하여 여러 민족에게 복을 흘려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왜 이곳에 세우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재정과 교육과 경험은 누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성경적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우리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성도들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데서 찾습니다.
우리는 복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6.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을 때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은 아브라함의 가족이 강 저편에서 살았으며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인간의 종교적 성취나 도덕적 우월성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7장 2~4절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신앙보다 하나님의 계시가 먼저였습니다.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였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의 선교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선교 현장에 가서 현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자신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져다주는 주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곳의 창조주이십니다. 그 땅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습니다. 선교사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소식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선교사의 태도를 바꿉니다.
우리는 현지인을 무지한 사람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며 경청합니다.
그들의 필요를 함부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라는 일방적인 관계를 넘어,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공동체를 세웁니다.
물론 문화에 대한 존중이 복음의 진리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문화를 무조건 승인하지도 않고, 특정 문화의 우월성을 복음과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은 모든 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7.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방으로 확장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구약의 한 시대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8절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을 의롭다 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방인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의 약속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나 자손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그 복은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 믿음으로 받는 의, 성령의 선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에 참여하는 은혜로 구체화됩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받지만, 그 약속의 완성을 인간의 능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선교의 방향이 명확해집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에게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돕습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은혜는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흘러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선교는 사람들을 우리 공동체의 성과로 만드는 일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숙한 제자로 살아가도록 섬기는 일입니까? 이 질문에 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선교의 목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3부. 구원받은 백성은 왜 세상으로 보내지는가 — 출애굽과 거룩한 공동체
8. 출애굽은 해방의 사건이며 파송의 시작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출애굽기 3장 7~8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의 근심을 알고, 그들을 건져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출애굽기 3장 10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선교의 또 다른 특징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실 뿐 아니라 보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보내심은 인간의 독립적인 활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적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세우시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만드십니다.
출애굽기 19장 4~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시며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이 말씀은 선교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과 분리된 자기만족의 공동체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와 자비를 드러내도록 부르셨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섬기는 역할을 합니다. 제사장 나라라는 정체성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서 열방 가운데 특별한 책임을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구원의 은혜를 세상에 드러내는 공동체입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 거룩한 사람처럼 행동합니까, 아니면 가정과 일터와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냅니까?
9. 선교의 출발은 거룩함입니다
레위기 19장 2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함은 선교와 별개의 주제가 아닙니다. 선교적 공동체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는 선교를 이야기할 때 예산과 인원, 방문 지역과 사역 프로그램, 언어 능력과 전문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실제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입니까?
선교 현장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일치합니까?
현지인을 존중합니까?
맡겨진 재정을 정직하게 사용합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도록 경계합니까?
성적인 순결과 재정적 투명성을 지키고 있습니까?
갈등이 생겼을 때 권위로 억누르지 않고 진실과 사랑으로 해결합니까?
거룩함은 단지 외적인 규칙을 지키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삶 전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도록 변화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절은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선교사는 복음을 설명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복음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의 거룩함이 복음의 능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완전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참으로 경험한 사람은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변화되며, 그 변화는 복음 증언의 신뢰성과 깊이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프로그램보다 먼저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변화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제자도의 문제입니다.
10. 광야는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백성이 빚어지는 시간입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곧바로 완성된 공동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했고, 두려워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시면서 율법을 주시고, 예배의 질서를 가르치시고, 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
레위기와 민수기와 신명기를 단순히 지루한 규칙과 여행 기록으로 읽으면 이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이 책들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거룩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레위기 19장 9~18절에는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한 배려, 정직한 재판, 이웃 사랑에 관한 규정이 등장합니다.
레위기 19장 34절은 거류민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0장 17~19절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명분이 아닙니다.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는 사명입니다.
교회가 약자를 보호하고, 정직을 실천하고, 차별과 착취를 거부하며, 낯선 사람을 환대할 때 복음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반대로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권력과 돈을 숭배하고, 약자를 이용하고, 잘못을 은폐한다면 복음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복음의 성품을 가릴 수 있습니다.
선교의 열매는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을 수행했는가로만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 갔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11. 선교적 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순종과 불순종이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사사기 21장 25절은 각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를 묘사합니다.
열왕기의 역사에서도 우상숭배와 불의, 회개와 심판, 하나님의 긍휼이 반복됩니다.
이 역사는 인간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어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이사야 49장 6절에서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의 회복만이 아니라 땅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사야 56장 6~8절은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60장 1~3절은 열방과 왕들이 빛으로 나아오는 비전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온 땅의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구약의 선교적 흐름은 한 민족의 종교적 성공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을 복 주시고, 마침내 온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시는 계획을 보여 줍니다.
이제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합니다.
4부. 선교의 심장은 십자가다 —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완성
12.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교가 육신을 입고 오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시기만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실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만나셨고, 죄인과 식사하셨으며,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당시 종교적·사회적 경계 바깥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이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은혜를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통전성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죄 사함과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질병과 배제와 억압과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단순히 사회적 해방의 선언으로만 읽어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연결되어 있으며,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잠시 도움을 주는 데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은 예수님의 선포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선교는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사람들을 제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13.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선교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선포합니다. 세상의 권력은 지배와 강압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과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십자가는 죄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20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적대와 강압의 방식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서 십자가와 정반대되는 지배와 모욕의 방식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말하는 방식까지 그리스도의 성품에 의해 다스림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존중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선교 성과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도움을 주면서 신앙을 강요하거나, 사람의 절박함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현지 교회를 우리 사역의 부속 기관처럼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함께 배우고 섬기는 동역자로 대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선교의 메시지일 뿐 아니라 선교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는 십자가의 방식으로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14. 부활은 선교의 능력이며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선교의 중심이라면, 부활은 선교의 소망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22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죄와 죽음이 마지막 권세가 아니라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이것이 선교사에게 왜 중요합니까?
선교 현장에는 오랜 수고에도 변화가 더디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거절당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폭력의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교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사역의 열매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선교의 결과를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성공으로만 판단하지 않도록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주 안에서 하는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격려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전략과 방법을 점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책임 있게 평가하고 배우며 개선해야 합니다.
다만 궁극적인 열매는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교는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충성하는 일입니다.
15. 지상명령은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신 본문입니다.
이 명령은 선교의 중요한 기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선언하신 후 모든 민족을 향한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선교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복음은 특정 국가나 민족, 계층이나 문화에 독점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열방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을 향해 선포됩니다.
둘째, 선교의 목표는 단순한 결신자의 숫자 증가가 아니라 제자 삼음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사에 참석했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신했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씀 안에서 자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웠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선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며, 동시에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5부. 교회는 선교의 주인이 아니라 증인이다 — 성령과 선교적 교회
16. 성령께서 교회를 보내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교는 인간의 열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능력을 주시고, 복음을 증언하도록 이끄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시자 여러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이 선포됩니다. 바벨탑에서 언어의 혼란과 흩어짐이 등장했다면, 오순절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듣게 됩니다.
물론 오순절 사건이 모든 문화적 차이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일을 듣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복음은 하나의 민족 문화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가 세워지게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시며, 복음의 은혜가 민족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안디옥 교회가 예배하고 금식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합니다.
이 장면은 선교적 교회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교회는 먼저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사람을 세우고, 보내고, 함께 사역하며,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17. 선교하는 교회에서 선교적 교회로
우리는 종종 선교를 교회가 수행하는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로 생각합니다.
교육부가 있고, 예배부가 있고, 봉사부가 있고, 선교부가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다 보면 선교는 특정 부서나 선교 담당자에게 맡겨진 일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라는 관점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에 앞서 ‘교회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성령 안에서 세상으로 보냄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의 여러 활동 중 하나일 뿐 아니라 교회의 존재 목적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인이 해외 선교사로 떠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부르십니다.
어떤 사람은 타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어떤 사람은 현지 교회를 세우고 양육합니다.
어떤 사람은 번역과 교육을 담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정과 행정으로 선교를 뒷받침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과 학교와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16절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역할임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적 성숙은 선교 행사의 규모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일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며, 다른 사람을 제자로 세우고, 공동체가 함께 세상에 복음을 드러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18.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의 성공으로 바꾸지 마십시오
선교학에서 미시오 데이라는 표현은 선교의 주체를 하나님께 돌려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52년 빌링겐 국제선교협의회 이후 이 개념은 선교를 교회의 확장 전략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선교 신학의 발전은 교회가 스스로를 선교의 주인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한다고 해서 교회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복음 선포와 제자 양육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반대로 복음 전도만 강조하면서 가난과 불의와 고통을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은 제자 삼음과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사명을 보여 줍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 말씀들을 함께 읽으면 선교는 복음 선포와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을 아무 구별 없이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사회적 봉사 자체가 죄 사함과 구원을 대신하지는 않으며, 복음 전도를 핑계로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가며,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화해를 증언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교적 교회의 방향입니다.
19. 가난한 이웃을 향한 선교는 동정이 아니라 이웃 사랑입니다
다시 필리핀 톤도의 선교 현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단지 선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이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교는 눈물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필요한 것을 함께 살피며, 지역 공동체와 협력하고, 교육과 돌봄과 회복을 위한 실제적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설명하십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사마리아인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상처를 돌보고,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고, 회복할 때까지 돌봄을 마련했습니다.
이웃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다만 선교 현장에서 외부의 도움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지 공동체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시설이나 프로그램을 만들면 오히려 의존성을 키우거나 기존의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교는 현지 교회와 주민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며, 지원의 과정과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사역의 성과로 취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존엄과 회복은 보고서의 숫자보다 중요합니다. 현지 공동체의 성장은 외부 선교단체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고 책임 있는 공동체로 세워 가야 합니다.
20. 일터와 가정도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선교를 해외에서만 이루어지는 일로 생각하면 대부분의 성도는 자신의 일상과 선교를 분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5장 13~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부르십니다.
골로새서 3장 23~24절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은 이방인 가운데서 선한 행실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들은 일상의 삶이 복음 증언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직장인, 약자를 보호하는 지도자, 책임 있게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 자녀에게 믿음과 사랑을 보여 주는 부모, 지역사회에서 이웃을 돌보는 성도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선한 행동을 곧바로 선교라고 부르기만 하면 선교의 고유한 의미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시적으로 증언하고 제자를 세우는 사명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 증언은 일상의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과 살아가는 방식이 일치할 때, 우리의 삶은 복음을 설명하는 신뢰할 만한 증언이 됩니다.
6부. 모든 민족이 예배하는 그날까지 — 새 창조와 선교의 완성
21. 성경의 마지막 장면은 열방의 예배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성경의 이야기는 요한계시록에서 완성의 비전을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0절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을 찬양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 장면은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보여 줍니다.
선교의 목표는 교회 조직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국가의 문화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에서도 어린양이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다고 노래합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지만, 그 민족들이 가진 언어와 역사와 문화적 다양성이 단순히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민족을 한 백성으로 모으십니다. 그 통일성은 획일성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서로 화목하게 된 데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열방의 예배가 가진 아름다움입니다.
22. 구원은 새 창조를 향한 회복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5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며,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없게 하시는 날이 옵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1장의 창조와 깊이 연결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창조세계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성경의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이 깨어진 세계를 버리시는 모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 말씀은 선교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선교는 인간의 능력으로 세상을 완전한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의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보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과 새 창조를 통해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을 믿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노력만으로 모든 악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의 삶에서 그 나라의 가치를 실천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며, 불의에 맞서고, 화해를 위해 힘쓰며,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세웁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을 바라보는 교회가 오늘 드리는 신실한 증언입니다.
23. 선교는 종말을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은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선교의 긴박성을 일깨웁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박해와 전쟁과 가난 속에서 고통받는 공동체가 있으며, 복음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의 완성 시기나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의 계산으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특정 선교 전략이나 인간의 성취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는 것처럼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날짜를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충성스럽게 증언하는 일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3절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서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기도는 현실을 포기하는 사람의 외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을 믿기에 오늘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려는 교회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모든 결과를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뿌린 씨앗이 열매 맺는 순간을 직접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고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믿음으로 감당했던 사랑과 섬김과 복음의 증언은 하나님의 완성된 계획 안에서 그 의미를 드러낼 것입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선교의 흐름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생명과 복을 맡기십니다.
창세기 3장에서 죄가 들어와 하나님과 인간과 창조세계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억압받는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십니다.
예언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시며 열방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다시 선포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십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이끄십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며 새 창조의 완성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째,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가 선교의 주인이 아닙니다. 선교사는 구원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구원의 사역에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하기보다 감사해야 합니다. 지배하기보다 섬겨야 합니다. 성과를 독점하기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 선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회적 책임은 중요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교육과 의료와 개발 사역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을 증언합니다.
셋째, 선교의 목적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로 살아가며, 새 창조의 소망에 참여하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하는 이유는 교회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의 규모를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흘려보내도록 부름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단순히 ‘올해 얼마나 많은 선교를 했는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깊이 배웠는가?’
‘우리의 선교는 현지 사람들의 존엄과 주체성을 존중했는가?’
‘우리의 공동체는 복음에 합당하게 거룩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는가?’
‘우리는 사람들을 일회성 행사에 초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고 있는가?’
‘우리의 삶과 교회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가?’
이 질문들이 우리의 선교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시 세상으로 보내집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부르심은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합니다.
너는 받은 복을 누구에게 흘려보낼 것인가? 출애굽에서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합니다.
너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있는가?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합니다.
너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는가, 아니면 사랑으로 섬기려 하는가?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우리의 수고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도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를 특별한 사람들의 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일입니다. 복음을 따라 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새 창조를 소망하며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자리를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시작한 사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사역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열방을 바라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민족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는 그날까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거룩함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기도. 열방을 품고 새 창조를 기다리는 교회의 기도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주님의 형상으로 지으시며, 생명과 복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할 때에도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으며, 죄와 반역으로 무너진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선교를 우리의 열심과 계획으로 시작하려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과 재정과 경험을 자랑하며, 때로는 우리의 성과를 하나님의 영광보다 앞세웠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듣지 않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방식을 강요했으며,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존엄과 주체성을 온전히 존중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우리 안에 가두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해 가정이 복을 받고, 이웃이 위로를 얻으며,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게 하옵소서.
애굽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던 하나님, 오늘도 전쟁과 가난과 질병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쓰레기 더미와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웃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 사회에서 배제되고 잊힌 사람들, 미래의 희망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그들을 단지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이웃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고통에 함께하며, 지혜롭고 책임 있는 사랑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교회를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 주옵소서.
재정을 정직하게 사용하게 하시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시며, 잘못을 숨기기보다 회개하고 책임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성령 하나님, 우리에게 선교의 열정을 주실 뿐 아니라 분별력을 주옵소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섬겨야 하는지 말씀으로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의 계획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게 하시고, 우리의 자랑보다 주님의 영광을 구하게 하시며,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한 영혼의 온전한 회복과 성숙한 제자의 삶을 소중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교의 중심에 두게 하옵소서. 복음을 전하되 사랑으로 전하게 하시고, 진리를 지키되 겸손하게 지키게 하시며, 세상을 섬기되 세상의 방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보내는 선교사들을 지켜 주시고, 현지 교회와 동역자들에게 지혜와 용기와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여 주옵소서.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배우며, 함께 주님의 나라를 섬기게 하옵소서.
가정과 학교와 일터와 지역사회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살아 내게 하옵소서. 정직한 사람으로, 약자를 보호하는 사람으로, 화해를 이루는 사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수고가 때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모든 결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예배하는 그날을 소망하게 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선교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시작이 주님의 은혜였고, 우리의 걸음이 주님의 인도하심이며, 우리의 마지막 소망이 주님의 영광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성부 하나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거하시며 증언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