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예수님의 비유 8강]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마태복음 7장 6절)

knowledgeplatform100 2026. 10. 20. 12:39

복음의 가치를 분별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태도 앞에서 지혜롭게 행동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1. 진주를 던지기 전에, 먼저 내 손을 보라 (마태복음 7장 6절)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매우 낯설고도 강렬한 한 구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 마태복음 7장 6절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갑자기 개와 돼지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거룩한 것과 진주는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한다면 복음 전도의 사명과 충돌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고, 사도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순히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의 가치를 분별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태도 앞에서 지혜롭게 행동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은 바로 앞의 가르침과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3절에서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그런데 그 말씀 바로 뒤에 개와 돼지, 거룩한 것과 진주가 등장합니다.

이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정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별은 필요하지만, 자기 의를 높이기 위한 정죄는 금지됩니다.  복음의 거룩함을 지켜야 하지만, 그 거룩함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의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진주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돌멩이로 바꾸고 있는가?

 

2. 염려의 뿌리: 하나님을 떠나 나를 지키려는 마음

본문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산상수훈의 앞부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예수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시고,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마태복음 6장 33절

이 말씀은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먹고 입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문제는 필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필요를 해결하는 일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며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충분히 벌어야 안전하다.’ ‘내가 인정받아야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실수하지 않아야 존중받는다.’ ‘내가 남보다 의로워야 하나님 앞에서도 괜찮다.’

 

이 마음은 때로 성실함과 책임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가정을 돌보고,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 모든 일을 통해 자기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려 한다면, 우리의 선한 행동마저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려 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창세기 3장 5절

죄의 핵심은 단순히 하나의 금지된 열매를 먹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신뢰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자기 판단과 자기 욕망을 삶의 최종 기준으로 삼으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 합니다. 가진 것이 부족하면 불안하고, 남이 나보다 앞서면 위협을 느끼며, 자신의 성취가 흔들리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자기 증명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충분히 의롭고 훌륭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장 8절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힘으로 네 가치를 만들어 내야만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신자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은혜는 게으름의 변명이 아니라, 두려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3. 들보를 가진 눈: 자기 의가 타인을 심판할 때

이제 마태복음 7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금하시는 것은 모든 도덕적 판단이나 분별 자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고, 악을 악이라고 말하며, 공동체 안의 죄를 바로잡으라고도 가르칩니다.

문제는 판단의 목적과 태도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유가 그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 사람을 낮추어 나를 높이기 위해서인가?

 

누군가의 실패를 보며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이미 자기 의의 함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누가복음 18장 11절

그는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의 종교적 실천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건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우월하다는 증거로 사용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누가복음 18장 13절

예수님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가장 깊이 직면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다윗과 나단의 이야기도 이를 보여 줍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악을 들었을 때 분노했지만, 나단은 그 이야기가 바로 다윗 자신을 향한 것임을 드러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7절). 다윗은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데는 민감했지만, 자신의 죄를 직면하는 데는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러므로 들보를 뺀다는 것은 내가 완전한 사람이 되어 남을 판단할 자격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의 죄와 한계를 인정하고, 회개와 은혜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은 타인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타인을 자기 의를 증명하는 재료로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7장 6절을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거룩한 것을 분별하라는 말씀은 남을 멸시하라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자기 마음을 살피라는 요청입니다.

 

 

4. 거룩한 것과 진주: 복음의 가치와 분별의 책임

이제 오늘의 중심 구절로 돌아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 마태복음 7장 6절

예수님 당시 개와 돼지는 오늘날 우리가 애완동물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와 달랐습니다.

개는 흔히 거리에서 먹이를 찾아다니는 동물로, 돼지는 유대인의 정결 규례와 관련된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거룩한 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모욕하는 태도를 묘사하십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것’과 ‘진주’는 무엇입니까?

본문 자체가 두 대상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산상수훈 전체의 흐름에서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귀한 것, 특히 하나님 나라의 말씀과 복음의 가치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주는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값지고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진주를 먹을 수 있는 먹이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발로 짓밟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무지일까요? 아니면 의도적인 거부일까요?

본문은 진주를 짓밟고 돌아서서 던진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선물이 모욕당하고, 그 선물을 전하는 사람까지 적대적인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복음은 아무렇게나 취급할 수 있는 값싼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의 내용을 자기 편의에 따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하거나, 듣기 좋은 이야기만 골라 전하거나, 회개와 십자가를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죄인을 위로하지만 동시에 죄를 드러냅니다. 우리를 사랑하지만 우리를 자기중심적인 삶에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만, 옛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삶을 요구합니다.

둘째, 복음을 전할 때는 상대방의 반응을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을 무조건 설득하려고 끝없이 논쟁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한 뒤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는 대화를 멈추고,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적대적인 상황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주의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복음을 거부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영원히 ‘개와 돼지’라고 규정할 권리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최종적으로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거부하는 사람이 내일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때 교회를 박해했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뒤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사도행전 9장 1–22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셨으며, 이방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7장 6절은 전도 대상자를 함부로 선별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멸시하거나, 복음을 독점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복음의 거룩함을 지키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태도가 지혜롭고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진주를 전하는 사람이지, 진주의 주인이 아닙니다.

 

 

5.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

마태복음 7장 6절 다음에는 놀랍게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마태복음 7장 7절

그리고 예수님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마태복음 7장 11절

누가복음의 평행본문은 이 말씀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누가복음 11장 13절

마태복음은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하고, 누가복음은 그 좋은 선물의 핵심을 성령으로 드러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의 중요한 질서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을 내 욕망에 맞추어 움직이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녀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원하는 방식과 시간에 받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참으로 좋은 것인지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을 감당할 믿음과 지혜를 주십니다.

때로 우리의 상황을 즉시 바꾸시지 않지만, 그 상황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태도와 하나님께 구하는 태도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보다 자기 욕망의 충족을 더 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은혜의 가치를 깨닫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시오’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 뜻이 주님의 뜻 앞에서 바르게 변화되게 하십시오.

제 안의 교만을 깨뜨리시고,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십시오.’

이것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성숙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주를 얻어 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더욱 깊이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6. 황금률의 중심: 먼저 우리를 대접하신 그리스도

마태복음 7장 12절은 산상수훈의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왜 예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 뒤에 황금률을 두셨을까요?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산상수훈 전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분노와 멸시의 문제까지 다루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마음의 욕망까지 다룹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의 범위를 나에게 친절한 사람들 너머로 확장합니다.

 

그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모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 마태복음 22장 37–39절

황금률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처세술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랑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을 자기 힘만으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고도 마음속으로 미워할 수 있습니다.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듣고도 상대방이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선한 행동을 하면서 속으로는 인정과 보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이 사랑을 배워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갖추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요한일서 4장 19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깊은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십자가에서 드러내셨습니다.

동시에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률은 우리가 먼저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사랑받으라는 조건이 아닙니다.

먼저 사랑받은 사람이 그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라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주를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내 생각대로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논쟁에서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7.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 자기 자랑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종교적 성취가 구원의 값을 치르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장 23절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장 24절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공로를 하나님께 제출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받아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선행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우리가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으며, 이것이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다음 10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선언합니다.

이 세 구절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 선행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공로가 아닙니다.

  • 선행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 선행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태도는 복음의 결론이 아닙니다.

은혜를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기 자랑에서 자유로워지고, 동시에 사랑의 책임을 받아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은 행함이 없는 믿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 말씀들은 바울의 은혜 교리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하는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며, 그 믿음이 사랑과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았기에 선한 일을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외로운 이웃을 돌보는 일, 불의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는 일, 진실을 말하고 책임을 다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드러내는 소중한 열매입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 한다면 우리는 다시 자기 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웃을 섬긴다면 우리의 삶은 은혜의 증언이 됩니다.

은혜는 선행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자기 자랑에서 해방시킵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는 교회

교회는 서로의 성취를 비교하며 누가 더 경건한지 경쟁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범죄한 사람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 자신도 시험받을까 살피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죄를 방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되, 회복을 목표로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 넘어졌을 때 우리는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한 칼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빛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주를 가진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전시장이 아니라, 진주를 거저 받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함께 배우고 감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8. 진주를 받은 사람의 기도: 분별과 겸손으로 복음을 살아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복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명예, 사람들의 인정이 우리 삶의 최종 가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둘째,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눈을 살피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쉽게 발견하지만, 자기 안의 교만과 자기 의는 놓치기 쉽습니다. 진리를 분별하되, 정죄와 멸시로 흐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셋째, 복음을 전할 때 사랑과 지혜를 함께 구하십시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설득하려고 모든 관계를 논쟁으로 만들지도 마십시오.

때로는 말해야 하고, 때로는 기다려야 하며, 때로는 조용히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주인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하며, 우리가 맡은 증언을 신실하게 감당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주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통해 내 의로움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가?

나는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말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가?

 

우리의 대답이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이 다시 우리를 붙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도 우리 안에 사랑이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주를 전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진주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귀한 은혜를 우리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겸손히 구하고, 신실하게 찾고, 믿음으로 문을 두드립시다.

우리의 기도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분별이 정죄가 아니라 사랑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선행이 자랑이 아니라 감사의 열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그 거룩한 진주를 세상의 소음 속에 묻어 두지 말고, 말과 삶으로 아름답게 증언하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으면서도 때로는 그 은혜를 잊고, 자신의 의와 성취를 자랑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은 쉽게 보면서도,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했던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거룩한 진주의 가치를 깨닫게 하시고, 복음을 값싼 말이나 자기 자랑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게 하옵소서.

 

진리를 분별하되 사랑을 잃지 않게 하시고, 잘못을 바로잡되 정죄와 멸시가 아니라 회복을 위해 말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마음을 억지로 움직이려 하지 말고,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며 겸손과 지혜로 증언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선한 행실이 구원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의 열매가 되게 하시고, 가난한 이웃과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우리의 욕망만을 채우려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붙들게 하시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과 말과 기도가 주님의 거룩한 진주를 아름답게 드러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