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칼럼] 부정한 희생제물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제 1부. 부정한 희생제물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하나님은 왜 제사장을 이렇게까지 책망하셨는가? (말라기 2:1-9)
하나님을 잃어버린 경외없는 예배, 사랑없는 제사, 사명없는 직분
말씀을 듣고, 마음에 두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얼굴에 먹칠했다."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이런 표현은 지금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말라기 2:3)
왜 하나님께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을까요?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제사장의 얼굴에 희생제물의 배설물을 바르겠다고까지 말씀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단순한 분노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언약을 배신한 영적 지도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최후의 경고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벧전 2:9)
따라서 말라기의 메시지는 과거 제사장만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오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1. 하나님을 잃어버린 경외없는 예배, 사랑없는 제사, 사명없는 직분
말라기는 포로 귀환 이후 기록되었습니다. 성전은 재건되었습니다. 예배도 회복되었습니다.
제사도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정상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르게 보셨습니다.
예배는 있었지만 경외가 없었습니다. 제사는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직분은 있었지만 사명은 사라졌습니다.
말라기 전체는 반복되는 질문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면 백성은 묻습니다.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너희가 내 이름을 멸시하였다." 그러면 또 묻습니다. "우리가 언제 멸시하였습니까?"
이 질문은 무지가 아니라 영적 둔감함입니다. 죄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2. 예배의 타락에서 시작된 제사장의 가짜 예배와 타락
말라기 1장에서 하나님은 병든 짐승을 제물로 가져오는 제사장을 책망하십니다.
총독에게도 드리지 못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예배가 형식이 되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올려 드리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
신약의 예배는 짐승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3. '수치'를 너머 '언약 파기' 선언으로 영광을 거두는 하나님의 똥칠
말라기 2장 3절은 당시 제사의 배경을 알면 더욱 충격적입니다.
희생제물의 배설물은 진영 밖으로 버려졌습니다. (레위기 4:11-12) 그것은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정한 것을 제사장의 얼굴에 바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창피를 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가 거룩을 잃었으니 이제는 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라는 언약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직분보다 거룩을 보십니다. 사역보다 순종을 보십니다. 외형보다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동일한 위험 앞에 있습니다.
교회가 커질 수 있습니다. 사역이 많을 수 있습니다. 콘텐츠가 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과 거룩을 잃는 순간, 하나님은 그 영광을 거두십니다.
4.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으로 특권자가 아니라 사명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특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은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보여 줍니다.
"너희가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스라엘은 선택받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열방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선택받았습니다.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신약교회에 적용합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벧전 2:9)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목적은 내부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직장, 가정, 학교, 삶의 현장이 바로 제사장의 사역지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열방을 부르시며, 왕 같은 제사장을 통해 세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제 2부.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영적 여정
1. 말씀을 듣고, 마음에 두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말라기 2:2)
말라기 2장의 핵심은 단 한 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책망하시면서 단순히 죄를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회복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길은 세 가지입니다.
- 말씀을 들으라.
- 말씀을 마음에 두라.
-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
이 세 가지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영적 성장 과정이며,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완성하는 영적 여정입니다.
(1) 첫 번째, 이스라엘아 말씀을 들으라
"너희가 듣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가장 먼저 **'듣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믿음은 보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기적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감정에서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출발점을 말씀을 듣는 것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창 1장),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도 말씀으로 살아났으며(겔 37장),
오순절의 교회도 베드로의 말씀 선포를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행 2장).
말씀이 생명을 낳고, 말씀이 교회를 세우며,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듣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쉐마(שמע)'는 '듣다' '순종하다' '응답하다' 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6장의 유명한 고백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나님은 단순히 귀를 열라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듣습니다. 사랑하면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삶입니다.
말씀보다 내 생각을 믿는 것이 교만이다
오늘날 교회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성주의입니다. "내가 이해해야 믿겠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사 55:8-9)
신앙은 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 위에 하나님의 계시를 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감정주의입니다. "은혜가 되면 믿겠다." "느낌이 와야 순종하겠다." 그러나 감정은 날씨처럼 변합니다.
오늘 뜨겁다가도 내일 식어버립니다. 기적을 보고도 돌아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병이어를 경험한 군중도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도망쳤습니다.
느낌은 신앙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말씀만이 사람을 끝까지 붙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여 준 영성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르다는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세상은 마르다를 칭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 (눅 10:42)
왜입니까? 봉사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봉사의 힘은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 없는 봉사는 쉽게 지칩니다. 말씀 없는 열정은 결국 자기 열심이 됩니다. 말씀 없는 사역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말씀 앞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교회의 능력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성도의 능력은 경험보다 말씀입니다.
(2) 두 번째, 말씀을 마음에 두라
말라기 2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단순히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이 말은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삶의 중심에 새기다, 내면화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은 귀를 통과하여 마음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열매 맺는 사람입니다(눅 8:15).
말씀이 지식으로 머물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질 때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며,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말씀이 붙든 예레미야 선지자 (말씀의 내면화)
예레미야는 핍박 때문에 더 이상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이것이 내면화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붙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람을 붙드는 상태입니다.
참된 영성은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다스리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갈렙의 내면화
갈렙은 45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85세가 되었을 때 말합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수 14:12)
환경은 변했습니다. 세대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의 심장 속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내면화된 말씀은 세월을 이깁니다. 상황을 이깁니다. 두려움을 이깁니다.
말씀을 오래 들은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오래 머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매일 말씀으로 자신을 조율하는 삶,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본질입니다.
창세기는 에녹과 노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동행은 단순히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아닙니다. 매일 말씀으로 자신을 조율하는 삶입니다.
동행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과정입니다. 내 뜻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욕심은 줄어들고, 그리스도의 성품은 자라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갈 2:20)
이것이 말씀의 내면화이며, 제사장의 영성입니다.
삶의 적용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말씀을 얼마나 들었는가가 아니라, 말씀이 얼마나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말씀이 우리의 소비를 바꾸고, 말씀이 우리의 인간관계를 바꾸고, 말씀이 우리의 사명을 결정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 3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 (소요리문답 제1문)
1.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삶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 말라기 2:2)
(1) 창조질서의 첫 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
말라기 2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 이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사 43:7)
창조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구원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 역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말라기는 이미 구약에서 이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많은 사람들은 영광을 화려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건물. 큰 교회. 많은 사람. 엄청난 기적.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곳에서 영광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입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열방이 복음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곧이어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요 12:24)
세상은 성공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영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높아지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낮아지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많이 내어주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3) 제사장의 영광은 선교에 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왜입니까? 열방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도 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선포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성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파송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마지막 명령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마 28:1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제사장의 삶은 "모이는 삶"이 아니라 "보냄받는 삶"입니다.
(4)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현대 선교신학은 중요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를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라고 부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셨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셨으며, 삼위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입니다.
(5) 생명과 평강의 언약
말라기 2장 5절은 놀라운 약속을 합니다.
"내가 그와 맺은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생명. 평강. 이 두 단어는 성경 전체를 대표하는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7)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흘러나옵니다. 평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세상은 조건이 좋아야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감옥에서도 찬송했던 바울과 실라, 죽음을 앞두고 잠들었던 베드로, 사자굴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다니엘,
모두 하나님의 평강을 누렸던 왕 같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질문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인가?" 직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직책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물으십니다.
첫째, 말씀을 듣고 있는가?
둘째, 말씀이 너를 지배하고 있는가?
셋째, 너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가? 말라기는 이 세 가지를 회복하라고 외칩니다.
제 4부. 예수 그리스도, 참된 대제사장
말라기의 제사장들은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실패했습니다. 우리 역시 완전한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대제사장을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는 선언합니다.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히 4:14)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단 한 번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분은 얼굴에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저주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수치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의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정죄받는 제사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다시 세워지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많은 프로그램보다 많은 행사보다 많은 지식보다 왕 같은 제사장을 찾고 계십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 말씀이 심령 깊이 새겨진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드리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얼굴에 수치를 입는 제사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길 소망합니다.
영성 깊은 기도문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말라기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멀어져 있었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순종하지 않았으며,
직분은 있었지만 제사장의 사명을 잊고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의 귀를 다시 열어 주셔서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과 삶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우리의 욕심과 두려움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향기로운 제사가 되게 하시고, 가정, 일터, 교회와 세상 가운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얼굴이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시며, 생명과 평강의 언약 안에서 끝까지 충성하는 백성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안내해드립니다. 더 편하고 유익하게 콘텐츠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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