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세를 이기는 '알곡' 신앙
하나님만 첫 번째로 두는 사람이 끝까지 승리합니다 (본문: 디모데후서 3:1-17)
제1부. 고통의 시대가 오면 믿음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기술은 발전하고, 정보는 넘쳐나고, 생활은 편리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물질은 풍성해졌는데 영혼은 더 공허해졌고, 사람들은 더 많이 연결되었는데 관계는 더욱 단절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2천 년 전에 놀라운 예언을 남겼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디모데후서 3:1)
여기서 바울은 말세를 설명하면서 전쟁이나 기근이나 정치적 혼란을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하는 때" 라고 말합니다.
원어의 의미는 "견디기 힘든 시대", "극도로 어려운 시대", "사람의 영혼을 압박하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를 고통의 시대로 허락하실까요?
그 이유는 놀랍게도 고통이 사람의 믿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1) 알곡과 가라지는 평소에는 구별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마태복음 13:30)
가라지도 어릴 때는 밀처럼 보입니다.
멀리서 보면 구별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추수 때가 되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알곡은 열매 때문에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끝까지 꼿꼿합니다.
알곡은 무게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무게가 없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평안할 때는 누가 진짜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교회도 다니고,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오면 달라집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오고, 건강의 문제가 오고, 관계의 상처가 오고, 인생의 폭풍이 몰아치면
그때 비로소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납니다.
(2)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도 있었고,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둘 다 기적을 보았습니다. 둘 다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고난 앞에서 둘의 믿음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넘어졌지만 회개했습니다. 유다는 넘어지고 절망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었고, 유다는 자기 자신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바꾸지 않습니다. 고난은 사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말세는 믿음을 만드는 시대가 아니라 믿음을 검증하는 시대입니다.
(3) 하나님은 왜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베드로전서 1:7)
금을 정련할 때 불을 사용합니다.
불은 금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불은 금을 순수하게 만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멸망을 위한 불이 아닙니다.
정결함을 위한 불입니다. 성숙을 위한 불입니다.
거짓을 제거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불입니다.
(4) 말세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랑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디모데후서 3:2)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디모데후서 3:4)
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핵심 단어가 반복됩니다.
"사랑"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하고,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말세의 위기는 경제 위기가 아니라 사랑의 위기입니다.
(5) 하나님만 첫 번째가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모두 두 번째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33)
여기서 핵심은 "먼저"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직장보다 먼저,
가정보다 먼저,
건강보다 먼저,
성공보다 먼저, 하나님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6)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 (창세기 22:2)
하나님은 왜 이삭을 요구하셨을까요? 이삭이 나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삭은 축복이었습니다. 약속이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축복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내가 준 선물을 더 사랑하느냐?"
아브라함은 이삭보다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7) 우리의 이삭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이삭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에 설 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로새서 3:5)
우상은 돌로 만든 신상만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8) 영적 질문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의 첫 번째는 누구냐?"
"네가 가장 잃기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냐?"
"네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시대의 우상일 수 있습니다.
말세를 이기는 첫 번째 비결은 교회를 많이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알곡입니다. 그 사람이 끝까지 갑니다.
제2부. 말세일수록 사랑은 식고, 알곡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단순히 죄의 목록만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들의 뿌리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부터 5절에는 무려 열아홉 가지의 죄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죄의 중심에는 '사랑의 왜곡'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마음이 자기 자신을 향하고, 이웃을 향해야 할 사랑이 욕심으로 변질되고,
거룩을 향해야 할 열정이 쾌락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시대를 말씀하시며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24:12-13)
사랑이 식는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이 식고, 예배의 감격이 사라지고, 죄를 향한 거룩한 슬픔이 없어지고,
이웃을 향한 긍휼이 메말라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는 넘치지만 감동은 부족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경 지식은 많지만 눈물이 없습니다.
신학은 발전했지만 회개는 줄어들었습니다.
설교는 분석하지만 말씀 앞에서 떨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말세의 가장 큰 위기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뿐 아니라 가슴도 원하십니다.
"뜨거운 가슴을 잃지 말라."
사람은 사랑이 식으면 신앙이 의무가 됩니다.
예배는 습관이 되고, 기도는 형식이 되며, 봉사는 노동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32)
참된 말씀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뜨겁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은 놀라운 복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에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우리의 상처를 품으시며, 우리의 탄식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도 역시 눈물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죄를 보고 우는 사람,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께서 빚어 가시는 알곡입니다.
(2) 정체성을 밝히는 사람이 끝까지 승리합니다.
바울은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말합니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디모데후서 3:6)
거짓은 언제나 숨어 들어옵니다. 빛은 숨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태복음 5:14)
빛은 존재 자체가 증거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삶을 예로 들며, 목사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살아갈 때 말과 행동을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가 직장에서 "나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살아갈 때, 가정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일 때,
세상은 우리의 말보다 삶을 먼저 읽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20)
우리의 정체성은 직업이나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은 숨길수록 약해지고, 드러낼수록 견고해집니다.
(3) 오늘 우리의 질문
나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가?
나는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나는 아직도 말씀 앞에서 눈물 흘릴 수 있는가?
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사람임을 담대히 드러내고 있는가?
말세는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 승리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시대입니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 끝까지 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이 진정한 알곡으로 추수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제3부. 욕심을 버리고 순종을 선택할 때 알곡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5)
이 말씀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모양은 있는데 능력이 없습니다.
예배는 드리는데 변화가 없습니다.
찬양은 하는데 회개가 없습니다.
성경은 읽는데 순종이 없습니다.
말은 신앙적인데 삶은 세상적입니다.
겉은 그리스도인인데 속은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것을 말세의 가장 위험한 영적 상태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과 멀어졌음을 알지만, 경건의 모양만 가진 사람은 스스로 괜찮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요한계시록 3:17)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상태는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부족한 줄 모르는 상태입니다.
(1) 욕심은 영혼을 무너뜨리는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본문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디모데후서 3:6)
소원과 욕심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소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갈망입니다.
결혼을 원하는 것, 가정을 이루고 싶은 것, 직장을 갖고 싶은 것,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소원입니다.
그러나 욕심은 다릅니다.
이미 충분한데 더 가지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만족하려는 마음입니다. 욕심은 언제나 "조금만 더"를 말합니다.
조금만 더 돈을, 조금만 더 명예를, 조금만 더 인정을, 조금만 더 성공을. 그러나 욕심은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은 바닥이 없는 우물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말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하나니." (전도서 5:10)
세상은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더 많이 가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만족할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립보서 4:11)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환경이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만족을 주십니다.
(2) 욕심이 사라질 때 감사가 시작됩니다
욕심 많은 사람은 항상 부족함을 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이미 받은 은혜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받았습니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리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했습니다.
왜입니까?
감사보다 욕심이 컸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윗은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도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환경은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충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는 형편이 좋아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좋으시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감사는 영적 승리의 무기입니다. 감사는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찬양입니다.
감사는 욕심을 무너뜨리고, 감사는 두려움을 무너뜨리고, 감사는 절망을 무너뜨립니다.
(3) 항상 배우지만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디모데후서 3:7)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배우기는 배우는데 변화가 없습니다.
성경 공부는 하는데 삶이 그대로입니다. 설교는 듣는데 순종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나는데 거룩은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하나님은 지식보다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사울 왕은 제사를 드렸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상 15:22)
말씀은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실천되지 않는 진리는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순종될 때 비로소 진리가 됩니다.
(4) 신앙은 반복되는 순종 속에서 자랍니다
인생을 바꾸는 것은 순간적인 감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예배, 매일 읽는 성경, 매일의 기도, 매일의 순종. 이 작은 순종들이 모여 한 사람을 알곡으로 만듭니다.
나무는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습니다.
매일 햇빛을 받고, 매일 비를 맞으며, 조용히 자랍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순종이 내일의 성숙을 만듭니다.
오늘의 기도가 내일의 능력을 만듭니다.
오늘의 눈물이 내일의 열매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알곡으로 빚어 가십니다.
그래서 알곡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매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매일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사람입니다.
매일 주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마지막 날까지 남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어두움을 말하면서도 절망으로 설교를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승리의 길을 보여 줍니다.
본문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리니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것임이라."
(디모데후서 3:9)
이 말씀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큰 위로입니다.
거짓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가짜는 잠시 화려할 수 있지만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진실을 드러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8:17)
세상은 겉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알곡은 끝까지 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알곡은 모아 내 곳간에 들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3:30)
가라지는 끝까지 버티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곡은 마지막 추수의 날까지 남습니다.
"끝까지 가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신앙은 출발이 아닙니다. 완주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눈물로 회개하는 것도 귀하지만 끝까지 회개하는 삶이 더 귀합니다.
예배를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생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후서 4:7)
바울은 "많은 사역을 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지켰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2) 끝까지 가는 사람의 세 가지 특징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직업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마태복음 10:32)
둘째, 욕심보다 감사를 선택합니다.
욕심은 항상 부족함을 보게 하지만,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합니다.
감사는 믿음의 언어입니다.
광야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셋째, 말씀을 삶으로 살아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후서 3:15)
그리고 이어서 유명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17)
성경은 단순히 읽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붙드는 사람은 끝까지 갑니다.
(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질문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알곡인가, 아니면 가라지인가?"
"나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있는가?"
"나는 말씀을 아는 사람인가, 아니면 살아내는 사람인가?"
"나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말세는 두려워할 시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더욱 순결해지는 시대입니다.
시련은 알곡을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알곡을 더욱 단단하게 만듭니다.
폭풍은 뿌리 깊은 나무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뿌리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를 만나든지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소망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만 첫 번째로 사랑하며, 욕심보다 감사를 선택하고,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참된 알곡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때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태복음 25:21)
이 음성이 우리 모두의 영원한 소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깊은 헌신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말세의 혼란 속에서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셔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있다면 성령의 빛으로 비추어 주시고, 오직 주님만 우리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게 하옵소서.
식어 버린 사랑을 다시 불붙게 하시고, 메마른 심령에 성령의 생수를 부어 주셔서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회복되며,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긍휼이 다시 살아나게 하옵소서.
경건의 모양만 남은 신앙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을 주옵소서.
욕심을 버리고 자족을 배우게 하시며,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순종하며 살아가는 제자가 되게 하시고, 우리 삶 자체가 복음의 향기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흔들려도 다시 주님을 붙들게 하시며, 어떤 유혹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끝까지 달려가게 하옵소서.
마침내 주님의 나라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는 알곡의 삶을 살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영광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올려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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