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이가봇. “영광이 떠났다.” (사무엘상 3-4장)

knowledgeplatform100 2026. 8. 27. 09:42

「초라한 상태에 머물러도 된다」(사무엘상 3–4장)

말씀보다 상징을 붙들 때,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우리는 보통 초라해지면 빨리 벗어나려고 합니다. 실패하면 빨리 성공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빨리 해결책을 찾고 싶습니다.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사업이 어려우면 새로운 방법을 찾고, 관계가 무너지면 새로운 사람을 찾고, 사역이 힘들면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3장과 4장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신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는가?”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언약궤를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 임재의 상징을 붙들었습니다.

 

회개보다 전쟁을 선택했고, 하나님께 묻기보다 자기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갔습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패배였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이가봇”​이었습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이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상징입니까?”

 

1.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참으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없었던 시대가 아닙니다. 성경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제사도 있었습니다. 성소도 있었습니다.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언약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이것이 사사 시대의 비극입니다.

종교는 남아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너져 있었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남아 있는데 말씀은 사라졌습니다.

성소는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은 있는데 영적 분별력은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2절은 엘리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육체적인 눈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은 단순한 노년의 묘사가 아닙니다. 본문 전체를 읽으면 영적인 어둠과 연결됩니다. 말씀이 희귀합니다. 엘리의 눈은 어둡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한 아이를 준비하셨습니다.

사무엘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사람은 어두워졌습니다.

시대도 어두워졌습니다.

지도자도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약해지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나님께서 패배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이 무너졌다고 하나님의 계획까지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등불은 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뚫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찾아오십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부터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그런데 사무엘은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는 “나는 부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 부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를 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 부르고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 부르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세 번 부르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인내가 많으십니다. 우리는 한두 번 기도하고 응답이 없으면 포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3장에 나타난 사무엘의 성장은 아주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가는 순간,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성경적 의미에서는 듣고 순종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세요.” 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제 뜻을 내려놓겠습니다. 말씀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진짜 영성입니다.

 

3. 하나님의 첫 말씀은 축복이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무엘이 처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와 그의 집에 임할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은 말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종교적 직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이라고 자동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직분이 있다고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설교한다고 반드시 하나님과 친밀한 것도 아닙니다.

사역한다고 반드시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직함보다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처음 받은 말씀은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불편한 말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향해 회개를 외쳐야 합니다.

 

사무엘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숨기지 않았습니다. 

엘리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하나도 숨기지 말고 내게 말하라.”

 

그리고 사무엘은 모든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신실함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말씀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4. 그런데 4장에서 이스라엘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여기가 오늘 본문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입니다. 사무엘상 3장의 마지막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선지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의 시대가 다시 열립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듣고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벌입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합니다. 4천 명이 죽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질문 자체는 좋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습니다. 말씀을 찾지도 않습니다. 대신 무엇을 합니까? 언약궤를 가져오자고 합니다.

 

사무엘상 4장 3절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이것이 바로 상징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하는 물건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기보다 성경책부터 찾습니다. 

 

그런데 성경책을 펼치는 목적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적처럼 사용하기 위해서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십자가를 붙듭니다. 기도제목을 붙입니다. 말씀카드를 붙입니다. 예배에 참석합니다. 금식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와 순종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5. 언약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언약궤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거룩한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문제는 언약궤를 하나님보다 앞세운 것입니다. 

 

언약궤가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언약궤가 들어오면 이긴다.” 그러자 온 백성이 큰 소리를 지릅니다. 사기가 올라갑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자기중심적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더 큰 패배입니다.

 

처음에는 약 4천 명이 죽었습니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약 3만 명의 보병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까지 빼앗겼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자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건물이 있다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의 임재가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화려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유명한 목회자가 있다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6. 실패했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빨리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조금 머물러 있으십시오.

무너졌습니까? 조금 울어도 됩니다. 기도가 안 됩니까? “하나님, 저는 지금 기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해도 됩니다.

 

사업이 무너졌습니까? “하나님, 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사람에게 상처받았습니까? 괜찮은 척하지 마십시오. 아프면 아프다고 하십시오. 괴로우면 괴롭다고 하십시오.

 

모르면 모른다고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신 자리에서는 낮은 자리에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첫 전쟁에서 패배한 뒤 해야 할 것은 언약궤를 들고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왜 패했습니까?” “우리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우리의 죄를 보여 주십시오.” “우리를 고쳐 주십시오.”

 

그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대신 상징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7. 믿음은 고난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견디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너무 자주 오해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문제가 없어야 한다.” “기도하면 즉시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모든 일이 잘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윗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함께 계셨습니다.

시편 23편 4절은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중요한 것은 골짜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골짜기에서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이 “하나님, 이 문제를 빨리 없애 주십시오.” 가 아니라 “하나님, 이 문제를 통과하는 동안 저를 떠나지 마십시오.” 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깊은 기도는 “하나님, 이 고난을 통해 제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보여 주십시오.” 가 되어야 합니다.

 

8.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초라하게 하셔서 본질을 보게 하십니다

사무엘상 4장의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군사력을 잃었습니다.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제사장들을 잃었습니다.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가봇. “영광이 떠났다.”

사무엘상 4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라.”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정말 절망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것이 마지막 장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빼앗기심으로 패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짓 신앙을 심판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언약궤는 이후 블레셋 땅에서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다곤 신상이 여호와 앞에서 넘어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재앙이 임합니다. 결국 그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블레셋이 빼앗아 갈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조종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 욕망에 이용당하지 않으십니다.

 

9. “이가봇”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질로 돌아오게 하시는 경고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가봇은 단순히 “하나님이 떠났다.” 라는 절망의 선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예배를 심판하시고 참된 예배를 회복하십니다.

사무엘상 3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을 회복하십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는 거짓된 종교를 심판하십니다.

 

이 두 장을 함께 보면 하나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종교의 외형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구약의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면, 신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상징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어떤 물건에 대한 신앙이 아닙니다.

어떤 장소에 대한 신앙도 아닙니다. 어떤 감정에 대한 신앙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신앙입니다.

 

10.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말씀 없이 결정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내 생각에는…” “내 느낌에는…” “사람들이 그러는데…” 만 붙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펼치십시오. 시편 119편 105절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빛은 내가 원하는 방향을 비추는 도구가 아닙니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 없이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을 결정하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사하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역을 결정하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그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신앙은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 전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셋째, 상징보다 본질을 붙드십시오.

교회라는 상징보다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직분이라는 상징보다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성경책이라는 물건보다 말씀의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십자가 장식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예배의 분위기보다 예배의 대상을 붙드십시오.

감정적인 뜨거움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을 붙드십시오.

 

넷째, 실패했을 때 너무 빨리 일어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울어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침묵해도 됩니다.

“주님, 저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해도 됩니다.

“주님, 저는 너무 힘듭니다.” 라고 말해도 됩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한 척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시편 51편 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1.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모두 “초라한 자리”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실패가 초라한 자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외로움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문제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사역의 실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긴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자리에서 너무 빨리 빠져나오려고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배웠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찬송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순종의 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은 말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고난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우리를 만나시면 그 고난은 영적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12.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가?”입니다

사무엘상 3장 19절은 사무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여기서 핵심은 사무엘이 위대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 이것입니다.

사무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사무엘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성공했는가?” 가 아닙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가?” 도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는가?”

 

결론 — 초라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잃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라하게 만드실 때, 상징으로 도망가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이스라엘은 패배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들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언약궤가 하나님을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더 큰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성공시켜 주세요.” 보다 먼저 “하나님, 나를 하나님께로 돌이켜 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보다 먼저 “하나님, 이 문제를 통해 제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를 높여 주세요.” 보다 먼저 “하나님, 나를 낮추셔서라도 주님을 알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성공했는데 하나님을 잃는 것보다, 초라해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괜찮습니다.

감옥에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괜찮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몰라줘도 하나님이 아시면 괜찮습니다.

세상이 나를 실패자라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면 괜찮습니다.

 

초라한 상태에 머물러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눈물이 나는 자리에서도 말씀을 붙드십시오.

답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세우실 때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사무엘상 3장의 어두운 밤에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4장의 절망적인 날에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시대는 끝날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시대도 끝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계획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멈추지 않습니다.

사무엘을 세우셨던 하나님께서 결국 다윗을 세우시고,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종적인 소망은 언약궤가 아닙니다.

교회 건물도 아닙니다.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도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도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된 임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된 구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제가 상징을 붙들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붙들게 하소서.”

“주님, 제가 문제에서 너무 빨리 도망치지 않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주님, 제가 실패했을 때 가짜 해결책을 찾지 않고 말씀 앞에 머물게 하소서.”

“주님, 제 인생의 초라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소서.”

 

그리고 사무엘처럼 고백합시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 삶의 성공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원합니다.”

“하나님, 제 인생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원합니다.”

“하나님, 빨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혹시 지금 여러분의 삶이 초라합니까? 괜찮습니다.

조금 더 그 자리에 머무르십시오. 울어도 됩니다. 기도해도 됩니다. 기다려도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자리가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본질로 돌아오게 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상징에서 본질로, 성공에서 순종으로, 자기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종교에서 관계로, 

그리고 나 자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갑시다.

 

초라해도 괜찮습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놓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어두운 밤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다시 타오를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