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그리스도인의 이어령과의 대화] 지성에서 영성으로 —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knowledgeplatform100 2026. 11. 1. 09:07

오프닝 —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깊이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 하나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많이 알면 지혜로워지는 것일까요?

좋은 대학을 나오고, 많은 책을 읽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손안의 작은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세계의 역사와 과학, 철학과 문학, 정치와 경제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얻을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검색하면 되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인공지능에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는 것은 많아졌는데 삶은 반드시 지혜로워지지 않습니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마음은 공허합니다.

사람의 생각을 분석하는 능력은 뛰어나졌는데 정작 가까이 있는 사람의 아픔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기술은 발전했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은 그만큼 발전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는 서툽니다.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외로운 사람은 더 많아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려는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그러나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지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학문을 멀리하고, 이성을 포기하고, 무조건 믿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생각하고 질문하고 탐구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다만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만으로 완전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지식의 한계에 갇히게 됩니다.

지성은 세상을 이해하게 하지만 영성은 그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게 합니다.

지성은 무엇이 옳은지를 설명할 수 있지만 영성은 옳음을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게 합니다.

지성은 생명의 구조를 분석하지만 영성은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참된 영성은 결국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지식이 지혜로 바뀌고, 자기중심적인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하며, 아는 신앙에서 살아내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제2부. 니고데모 — 지식이 많아도 거듭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세계

오늘 말씀의 첫 번째 인물은 니고데모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입니다.

성경은 그를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종교적 전통을 잘 알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몰라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종교적 지식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인사에 답하시는 대신, 그의 영혼을 향해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더 많은 성경 지식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높은 종교적 지위를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더 많은 율법 공부를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남을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체적인 출생의 차원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육체의 재출생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영성의 출발점을 발견합니다.

영성은 인간이 자기 수양을 통해 도달하는 높은 경지가 아닙니다.

영성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니고데모의 문제는 지식이 없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데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오래 읽었다고 반드시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반드시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의 형식을 안다고 해서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적 용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도 실제로는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용서에 관한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단순히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영성의 방향입니다.

생각이 새로워지고, 가치관이 새로워지고, 삶의 목적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던 사람이 이웃의 아픔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누구에 의해 변화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인가?

니고데모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울려 퍼집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제3부. 솔로몬의 선택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무엇인가?

이제 두 번째 인물인 솔로몬을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상 3장은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열왕기상 3장 5절입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건강을 구하겠습니까?

경제적인 안정을 구하겠습니까?

자녀의 성공을 구하겠습니까?

권력과 명예와 장수를 구하겠습니까?

솔로몬은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입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 부귀와 권력을 먼저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지혜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지혜란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혜란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에서 자랍니다.

성경에서 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호크마(ḥokmāh)*입니다.

구약성경의 지혜는 단순한 지적 능력이나 정보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며,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과 연결됩니다.

잠언 9장 10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인정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그분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인간은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신의 지혜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자신의 판단이 항상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구한 지혜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처음에는 지혜를 구했지만, 그의 인생 마지막까지 그 지혜에 충실했던 것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섰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한때 지혜를 구했다고 해서 평생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서 영원히 깨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과거의 경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

"제가 아는 것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모르는 것을 겸손히 배우게 하십시오."

"제 판단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게 하십시오."

"제 지식이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지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제4부. 지혜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다 — 지식의 목적은 생명을 세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혜의 본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지혜는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데서 드러날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서 드러날까요?

성경은 지혜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난다고 말씀합니다.

잠언 3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다면 지혜를 얻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참된 지혜는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로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첨부된 강연에서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젊은 시절과 이후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과거에 '도와 달라'는 말과 '사람 살려'라는 말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생각했다고 회고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에 인간의 주체성과 노력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경험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일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통찰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도움을 주고받는 존재를 넘어 서로의 생명을 책임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은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하는 외로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의 부족함을 분석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문제를 멀리서 관찰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은 단순히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고통에 마음을 열고 그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성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합니다.

영성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미워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심각하게 점검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매우 엄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는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송만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약한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람을 평가합니까?

그 사람의 학력, 직업, 경제력, 외모,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인간의 존엄성은 그 사람이 얼마나 성공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했느냐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높은 학력을 가졌느냐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존귀합니다.

그러므로 영성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조롱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신앙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강연에는 시골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그 할머니는 학문적 지식이나 세련된 언어 표현에서는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마음에서는 깊은 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커피를 넘치도록 따라 주는 행동을 통해 손님에게 넉넉한 마음을 전하려 했고, 먹을 것을 나누는 일에서도 단순한 양보다 사람을 향한 정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지혜는 반드시 학문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한 그릇의 밥에 담겨 있고, 한 잔의 차에 담겨 있으며, 누군가를 배려하는 작은 행동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 언제나 지혜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학문을 많이 배운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핵심은 학문과 지식이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지식이 사람을 무시하는 근거가 된다면 그것은 지식의 잘못된 사용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이 약한 사람을 섬기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사용입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을 설명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를 설교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동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말씀의 목적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앙은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제5부. 사랑은 영성의 열매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랑으로 완성된다

이제 오늘 강연의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지식과 명예와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정작 가까운 가족에게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자녀와의 관계를 회상하면서 자신이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자녀는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성취를 이루는 모습에 더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서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는 얼마나 시간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가족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은 뒤로 미루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공을 위해 수많은 것을 준비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시간은 아까워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끝날 때 우리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일까요?

더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일까요?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한 것일까요?

물론 그러한 아쉬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보게 되는 것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3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놀랍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믿음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능력과 은사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것이 사랑과 분리될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사랑을 가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사랑의 본질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많이 실천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것이 복음의 순서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먼저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삶에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은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면서 가장 먼저 사랑을 언급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영성이 깊어졌다는 것은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사랑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쉽게 화를 냈던 사람이 이제는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했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형편을 돌아보게 됩니다.

예전에는 상처를 받으면 즉시 보복하려 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내 신앙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

내 신앙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었는가?

내가 하나님을 믿은 이후 가족에게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는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 정직한 사람이 되었는가?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더 겸손한 사람이 되었는가?

이 질문들이야말로 우리의 영성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제6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 지식으로 이해하는 신앙에서 생명을 나누는 신앙으로

이제 오늘 말씀의 중심이자 절정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강연에는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나누는 일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서로의 삶을 나누는 일입니다.

한 그릇의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영양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밥상에는 이러한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손님이 오면 음식을 넉넉하게 내어놓고, 먹을 것을 서로 나누며, 함께 식사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통찰을 성경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절입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어 잔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자신의 피를 흘리셔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따라서 성찬을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상징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며, 교회 공동체가 한 몸임을 고백하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마다 성찬의 임재 방식과 신학적 설명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은혜를 기억하고 선포한다는 중심은 중요하게 공유됩니다.

이제 요한복음 6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배고팠고,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적 이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27절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예수님은 육체의 양식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을 하찮게 여기신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굶주린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육체의 필요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먹는 것만으로 인생의 의미를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생명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생명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더 나은 삶의 기술을 가르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4절은 선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진리를 설명하신 선생님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영성은 어떤 추상적인 우주적 에너지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핵심을 발견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정보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잠시 침묵]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아갑니까?

돈을 먹고 삽니까?

명예를 먹고 삽니까?

사람들의 칭찬을 먹고 삽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니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떡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떡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은 일시적인 만족을 주는 양식만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7부. 지성의 한계를 넘어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인간의 지식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과학은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나이를 연구하고, 세포의 구조를 분석하며, 생명의 비밀을 밝혀 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복잡한 자료를 분석하며,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의 구조를 연구할 수 있지만 생명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질문합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인간이 왜 존재하는지, 무엇이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인지 질문합니다.

이것이 인간 지성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과학과 신앙을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과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탐구하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과학적 탐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은 창조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를 책임 있게 돌보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지식이 인간의 삶에서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하나님과 생명의 가치를 밀어낼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 말씀은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이 사랑과 분리될 때 교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지식은 인간을 높일 수도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다른 사람을 낮추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람을 세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지혜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이 아는 진리를 사랑과 겸손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넷째,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서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서 12장 13절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인간은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무엇을 이루었는가만큼 중요한 것은 누구 앞에서, 무엇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8부. 십자가의 지혜 — 인간의 지혜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화면: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실루엣, 어두운 하늘 사이로 비치는 빛]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기 위해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지혜는 어디에 있을까요?

솔로몬의 지혜에 있을까요?

위대한 신학자들의 학문에 있을까요?

수많은 성경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을까요?

물론 이 모든 것은 귀중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과 2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리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십자가는 패배처럼 보입니다.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손해처럼 보입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세상의 계산법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갖추기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용서하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섬김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강연 후반부에는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장면입니다.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나누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진짜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생명을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진짜 어머니는 아이를 소유하는 것보다 아이가 살아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유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향한 사랑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사랑은 때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랑은 때로 자신이 옳다는 주장을 멈추고 상대방의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오늘날의 모든 갈등이나 재판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생명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함부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러한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것이 인간의 계산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쉽습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며, 나와 다른 사람을 품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결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져야 합니다.

로마서 5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그러므로 영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으로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9부. 지성에서 영성으로 —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화면: 아침에 성경을 펼치는 손, 가족의 식탁,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

이제 오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일까요?

저는 세 가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첫째, 지식을 쌓는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 배워야 합니다.

책을 읽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지식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1장 7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아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하시고, 제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둘째,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이웃을 살리는 삶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합니다.

좋은 직장, 안정된 가정, 경제적인 풍요, 사회적인 인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경험도 이웃을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누군가의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 주십시오.

외로운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십시오.

상처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십시오.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그 마음을 구하십시오.

이것이 영성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셋째, 듣고 아는 신앙에서 살아 내는 신앙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부터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신앙은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가보다 그 말씀을 얼마나 실천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신앙 서적을 읽었는가보다 그 지식이 우리를 얼마나 겸손하고 사랑 많은 사람으로 변화시켰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가보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작은 것 하나를 실천해 보십시오.

식사하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가족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십시오.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십시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도 존중을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십시오.

이러한 작은 실천이 모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영성은 일상에서 분리된 특별한 체험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제10부. 결론 — 지식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으로 살아가다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의 지적 여정과 신앙의 고백을 출발점으로 삼아 성경이 말씀하는 영성의 본질을 살펴보았습니다.

니고데모를 통해 우리는 지식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솔로몬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참된 지혜가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데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우리는 지식과 능력과 믿음조차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독교 영성의 중심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오늘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교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공이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형식이 사랑을 대신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말에만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에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명예와 지위는 언젠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은 재산도 영원히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쌓은 지식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살아 낸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오늘 우리는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지식의 축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자기중심적인 성공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종교적인 형식에서 성령 안의 변화로.

죽어 가는 세상의 가치에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며, 우리의 삶이 이웃을 살리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동안 많은 것을 알고자 했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했으며,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이 때로는 교만이 되었고, 우리의 성공이 때로는 하나님을 잊게 만들었으며, 우리의 바쁜 일상이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조차 뒤로 미루게 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솔로몬에게 주셨던 지혜를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지성이 교만해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지식이 사람을 정죄하는 무기가 아니라 생명을 세우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받은 사랑을 가족과 이웃에게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술만이 아니라 삶으로 주님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만족과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하시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매일 새롭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지성에서 영성으로, 우리의 지식에서 지혜로, 우리의 이기심에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