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여, 세상과 함께 춤추지 말고 세상과 함께 울지도 말라
본문: 누가복음 7장 31–35절
들어가는 말씀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누가복음 7장 31절부터 35절까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장례의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사람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이 비유는 단순히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인간의 깊은 죄성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마음,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종교의 위험,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하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기쁨을 거부하고, 이웃의 슬픔에 무관심하며, 사회와 담을 쌓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기뻐하는 것을 무조건 기뻐하지 않고, 세상이 슬퍼하는 방식을 무조건 따라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분별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세상이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성공일까요?
세상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실패일까요?
사람들이 박수치는 삶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까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도 하나님을 잃을 수 있고, 세상의 외면 속에서도 하나님과 깊이 동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영적으로는 낮아질 수 있으며,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박수를 받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인생을 평가하는 최종적인 기준은 사람들의 시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화려한 무덤, 사라지는 영광 — 인간은 무엇을 남기려고 살아가는가?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한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레콜레타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인물들의 무덤과 화려한 묘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에바 페론, 곧 에비타의 무덤도 있습니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정치사에서 대중적인 상징이 된 인물입니다. 노동자와 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 활동으로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었고, 오늘날까지도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한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정치적 유산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한 인물에 대한 단순한 찬반 평가가 아닙니다. 한 시대를 살았던 인간이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남기려 애쓰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다는 사실입니다.
화려한 무덤도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값비싼 대리석도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생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왔는지, 얼마나 큰 권력을 행사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지도 죽음 자체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전도서 1장 2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가 말하는 헛됨은 세상의 모든 일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신의 수고와 소유와 명예를 궁극적인 의미로 삼을 때, 그것이 인간의 영원한 갈증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전도서 2장에서 전도자는 큰 집과 포도원과 재산과 즐거움을 누렸지만, 결국 그 모든 것만으로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사람들이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자체로 모든 명예와 기억이 죄인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고, 아름다운 수고를 존중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무엇을 남기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남기려고 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이름이 알려질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사회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를 섬기다가 많은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삼는 순간, 섬김은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같은 장 19절부터 21절에서는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보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의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면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섬기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없으면 견딜 수 없고, 나보다 다른 사람이 인정받으면 마음이 무너지고, 내가 수고한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우려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교회에서 봉사하면서도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향력이 커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행위의 가장 깊은 동기까지 살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이름을 영원하게 만드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도록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화려한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사람들이 저를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제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하소서.
제가 한 일을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하소서.”
그것이 자기 영광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방향을 바꾸는 삶입니다.
2. 왕이 되려는 사람과 왕관을 피하신 예수님 — 세상의 성공과 십자가의 역설
복음서에는 매우 대조적인 두 모습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권력을 얻으려는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시험받으셨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증명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며 자신에게 경배하면 그것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시험은 단순히 기적을 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 대신, 능력을 자기 목적에 사용하고, 자신을 증명하며, 지름길로 영광을 얻으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시며, 10절에서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없어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의 뜻과 분리하여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신 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시고 홀로 산으로 떠나십니다(요 6:14–15).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원하는 왕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자신들의 필요를 해결하고, 자신들의 민족적 기대를 만족시키며, 자신들이 꿈꾸는 정치적 승리를 가져올 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세상은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더 많이 소유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누고 섬기라고 가르치십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눅 9:23).
세상은 승리를 위해 다른 사람을 밟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마 5:44).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존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부인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려는 죄의 주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지배하는 자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무능해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능력을 가지고도 그 능력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라고 부르십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으로 약자를 보호한다면 그것은 섬김이 될 수 있습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이웃과 나눈다면 그것은 청지기적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과 명성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공동체를 세우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가졌느냐보다 그것이 누구의 통치 아래 사용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기를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방식의 왕이 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참된 왕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의 왕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더 많은 박수를 받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공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성공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를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권위를 갖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자신의 이름이 얼마나 커졌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깊이 다스리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3. 장터의 아이들 — 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닫는가?
이제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 31–32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장터는 사람들이 만나고 거래하며 일상생활을 이어 가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앉아 놀이하는 아이들을 예로 드십니다.
아이들은 혼인잔치와 장례식의 놀이를 합니다. 피리를 불면 상대방이 춤을 추어야 하고, 곡을 하면 상대방이 함께 슬퍼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단순히 놀이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메시지에 일관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절제된 생활을 하며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향해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과 식탁을 나누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셨습니다. 잔치에 참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번에는 예수님을 탐식하는 자요 술을 즐기는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절제해도 비난하고, 예수님이 사람들과 식사하셔도 비난합니다.
한쪽은 너무 엄격하다고 비난하고, 다른 한쪽은 너무 자유롭다고 비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제는 요한의 식생활이나 예수님의 식사 방식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닫혀 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듣고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기준으로 심판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결정해 놓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서 승인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고 말합니다.
결과가 기대와 다르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설교자는 은혜롭다고 말하지만, 나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는 사랑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나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말씀은 은혜라고 여기지만, 나의 탐욕을 드러내는 말씀은 불편한 말씀이라며 밀어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메아리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자신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며,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반드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자신의 성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언어로 자신의 탐욕을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와 봉사와 헌신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얻는 수단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말씀 앞에서 변화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내 편으로 끌어와 내 생각을 정당화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기도합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를 이용합니까?
나는 하나님을 예배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들을 예배합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단지 새로운 종교적 활동을 더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누가복음 7장의 장터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기 취향으로 평가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위로할 때만 아니라, 나를 책망할 때도 그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 주실 때만 아니라, 내가 붙들고 있는 잘못된 욕망을 내려놓으라고 하실 때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은혜는 언제나 우리를 편안하게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은혜는 죄에 안주하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돌이키게 하며,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변화시킵니다.
4. 세례 요한의 광야와 예수님의 식탁 — 서로 다른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지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심판과 회개의 긴박성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죄인에게도 열려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역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증언한 메시아이십니다.
누가복음 3장 4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그분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선포합니다.
누가복음 7장 27절에서도 예수님은 요한을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자로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회개를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맞아 주셨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은혜로운 식탁을 서로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 없는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값싼 위로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없는 회개는 인간의 절망과 자기 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선포하는 복음은 죄를 심각하게 다루면서도 죄인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모른 척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심판하시고,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균형을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공로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에는 변화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선행을 많이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은혜에 감사하여 선한 일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우리가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으며,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화폐가 아닙니다. 선행은 구원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맺는 열매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두 가지 극단에 빠집니다.
한쪽은 선행과 종교적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율법주의입니다. 다른 한쪽은 은혜를 받았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방종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둘 다 거부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구원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거룩한 행위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거룩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봉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기에 기쁨으로 섬깁니다.
우리는 자기 부인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자기 부인의 길을 배웁니다.
이것이 복음의 질서입니다.
또한 본문은 우리가 사람을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엄격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과 식사를 나누고 기쁨을 표현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세속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외형만이 아니라 그 삶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절제와 예수님의 식탁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두 사람을 평가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했습니다.
오늘 교회도 이 점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형식만으로 거룩함을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자유를 주장하면서 거룩함과 회개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진리와 사랑, 거룩함과 자비, 회개와 은혜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5. 회개는 종교적 업적이 아니라 자기 주권의 내려놓음이다
세례 요한의 사역을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3장 7절 이하에서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를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자부심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경고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비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혈통이나 종교적 전통을 구원의 보증서로 삼는 잘못을 지적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자랑을 위한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자기 공로를 자랑하도록 허락하는 면허증이 아닙니다.
요한은 이어서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며,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눅 3:9).
이 말씀은 회개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의 대답을 주목하십시오.
누가복음 3장 11절에서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 외에 더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눅 3:12–13). 군인들에게는 사람을 강탈하거나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합니다(눅 3:14).
회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 경험만이 아닙니다. 죄를 고백하고 종교적 의식을 하나 더 수행하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열매는 생활 속에서 나타납니다.
자신에게 여분의 옷이 있다면 어려운 이웃과 나눕니다. 권한이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얻지 않습니다.
힘이 있다면 약한 사람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돈을 다룰 때 정직하고, 다른 사람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기 부인은 추상적인 종교 용어가 아닙니다. 실제로 나의 탐욕과 이기심을 내려놓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이 나눔과 정직을 요구했다고 해서 그 행위들이 구원을 구매하는 대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회개가 참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절대적인 주인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은 자신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나의 소유와 재능과 미래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산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미래를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노후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해야만 안전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웃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과가 곧 나의 가치라는 거짓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책임을 버리고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구하는 사람도 일해야 합니다.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삶의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지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인생은 제 욕망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제 재능도, 제 시간도, 제 재물도, 제 미래도 주님의 것입니다. 저를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 고백이 회개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6. 세상과 함께 춤추지 않는다는 것 —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정체성
“교회여, 세상과 함께 춤추지 말고 세상과 함께 울지도 말라.”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거부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고 가르칩니다(롬 12:15).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예수님은 인간의 슬픔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제목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려면 분명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웃의 슬픔에 함께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절망에 우리의 영혼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성공이라고 포장하는 세상의 환호에 무조건 춤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일하고, 배우고,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를 섬깁니다. 그러나 사회가 정해 놓은 모든 기준을 하나님 나라의 기준보다 높여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의 마음과 판단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세상은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더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소유의 크기만으로 인생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자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정직했는지를 함께 살펴봅니다.
세상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 얻은 승리를 진정한 승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인기와 영향력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사람들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세상과 함께 춤추지 않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성공한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의롭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부와 가난 그 자체만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단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부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 가운데 무엇을 주인으로 삼는가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은 부한 자들에게 교만하지 말고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한 일을 행하며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라고 권면합니다.
재물을 소유하는 사람도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탐욕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형편만으로 영성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붙들려 있는가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성도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의 궁극적인 소속과 소망을 이 땅의 권력이나 명예에 두지 않습니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이 말씀은 현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더 책임 있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이 땅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공공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가정을 사랑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불의와 부패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서 자신의 최종적인 충성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세상이 불의를 정당화한다고 해서 성도가 불의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거짓을 성공의 수단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성도가 거짓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약자를 희생시켜도 괜찮다고 말한다고 해서 성도가 그 길을 걸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 시민권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신분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다른 왕을 섬기는 신분입니다.
7. 말씀의 칼이 가면을 벗길 때 — 자기 부인과 성화의 길
우리는 종종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기가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비판하면 왜 그렇게 화가 날까요?
내가 수고한 일을 다른 사람이 인정받으면 왜 마음이 불편할까요?
나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앞서가면 왜 시기심이 일어날까요?
이러한 반응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행동 속에 통제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이라고 부르는 노력 속에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이 자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단순히 좋은 행동을 늘리는 과정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의 동기를 드러내시고 변화시키시는 과정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선언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위로합니다. 동시에 우리를 폭로합니다.
말씀은 상한 마음을 싸매 줍니다. 동시에 우리가 숨겨 둔 죄를 드러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합니다. 동시에 그 사랑을 이용하여 죄에 머무르려는 우리의 마음을 책망합니다.
누가복음 2장 35절에서 시므온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위안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앞에 서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 존재인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폭로는 우리를 절망 속에 버려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드러내심으로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의지하도록 이끄십니다.
로마서 7장 24–25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비참함을 탄식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죄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죄를 해결하실 수 있는 구주께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깨닫는 것은 자기 혐오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약함 가운데서도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주님은 바울에게 자신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씀하시며,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이 점점 커지는 과정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더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온전히 의지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이웃에게 사과하고, 필요한 경우 손해를 감수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순종해야 합니다.
성화는 수동적인 무기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13절은 두 가지를 함께 가르칩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며, 동시에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은혜와 순종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오래된 자아의 습관들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소유를 통해 안전을 확보하려는 마음,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마음, 실패를 두려워하여 진실을 숨기려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비추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불편함을 느낄 때 무조건 그 말씀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물론 모든 설교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증언과 일치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하게 지적하는 죄를 만났다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말씀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면을 벗기실 때, 그분은 우리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한 회개와 회복으로 부르십니다.
8. 회개에 합당한 열매 — 나눔과 정직과 자족으로 드러나는 은혜
이제 회개가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옷이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라고 합니다. 세리는 정해진 것 이상을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은 사람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하지 말고 자기 급료에 만족하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 권면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첫째, 회개는 소유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꿉니다.
옷이 두 벌 있는 사람에게 옷이 없는 사람과 나누라고 한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소유를 가져야 한다는 추상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것이 이웃의 필요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책임 있는 삶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내 안전만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소유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안에 거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구원을 얻기 위한 거래가 아닙니다.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둘째, 회개는 권한을 사용하는 방식을 바꿉니다.
세례 요한은 세리들에게 정해진 것 이상을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 세금 징수 과정에서 권한을 남용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권한을 행사합니다. 직장에서 업무를 배분할 수 있고, 예산을 집행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배우자라는 관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 권한을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하면 권력은 착취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맡겨진 사람들을 보호하고 공정하게 대하는 데 사용하면 권한은 섬김의 도구가 됩니다.
성도는 권한이 없을 때만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한이 생겼을 때도 겸손해야 합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 더욱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을 반박하기 어려운 사람을 대할 때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 더욱 공정해야 합니다.
셋째, 회개는 탐욕을 다루는 방식을 바꿉니다.
군인들에게 사람을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며 자기 급료에 만족하라고 한 말씀은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으로 부당한 이익을 얻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족은 아무런 발전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당한 목표를 위해 일하고 노력하면서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1–13절에서 바울은 풍부함과 궁핍함을 모두 경험했으며,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자족은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가난을 줄이기 위해 일할 수 있고, 불공정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형편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자족하는 사람은 발전을 포기한 사람이 아닙니다. 발전을 추구하되 그 결과를 자신의 신으로 삼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회개의 열매는 일상 속에서 드러납니다.
나눔으로, 정직으로, 공정함으로, 자족으로, 그리고 약자를 향한 책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은 일상의 책임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돈을 다룰 때도 정직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권한을 행사할 때도 공정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공동체는 어려운 이웃의 필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말하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은혜가 실제로 무엇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려 드린 삶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갑니다.
9. 지혜는 그 열매로 증명된다 —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마지막 소망
본문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 7:35)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자신의 사역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결국 그 열매로 드러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의 회개 선포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죄인들을 향한 자비도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들의 즉각적인 인정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성경의 시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가 인간의 능력만으로 점점 완전해지고 마침내 구원에 도달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공동체와 제도와 문화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권력은 타락할 수 있고, 재물은 우상이 될 수 있으며, 종교조차 자기 의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관은 절망적인 숙명론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시작되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무조건 낙관하지도 않고, 현실의 어둠 앞에서 모든 소망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신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불의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의가 최종적인 승자가 될 것이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 부활의 소망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평가에 절대적으로 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마지막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기와 기회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은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아니하사 성도들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과 섬김을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장 깊은 위로입니다.
그렇다고 이 땅의 삶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소망은 오늘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확신을 줍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 권면하며,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성하기 위해 일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깁니다.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이름을 지우는 기술이 아닙니다. 자기 이름이 인생의 중심이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실 때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도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경쟁자로만 보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공을 우상으로 삼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피리 소리에 무조건 춤추지 않고, 세상의 애곡에 무조건 휩쓸리지 않는 하늘 백성의 삶입니다.
10. 결론 — 세상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 가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첫째, 나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해 살아갑니까?
둘째, 나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과 사건을 평가합니까?
세상이 성공이라고 부르면 무조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이 실패라고 부르면 하나님께서도 실패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다시 판단합니까?
셋째, 나의 회개는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나는 더 정직해지고 있습니까? 더 많이 나누고 있습니까?
권한을 더 공정하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고 있습니까?
내게 주어진 형편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미래를 스스로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에 기뻐하고 비판에 상처받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하는 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 가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날마다 회개하고 순종하며 자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은 우리의 업적보다 크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실패보다 강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느끼는 자리에서도 우리를 붙들고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박수에 인생을 걸지 마십시오.
박수를 받아도 교만하지 마십시오. 외면당해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성공해도 자신을 구원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실패해도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규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궁극적인 정체성은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이 피리를 불 때, 그 소리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분별하십시오. 세상이 애곡할 때, 그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리와 소망을 붙드십시오.
이웃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십시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울어 주십시오. 그러나 죄를 미화하는 환호에는 참여하지 말고, 절망이 모든 것을 삼켰다고 선언하는 소리에도 마음을 내어주지 마십시오.
우리는 세상을 떠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기억해 주느냐가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의지했습니까?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썼습니까?
그날 우리는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제가 이룬 모든 것보다 주님의 은혜가 컸습니다. 제가 남긴 모든 흔적보다 주님의 사랑이 깊었습니다. 제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제 이름이 아니라 저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춤추라고 말할 것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라고, 더 많이 가지라고, 더 큰 이름을 남기라고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을 충성스럽게 감당합시다.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일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고, 재물을 선하게 사용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수고를 통해 우리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소망합시다.
세상의 박수는 언젠가 멈춥니다. 사람들의 기억은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화려한 무덤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여, 세상의 기준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세상의 성공을 무조건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실패를 무조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십시오.
그것이 세상과 함께 춤추지 않고, 세상과 함께 울지도 않으면서도 세상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하늘 백성의 삶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비추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했고, 우리의 수고가 기억되기를 바랐으며,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영광을 구했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만족을 먼저 생각했으며,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평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교만과 탐욕과 자기 의를 드러내 주시고, 사람들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이름을 세우려는 욕망보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려는 소원이 더 커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이웃을 섬기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님, 우리의 자기 부인이 자기 혐오나 무기력으로 변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주신 생명과 은사와 책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재물이 있다면 선하게 사용하게 하시고, 권한이 있다면 공정하게 행사하게 하시며, 지식과 재능이 있다면 이웃을 살리는 데 사용하게 하옵소서.
가진 것이 적을 때에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많은 것을 얻었을 때에도 교만하지 않게 하옵소서. 성공할 때에도 주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실패할 때에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의 피리 소리에 무조건 춤추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애곡에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이웃의 기쁨에는 함께 기뻐하고, 이웃의 고통에는 함께 울게 하시되,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분별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종교적 행위가 자기 의를 쌓는 수단이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선행이 구원의 대가가 아니라 먼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열매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으로 우리의 가면을 벗기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며,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에 우리가 남긴 이름과 업적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얼마나 오래 남느냐보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하시고, 이 땅에서 맡겨 주신 사명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가 세상의 성공을 숭배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곳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참된 소망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붙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