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예수님의 비유 12강] 동전 하나가 드러낸 인간의 진짜 주인 -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누가복음 20장 19–26절)

knowledgeplatform100 2026. 10. 28. 07:55

동전 하나가 드러낸 인간의 진짜 주인

본문: 누가복음 20장 19–26절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매우 자주 인용됩니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일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설명할 때 사용되기도 하고,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도 인용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말 세금은 국가에 내고 헌금은 교회에 내라는 말씀만 하셨을까요?

 

그렇다면 이 짧은 말씀은 그저 재정 관리에 관한 교훈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0장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너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 그리고 네 삶의 궁극적인 주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 가치관과 인생의 목적,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던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았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고발할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선 누가복음 20장 9–18절에는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겼지만, 농부들은 주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쫓아냈으며, 마침내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맡은 것을 소유한 것으로 착각하고,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반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인데 내 생명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인데 내 능력이라고 자랑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인데 내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인데 그 자리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왕좌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이 성경이 폭로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주인이 되려 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반역은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돈이 나를 지켜 준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나를 안전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명예가 나의 가치를 증명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종교적 열심과 선한 행위까지도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라는 질문을 넘어 이렇게 묻습니다.

“네 마음의 왕좌에는 누가 앉아 있느냐?”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세금 납부의 원칙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첫째. 함정으로 다가온 질문 — 진리를 이용하려는 종교

본문: 누가복음 20장 19–23절

누가복음 20장 1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움입니다.

 

죄인은 언제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드러내면 그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비판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검증받아야 하며, 교회 지도자도 잘못을 지적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제거하려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영적 문제입니다.

이어서 종교 지도자들은 정탐꾼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누가복음 20장 20절은 그들이 예수님을 총독의 권세와 관할에 넘기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이 질문에는 정치적 폭발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세금을 내는 데 동의하면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었고, 반대하면 로마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고발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쪽으로 대답하시든 그들은 그 대답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계를 아셨습니다. 누가복음 20장 23절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간계를 아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종교적인 질문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묻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자기 이익을 지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까?  아니면 이미 정해 놓은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할 구절을 찾습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 계획을 승인해 주시기를 기대합니까?

교회에서 봉사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 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합니까?

 

이 질문들은 우리의 신앙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말씀은 때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살립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가르칩니다.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여 소유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이 우리를 비추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말씀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말씀이 저를 판단하고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간계를 넘어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동전 하나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둘째.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 세상의 권세와 인간의 욕망

본문: 누가복음 20장 24–25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보여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당시 데나리온은 로마 제국에서 사용되던 은화였습니다.

이 동전에는 황제의 초상과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화폐를 통해 그들의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이 장면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사람들은 동전을 꺼내 보였습니다. 그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형상을 확인하신 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동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모든 신앙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들이 로마의 경제적·정치적 질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을 단순히 세금과 헌금의 구분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해야 할 모든 의무가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자들이 만든 양자택일의 함정을 무너뜨리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권위가 세상의 어떤 권력보다 근본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가이사에게 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이사에게 돌려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것을 세상의 권세가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가이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가이사는 반드시 로마 황제의 이름을 가진 인물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이사처럼 기능하는 것은 돈일 수 있습니다.

 

권력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명예, 성공, 인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그 자체로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돈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고, 권력은 공공의 질서를 위해 사용될 수 있으며, 명예와 성공도 정당한 노력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우리를 섬기는 도구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바뀔 때 발생합니다.

돈을 사용하던 사람이 돈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던 사람이 직업적 지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합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고, 그 평가를 지키기 위해 양심까지 희생합니다.

 

이때 가이사는 더 이상 동전 위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왕좌를 차지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의 위험은 단지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재물이 궁극적인 안전과 정체성을 제공한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돈이 우리의 시간과 선택과 관계를 소유합니다.

 

우리는 명예를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 진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권세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권세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보다 더 깊은 질문입니다. “무엇이 너를 소유하고 있느냐?”

 

돈이 많아도 돈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지위가 높아도 인정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명성을 얻어도 사람들의 칭찬을 먹고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도 하나님께 궁극적인 충성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버리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맡겨진 것입니다. 재물도, 시간도, 능력도, 직분도, 관계도 모두 청지기적 책임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돈을 벌 때도 하나님 앞에서 벌어야 하고, 돈을 사용할 때도 하나님 앞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권한을 행사할 때도 하나님 앞에서 행사해야 하며,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동전은 세상의 경제 질서 안에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 동전이 자기 영혼의 주인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 누가 진정한 주인인가

관련 성경: 창세기 1장 26–27절, 로마서 12장 1–2절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의미를 한 걸음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전에 새겨진 형상을 물으셨습니다.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속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 26–27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연결은 누가복음 20장 25절의 직접적인 설명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형상’이라는 주제를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묵상할 때 중요한 신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신약의 관련 본문을 연구한 주석들도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사이의 대비를 하나의 유력한 해석으로 제시합니다.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일부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재능, 재물과 관계, 직업과 미래를 포함한 삶 전체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창조 세계를 돌보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죄는 이 관계를 뒤집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섬깁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인간이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깊이입니다.

 

죄는 단지 규칙 몇 가지를 어기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죄의 뿌리에는 하나님 없이도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착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때로 선한 행위를 통해서도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서 인정받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헌신을 통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선행이 위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정의를 행하며, 약자를 보호하라고 명령합니다.

 

문제는 선행 자체가 아니라 그 선행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고 자신의 의를 하나님 앞에 세우려는 태도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이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순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여 구원을 구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선행은 구원의 값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흥정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선행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선행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지고, 이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선을 행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가져오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감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넷째. 선행의 한계와 복음의 중심 — 도덕적 성취인가, 십자가의 은혜인가

관련 성경: 로마서 3장 23–24절, 갈라디아서 2장 16절, 에베소서 2장 8–10절

이제 원고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인 복음과 도덕적 성취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선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고, 약자를 돌보며,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단순히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한 도덕 교육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먼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왜 인간은 선을 알면서도 악을 행합니까?

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변명합니까?

왜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기보다 시기합니까?

왜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까?

 

성경은 이 문제를 단순한 지식의 부족이나 교육의 부족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죄인이라는 것이 성경의 진단입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복음의 중심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좋은 습관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개선만이 아니라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물론 도덕적 변화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평생 정직하게 살았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을 도왔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나누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았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귀하고 선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그 사람의 모든 죄를 없애거나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선언할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첫째는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성취로 대체합니다.

둘째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선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목적을 왜곡합니다.

 

참된 복음은 이 둘을 모두 거부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변화되어 갑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가르친 은혜의 복음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선행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설명하고, 야고보는 참된 믿음이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뿌리와 열매는 다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나무에는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는 경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동시에 은혜를 핑계로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충분히 훌륭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우리를 죄 가운데 그대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랑과 정의와 거룩함의 길로 이끕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 무엇이 중요한가

예수님을 단순히 도덕적 모범으로 축소하는 신앙을 경계합니다. 이 문제 제기는 중요합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역사적 자료와 당시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탐구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그러나 역사 연구의 모든 성과가 곧바로 신앙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연구자들 사이에도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단지 본받을 만한 인물로 축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죄와 심판과 구원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복음의 중심을 이루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사도적 복음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신지를 믿는 것과 그분의 구원 사역을 의지하는 것은 그보다 부수적인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동시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로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지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고 그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복음입니다.

 

이 사실이 무너지면 신앙은 자기 개선의 프로젝트로 축소됩니다.

반대로 이 사실을 붙들면 선행과 봉사는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의 열매가 됩니다.

 

다섯째. 회개란 무엇인가 — 자기 영광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관련 성경: 누가복음 18장 9–14절, 사도행전 3장 19절, 로마서 7장 18–25절

그렇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회개를 잘못된 행동을 중단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했다면 정직하게 살고, 남을 미워했다면 사랑하며, 욕심을 부렸다면 절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 회개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생각과 마음의 방향이 변화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성경적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방향 전환이며, 믿음과 결합하여 삶의 변화를 낳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는 사실을 내세웁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는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높이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세리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금식과 십일조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 의를 증명하는 근거로 삼았다는 데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자리에서도 다른 사람을 낮추고 자신을 높였습니다.

 

세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회개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도덕적 변화의 불필요성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회개는 죄를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고, 가능한 범위에서 잘못을 바로잡으며, 새로운 순종의 길을 걷게 합니다.

 

삭개오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복음 19장에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재산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나눔과 배상은 구원을 구매하기 위한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은혜가 그의 재물과 인간관계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두 가지를 함께 포함합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실제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용서를 구하면서도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손해를 보는 일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증명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창조주께서 주신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피조물입니다.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나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내 의를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를 의지하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죄인을 정죄의 권세에서 건져 내며,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실패를 감추기 위해 종교적 가면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회개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얼마나 완벽한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붙드시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여섯째.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 나라 — 그리스도인의 시민권과 충성

관련 성경: 로마서 13장 1–7절, 사도행전 5장 29절, 베드로전서 2장 13–17절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우리는 지금까지 이 말씀을 하나님께 속한 삶 전체를 드리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절은 모든 사람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며,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권력자가 언제나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정부의 명령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권세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제한된 권세입니다.

 

국가와 정부는 공공의 질서를 지키고 악을 억제하며 정의를 실현하도록 책임을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책임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정당한 세금을 납부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며, 이웃의 권리를 보호하고, 공적인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이유로 모든 시민적 의무를 거부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권세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에서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충성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국가가 죄를 명령하거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신앙을 부정하도록 강요한다면,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를 무조건 거부하라는 뜻도 아니고, 국가를 무조건 신성시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가를 존중할 수 있지만 국가를 하나님으로 섬기지는 않습니다.

 

정치 권력도, 경제 체제도, 사회적 이념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평가받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논쟁이었습니다.

 

J. I. H. 맥도널드는 로마서 13장 1–7절의 해석을 다룬 논문에서 이 본문이 억압적인 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저항을 억누르는 데 오용되어 온 문제를 지적합니다. 동시에 해석자는 자신의 정치적 선호에 따라 본문의 의미를 미리 결정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는 권세에 대한 복종의 명령뿐 아니라, 권세가 하나님의 정의와 목적 아래 있다는 사실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과 권력자들의 불의를 책망했습니다.

신약의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명령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성경은 권력을 무조건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직장에서 권한을 맡았다면 그 권한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팔지 말아야 합니다.

 

공적인 책임을 수행할 때는 사적인 이익보다 정의와 공동선을 생각해야 합니다.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은 정직해야 합니다. 인사와 평가를 담당하는 사람은 공정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권한이 영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맡겨진 책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권위는 자녀를 지배하기 위한 권리가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고 양육할 책임입니다.

 

교회의 직분도 사람 위에 군림하기 위한 지위가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소명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세상의 자리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세상의 인정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승진을 위해 양심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이웃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영역에 미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입니다.

 

 

일곱째. 십자가의 피로 완성되는 구원 — 가짜 구원과 참된 메시아

관련 성경: 요한복음 14장 6절, 사도행전 4장 12절, 로마서 5장 8–11절, 히브리서 9장 22절

인간은 왜 자기 자신을 높이려 합니까?

왜 다른 사람의 인정에 목말라합니까?

왜 돈과 명예와 권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합니까?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안전과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돈이 있으면 괜찮은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면 자신의 가치가 증명될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마음속의 공허함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인간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은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지만 죄의 용서를 구매할 수 없습니다.

권력은 외부의 환경을 바꿀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단절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명예는 사람들의 평가를 바꿀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본질을 다시 물어야 합니다.

구원이란 단지 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구원을 훨씬 더 깊게 설명합니다.

구원은 죄 사함이며,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선포합니다.

 

복음의 중심은 인간이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올라갔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는가에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의를 쌓아 하늘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고유한 중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구원이 다른 이에게는 없으며,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증언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단순한 도덕 교사나 종교적 모범으로 축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고백하는 태도 역시 복음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모욕하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의 인간적 존엄성을 부정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리를 말할 때도 사랑과 겸손과 온유를 지켜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변증하는 목적은 사람을 조롱하거나 논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왜 십자가가 필요한지, 왜 은혜가 인간의 유일한 소망인지를 진실하게 증언하는 데 있습니다.

 

유사한 구원과 십자가의 복음은 어떻게 다른가

여러 종교와 신화 속에 성경 이야기와 비슷해 보이는 요소가 등장한다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집트의 호루스 신화와 예수님의 이야기 사이의 유사성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다룰 때는 신중한 역사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고대 종교와 신화 사이에는 죽음과 생명, 심판과 내세, 신적 존재와 인간의 운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특정 신화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생애가 비슷해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기독교가 그 신화를 복사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모든 유사성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신 시험이라고 역사적 사실처럼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호루스와 예수님의 생애가 세부적으로 동일하다는 대중적 주장들 역시 각각의 고대 자료와 원문을 대조하여 검증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증언을 고대 이집트 신화와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비교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무엇이 유사하며 무엇이 다른지를 정확하게 밝히는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다른 이야기와 닮은 요소가 전혀 없다는 주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성경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어떻게 증언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죄와 구원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라고 해서 곧바로 복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도 아닙니다.

 

희생과 봉사를 강조한다고 해서 십자가의 대속이 자동으로 성립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사도적 증언에 근거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를 단순한 외적 환경의 개선으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질병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불의한 제도가 개선되어야 하고, 폭력과 차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한 일들이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죄 사함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질병과 가난과 불의를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돌보셨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으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의 고통을 무시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도록 이끄는 복음입니다.

십자가는 선행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이 서야 할 자리를 바로잡습니다.

선행은 구원의 대가가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봉사는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드리는 응답입니다. 이것이 가짜 구원과 참된 복음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여덟째.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 — 은혜로 살아나는 사람들

관련 성경: 고린도전서 6장 19–20절, 고린도후서 5장 17–21절,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제 본문의 두 문장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신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시편 24편 1절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이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재능과 시간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기회와 관계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소유하지 않으셨던 것을 우리가 드려서 하나님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으로 비로소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헌금, 봉사와 헌신은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요구하시는 이유도 우리를 착취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에 궁극적인 충성을 바치며 살아가는 상태에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은 성도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며 값으로 산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기서 복음의 역설이 드러납니다.

세상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자기 가치를 증명하며,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주인으로 삼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제는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격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책임을 포기하거나 삶을 무기력하게 살아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자랑을 인생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되 능력을 우상화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소유하되 재물을 구원자로 삼지 않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설 때는 교만하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뒤처질 때는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정체성은 세상의 평가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우리의 일상을 바꿉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이 될 수 있습니다. 정당한 세금을 납부하고 공공의 질서를 지키는 것도 시민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단순히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느냐만이 아닙니다.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주일에만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월요일에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신앙인이 아니라 직장과 가정과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삶은 세상의 권세가 궁극적으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아홉째. 가이사의 동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

본문 요약: 누가복음 20장 19–2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동전 하나를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동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첫째,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으려는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신의 공로로 착각하고, 자신이 이룬 성취를 통해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합니다. 심지어 종교적 열심과 선한 행위까지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세상의 재물과 권력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돈과 지위와 명예는 삶에 필요한 수단일 수 있지만, 죄를 용서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순간, 우리는 창조주께 드려야 할 충성을 피조물에게 바치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외적인 종교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삶입니다.

예배와 헌금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일부를 형식적으로 드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재물과 시간, 직업과 관계가 하나님의 뜻 아래 놓이기를 원하십니다.

넷째, 우리는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선한 행위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다섯째, 참된 회개는 자기 영광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 질문 — 나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돈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까? 지위를 잃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까? 사람들의 인정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물론 우리는 누구나 삶의 어려움을 두려워합니다. 재정적 어려움과 직업의 불안정, 인간관계의 상실은 실제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해 양심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미루고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 — 나는 선행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봉사와 헌신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마음속으로 우월감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대우를 받지 못하면 쉽게 분노하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들은 봉사를 중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봉사가 은혜에서 시작되고 사랑으로 열매 맺도록 하려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질문 —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가?

우리는 실패할 때 자신의 가치를 의심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을 감추려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죄를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소망은 자신의 완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이사의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와 은혜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우리에게 특정한 역할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직업과 직책은 우리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돈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의 궁극적인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사용하되 세상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재물을 관리하되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마십시오. 권한을 맡았을 때는 겸손하게 섬기십시오. 선한 일을 하되 그것으로 자신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소망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근거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십시오.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십시오. 사회에서 책임을 다하십시오. 약한 사람을 돌보고, 불의를 외면하지 말며,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하십시오.

 

그 모든 일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십시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과 삶의 주권은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돈은 여러분의 주인이 아닙니다. 권력도 여러분의 주인이 아닙니다. 명예도 여러분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영광을 내려놓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열째. 마무리 기도 — 주님, 우리 안의 가이사를 무너뜨리소서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누가복음 20장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비추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돈과 권력과 명예와 사람들의 인정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신의 공로로 착각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능력을 자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으며,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은 채 자신의 의를 쌓으려 했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떠나 자기 자랑이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봉사와 헌신이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다고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선행을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시며,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가이사를 드러내어 주옵소서.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권력이 우리의 양심을 지배하지 않게 하시며, 명예와 성공이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의 것을 사용하되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맡겨진 재물과 시간과 능력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관리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정직하게 일하게 하시고, 권한을 가졌을 때 겸손하게 섬기게 하시며, 불의를 보았을 때 침묵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나 진리를 말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복음을 증언할 때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게 하시며, 온유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드러내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주님,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참된 소망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사랑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용서하게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살리셨으니 우리도 그 은혜를 세상에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자기 이름을 높이는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지막 자랑이 재물도, 명예도, 종교적 성취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되,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