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예수님의 비유 13강] 악을 분별하는 뱀의 영적 지혜, 악의 방식에 동화되지 않는 비둘기의 순결 (마태복음 10:5–42)

knowledgeplatform100 2026. 10. 28. 09:30

프롤로그.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나의 우상이 될 때

본문: 마태복음 10:5–42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주신 매우 역설적인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그리고 양처럼 살아라. 이 말씀은 얼핏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지혜를 갖추라고 하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결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양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양은 이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양에게는 사자의 발톱도 없고, 늑대의 이빨도 없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제압할 만한 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사자처럼 강해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세상의 권력을 장악하고, 경쟁자를 제압하고,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복음의 본질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질문 하나를 마주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에게는 자녀일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부모님이나 배우자일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오랫동안 쌓아 온 재산과 명예, 직장과 사회적 지위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자신이 이룩한 성취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이 가장 소중할 것입니다.

 

그것들이 소중하다는 사실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며, 자녀를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들을 사랑하느냐의 여부만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하나님 아래에 있는 선물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주인인지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합니다.

자녀를 위해 밤을 새우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사용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랑이 다른 얼굴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녀가 내가 원하는 길로 가지 않으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배우자가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분노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것처럼 느낍니다.

재산을 잃으면 단순히 소유를 잃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 인생 전체가 무너진 것처럼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사람과 그 소유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그것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 되고, 배우자의 인정이 나의 가치가 되며, 재산의 크기가 나의 안전이 되고, 사람들의 칭찬이 나의 정체성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녀가 내가 설계한 인생을 살아 주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자녀의 신앙보다 자녀의 성적과 사회적 성공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자녀를 잃은 부모의 슬픔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의 눈물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슬픔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속한 인격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내 삶의 연장선으로 여기며 내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라는가?

 

이 질문은 자녀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재산과 명예, 교회와 신앙생활,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말하는 봉사에도 해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성공과 평안, 인정과 안전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읽기 전에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마음의 문제입니다.

 

 

1장. 십자가는 내가 세운 왕국을 무너뜨린다

1.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놓인 것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을 파송하시기 전에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7–39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랑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올바른 자리를 찾도록 하십니다.

 

핵심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놓인 것은 무엇이든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상은 반드시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며, 하나님보다 더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돈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 순간 돈은 우상이 됩니다.

자녀 자체가 우상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의 성취를 통해서만 내 인생이 가치 있다고 느낀다면 자녀는 내가 만든 자기 왕국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도 귀합니다. 그러나 봉사를 통해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낀다면 신앙의 행위마저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죄의 깊은 뿌리는 단순히 몇 가지 나쁜 행동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질서를 거부하며, 자기 자신을 삶의 최종적인 주인으로 세우려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

유혹의 핵심은 열매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피조물이 하나님 없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과 악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 기준을 정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더 많은 돈을 가져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야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마음이 놓입니다. 자녀가 남들보다 잘되어야 부모로서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같은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증명하지 못하면 누가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해 주겠는가?’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는 자기 성취를 통해 존재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로 존재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우리가 쌓아 올린 성취의 탑이 아닙니다. 무너진 인간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건져 올리시는 선물입니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검의 의미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분쟁을 일으키기 위해 오셨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검은 예수님의 복음이 가져오는 분리와 갈등의 현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질서와 충돌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때때로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긴장을 일으킵니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라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를 따르기 위해 사람들의 인정과 기대를 거절해야 할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리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사람을 미워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앞선 자리에 놓인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정복하기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세우려는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 질문은 반드시 재산이나 가족을 잃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가족을 더 책임 있게 사랑하고, 재산을 더 정직하게 사용하며, 명예를 더 겸손하게 감당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의 유무가 아니라 소유와 관계를 다스리는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왕으로 앉아 있는 인생에서 내려와 하나님께서 왕이신 삶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회개이며, 제자도의 출발입니다.

 

 

2장. 고난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왕좌

1. 욥의 고백과 인간의 한계

이제 욥기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욥기 1장에 등장하는 욥은 의롭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위해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욥의 삶에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이 닥칩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건강까지 무너집니다.

 

욥기 1장 21절에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 고백은 놀랍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통이 깊어지자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토로합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보다 그의 고난을 죄의 결과로 해석하려 합니다.

 

욥기는 단순히 ‘고난을 당하면 무조건 참고 감사하라’는 교훈을 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인이 겪는 고통의 문제와 인간의 제한된 지식,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겸손을 깊이 다룹니다.

 

욥기 42장 5–6절에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의 변화는 모든 질문에 대한 설명을 얻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식과 판단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잃어버리는 경험은 우리 마음의 의지처가 무엇인지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서 특정한 우상을 제거하시려고 직접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욥의 고난을 단순한 인과응보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바로 그런 단순한 설명을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욥기 42:7).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며 ‘당신이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질병은 그 사람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자녀를 잃은 슬픔은 그 자녀를 우상으로 삼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실패와 상실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특정한 영적 원인을 선언하는 것은 성경의 지혜가 아닙니다.

다만 고난 가운데서 우리 자신에게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주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었습니까? 제가 붙들고 있는 것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고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2.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이 깨끗하거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뉘어 있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삶의 중심이 창조주의 뜻을 향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여호수아 24장 23절도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종교적인 외양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방향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성공만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보다 내 계획을 승인받는 데만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헌금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청결은 자기 자신을 완벽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은혜로 정결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마음을 청결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부인의 참된 의미를 발견합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인격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을 함부로 여기거나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란 내가 내 삶의 최종적인 주인이라는 주장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치가 성취와 인정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은혜로 사랑받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통제해야만 안전한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데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3장.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1. 지혜를 가지되, 악의 방식으로 살지 말라

오늘 본문의 중심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하십니다.

뱀처럼 지혜로울 것. 비둘기처럼 순결할 것.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지혜만 있고 순결이 없으면 영리한 계산으로 사람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순결만 강조하고 지혜를 버리면 위험을 분별하지 못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분별한 순진함도,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교활함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요한 칼뱅은 『공관복음 조화 주석』의 마태복음 10장 16절 해설에서 제자들이 위험 앞에서 신중해야 하지만,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사명을 회피해서도 안 된다는 취지로 이 말씀을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무조건 의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말을 분별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랑하되 분별해야 합니다. 용서하되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를 추구하되 진리를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또한 로마서 16장 19절은 선에 대해서는 지혜롭고 악에 대해서는 미련하기를 권합니다. 성경적 지혜란 단순히 세상에서 성공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분별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2. 창세기의 뱀과 마태복음의 뱀은 같은 의미인가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뱀은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든 존재입니다.

반면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탄의 교활함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비유는 어떤 대상을 모든 면에서 본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특정한 특성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교훈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롭다는 말은 위험을 분별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비둘기의 순결은 그 지혜가 악의 도구로 변질되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뱀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켜라’라는 하나의 의미로만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지혜와 순결, 신중함과 무해함을 함께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세상의 유혹을 분별해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더 가져야 안전하다.’ ‘남보다 앞서야 성공한 것이다.’ ‘힘이 없으면 빼앗기므로 너도 강해져야 한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조금쯤 양심을 굽혀도 괜찮다.’

이러한 가치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둘째, 자신의 목적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영광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도 자신을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헌신하면서도 사람들의 칭찬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의 결과뿐 아니라 마음의 동기도 살펴봅니다.

셋째, 악을 이기기 위해 악의 방식을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짓말로 진리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조종하여 하나님을 믿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위협과 강압으로 만들어 낸 복종은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과 같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간교하게 행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복음의 지혜는 목적만 거룩하면 과정은 어떠해도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복음의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3. 비둘기의 순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둘기의 순결은 세상에 대한 무지함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에서 노아는 홍수가 끝나 가는지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비둘기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옵니다.

 

이 장면은 홍수 이후 새로운 생명의 징표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비둘기는 언제나 순종하고 까마귀는 언제나 불순종한다는 식의 고정된 동물 상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8장의 중심은 홍수가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도 비둘기의 이미지는 지혜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짓과 탐욕을 자기 삶의 방식으로 삼지 않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놓여도 양심을 팔지 않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보복할 기회가 있어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위해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은 성도들이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권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똑같은 탐욕을 품으면서 단지 종교적인 언어만 사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실제 삶에서 드러나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뱀처럼 지혜롭다는 것은 악을 분별하는 것이며, 비둘기처럼 순결하다는 것은 악의 방식에 동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양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4장. 이리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양의 역설

1.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양으로 보내셨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사자나 늑대로 무장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9–10절에서 예수님은 여행을 위해 금이나 은이나 동을 준비하지 말고, 여벌의 옷과 신발과 지팡이를 챙기는 데 의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은 당시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파송 지침입니다.

오늘날 모든 선교사와 목회자가 문자 그대로 재정이나 여행 준비를 전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 규칙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보여 주는 영적 원리는 분명합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가진 자원과 능력만으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명은 자신을 증명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예수님의 권위와 공급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능력을 개발하거나 성실하게 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게으름을 권하지 않습니다. 잠언은 부지런함을 가르치며, 바울은 각 사람이 맡은 일을 충실히 감당하라고 권면합니다.

 

문제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 능력을 누구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입니다.

자기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능력을 겸손하게 사용합니다.

 

반면 자기 능력을 자신의 구원자로 삼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안전과 가치를 확보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무력한 존재로 보내시지만 무의미한 존재로 보내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맡기시고, 병든 자를 돌보며,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는 사명을 주십니다.

약함과 무능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리스도인의 약함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인정하는 약함입니다. 그것은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태도입니다.

2. 핍박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17–22절에서 제자들이 공회에 넘겨지고, 매를 맞으며,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 사이에도 배신과 갈등이 일어날 수 있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도의 대가를 숨기지 않습니다.

복음에 충실하게 살더라도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직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부당한 일을 거부하기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의 기대를 거절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반대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옳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내가 무례하게 행동해서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해서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설명하고 사과해야 할 일을 신앙의 박해라고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언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에 충실했기 때문에 겪는 고난인지, 자신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겪는 결과인지 말씀 앞에서 분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16절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는 것을 구분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양의 길은 무조건 공격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악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지키고, 박해를 받더라도 악으로 보복하지 않으며,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3. 세상의 무기를 내려놓는다는 것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배웁니다.

돈이 있어야 하고, 인맥이 있어야 하며,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재정적 준비와 좋은 관계, 전문성과 사회적 책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큰 의지처가 될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돈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지위가 있으므로 진리를 무시하며, 인맥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그것은 이미 무기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양으로 보내셨다는 것은 제자들이 세상의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하려 하지 않도록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무기를 모두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무기를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목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은 목자를 바라봅니다.

시편 23편 1절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은 양에게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등장하고, 원수들이 지켜보는 자리도 등장합니다.

 

그런데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모든 위험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이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5장. 복음 전도는 긍휼에서 시작된다

1. 목자 없는 양을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까?

단지 그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을까요?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일만이 목적이었을까요?

 

본문의 앞부분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9장 35–36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복음 전도의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고, 약한 자를 돌보셨으며,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의 사역에는 말씀과 치유, 진리와 긍휼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 순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단순히 심판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따라서 복음 전도는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여 자신이 더 의로운 사람임을 증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길을 잃었을 사람임을 깨닫고,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0장 7–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복음 사역의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구매한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를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그들을 조종하거나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 자체가 복음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반대로 교회가 성장하거나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역을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음악과 영상, 구제와 교육, 다양한 문화적 접근은 이웃을 섬기고 복음을 전달하는 데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방법 자체가 아니라 그 방법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입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이용하여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과, 사람들의 필요를 진심으로 돌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릅니다.

 

구제는 복음을 대신하지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복음은 영혼의 구원만을 말하면서 이웃의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 어려움에 무관심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한 형제자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믿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 전도에는 진리의 선포와 사랑의 실천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인간의 자존심을 무조건 높여 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는 단지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았던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자기 혐오와 다릅니다.

‘나는 아무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라고 끝없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순종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복음의 두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무능한 인간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전도자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사람을 모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초대하는 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가르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사람을 잘못된 길에 그대로 두기 쉽습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밀어낼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는 진리와 사랑을 함께 붙드는 사명입니다.

 

3. 전도는 설득인가, 증언인가

복음 전도를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여 교회로 모으는 행위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문제의식은 중요합니다.

전도의 성공을 숫자로만 평가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복음의 내용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내용만 말하고, 회개와 십자가와 제자도의 대가를 감추려는 유혹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설득과 완전히 대립시키는 것 역시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회당과 광장에서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과 토론하며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서 바울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전도에는 설명과 권면, 변증과 초대가 포함됩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의 기술이나 감정 조작으로 사람을 억지로 믿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6–7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의 책임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도자가 자기 역할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충실하게 전합니다. 상대방의 질문에 정직하게 답합니다. 그 사람의 고통과 상황을 경청합니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합니다. 그리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전도는 사람을 정복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을 신실하게 증언하는 일입니다.

 

4.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누구인가

마태복음 10장 5–6절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이나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 가운데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정한 파송 지침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과 구원 역사의 우선순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학자 조엘 윌리츠(Joel Willitts)는 「마태의 메시아적 목자 왕: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라는 연구에서 이 표현을 단순히 추상적인 구원 개념으로만 다루지 않고, 마태복음의 이야기와 당시 유대교의 메시아적 목자 왕 기대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봅니다.

이 본문을 근거로 이방인은 복음을 들을 필요가 없다거나, 전도는 오직 특정한 사람들만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인 28장 19–20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지만, 복음의 선교적 지평은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되,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도록 겸손히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5. 평안을 빌되, 강요하지 말라

마태복음 10장 12–1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집에 들어가면 평안을 빌고, 그 집이 합당하면 그 평안이 임하게 하며,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에게 무제한으로 강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상대방의 반응만으로 그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 여부를 우리가 확정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는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바꿀 권한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진실하게 권면합니다. 상대방이 거절할 때에는 그 선택을 존중하고, 적절한 때에 다시 대화할 가능성을 열어 둘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4–5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 마을을 하늘의 불로 심판하자고 제안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을 파괴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분명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실성을 강압과 모욕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전하는 동시에 그 진리를 필요로 하는 죄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장. 어린양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1. 목자 없는 양에서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

이제 모든 내용을 하나로 모아 보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삶을 지키려고 합니다. 관계와 재산과 명예를 통해 안전을 확보하고, 자신의 성취를 통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유한합니다.

재산은 사라질 수 있고, 건강은 약해질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우리의 뜻대로만 유지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 역시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재산을 포기하거나 가족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물로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앞선 자리에 놓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편 23편의 목자는 양을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양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길이 평탄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길을 없애 주십시오. 이 사람을 바꾸어 주십시오. 이 어려움을 즉시 해결해 주십시오.’

 

물론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마지막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어 내는 기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어린양이 먼저 그 길을 걸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진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양으로 살라고 명령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먼저 어린양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대적했고, 권력자들은 그분을 심문했으며, 제자들은 그분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패배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목자이시면서 동시에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을 먼저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양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가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는 우리의 헌신과 봉사로 구원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은혜로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의 삶도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먼저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3.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

요한계시록 14장 4절은 구속받은 자들을 묘사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인생의 모든 길을 미리 계산하고,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성경은 지혜로운 계획과 성실한 수고를 귀하게 여깁니다.

다만 계획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성공을 향한 열망이 정직과 사랑을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미래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현재의 책임을 무시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은 오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감당합니다.

 

가정에서는 가족을 사랑하고, 직장에서는 정직하게 일하며, 교회에서는 자신의 은사를 겸손하게 사용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거짓을 선택하지 않고, 손해를 보더라도 양심을 지키며,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 주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한 문제가 즉시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상황의 의미를 즉시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의 순종을 이어 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양의 길입니다.

 

에필로그.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도 목자의 음성을 따르라

오늘 우리는 세 가지 동물의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살펴보았습니다.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말씀은 세상의 유혹과 위험을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악의 방식에 물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양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은 자기 힘을 구원자로 삼지 않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지혜만 있으면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순결만 말하면서 지혜를 잃으면 현실의 책임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양의 연약함만 강조하면서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자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도망치는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내 마음의 왕좌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잃으면 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낍니까?

무엇을 얻기 위해 양심과 진리를 타협하려 합니까?

그 질문을 통해 하나님보다 앞선 자리에 놓인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둘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찾아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난을 특정한 영적 훈련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다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질문하고, 도움을 구하며, 필요한 위로와 치료와 공동체의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탄식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셋째, 복음을 진리와 사랑으로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나 역시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감추지 않되, 사람을 모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통제하려 하지 않되, 맡겨진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넷째,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푸른 초장도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때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길이 열리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환경이 언제나 평탄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을 구원하려고 애쓰는 데서 벗어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자가 되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더 강해지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 주십니다.

지혜롭되 교활하지 마십시오. 순결하되 무분별하지 마십시오. 연약함을 인정하되 책임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진리를 말하되 사랑을 잃지 마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목자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양의 생명은 자신의 강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가 누구이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목자를 따라가는 이유는 모든 길이 편안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 뜻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세상의 인정에 매달리기보다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십시오.

자기 영광을 쌓기보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며, 양처럼 목자를 따르는 삶.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제자의 길입니다.

 

결단의 기도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비추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주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의지했습니다.

 

재산과 명예와 사람들의 인정 속에서 우리의 가치를 찾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려 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주님보다 더 사랑했고, 그 선물을 잃을까 두려워 주님의 뜻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바라보되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회개하되 자기 혐오에 머물지 않게 하시며,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뱀처럼 지혜로운 분별력을 주옵소서. 세상의 유혹과 거짓을 알아보게 하시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팔지 않게 하옵소서.

 

비둘기처럼 순결한 마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게 하시고, 사람을 이용하지 않게 하시며,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양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능력과 계획을 주님보다 더 의지하지 않게 하시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회복을 허락하시고, 슬픔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함께 울어 줄 사람들을 보내 주옵소서. 고난의 이유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전도가 사람을 모으는 일에 그치지 않게 하옵소서. 복음을 진실하게 전하고, 약한 이들을 돌보며,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상의 힘을 빌려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약함 속에서도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푸른 초장에서도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을 놓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앞날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오늘 주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우리의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사랑과 진리와 겸손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세상의 방식과 다른 삶이 되게 하시고, 그 차이를 통해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