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우리는 왜 선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가 (누가복음 10:37)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너무나 익숙한 비유입니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
‘종교와 인종과 신분을 넘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모두 귀한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어려운 이웃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을까요?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려는 것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직접적인 교훈만 주시지 않고,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한 사람과 그를 외면한 종교인들, 그리고 뜻밖의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선한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사랑 없이는 살아날 수 없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을 근본부터 흔듭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보다 조금 더 봉사하고, 조금 더 헌금하고, 조금 더 기도하고, 조금 더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쌓아 올린 자기 의의 탑을 흔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지를 묻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 수 있는지를 묻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드러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인간의 선행을 무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선행이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선행은 자기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선행은 감사의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그 사마리아인의 사랑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이 무거운 율법의 짐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 내는 새로운 삶의 부르심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1장. 영생을 묻는 인간, 자기 의를 드러내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10장 2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얼핏 보면 참으로 진지한 질문입니다. 영생을 얻고 싶다는 것은 잘못된 소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고,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다는 갈망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의 의도를 알려 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의 중요한 역설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관해 질문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도 하나님을 자신의 지식 안에 가둘 수 있습니다.
신학을 연구하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생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율법사는 묻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의 질문에는 이미 하나의 방향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가 하는 방향입니다.
물론 성경은 순종과 행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구원을 자기 행위의 대가로 이해하는 순간, 신앙은 은혜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 의를 증명하는 자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율법이 무엇을 말하는지 되물으십니다.
율법사는 신명기 6장 5절의 하나님 사랑과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을 연결하여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 누가복음 10:27
정확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누가복음 10:28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9절이 결정적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범위와 대상을 정하고 싶어 합니다.
어디까지 사랑하면 되는지, 누구까지 사랑하면 되는지, 어느 정도 사랑하면 의무를 다한 것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의 경계를 정하면 자신의 의무도 경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내 이웃이다.’
‘이 사람까지 사랑하면 나는 충분히 사랑한 것이다.’
‘이 정도를 행했으면 나는 율법을 지킨 사람이다.’
인간은 사랑을 명령받으면 사랑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의무를 계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보다 사랑의 한계를 먼저 정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판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에 직접적인 명단을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율법사의 자기 확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했는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는지 진지하게 돌아보면 누구도 자신의 성취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율법의 목적은 우리가 스스로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도록 돕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제가 사랑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의롭다고 생각했지만 제 마음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향한 집착이 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판단했지만 정작 제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합니다.’
이 고백은 절망의 끝이 아닙니다. 은혜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2장. 끊임없이 탈출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인간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논의한 ‘노마디즘’, 곧 유목적 삶에 관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원래 철학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의 교리와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고착된 질서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다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생각해 보는 데에는 하나의 비유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합니다. 자신을 억압하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더 나은 삶을 원하고, 더 많은 기회를 원하고, 자신을 제한하는 환경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 일합니다. 어떤 사람은 낮은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공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노력 자체가 모두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불의한 구조를 개선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일은 정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의 억압을 거부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권력을 갖게 되면 똑같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외치면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탈출은 일어나지만 인간의 중심은 바뀌지 않습니다.
외부의 환경은 달라졌지만 마음의 왕좌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앉아 있습니다.
전도서 1장 9절은 말씀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변화가 무의미하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수고와 성취가 궁극적인 의미와 만족을 제공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새로운 대상 안에서도 옛 욕망을 반복합니다.
돈을 얻으면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지만 더 많은 돈을 원합니다.
명예를 얻으면 인정받으려는 갈망이 사라질 것 같지만 더 큰 명예를 추구합니다.
권력을 얻으면 불안이 사라질 것 같지만 더 많은 통제를 원합니다.
대상은 달라져도 욕망의 중심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5절은 인간의 타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의 근본 문제는 단순히 사회적 구조나 외부 환경에 갇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 드려야 할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리고,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잃기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마음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돈도, 명예도, 성공도, 심지어 종교적 활동도 하나님보다 앞서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환경을 바꾸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내 삶의 중심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 결심만으로 자기중심성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자리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새로운 왕좌를 세우려 할 때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삶을 재구성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기 계발과 기독교적 변화의 차이입니다.
자기 계발은 내가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내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역사는 한 사람의 부르심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3장. 갈대아 우르에서 모리아산까지, 은혜가 이끄는 순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창세기 12:1
이 부르심의 중심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위대한 결단을 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모두 알고 떠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그는 안정된 환경을 떠나 낯선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워했고, 때로는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한 사건에서도 그의 두려움과 자기 보호의 본능이 드러납니다(창세기 12:10–20; 20장).
이것은 중요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이 그의 실패보다 크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은 말씀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의 의로움은 하나님과 거래하여 얻어 낸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의 질서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믿음과 순종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언약의 질서입니다.
1) 믿음의 여정은 내가 목적지를 소유하는 여정이 아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자기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내 사업이 잘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 내 계획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셨으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욕망을 보증하는 계약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계획을 마음껏 실현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열방을 복되게 하시겠다는 구속의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창세기 12:2–3).
믿음은 하나님을 내 계획에 초대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내가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고통이라고 말하고, 실패를 실패라고 인정하며,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현실이 자기 인생의 최종적인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모든 일이 자동으로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목적 안에서 이끄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사건이 있습니다.
기쁨도 있고, 상실도 있고, 기다림도 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 모든 사건을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재료로 삼지 않습니다.
그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2) 모리아산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자기 확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리아산에서 결정적인 시험을 받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은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도 매우 무겁게 다가옵니다.
이삭은 단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질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삭을 통해 언약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의 결말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기 확신이나 인간적 계산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숫양을 준비하셔서 번제물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22:14).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꾀로 지켜 내려고 할 때마다 두려움과 자기 보호의 유혹에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모리아산의 사건은 언약의 성취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드러냅니다.
물론 이 본문을 오늘날 누군가가 자녀를 해치거나 비윤리적인 일을 하라는 명령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자체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실제로 죽이지 못하게 막으시며, 대신 준비하신 제물을 드리게 하십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희생 행위를 찬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준비하심, 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 장면은 더 큰 구속의 역사를 바라보게 합니다.
창세기 22장 8절에서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동시에 기독교의 성경 전체를 읽는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을 준비하시는 궁극적인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준비된 제물을 드렸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고 선포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모리아산의 이야기는 인간이 자기 아들을 바쳐 구원을 얻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 은혜 앞에서 우리의 자랑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제 인생을 제가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저를 붙들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믿음의 순례를 시작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4장. 행함이 있는 믿음, 누가 구원의 일을 이루는가?
여기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신학적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행함 때문입니까?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선포합니다. 반면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말씀은 구원을 인간의 선행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이 문제를 매우 선명하게 정리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그리고 곧이어 10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둘째, 구원은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셋째,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지음 받았습니다.
선한 일은 구원의 값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바울과 야고보를 함께 읽는 열쇠입니다.
바울은 선행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확보하려는 인간을 반박합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형제자매의 실제적인 필요를 외면하는 공허한 신앙을 반박합니다.
두 사도는 서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오류를 바로잡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한 사건으로 언급됩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야고보서 2:21–22).
이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구원받을 자격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이 실제적인 순종으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다른 길로 보내어 보호했습니다(여호수아 2장).
야고보는 이 행동을 믿음과 분리할 수 없는 행함의 사례로 제시합니다(야고보서 2:25).
아브라함과 라합은 사회적 배경도, 삶의 환경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야기는 믿음이 단순한 지적 동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누구이신지를 신뢰하는 것이며, 그 신뢰는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가 사람을 변화시키며, 그 변화가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완전하게 사랑하고 순종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도는 여전히 연약하며, 회개해야 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십니다(고린도후서 3:18).
여기서 우리는 자기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봉사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헌금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선교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도왔다고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다고 판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은혜를 받았으니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은혜는 선행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핑계가 아닙니다. 은혜는 선행의 뿌리를 새롭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신학적 토대를 가지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돌아가야 합니다.
율법사는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랑의 계명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고 비유를 통해 그의 자기 확신을 흔드십니다.
그렇다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에서 누가 진정한 이웃으로 나타납니까?
바로 예상하지 못한 인물, 사마리아인입니다.
5장.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가고, 사마리아인은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한 사람의 비극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의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강도들을 물리칠 수도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일어나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잃었습니다. 안전을 잃었고, 존엄을 잃었으며, 자기 삶을 통제할 능력마저 잃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제사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레위인입니다. 두 사람은 그를 보고도 지나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본문은 그들이 왜 지나갔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질 수 있다는 율법적 이유를 생각하는 해석도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으므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보았지만,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지위가 고통받는 사람을 향한 긍휼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신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누군가의 눈물을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종교적 활동과 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자동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고, 봉사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 행사를 위해 수고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런 활동이 이웃을 향한 긍휼과 분리된다면 우리는 신앙의 중심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1장 17절은 말씀합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형식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정의와 긍휼, 약한 자를 향한 돌봄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미가 6장 8절도 같은 진리를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이웃을 향한 우리의 태도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는 더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오랜 역사적·종교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9절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긴장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 배경에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으로 보이는 강도 피해자를 돌본다는 것은 단순한 친절 이상의 충격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대하던 종교적 중심인물이 아니라, 청중이 경계하거나 멸시할 수 있는 인물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세우십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피해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맸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를 돌보았고, 다음 날에는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며 계속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추가 비용이 들면 돌아와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사랑은 감정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자기 소유를 사용했습니다. 위험과 불편을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의 행동으로 끝내지 않고 지속적인 돌봄을 마련했습니다.
긍휼은 고통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실제로 다가가 돌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의 민족을 먼저 묻지 않았습니다. 종교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올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통받는 사람을 보았고, 그 고통 앞에서 행동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종교적 형식만으로는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사랑은 상대가 나의 이웃이라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데서 나타납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에서,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로
율법사는 처음에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는 사랑의 대상을 규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질문을 바꾸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가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었는가를 물으십니다.
이것이 비유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저 사람은 내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
‘내가 왜 저 사람까지 도와야 하는가?’
‘저 사람이 먼저 달라져야 하지 않는가?’
물론 사랑은 지혜와 책임을 필요로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접근이 안전하거나 적절한 것은 아니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전문적인 지원과 공동체의 돌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출발점이 언제나 상대방의 자격 심사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이 비유의 도전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경계를 좁히려는 인간에게 사랑의 방향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질문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 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는 왜 사랑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해야 할 때 우리 안에서는 이기심과 두려움, 무관심과 계산이 일어납니다.
사랑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우리에게 사랑의 명령만을 남겨 놓는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그 명령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을 바라보게 하는 이야기일까요?
이 질문을 따라 이제 우리는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6장. 강도 만난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만큼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의를 쌓는 데서 구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관점은 성경 전체의 복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상의 균형을 하나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자체는 강도 만난 사람을 곧바로 예수님, 사마리아인을 곧바로 그리스도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직접적인 문맥은 이웃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이 비유를 성경 전체의 구원 이야기와 함께 읽을 때, 사마리아인이 보여 준 긍휼은 죄인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게 하는 풍성한 연결점이 됩니다.
이 연결은 본문의 직접적인 의미를 대신하는 해석이 아니라, 본문에서 드러난 긍휼을 복음의 더 큰 빛 아래에서 바라보는 신학적 묵상입니다.
1) 우리는 상처 입은 존재일 뿐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존재다
강도 만난 사람은 스스로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힘을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야 했습니다.
이 장면을 우리의 영적 현실과 연결해 보십시오.
에베소서 2장 1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경은 인간의 문제를 단순히 교육 부족이나 의지 부족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으며, 죄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좋은 습관을 만들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는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자기 개선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합니다. 새 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없애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로마서 5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리고 8절은 더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완전해졌을 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자격을 증명했을 때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2) 구원은 내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일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원 행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 사다리를 쌓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께서는 멀리서 우리를 향해 사랑하라고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픔과 피곤함을 경험하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만나셨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식탁을 나누셨습니다.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와 복음의 놀라운 접점을 발견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소유를 사용해 그를 돌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돌봄은 상처 입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유일하고 결정적인 구원 사건입니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마리아인의 행동 자체가 십자가의 대속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긍휼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3)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 의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은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할까요?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성취해야 안심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 일을 증명해야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는 공로가 없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디도서 3장 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이 말씀은 우리의 선행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행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선한 삶을 이루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뒤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우리의 마음과 소원과 행동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내가 원래의 나를 더 세련되게 포장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인격과 책임이 사라지는 과정도 아닙니다.
성화는 성령의 역사 안에서 죄와 싸우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평생의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부인은 내가 내 삶의 절대적인 주인이라는 주장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내 성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에서 옛사람의 지배가 무너지고 새로운 생명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선택과 관계가 그분의 말씀에 의해 새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조차 자기 의를 쌓는 데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이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가 낳는 새로운 삶입니다.
7장.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은혜가 낳는 사랑
이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에 도달하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누가복음 10:36
율법사는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누가복음 10:37
여기에서 우리는 이 비유를 읽을 때 반드시 붙들어야 할 두 가지 진리를 만납니다.
첫째,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둘째,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이 두 가지를 분리하면 복음의 균형이 무너집니다.
첫 번째 진리만 강조하면서 두 번째 진리를 무시하면, 은혜를 핑계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게 됩니다.
두 번째 진리만 강조하면서 첫 번째 진리를 무시하면, 선행이 구원의 자격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은혜와 순종을 함께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합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매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 말씀은 오늘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노력하라는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부르며, 동시에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1) 사랑은 자격을 계산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신분을 확인한 뒤 사랑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고통 앞에서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비슷한 선택의 순간을 만납니다.
누군가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실수부터 지적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만났을 때, 그가 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부터 따질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부족함을 먼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을 분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묵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분명한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분별한다는 이유로 긍휼 자체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누군가의 짐을 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책임을 대신 떠맡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지혜 안에서 함께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실제적인 경제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병원에 함께 가는 일이 필요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 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공동체가 외면해 온 문제를 바로잡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사람의 구체적인 필요 앞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2) 사랑은 자기 자랑을 위한 무대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서 인정받고 싶을 수 있습니다. 헌금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신실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을 수 있습니다.
선교와 구제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경력이나 명성을 쌓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많이 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동기가 언제나 순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것은 선행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의 칭찬을 얻기 위해 선행을 이용하는 태도입니다.
그렇다고 동기가 완전히 순수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의 동기는 복잡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동기를 정직하게 살피고, 잘못된 마음을 회개하며, 실제적인 사랑의 행동을 계속 배워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해진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변화되어 가면서 사랑을 배웁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열매가 맺힐수록 우리는 자기 자랑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고백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은 묻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의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기회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자랑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감사할 이유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은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우월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3) 사랑은 교회 담장 밖에서도 증명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중요한 사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종교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길 위에 있었습니다.
그를 돌본 사마리아인은 종교적 지위나 공동체의 인정에 의존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이웃도 교회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있습니다. 직장에 있습니다. 학교에 있습니다. 지역사회에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질병과 장애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외로움과 고립을 경험하는 사람들, 사회적 편견 때문에 배제되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복음의 사랑을 삶으로 증언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경건은 예배당 안에서의 태도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힘없는 사람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과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서도 드러납니다.
교회가 약한 자를 외면한다면 복음의 증언은 약해집니다.
반대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을 돌보고, 부당한 고통에 맞서며, 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수고한다면 세상은 그 공동체의 삶을 통해 복음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
물론 교회의 선행이 복음 선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선교와 구제, 사회적 책임은 서로 경쟁하는 사역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이 삶에서 낳는 사랑과 정의의 열매를 함께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받은 사랑의 의미를 삶으로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사랑받는 사람으로만 머물게 하지 마십시오. 제가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게 하십시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사랑을 독점하지 않습니다. 받은 사랑을 흘려보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8장. 자기 의의 왕좌에서 내려와 은혜의 사람으로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세 가지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영생을 확보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율법사는 영생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 했고, 이웃 사랑의 범위를 정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질문을 뒤집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범위를 정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시고 약속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준비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을 구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셋째, 은혜는 우리를 사랑의 삶으로 부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지나갔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이웃 사랑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복음의 순서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워진 삶에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마지막 묵상 — 나는 지금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잠시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까?
남보다 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우리의 신앙생활마저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복음 앞에서 잠시 멈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완전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직장에서 내가 외면하고 있는 동료가 있습니까?
교회에서 누군가가 홀로 감당하고 있는 짐이 있습니까?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과 물질로 도울 수 있는 이웃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그 사람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부터 따지지 마십시오.
물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올바른 도움의 방법을 찾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과 협력하십시오.
사랑은 무모함이 아니라 책임 있는 긍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를 미루기 위해 끝없이 이유를 만들지는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랑의 책임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마디의 위로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부당한 대우를 멈추게 하고, 안전한 도움을 연결해 주는 용기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보여 주는 대신,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마음에 새기십시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만 생각하며 절망하지도 마십시오.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에 붙들려 다시 일어나십시오.
우리가 완벽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완성할 수 있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에 섬깁니다.
이제 자기 의의 왕좌에서 내려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들고 이웃에게로 나아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복음의 길입니다.
마무리 기도 — 먼저 사랑하신 주님, 저를 사랑의 통로로 사용하소서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영생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 했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의 경계를 정하려 했으며, 이웃을 섬기면서도 때로는 우리의 선행을 자랑하려 했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자랑하기 전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 증명하기 전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에 달려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의와 교만을 무너뜨려 주옵소서.
돈과 명예와 성공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게 하시고, 사람의 칭찬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지 않게 하시며,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사실로 위안을 얻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님, 은혜를 안다는 말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도 지나치지 않게 하시고, 사마리아인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게 하시고, 우리가 가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기꺼이 나누게 하옵소서.
사랑할 자격이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이웃에게 다가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선행이 자기 자랑이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선한 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넘어질 때 다시 일으켜 주시고, 사랑하기 어려울 때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굳어질 때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으로는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다스려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가정에 흐르게 하시고, 우리의 교회에 흐르게 하시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흘러가게 하옵소서.
우리가 구원의 공로를 쌓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주님, 이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을 통해 우리의 의를 증명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을 향해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세상의 자랑이 아니라 복음의 증언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