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예수님의 비유 9장] 무엇이 반석이며, 무엇이 모래입니까? 오늘 우리는 무엇 위에 인생의 집을 짓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7:24–27)

knowledgeplatform100 2026. 10. 20. 13:11

1. 두 집의 차이는 외관이 아니라 기초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7:24–27)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들려주신 매우 익숙한 비유입니다.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두 집에 부딪쳤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크게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물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단순히 선한 행위를 많이 하는 사람과 적게 하는 사람의 차이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전체를 통해 드러내신 복음의 깊이를 놓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앞부분을 함께 읽어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그리고 22절에서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 자신들의 행위를 내놓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태복음
7:22)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했다고 주장했으며, 놀라운 종교적 활동을 자신들의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태복음 7:23) 

이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고, 능력 있는 사역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의 확신을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믿음이며, 무엇이 거짓된 믿음입니까? 무엇이 반석이며, 무엇이 모래입니까?

오늘의 핵심은 단순히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근거가 무엇이며, 그 행위를 통해 누구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훌륭한 종교적 행위가 반드시 참된 믿음의 기초를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집의 외관을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두 집 모두 집입니다. 두 집 모두 지어졌습니다.

차이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기초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신앙을 외형으로 평가하기 쉽습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는가?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는가?

얼마나 많이 헌금하는가?

얼마나 성경을 잘 아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기초로 돌리십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세워져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의와 성취 위에 세워져 있는가?

이것이 오늘 비유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2. “주여, 주여”라는 고백과 주님을 아는 믿음

예수님께서 심판의 날을 말씀하실 때,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7:21–23, 마태복음 6:1–6)

 

그들의 입술에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종교적 활동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일을 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고백과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것과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 능력으로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께 더 큰 보상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봉사를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확인받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종교적 활동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앞부분에서 이미 이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6:1)

구제할 때, 기도할 때, 금식할 때 사람들의 인정을 얻으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의 가르침은 7장의 마지막 비유와 연결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는 의와 종교적 열심은 겉으로는 훌륭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의 동기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선행에 자기 영광이 섞여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는 자기 의를 세우려는 욕망이 얼마나 쉽게 자리 잡는지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행위가 단지 외적인 결과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시편 139:23)

신앙의 성숙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확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살피며, 자신의 의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구제와 기도와 봉사를 그만두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면서도 제 이름을 높이려 하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의 일을 하면서 제 공로를 쌓으려 하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이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을 참된 기초 위에 세우기 위한 기도입니다.

 

 

3.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믿고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38–40, 에베소서 2:8–10)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그 뜻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6:38)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40)

 

아버지의 뜻은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중심은 인간의 성취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선행을 쌓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10)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한 일을 행하도록 새롭게 지음 받았습니다.

 

선행은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순종은 구원의 값을 치르는 행위가 아니라, 구원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표지입니다.

 

이것이 종교적 율법주의와 복음의 차이입니다.

율법주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충분히 행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셨으므로, 나는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순종한다.”

 

이 둘은 겉으로 비슷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기도할 수 있고, 헌금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의 근거와 방향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행합니다. 다른 사람은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행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얼마나 많이 행했는가?”만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의 의를 의지하고 있는가? 나의 구원은 누구의 공로 위에 서 있는가?”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입니다.

 

 

4. 에덴의 닫힌 길과 십자가로 열린 은혜의 길

본문: 창세기 3:22–24, 히브리서 10:19–22, 요한복음 14:6

이 은혜의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성경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이 선과 악의 판단자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고,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은 닫힙니다.

창세기 3장 24절은 하나님께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장면은 죄인이 자기 힘으로 생명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도덕과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그 선행이 과거의 죄를 없애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충족하는 구원의 공로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으로 가는 길은 영원히 닫혀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여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생명으로 가는 길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9)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여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충분히 깨끗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우리가 종교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앞에서 인간의 자랑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균형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선행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선행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사라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셔서 사랑과 순종의 삶으로 부르십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십자가는 자기 의를 무너뜨리지만, 순종의 삶을 폐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의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세우고, 그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합니다.

 

 

5. 선한 행위가 자기 영광의 마일리지가 될 때

본문: 누가복음 18:9–14, 마태복음 6:1–4

우리는 종교적 열심이 자기 의로 변질되는 모습을 성경에서 자주 발견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내세웁니다.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합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18:13)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금식이나 십일조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행위를 자신의 의를 증명하는 근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인지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의의 위험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마일리지를 쌓을 수 있습니다.

“나는 매일 기도한다.”

“나는 교회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한다.”

“나는 헌금을 많이 한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성경을 많이 안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말씀을 배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한다면, 신앙생활은 은혜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자기 의를 쌓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 의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나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헌신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헌신을 평가합니다.

내가 성경을 많이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믿음을 낮게 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모두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묻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의 믿음도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재능도, 시간도, 물질도, 사역의 기회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이 행한 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위의 근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왔다면, 그 도움을 통해 자신을 높이기보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겼다면, 그 섬김을 자신의 지위를 세우는 근거로 삼기보다 주님께서 주신 기회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렸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더 큰 보상을 요구하기보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구원의 증서로 내놓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드린 것보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것이 훨씬 큽니다. 제가 행한 것보다 주님께서 저를 위해 행하신 일이 훨씬 큽니다.”

 

 

6.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집은 은혜로 세워지는 삶

본문: 고린도전서 3:10–11, 고린도전서 10:4, 히브리서 12:2

이제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말의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1)

바울은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신앙의 시작이며, 지속이며, 완성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인간의 공로를 더하여 완성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구원의 은혜에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7:24)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참된 제자의 삶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 행함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그분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듯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참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순종은 자기 의를 세우는 독립적인 성취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는 삶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때로는 실패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실패를 감추고 더 많은 종교적 활동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습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며, 주님의 사랑을 제 안에 이루어 주소서.”

 

이 고백은 순종을 포기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순종의 근원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참된 믿음은 은혜를 핑계로 말씀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알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려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서와 로마서의 가르침도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로마서 3:28).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야고보서 2:17).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야고보는 참된 믿음이 실제 삶에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는 죽은 믿음일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지만, 구원하는 믿음은 우리를 순종의 삶으로 이끕니다. 이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7. 와디의 모래와 폭풍의 시험

본문: 마태복음 7:25–27, 시편 1:1–3

예수님께서는 두 집에 똑같이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고 해서 폭풍을 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고난을 겪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질병과 상실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인생의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두 집의 차이는 폭풍이 오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폭풍을 견딜 수 있는 기초가 있었느냐에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와디라는 지형을 예로 보면 모래 위의 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기에는 단단해 보이는 마른 물길이 우기에는 갑자기 물이 흐르는 위험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평온할 때는 단단해 보였던 신앙이 위기의 순간에도 견고합니까?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때는 열심히 봉사하던 사람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도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는 감사하던 사람이 응답이 늦어질 때도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경제적으로 넉넉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던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좋은 환경에 의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에 의존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과 성취에 의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영원한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활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들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시편 1:3)

그 나무가 열매를 맺는 이유는 자기 힘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린 사람은 고난이 없어서 견고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붙들기 때문에 견고합니다.

 

 

8. 참된 열매는 성령께서 맺으십니다

본문: 마태복음 7:15–20, 갈라디아서 5:22–23

마태복음 7장의 마지막 비유를 이해하려면 그 앞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말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마태복음 7:16)

이 말씀은 사람의 외적인 성취만을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 거짓 선지자를 경고하십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 수 있습니다. 훌륭한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과 삶이 어떤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끄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합니까? 아니면 인간의 공로와 자랑을 키웁니까?

그 사역이 성도를 사랑과 겸손으로 이끕니까? 아니면 두려움과 과도한 의존, 지도자 개인에 대한 숭배를 낳습니까?

그 열매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열매들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훈련하여 하나님께 구원의 자격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역사하셔서 맺게 하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물론 성도는 이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열매의 근원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령의 열매가 신자에게 완성된 형태로 즉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여전히 죄와 싸우며 성화의 길을 걸어갑니다.

 

어떤 날에는 사랑이 부족하고, 어떤 날에는 인내하지 못하며, 어떤 날에는 교만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그렇다고 참된 믿음이 없다고 성급하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열매가 완성되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계시는지 살펴야 합니다.

참된 성도는 자신의 실패를 발견할 때마다 은혜를 구합니다.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회개합니다.

 

자신이 맺은 열매를 자랑하기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 부족한 부분을 주님께 맡깁니다.

참된 열매는 자신을 높이는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9. 오늘 우리는 무엇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까?

본문: 마태복음 7:24–29, 빌립보서 2:12–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일을 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말씀을 공부합니다. 기도합니다. 헌금합니다. 구제합니다. 봉사합니다. 선교합니다.

 

이 모든 일은 귀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무엇을 의지하여 그 일을 하고 있느냐?” 

 

우리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기도한 만큼 하나님께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서입니까?

내가 헌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헌금을 통해 내 삶의 가치를 증명하고 더 큰 복을 얻으려는 것입니까?

내가 봉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얻기 위해서입니까?

내가 말씀을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로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입니까?

 

이 질문들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자기 의가 발견될 때, 우리는 그 자기 의를 붙들고 더 열심히 행함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제 안에 여전히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행한 선한 일조차 제 자랑이 되려 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저를 새롭게 하소서.” 그리고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시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13절은 이 균형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자기 힘으로 완성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그 은혜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믿는 성도는 선한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더 진실하게 사랑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이웃을 섬깁니다.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진리 안에서 겸손히 권면합니다.

그는 실패할 때도 절망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신의 실패보다 크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공할 때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견고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10. 결론 — 주님,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세워 주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두 집은 외형으로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두 집 모두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왔을 때 그 기초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얼마나 훌륭해 보이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초로 삼고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기초는 우리의 선행도, 우리의 열심도, 우리의 종교적 성취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과 순종의 열매를 맺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고백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행한 일로 저를 자랑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행하지 못한 일로 절망하지도 않게 하소서.

저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게 하소서. 제가 주님의 은혜를 깊이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사랑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마치시며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은 그리스도를 떠나 자신의 의를 세우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를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우리 자신이 반석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오늘도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때로는 우리의 이름을 높이려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공로를 쌓으려 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하면서도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했고, 종교적 열심을 통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살펴 주옵소서.

우리의 자랑과 교만을 드러내시고, 우리가 의지하던 자기 의를 내려놓게 하옵소서.

우리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은혜를 핑계로 순종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순종을 통해 우리의 의를 쌓으려 하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 주옵소서.

 

우리의 신앙이 사람들의 칭찬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고난과 시험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붙들게 하옵소서.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자랑하기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가 자기 의의 모래 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반석 위에 세워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