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미혹의 거짓 영을 분별하라! 소비자가 아니라 예배자로 살라(요한일서 4장 1–21절)

knowledgeplatform100 2026. 10. 16. 14:29

프롤로그. 세상은 우리를 흔들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세우십니다 (요한일서 4장 1–21절)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4장을 통해 매우 중요한 질문 앞에 서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의 미혹을 이기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믿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뜨겁기만 한 인생을 살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뛰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나며,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늦어지고, 말씀대로 살았는데도 손해를 보며, 정직하게 행동했는데 오히려 불이익을 당합니다.

사랑했는데 상처를 받고, 섬겼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며, 충성했는데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정말 바르게 믿고 있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야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 과연 내 인생에 유익할까?’

 

요한일서는 바로 이런 질문을 품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서신은 사도적 복음의 진리를 붙들면서도, 거짓 가르침과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 믿음을 지켜야 했던 교회 공동체를 향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판단하기는 오히려 어려워졌습니다.

 

수많은 설교와 영상, 철학과 심리학, 성공의 원리와 자기 계발의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형성합니다.

그 가운데는 유익한 통찰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는 가치관도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는 단순히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누구의 음성에 순종하고,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요한은 이 문제를 두 가지 명령으로 풀어 갑니다.

첫째, 영들을 분별하십시오.

둘째, 서로 사랑하십시오.

 

얼핏 보면 분별과 사랑은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하나의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은 진리와 사랑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방향을 잃고, 사랑이 없는 진리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드러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린 사람입니까?

나는 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 삶을 드리는 예배자입니까?

나는 사랑받기를 기다리는 데 머무는 사람입니까, 먼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입니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우리의 영적 성숙을 결정합니다.

 

 

1.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 — 반복 속에 담긴 영적 각성

요한일서를 읽다 보면 반복되는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라는 말씀, 하나님 안에 거하라는 말씀,

미혹되지 말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

 

왜 같은 말씀을 반복할까요? 성경의 반복은 단순히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잊지 말아야 할 진리를 다시 새겨 주시는 방식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합니다(신명기 6:6–7).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여러 상황에서 거듭 가르치셨습니다.

바울 역시 같은 내용을 다시 쓰는 것이 성도들에게 안전하다고 말합니다(빌립보서 3:1).

 

믿음은 한 번 듣고 모든 것을 완성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듣고,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실천하면서 깊어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듣습니다. 이미 아는 이야기인데도 다시 듣고 싶어 합니다.

 

반복되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배워 가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이 어려워지면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잊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리를 반복하여 들려주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반복 속에서 말씀이 우리를 더 깊은 자리로 이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들립니다.

그다음에는 왜 사랑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복음에 도달합니다.

 

처음에는 미혹되지 말라는 경고로 들립니다. 그다음에는 무엇이 미혹인지 살피게 됩니다.

마침내 우리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무엇을 예배하며 살아가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말씀은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들은 말씀이라고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말씀 앞에서 오히려 자신을 낮추십시오.

 

말씀을 많이 아는 것과 말씀에 의해 변화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도 자기 욕망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면서도 이웃에게 냉혹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많이 들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은 바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새로운 지식만이 아닙니다. 이미 들은 말씀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은혜입니다.

 

오늘 요한이 반복하여 들려주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진리를 분별하십시오. 하나님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연결될 때, 우리의 믿음은 감정의 높낮이를 넘어 삶을 지탱하는 뿌리가 됩니다.

 

2. 빛처럼 다가오는 미혹 — 무엇이 참된 영성을 결정하는가

요한일서 4장 1절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분별하라’입니다.

 

성경은 무조건 의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적대적으로 대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영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영적 주장과 종교적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속으로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마태복음 7장 21–23절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적인 종교 행위만으로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가르침이 참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뜻이 입증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이 감동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메시지 전체가 성경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미혹은 언제나 무섭고 추한 얼굴로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매우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불안을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고, 욕망을 충족해 줄 것처럼 보이며, 복잡한 현실을 단번에 설명해 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적 증언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2–3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시인하는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도덕 교사가 아니십니다.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는 위대한 스승에 그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으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2장 14–17절은 예수님께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으로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일을 이루셨다고 설명합니다.

 

왜 성육신이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실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고통을 외면한 채 멀리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실제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부정하거나, 그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그분의 구원 사역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가르침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고백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16).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구원자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둘째, 영적인 현상보다 말씀의 진리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출애굽기 7장 11–12절에서 애굽의 술사들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비슷한 현상을 나타냈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판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은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간절히 받고,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살폈다고 칭찬합니다.

참된 신앙은 맹목적인 추종이 아닙니다. 성경을 깊이 배우고, 가르침을 검토하며,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 안에서 판단하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조심할 점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모든 말을 단 한 번의 실수로 거짓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유명하거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의 모든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사람을 무조건 숭배하지 말고, 그렇다고 성급하게 정죄하지도 마십시오. 성경을 기준으로 차분히 살펴야 합니다.

 

셋째, 참된 진리는 사랑과 거룩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고백한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정확한 문장을 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그분의 말씀과 통치 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은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고백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과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어떤 가르침이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하면서도 탐욕과 교만, 증오와 착취를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그 가르침을 심각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진리는 사랑을 파괴하는 면허가 아닙니다. 사랑도 진리를 무너뜨리는 변명이 아닙니다.

참된 분별은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과 말씀에 대한 순종, 그리고 사랑의 열매를 함께 살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영적인 것을 무조건 두려워하지도 말고 무조건 믿지도 마십시오. 성경을 배우십시오.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 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따르는 가르침이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지 살펴보십시오.

이것이 미혹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영적 분별력입니다.

 

 

3. 욕망의 시대를 거슬러 — 소비자가 아니라 예배자로 살라

요한일서 2장 15–17절, 4장 4–6절, 이제 우리는 조금 더 깊은 문제로 들어가야 합니다.

교리적인 미혹은 성경을 통해 비교적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은밀한 미혹이 있습니다.

 

성경의 단어를 노골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삶을 서서히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이는 미혹입니다.

이것을 세속주의의 문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세속주의를 단순히 세상에 살거나 물질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세상 속에서 일하고, 가정을 돌보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를 선하게 지으셨고, 우리에게 그 세계를 책임 있게 돌보도록 맡기셨습니다(창세기 1:28, 31).

문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리하고, 하나님 대신 세상의 가치와 욕망을 삶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지 보여 줍니다.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께서 주신 욕구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가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벗어나 나를 지배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안목의 정욕은 보는 것을 통해 욕망이 자극되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끊임없이 탐내게 되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이생의 자랑은 자신이 가진 재산과 지위, 능력과 성취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태도입니다.

 

이 세 가지는 오늘 우리의 일상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가져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느낍니다. 소유와 성취가 늘어날수록 만족할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 커집니다.

 

왜 그럴까요?

욕망은 만족을 약속하지만, 하나님과 분리된 욕망은 끝없는 비교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를 얻으면 더 좋은 것을 원합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면 자신의 삶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가진 것을 누리기보다 아직 갖지 못한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때 신앙마저 욕망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바뀔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 계획을 이루는 수단이 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한 거래가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기회를 얻는 장소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필요를 아뢰는 기도는 성경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6:11).

문제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 욕망에 종속시키려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통해 얻을 것을 사랑합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을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예배자와 소비자는 무엇이 다릅니까?

예배자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소비자는 자신의 만족을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이 구분은 단순히 경제 활동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묻는 영적 질문입니다.

소비자의 태도로 예배하면 예배가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는 행사로 바뀝니다.

 

찬양이 마음에 들면 기뻐하고, 설교가 내 생각과 맞으면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말씀이 내 욕심을 건드리면 불편해하고, 나를 회개로 이끄는 설교를 들으면 설교자를 비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배에는 기쁨과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설교도 성경에 충실하면서 성도를 세우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목적이 언제나 내 기분을 만족시키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때로는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판단을 수정하게 하시고, 내려놓지 못했던 욕심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해 주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예배의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배는 주일 예배당 안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예배는 월요일의 직장으로 이어집니다.

돈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가족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지며,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내리는 결정으로 이어집니다.

 

정직하게 일하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것, 성공을 위해 양심을 팔지 않는 것, 나에게 유리하지 않아도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 이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삶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주의를 이기는 첫 번째 길은 세상을 무조건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다시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미디어 시대, 우리는 예배의 참여자인가 구경꾼인가?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은 소비자적 태도가 예배 자체에도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설교와 찬양을 손쉽게 접합니다. 좋은 콘텐츠를 찾아 듣는 것은 유익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와 디지털 매체도 복음을 전하고 성도를 돕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리함이 참여를 대신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찬송을 듣는 데 익숙해져 정작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계속 접하면서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를 평가하면서 자신의 기도는 멈출 수 있습니다.

 

찬송의 핵심은 음악을 감상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과 감사와 간구를 올려 드리는 데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찬양하거나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과 장애, 환경에 따라 표현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높이며, 말씀에 응답하는 태도입니다.

예배는 공연을 관람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자리입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되기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려는 유혹에 넘어갔습니다(창세기 3:4–6).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판단의 권한을 맡기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이라고 부르고 불편한 말씀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내 판단 아래 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의 욕망과 충돌할 때, 그 충돌을 무조건 제거하려 하지 마십시오. 먼저 물으십시오.

 

‘주님,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습니까?’

‘제 안에 어떤 욕망이 주님의 뜻을 가리고 있습니까?’

‘제가 다시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합니까?’

이것이 예배자의 질문입니다.

 

세속주의를 이기는 실제적인 훈련

첫째, 말씀을 읽을 때 나에게 유리한 구절만 찾지 마십시오.

나를 위로하는 말씀과 함께 나를 교정하는 말씀도 받아들이십시오.

 

둘째, 소비와 소유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습관을 돌아보십시오.

돈을 버는 것은 악이 아니지만, 돈이 나의 정체성과 안전의 최종 근거가 되면 마음은 점점 돈에 묶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은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선을 행하며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라고 권면합니다.

 

셋째, 예배와 기도를 일상의 순종으로 연결하십시오.

예배 시간에 용서를 구했다면 실제로 화해를 시도하십시오.

정의를 위해 기도했다면 부당한 일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도했다면 가능한 방식으로 도움을 나누십시오.

 

넷째,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을 선택하십시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정체성은 소비자에서 예배자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다음 질문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때로 성공이 아니라 실패처럼 보이는 순종에 있습니다.

 

 

4. 실패처럼 보이는 순종 —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진리를 따르라

요한일서 4장 4절은 성도에게 놀라운 선언을 들려줍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강해서 세상을 이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보다 크시기 때문에 승리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승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승리를 흔히 성공과 동일시합니다.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고, 계획한 일이 성취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눈에 보이는 열매가 많아지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공과 열매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공만을 순종의 증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거절당하고 박해받았습니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당대의 성공 기준으로 평가하면 실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했고, 어떤 사람들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히브리서 11:32–38).

 

그들은 모두 똑같은 환경에서 같은 결과를 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했다는 점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요한일서 4장 5–6절은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말을 구별합니다.

세상은 세상에 속한 말을 잘 듣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사도적 진리의 증언을 듣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언제나 세상의 환영을 받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세상은 정직을 칭찬할 때도 있지만, 정직 때문에 손해를 보면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자신이 용서해야 할 상황에서는 복수를 권할 수 있습니다. 나눔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몫을 내어 주는 사람을 보면 이용당한다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박수를 얻기 위해 말씀을 조정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할 것인가?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모든 반대가 우리가 옳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우리의 무례함이나 미숙함 때문에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자랑하거나 반대 자체를 영적 훈장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진리에 충실하고 사랑과 겸손으로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한다면, 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진리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순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2:24).

 

이 말씀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영광에 있습니다. 동시에 제자의 삶 역시 자기 보존과 자기 영광만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내어 드리는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으면 반드시 곧바로 열매가 맺히기를 바랍니다.

정직하면 즉시 인정받고, 봉사하면 곧바로 보람을 느끼며, 복음을 전하면 당장 변화가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은 우리의 시간표와 항상 같지 않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심었다고 해서 다음 날 곧바로 열매를 수확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심은 씨앗이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 언제 싹을 틔울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되, 오늘 해야 할 순종은 미루지 마십시오.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보았을 때 지혜롭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진실을 말하십시오.

 

가정에서 잘못했다면 먼저 사과하십시오. 교회에서 알아주지 않아도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십시오. 복음을 전했는데 거절당하더라도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과 존중으로 대하십시오.

 

다만 모든 고통을 무조건 견뎌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과 학대, 불법과 착취 앞에서는 안전을 확보하고 적절한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순종은 악을 방치하는 일이 아니며, 믿음은 무모함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무조건 실패하는 삶이 아니라, 성공을 우상으로 삼지 않고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충실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때로는 오랜 기다림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열매를 다 보지 못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과의 크기로만 평가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충성이라고 부르시는 것을 구하십시오.

사람들의 인정이 늦어져도 진실하게 사십시오. 열매가 더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셨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의 사람으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사람으로도 부르셨습니다.

 

 

5. 사랑은 머무는 것이다 — 예수님의 품과 공동체를 떠나지 말라

이제 요한은 진리의 분별에서 사랑의 문제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일서 4:7)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중요한 순서를 발견합니다.

요한은 먼저 사랑하라고 명령하지만, 사랑의 근거를 인간의 의지에서 찾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까?

더 강한 의지를 가지면 됩니까?

성격을 바꾸면 됩니까?

사랑에 관한 책을 많이 읽으면 됩니까?

 

물론 의지와 배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출발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복음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말씀은 사랑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라는 뜻을 넘어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사랑의 감정과 행동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참된 사랑인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 주셨습니까?

요한일서 4장 9–10절은 그 답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충분히 선해졌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격을 증명한 뒤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새로운 삶으로 부름받습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은 이어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은혜를 얻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신앙은 무거운 종교적 의무가 됩니다. 그러나 이 순서를 바로 세우면 사랑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라 머무는 삶입니다

특별히 강조하는 통찰은 사랑을 ‘거함’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5–16절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사람과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것은 잠시 방문했다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머물며 관계를 지속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어떤 순간에 뜨겁게 느끼는 감정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관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갈등이 생겼다고 관계를 쉽게 버리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발견했다고 곧바로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사랑을 철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머문다는 것이 모든 관계에서 무조건 참거나 위험한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과 학대가 있는 관계에서는 거리를 두고 보호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성경적 사랑은 악을 묵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불편함과 갈등 앞에서 너무 쉽게 관계를 포기하는 태도는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관계를 쉽게 시작하지만, 불편해지면 쉽게 끊어 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기대에 맞지 않으면 상대방을 차단하고,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으면 공동체를 떠나며, 갈등이 생기면 대화보다 단절을 먼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인내와 용서, 진실한 대화와 책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며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완벽하기 때문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서로를 품고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 사랑을 떠난 사람과 사랑으로 돌아오는 사람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원했지만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을 떠났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을 떠난 뒤 그가 경험한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니라 결핍과 고독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에게 돌아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를 종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달려가 안고 입을 맞추며 아들의 귀환을 기뻐합니다(누가복음 15:17–24).

이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 줍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완벽한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인정하고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품었습니다.

 

사랑의 회복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열심이 식었을 때, 세상의 욕망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깨어진 관계가 있다면 지혜와 진실함으로 회복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교회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로 완전히 고립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부르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12–27).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고 성장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족함을 외면할 필요도 없지만, 작은 갈등과 실망만으로 공동체의 가치를 모두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진실을 말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서로를 섬기고, 필요한 경우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은 떠나지 않는 힘이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서도 사람을 회복으로 초대하는 힘입니다.

 

사랑의 기초는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요한일서 4장 15절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0장 9–10절도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믿음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고백은 단순히 특정한 문장을 반복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인정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혼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 관계에 책임을 지고 헌신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은 말로 표현되기도 하고, 약속을 지키는 삶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그 고백은 우리의 선택과 관계와 삶의 방향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찬양을 부르고 기도하며 말씀을 고백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백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입술이 고백한 주님을 삶에서도 따라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누구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까?

나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인정과 욕망에 나의 정체성을 맡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사랑을 말하면서 가까운 사람에게 차가운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 안에 거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진리를 붙들고, 공동체를 섬기며, 다른 사람을 향해 사랑을 실천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가장 깊은 열매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6.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 — 움켜쥐는 삶에서 내어 주는 삶으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요한일서 4:18)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앞뒤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7절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하려는 사랑의 완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심이 되는 두려움은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모든 불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형벌을 두려워하며 떨게 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사랑은 어떻게 그 두려움을 내쫓습니까? 그 출발점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선행과 종교적 열심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로마서 8장 31–39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환난이나 권세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임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자신의 완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참으로 믿을 때 우리는 형벌에 대한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종교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을 모든 두려움이 즉시 사라진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신실한 성도도 질병과 상실, 전쟁과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들도 두려움을 하나님께 솔직히 아뢰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능력입니다.

칼뱅은 요한일서 4장 17–18절을 해설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알 때 양심에 평안이 주어지고 두려움이 믿음에 자리를 내어 준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그에게도 이 말씀의 핵심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이 주는 담대함에 있습니다.

두려움과 욕망은 왜 함께 자라납니까?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돈이 부족할까 봐, 지위를 잃을까 봐,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봐, 혼자 남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모든 불안을 욕심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가난과 질병, 사회적 고립은 사람에게 깊은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더 많이 움켜쥐려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기보다 나만의 안전을 확보하려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관계에 벽을 쌓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전해질 것 같지만, 마음의 벽은 때로 고립을 더 깊게 만듭니다.

 

반대로 사랑은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은 나의 필요만 바라보던 눈을 다른 사람의 필요로 돌립니다.

나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게 합니다.

나의 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내가 가진 것을 지혜롭게 나누도록 이끕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무조건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자신을 돌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원을 책임 있게 관리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축적을 넘어 다른 사람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움켜쥐는 손을 펴게 합니다. 그 손이 펴질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연결됩니다. 누군가를 섬기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 때 삶의 시야가 넓어집니다.

 

고독을 이기는 사랑의 실천

현대 사회에는 혼자 사는 사람도 많고, 가족과 함께 살아도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도 많습니다.

미래의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노년의 고립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사랑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의 돌봄과 사회적 지원,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고독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중요한 태도입니다.

혼자 지내는 이웃에게 먼저 안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새로 온 사람에게 다가가 함께 식사할 수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성도를 위해 이동을 돕거나 필요한 일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가족에게 먼저 연락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섬기는 일은 때로 우리 자신의 고립을 깨뜨립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삶에 작은 선물을 건넬 때, 우리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섬김을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만 삼아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대가를 기대하는 거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보답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존엄과 필요를 존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은 서로의 짐을 지라고 권면합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드러내야 할 모습입니다.

교회는 고독한 사람에게 단지 더 열심히 믿으라고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나누며,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고난의 자리도 달라집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사도행전 7:54–60).

 

그의 고통이 가벼웠던 것은 아닙니다. 죽음의 현실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스데반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언제나 고난을 피하는 데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분의 사랑을 붙드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어도 사랑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을 가능성이 있어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모두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모든 위험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두려움보다 더 깊은 근거가 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힘입어 한 사람을 더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길이 될 것입니다.

 

7. 사랑의 근육을 기르라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이웃에게서 섬기라

이제 요한일서 4장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영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세상의 욕망에 지배당하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씀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며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신앙의 진실성은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요한은 아주 구체적인 답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

 

이 말씀은 기독교 사랑의 출발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사랑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사랑을 검증하는 매우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요한일서 4:20)

 

이 말씀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고, 깊은 신앙고백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형제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고백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족, 직장 동료, 교회 성도, 어려움을 겪는 이웃, 도움이 필요한 낯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때로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의 기대에 맞는 사람도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친절한 사람도 있고,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그 관계 안에서 우리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하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사람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라는 뜻도 아닙니다.

 

인간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을 실제 관계 안에서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5–40절에서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사람을 돌본 일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실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의 고백으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고백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면 어떻게 반응합니까?

외로운 사람을 보면 다가갑니까, 외면합니까?

다른 사람의 실패를 들었을 때 그 사람을 조롱합니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습니까?

누군가 내게 잘못했을 때 진실하게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까, 아니면 상대방을 끝없이 미워하며 살아갑니까?

 

물론 용서가 잘못을 부정하거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해에는 진실한 인정과 책임 있는 변화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복수를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정의와 회복을 추구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훈련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감정이라고만 생각하면 감정이 사라질 때 사랑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뿐 아니라 의지와 행동을 포함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은 사랑이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사랑이 단지 기분 좋은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랑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절제가 필요합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근육을 길러야 합니다.

근육은 한 번 운동한다고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자랍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친절했다고 해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복해서 인내하고, 반복해서 경청하고, 반복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복해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볼 때 사랑의 습관이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근육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경청의 근육: 상대방의 말을 끊거나 곧바로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끝까지 들어 줍니다.

  • 용서의 근육: 잘못을 없는 일로 만들지는 않되, 복수와 원망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습니다.

  • 섬김의 근육: 누군가 먼저 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아 실천합니다.

  • 인내의 근육: 관계가 불편해졌을 때 즉시 포기하기보다 대화와 회복의 가능성을 살핍니다.

  • 진실의 근육: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잘못을 감추지 않고, 상대방의 존엄을 지키면서 진실을 말합니다.

  • 나눔의 근육: 시간과 재능과 재정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며 필요한 사람과 나눕니다.

이 훈련의 목적은 우리가 사랑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동시에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순서는 분명합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선한 행실과 사랑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사랑은 구원의 값을 치르는 행위가 아니라 구원의 은혜가 맺는 열매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

원수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은 쉽게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준비되기를 기다립니다.

용서할 수 있는 감정이 생기면 용서하고, 상대방이 충분히 미안해하면 사랑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은 감정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작은 순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불필요한 보복을 멈추고, 정직하면서도 악의를 품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에게 용서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충분한 시간과 상담, 안전한 거리 두기와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즉시 용서하라고 압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미움에 영원히 갇혀 살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 줍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로마서 5:10).

이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의 의로움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은혜가 필요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악을 악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잘못은 분명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합니다.

가해자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우리는 증오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진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회복을 소망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열매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의 경고는 교회에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과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신학적 논쟁에서 이기는 것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며, 상처 입은 사람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잘못된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거짓을 진실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요한은 두 가지를 함께 붙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고백, 그리고 그 고백에서 흘러나오는 형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사랑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십시오.

 

가족에게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한 사람 찾아보십시오. 오랫동안 미뤄 온 사과가 있다면 지혜롭게 시작하십시오. 교회에서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작은 일을 기꺼이 감당해 보십시오.

 

누군가를 위해 기도했다면 가능한 도움을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을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믿음은 보이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8. 결론 — 진리를 붙들고, 예배하며,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요한일서 4장의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길은 세상의 모든 사람과 싸우는 길이 아닙니다. 세상을 무조건 떠나 은둔하는 길도 아닙니다. 또한 언제나 성공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첫째, 우리는 진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모든 영적인 주장과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고,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십시오.

둘째, 우리는 세상의 욕망을 경계해야 합니다.

돈과 지위, 인정과 성취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해 우리의 삶을 지배하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자가 아니라 예배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셋째, 우리는 결과보다 하나님의 뜻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해서 언제나 세상의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가 늦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은 성공을 우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잠시 방문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말씀 안에 거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세우는 삶입니다.

다섯째, 우리는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 앞에서 우리의 담대함이 됩니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움켜쥐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고립된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여섯째, 우리는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모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고백하는 입술과 사랑을 실천하는 손이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며, 먼저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 이것이 세상의 미혹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까?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 영향력이 큰 사람, 많은 성취를 이룬 사람을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과 영향력을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일이 세상의 성공 기준에만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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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가족을 위해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정직을 지키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낙심한 사람의 손을 잡아 주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당장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심은 작은 사랑이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다 알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을 위한 기도가 그 사람을 다시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작은 친절이 누군가에게 교회를 다시 신뢰할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정직한 행동 하나가 공동체의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의 한 알의 밀알처럼, 하나님께 드린 작은 순종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열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성공의 기준으로만 비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자리에서 충실하십시오.

 

누군가는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누군가는 뒤에서 그 사역을 돕습니다. 누군가는 큰 공동체를 섬기고, 누군가는 한 사람을 돌봅니다. 누군가는 눈에 보이는 열매를 거두고, 누군가는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을 심습니다.

 

각자의 사명과 은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역할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사랑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근원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랑하라는 명령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도저히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관계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어떤 이웃을 섬기는 일은 부담스럽고, 어떤 순종은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그럴 때 자기 자신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강한 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미래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말씀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여러분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사회 속에서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진리를 붙들되 교만하지 말고, 거룩함을 추구하되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말며, 용서하되 악을 묵인하지 말고, 섬기되 지혜롭게 섬기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복음의 실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미혹을 이기는 힘은 세상보다 더 큰 욕망을 갖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진리 안에 거하며,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일서 4장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9. 마무리 기도 —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이 되게 하소서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일서 4장의 말씀을 통하여 진리와 사랑의 길을 다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소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유혹이 있고,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가치관이 있으며,

하나님보다 세상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압박이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영적인 언어와 외적인 능력에만 현혹되지 않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진리를 굳게 붙들게 하옵소서.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모든 가르침을 말씀에 비추어 살피며, 진리와 사랑을 함께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예배를 회복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며,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을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예배를 소비하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게 하시고, 말씀 앞에서 변화되는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찬양을 감상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마음과 입술로 주님을 높이게 하시며,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삶으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 세상의 성공을 우상으로 삼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정직하게 살게 하시고, 결과가 더디게 나타나도 주님의 말씀을 붙들게 하옵소서.

 

열매가 보이지 않는 날에도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주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충실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순종이 무모한 고집이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랑과 지혜와 책임을 동반하게 하옵소서.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피할 길과 도움을 허락하시고,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에게는 정의와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무엇보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떠나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힐 때마다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낙심하여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그 사랑을 힘입어 우리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고독과 상실의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마음의 벽을 쌓지 않게 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다가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지혜롭게 나누게 하시며, 외로운 사람에게 친구가 되고, 낙심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며, 고통받는 사람의 짐을 함께 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사랑이 말에만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가족을 사랑하게 하시고, 직장과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정직과 존중으로 대하게 하옵소서.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게 하시며, 서로의 부족함을 인내하고 진실한 대화와 책임 있는 행동으로 함께 성장하게 하옵소서.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날 때 우리의 힘만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악을 악이라고 말할 용기를 주시되 미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고, 진실을 지키되 교만하지 않게 하시며, 화해를 추구하되 정의와 안전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가까이 있는 형제를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일상의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섬김이 되게 하시며, 우리의 찬양이 삶의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사랑의 근육을 길러 주옵소서.

작은 친절을 반복하게 하시고, 먼저 사과할 용기를 주시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줄 인내를 허락하옵소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도 선을 행하게 하시고, 작은 순종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교회가 진리와 은혜가 함께 흐르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복음의 빛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보다 믿음을 선택하게 하시고, 욕망보다 순종을 선택하게 하시며, 자기중심성보다 사랑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큰 성취를 이루었는가로만 평가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는가로 드러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그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고, 그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진리를 분별하는 지혜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며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