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믿음의 속도를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2장 말씀을 통해 우리 신앙을 근본부터 돌아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오래 들었는데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데도 마음속에는 분노가 남아 있고, 사람을 향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으며, 세상의 온갖 가르침 앞에서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때때로 더 강한 능력을 구합니다.
더 뜨거운 기도를 원하고, 더 큰 은혜를 기대하고, 더 놀라운 기적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내 안에 있는 미움을 제거하고 있는가?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언하는 바로 그분인가?
요한일서 2장은 이 세 가지 질문을 우리 앞에 놓습니다.
첫째, 구원받은 사람은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둘째,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 진리에 속한 사람은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순종 없는 신앙은 말에 머물고, 사랑 없는 열심은 사람을 무너뜨리며, 진리 없는 확신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은 우리에게 복음의 완전한 삶을 보여 줍니다. 용서에서 시작하여 순종으로 나아가고, 사랑으로 열매 맺으며, 진리 안에서 끝까지 거하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의 걸림돌이 제거되고, 어둠 속에 가려졌던 영적인 눈이 열리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다시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장. 용서받은 다음에 시작되는 믿음 — 은혜는 순종으로 열매 맺습니다
1. 죄 사함은 신앙의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과 2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이 말씀에는 복음의 두 가지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요청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범했을 때 우리에게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위로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까지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에 넘어지는 자녀를 절망 속에 방치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대언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와 연결됩니다.
이 단어는 곁에서 돕는 자, 변호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에게 용서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친히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며,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특정한 민족이나 계층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선포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자기 의로움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은혜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는 죄를 반복해도 괜찮다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은혜는 죄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요한이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 용서 이후에 무엇이 달라져야 합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고백하는데, 왜 여전히 같은 죄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왜 이웃을 향한 태도는 달라지지 않습니까?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데 왜 실제 삶에서는 순종하지 않습니까?
요한일서 2장 3절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한일서 2:3)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물론 순종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순종이 구원을 사는 대가도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참된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순종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우리가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선언합니다.
순서를 놓치지 마십시오.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한 일을 행합니다.
순종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요한일서 2장 4절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과 실제 삶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종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종교적 연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말로만 증명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뜻을 귀하게 여기고, 그 뜻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드러납니다.
3. 말씀을 아는 사람에서 말씀을 살아 내는 사람으로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기도에 관해 아는 것과 실제로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에 관한 설교를 듣는 것과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은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은 머릿속에 보관하기 위한 정보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가령 정직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고 있다면,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고 있다면, 걱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말씀에 우리의 삶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46절에서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십니다.
신앙고백과 삶의 방향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들은 말씀 가운데 오늘 실천해야 할 한 가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한 번의 순종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순종이 성품을 빚어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기계적인 공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한 번 순종하면 반드시 출세하고, 두 번 순종하면 반드시 도약하며, 세 번 순종하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조종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순종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결과를 통제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서 1장 8절에서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뜻을 정합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환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우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셨고, 그들은 낯선 제국의 한복판에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다니엘 1:17–20).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성공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께 충성했으며, 하나님께서 건져 내시지 않으시더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고백했습니다(다니엘 3:17–18).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믿음과,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충성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받은 이후의 삶을 시작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감동받는 데서 멈추지 마십시오.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을 통해 믿음을 드러내십시오. 그것이 은혜를 값없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응답입니다.
2장. 미움이라는 걸림돌, 사랑이라는 새 창조 — 빛 가운데 걷는 사람
1. 사랑은 새로운 명령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현실입니다
요한일서 2장 5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6절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서 7절과 8절은 사랑의 계명을 다룹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요한일서 2:7–8의 요지)
여기에는 놀라운 신학적 깊이가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구약에도 있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이 구약과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윤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은 왜 새 계명이라고 부를까요?
사랑의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깊이와 실체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삶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고,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사랑의 궁극적인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자신이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새 계명의 핵심입니다.
이제 사랑의 기준은 단순히 내가 사랑받고 싶은 방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완전했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화목의 길을 여셨습니다(로마서 5:8–1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감정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나와 잘 맞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사랑은 악을 묵인하거나 불의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우면서도 상대방의 파멸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 사랑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2. 미움은 왜 우리 인생의 걸림돌이 됩니까?
요한일서 2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한일서 2:9)
그리고 11절은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이 어둠 가운데 행하며,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한다고 경고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가볍게 읽지 마십시오.
요한은 미움을 단순히 성격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미움은 우리가 어떤 영적 영역에 머물러 있는지를 드러내는 문제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면, 우리의 고백과 삶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움이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지적하는 것 자체가 미움은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고 불의를 거부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망하기를 바라며, 그 사람의 고통에서 만족을 얻고, 복수심을 정당화하며,
그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우리 안에서 다루어져야 할 미움입니다.
미움이 무서운 이유는 처음에는 상대방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의 내면까지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그가 선한 일을 해도 숨은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수하면 기다렸다는 듯 비난하고, 잘되면 오히려 불편해합니다.
미움은 판단의 기준을 왜곡합니다.
한 사람의 잘못을 그 사람의 전부로 확대하고, 한 번의 상처를 모든 관계에 적용하며, 과거의 아픔을 현재의
모든 상황을 해석하는 렌즈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우리는 상대방을 정확히 보지 못합니다. 내 안의 분노를 통해서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미움은 걸림돌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관계의 회복을 막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기회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은 쓴 뿌리가 돋아나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하고 더럽히지 않도록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4장 31–32절은 악독과 노함과 분냄을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미움은 상대방을 벌주기 위해 붙들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나 자신도 그 고통에 묶어 둘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네가 미워하니 네가 문제다”라고 단순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깊은 상처는 시간이 필요하고, 때로는 안전한 분리와 전문적인 도움, 공동체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범죄를 숨기거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용서는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복수의 욕망이 내 영혼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영적 결단입니다.
관계의 회복은 진실한 회개와 책임, 안전이 갖추어질 때 별도로 분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움을 내려놓는 것은 상대방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미움이 내 인생을 지배하도록 내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3. 미움의 힘에서 사랑의 힘으로
우리 삶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힘이 작용합니다.
하나는 미움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힘입니다.
미움은 때로 강한 추진력을 만들어 냅니다.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무시한 사람에게 성공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경쟁자를 이기겠다는 분노가 일시적인 에너지를 공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가 추진력이 되면, 성공한 이후에도 마음의 평안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상대방보다 더 높이 올라가도 그 사람의 반응에 여전히 매달릴 수 있습니다.
복수에 성공해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그 사람에게 사로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미움으로 달리면 상대방이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반대로 사랑은 다른 길을 엽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을 분별하면서도 그 잘못이 내 인격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상처를 기억하면서도 그 상처를 다음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게 합니다.
과거의 피해를 인정하면서도 미래까지 복수의 논리에 맡기지 않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현실을 무조건 좋게만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한 조각의 정보로만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기다립니다.
사실을 확인합니다.
성급하게 단죄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바로잡되 사람을 함부로 파괴하지 않습니다.
미움은 시야를 좁히지만, 사랑은 진실을 더 넓고 깊게 보도록 이끕니다. 무엇보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십자가는 죄가 심각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기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4. 한국교회의 부흥을 돌아보다 — 회개는 공동체를 새롭게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 역사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는 선교사 로버트 하디를 중심으로 회개와 영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하디는 자신의 선교 사역을 돌아보면서 교만과 편견, 영적 무력함을 자복했습니다.
그의 회개는 다른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들의 자기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도 단순히 감정이 고조된 집회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돌아보는 일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역사를 오늘 본문과 연결할 때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부흥은 다른 사람의 죄를 찾아내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가정이 새로워지기를 원한다면 배우자와 자녀의 잘못만 지적하지 말고, 나 자신의 말과 태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다른 교단과 다른 세대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 공동체 안의 교만과 위선을 살펴야 합니다.
사회가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상대 진영을 향한 증오만 키우지 말고, 내 안의 거짓과 탐욕도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를 미움 없는 완전한 역사로 이상화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은 복합적이며, 부흥의 열매와 한계 모두를 정직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회개가 실제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질 때 신앙은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힘이 됩니다.
원산에서 평양으로 이어진 부흥의 역사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부흥은 무엇입니까?
더 많은 사람을 비판하는 부흥입니까, 아니면 먼저 자기 죄를 회개하는 부흥입니까?
더 큰 소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부흥입니까, 아니면 진실과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부흥입니까?
요한일서 2장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형제를 미워하는 어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움을 제거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3장.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 영원을 선택하는 사람
1.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세상의 가치가 충돌할 때
요한일서 2장 12–14절에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을 향해 각각 권면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이들,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이들, 악한 자를 이긴 이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상기시킵니다.
그런 다음 15절에서 강력한 명령을 제시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요한일서 2:15)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선하게 만드셨고,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장에서 경계하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이나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욕망과 교만과 자기중심성에 지배되는 가치 체계를 가리킵니다. 이 문맥적 구별은 여러 성경 주석에서도 강조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일하고, 가정을 돌보고, 문화를 만들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문제는 세상에 사느냐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느냐입니다.
돈이 필요하지만 돈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명예가 유익할 수 있지만 명예를 얻기 위해 양심을 팔 수도 있습니다.
성공을 추구할 수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무가치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우리의 주인이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보다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바로 그때 영혼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2.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요한일서 2장 16절은 세상에 속한 세 가지 욕망을 제시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요한일서 2:16)
첫째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는 육체를 가진 것 자체가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욕구가 하나님을 떠나 절제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나의 만족만을 추구할 때 문제가 됩니다.
먹고 마시는 일도, 성적인 욕구도, 휴식과 쾌락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삶의 영역 안에서 올바르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절제와 책임을 무너뜨리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소유해야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더 비싼 물건과 더 높은 지위와 더 화려한 삶을 가져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비교의 대상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일상과 성공을 실시간으로 바라봅니다. 화면 속의 화려한 삶을 보며 자신의 현실을 초라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아니라 선택된 일부일 수 있습니다. 남의 겉모습을 기준으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면 감사는 줄어들고 탐욕은 커집니다.
셋째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재산이나 지식, 지위와 능력을 근거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성취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실력을 쌓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문제는 성취가 감사의 이유가 아니라 교만의 근거가 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할 때, 성공은 더 이상 선한 청지기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세 가지 욕망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최종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3. 지나가는 것과 영원히 남는 것
요한일서 2장 17절은 말씀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7)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두 방향을 봅니다.
하나는 결국 지나갈 것에 인생 전체를 거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원히 남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입니다.
돈도 언젠가는 손에서 떠납니다. 직책도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젊음과 건강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평판 역시 언제든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합니까? 성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소유와 성취 그 자체보다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느냐를 묻습니다.
재물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고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직책을 자기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는 자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식과 재능을 약한 사람을 돕고 세상을 더 선하게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졌느냐만이 아닙니다. 무엇이 내 마음을 소유하고 있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잃어버리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많은 시간과 마음을 쏟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들은 우리 마음의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에 영원을 맡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되,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세상의 가치에 지배되지 않는 사람, 맡겨진 것을 충실히 사용하되 그것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사람이 참된 믿음의 사람입니다.
4장. 진짜처럼 다가오는 거짓을 분별하라 — 미혹을 이기는 신앙
1.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긴장
요한일서 2장 18절은 엄중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한일서 2:18)
사도 요한은 왜 마지막 때를 말하면서 적그리스도를 경고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위기는 외부의 박해에서만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복음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복음의 핵심을 바꾸는 가르침이 더 큰 혼란을 일으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가르침을 접했습니다.
요한일서의 문맥을 보면, 교회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과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둘러싼 갈등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합니다(요한일서 2:19–23, 4:1–3).
요한이 말하는 적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와 의견이 다른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사도들이 증언한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왜곡하며, 신자들을 미혹하는 세력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이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그리스도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모든 갈등을 영적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분별에는 성경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가르치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하는지, 그 가르침이 사도적 복음과 일치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2장이 제시하는 경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진리를 닮은 언어에 속지 말고, 진리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굳게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2.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세 가지 성경적 기준
첫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시작되거나 교회와 연결된 거짓 가르침을 경계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요한일서 2:19의 일부)
이 구절은 요한의 공동체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다룹니다.
이들은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이탈은 사도적 신앙에 대한 불일치를 드러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를 떠나는 모든 사람이 거짓 교사라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옮기거나 공동체를 떠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안전을 위해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이용해 교회 지도자에 대한 모든 질문을 금지하거나, 떠난 사람을 자동으로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경고하는 핵심은 외형적인 소속이 진리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올바른 신앙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살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22–23절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요한일서 2:22)
여기서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둘러싼 문제가 복음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막연하게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증언에 근거합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요한일서 4장 2–3절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사실을 고백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예수님을 단지 훌륭한 도덕 교사로 축소하거나, 십자가의 구원 사역을 부정하거나,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도적 증언을 왜곡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복음의 중심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들을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미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요한일서 2:26)
미혹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방향으로 사람을 이끌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도적 복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성경보다 특정 인물의 권위를 높이는 가르침,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주장, 공포와 특권 의식을 이용해 사람을 통제하는 방식은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누군가 자신만이 특별한 계시를 독점하고 있으며,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구원을 잃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을 성경의 빛 아래서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참된 복음은 사람을 특정 지도자의 소유물로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세웁니다.
다만 어떤 가르침을 분별할 때는 소문이나 인상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확인하고, 성경 전체의 증언과 대조하며, 신뢰할 만한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3. 분별은 의심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별력은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분별력은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성경을 살펴 그것이 그러한가 확인했습니다(사도행전 17:11).
이것이 건강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목회자의 설교도 성경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유명한 강사의 주장도 검토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따르는 가르침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주장을 거부하는 것도 성숙한 분별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문맥을 살피고,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이 틀릴 가능성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 질문합니다.
요한일서 2장의 경고는 우리를 공포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중심을 붙들고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더 크게 가져야 합니다.
5장. 성령의 기름 부음과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
1. 미혹을 이기는 길은 성령과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한일서 2:20)
그리고 27절은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 신자들 안에 거하며, 그들이 진리 안에 거하도록 가르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기름 부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서 기름을 붓는 행위는 왕과 제사장 등을 구별하여 세우는 일과 관련됩니다.
요한일서 2장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신 분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으로,
문맥상 그들을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사역과 연결됩니다.
많은 기독교 해석은 이 기름 부음을 성령의 역사와 연결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는 진리의 성령께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미혹을 이기는 길은 단순히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성경의 진리를 배우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 안에 거하는 데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반드시 강렬한 감정이나 특별한 현상으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성령의 열매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제시합니다.
이 열매들은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인격과 관계 안에서도 드러나야 함을 보여 줍니다.
성령을 말하면서 진리를 무시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주장하면서 사랑과 정직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신앙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말씀을 깨닫게 하며, 우리를 진리와 거룩함으로 이끕니다.
2.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의 의미
요한일서 2장 27절에는 처음 읽으면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기름 부음이 신자들을 가르치므로 아무도 그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성경 교사나 목회자의 가르침이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약성경은 교회 안에 교사와 목회자의 역할이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에베소서 4:11–13).
바울도 디모데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라고 명령했습니다(디모데후서 4:2).
그렇다면 요한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요한일서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거짓 교사들이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진 것처럼 주장하며 신자들을 미혹하는 상황입니다. 요한은 신자들이 그런 사람들의 독점적인 지식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복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교회의 가르침을 폐지하는 선언이 아니라,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비밀 지식에 의존하지 말고 이미 받은 복음 안에 굳게 서라는 권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8–27절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서도 사도적 전승과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이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다루어집니다.
성령은 성경과 경쟁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주장도 성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성품에 비추어 분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성령의 권위로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사람은 더 겸손해지고, 진리를 더 사랑하며, 자신의 판단을 말씀 앞에서 검토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사람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구별한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돌보며, 양은 목자를 따라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비밀스러운 정보를 얻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익숙해지며, 실제 삶에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으면 무엇이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지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기도하며 순종하는 훈련을 하면 내 욕망과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데 도움을 얻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말씀을 나누면 자신의 판단을 더 넓게 점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언제나 옳은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경험도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고, 성경 지식이 많아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씀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분별에는 성경 지식뿐 아니라 겸손과 공동체적 검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진리 안에 거하는 믿음입니다.
4. 받은 말씀을 굳게 붙들고 끝까지 거하십시오
요한일서 2장 24절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신자들 안에 거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이 그들 안에 거하면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분이 나타나실 때 담대함을 얻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거하라.
믿음은 순간적인 감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번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서 이후의 모든 삶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 거하고, 예배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4–5절에서 자신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활동을 많이 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9절은 의를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줄을 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순종과 사랑의 주제로 돌아옵니다.
참된 분별은 단지 거짓 교사를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진리를 따라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식은 목적을 잃을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버린다면 그 사랑은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고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혹의 시대를 두려움으로만 살아가지 마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성경의 말씀을 붙들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갈수록 거짓을 분별할 기준이 분명해지고, 말씀에 순종할수록 우리의 삶은 진리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6장. 순종과 사랑과 분별로 완성되는 복음의 삶
1. 세 가지 기둥은 하나의 복음으로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요한일서 2장 전체를 하나로 연결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세 가지 핵심 메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용서받은 사람은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 진리에 속한 사람은 미혹을 분별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진 교훈이 아닙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형제를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한 복음 안에 거합니다.
이것이 요한일서 2장이 보여 주는 복음의 질서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순종은 그 은혜를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구원을 대신하는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분별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는 무기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살아 내기 위한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을 강조하면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을 강조하면서 진리를 버려서도 안 됩니다. 분별을 강조하면서 겸손을 잃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은혜 안에서 순종하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며, 사랑 안에서 분별하는 것.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2.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주어야 합니까?
신앙의 세대가 바뀌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이전 세대가 경험한 부흥의 감격과 눈물, 기도의 열정이 다음 세대에게는 낯선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전 세대가 목숨처럼 지켜 온 신앙의 가치가 다음 세대에게는 당연하거나 오래된 관습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배우고, 순종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시편 78편 4절은 여호와의 영예와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6장 6–7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합니다.
믿음은 유산으로 전해지지만, 믿음의 삶은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부모가 기도한다고 자녀의 믿음이 자동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다음 세대의 신앙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의 모범을 보여 주며,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무엇보다 다음 세대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은 살아 있는 복음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지만 타인을 미워하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용서하고 책임지는 신앙입니다. 성공을 자랑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신앙입니다. 자기 확신만 강한 신앙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신앙입니다.
요한일서 2장은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용서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세상의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미움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믿음을 붙드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이것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장 귀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3. 오늘 우리가 실천할 다섯 가지 결단
이제 말씀을 실제 삶으로 가져가겠습니다.
오늘의 믿음 실천
말씀에 한 가지 순종하기
오늘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실제로 실천할 한 가지를 정하십시오.
미움의 뿌리를 하나님께 고백하기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분노와 복수심을 정직하게 기도하십시오. 필요한 경계와 도움도 함께 구하십시오.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뜻 선택하기
비교와 탐욕과 자기 과시가 내 결정을 지배하고 있는지 점검하십시오.
가르침을 성경으로 분별하기
유명세나 감정적 확신에 의존하지 말고, 성경의 문맥과 복음의 중심을 확인하십시오.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기
가족과 이웃에게 먼저 사과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거나, 화해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이 다섯 가지를 한 번에 완벽하게 실천하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한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그리고 내일도 그분의 은혜를 의지하며 한 걸음 더 걸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실패했다고 절망하지 말고, 죄를 깨달았을 때 다시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요한일서 1장 9절은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숨기지 않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며, 은혜를 의지해 다시 순종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에필로그 — 미움을 버리고, 진리 안에 거하며, 사랑으로 걸어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치며 다시 세 가지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첫째, 용서받은 다음에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 사함은 신앙의 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둘째, 미움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해야 합니다.
미움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관계를 파괴하며, 사랑의 열매를 가로막습니다. 상처를 부정하지 마십시오. 불의를 묵인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나 복수심이 여러분의 영혼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의 길을 구하십시오.
셋째, 진리의 성령을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모든 가르침이 참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분별하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복음에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진리를 안다는 고백이 사랑과 의로운 삶으로 이어지게 하십시오.
요한일서 2장은 우리에게 단순히 종교적인 열심을 더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나타내십시오.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십시오. 분별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지키십시오.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이 시대의 다음 세대 가운데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미움이 지배하던 자리에 사랑이 들어오고, 탐욕이 지배하던 자리에 감사가 들어오며, 미혹과 혼란이 가득하던 자리에 말씀의 진리가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에 머물지 않고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이 감정에 머물지 않고 행동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분별이 정죄에 머물지 않고 진리를 지키며 사람을 살리는 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며 그분 안에 거한 사람으로 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미움을 버리고 사랑하십시오.
진리를 분별하며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삶에 복음의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침 기도 — 주님, 우리 안의 어둠을 걷어 주소서
거룩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일서 2장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가볍게 여기고, 주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았으며, 사랑을 말하면서도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를 품고 살아왔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합니다.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고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굳게 붙들게 하옵소서.
용서받은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않게 하시고, 그 은혜가 우리의 말과 행동과 선택을 변화시키게 하옵소서. 말씀을 듣고 감동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게 하시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실제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미움의 뿌리를 드러내 주옵소서.
우리를 아프게 했던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되살아나는 분노와 억울함을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의 상처를 외면하지 마시고, 그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내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정의가 필요한 곳에서는 정의를 구하게 하시고, 보호가 필요한 곳에서는 안전한 경계를 세우게 하시며, 용서해야 할 자리에서는 주님의 은혜를 의지해 용서의 길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복수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실패를 기뻐하지 않게 하시며, 진실을 말하되 사랑으로 말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옵소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지나가는 것보다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재물과 지위와 성공을 하나님보다 높이지 않게 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것을 선한 청지기로서 사용하게 하옵소서.
진리의 성령님, 우리 안에 충만히 역사하여 주옵소서.
거짓된 가르침과 사람의 꾀에 미혹되지 않게 하시고,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시며, 언제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게 하시고, 교만과 탐욕과 분열을 내려놓게 하시며, 진리와 사랑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다음 세대가 살아 있는 복음을 경험하게 하시고, 믿음의 선배들이 받은 은혜를 그들의 삶으로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가 맺히게 하시고, 미움이 사랑으로 변화되며, 혼란 속에서도 진리를 분별하는 지혜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강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기에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넘어질 때마다 다시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시고, 죄를 깨달을 때마다 회개하게 하시며,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복음의 증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며, 우리의 믿음이 다음 세대에 아름다운 유산으로 전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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