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장 18절)

knowledgeplatform100 2026. 10. 16. 10:12

프롤로그 — 당신의 미래는 당신의 과거보다 큽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3장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때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지금보다 나은 형편입니까?

건강입니까? 자녀들의 앞날입니까?

아니면 은퇴 이후의 삶과 경제적인 안정입니까?

 

우리는 미래를 생각할 때 흔히 지금 가지고 있는 조건을 계산합니다.

내가 얼마나 준비했는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를 따져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의 자녀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달라지면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고난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죄와 싸우는 태도가 달라지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요한일서 3장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되던 당시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둘러싼 혼란과 분열, 거짓 가르침의 위협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단지 더 열심히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어떤 생명을 얻었는지를 다시 일깨웁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처음 믿었을 때의 감격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예배는 익숙해지고,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마음은 무뎌지며, 기도는 계속하지만 삶에 새로운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강한 자극이 아닙니다. 복음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강하게 붙들고 계시는지를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형제를 향한 실제적인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미 주어진 은혜가 있고, 지금 걸어가는 성화의 길이 있으며, 장차 완성될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막힌 미래입니다.

 

1장.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인생의 출발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보라”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다시 보라고 합니다. 익숙하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충분히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말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 평범한 종교적 표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도대체 어떤 사랑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아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복음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도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여러분, 촛불과 태양을 비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촛불도 빛을 냅니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면 촛불의 빛은 더 이상 주변을 밝히는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노력과 결심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근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를 같은 수준에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우리의 정체성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직업으로 평가합니다. 소득과 성취로 평가하고, 실패와 성공으로 평가합니다. 때로는 가족관계나 사회적 지위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받아 주십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책임이나 잘못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로 받아들여진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갈 책임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둘째, 우리의 믿음이 더 이상 자기 확신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흔들립니다. 어제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오늘은 낙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은 기도가 잘되는 것 같지만, 어떤 날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감정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복음은 우리에게 스스로 강해져서 고아의 상태를 벗어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다고 선포합니다.

 

셋째,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성공할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빚어 가실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성공할 때 교만해지고 실패할 때 무너집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붙들면 성공 속에서도 겸손할 수 있고,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2장.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 놀라운 미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이 말씀에는 놀라운 긴장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동시에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존재는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는 이미 주어졌지만, 구원의 모든 영광이 지금 우리 눈앞에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학은 이 사실을 설명할 때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긴장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구원은 영광 가운데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을 영화라고 합니다.

 

로마서 8장 30절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와 영화는 서로 뒤섞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화를 통해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성화의 길을 걸어갑니다.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입장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장래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요한일서 3장 2절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우리의 미래는 단지 더 오래 살거나 더 편안하게 사는 정도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뵙고 그분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은 지금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이해합니다. 왜 어떤 기도는 응답되는 것 같고 어떤 기도는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쉽게 회복되고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는지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한 미래를 아버지의 성품에 맡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의 미래가 확실하다는 것은 성도의 현재가 언제나 편안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고난이 없는 인생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이끄신다고 증언합니다.

 

로마서 8장 28–29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그 목적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데 있음을 가르칩니다.

 

이 말씀을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고난의 원인을 우리가 즉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통은 설명보다 위로가 먼저 필요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의학적 치료와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문장이 아니라는 사실은 붙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자체를 선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고난도 하나님의 구속적 손길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3장 3절은 이 소망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도 알려 줍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미래에 대한 참된 소망은 현재의 삶을 무책임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을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부가 자신을 준비하듯, 하나님의 자녀는 장차 주님을 뵐 소망을 가지고 오늘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붙들고 있는 욕심은 주님을 닮아 가는 데 도움이 되는가?

내가 반복하고 있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

내가 겪는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성품을 배울 수 있는가?

 

여러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부족하다고 해서 내일도 반드시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넘어졌다고 해서 남은 인생 전체가 실패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주시는 기막힌 미래입니다.

 

 

3장. 죄와 싸우는 사람, 죄와 타협하는 사람

이제 요한일서 3장은 우리를 불편하지만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질문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는 왜 죄를 짓습니까?

 

요한일서 3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리고 9절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누구나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도 죄를 짓는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이 질문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진실하게 회개하는 성도들을 절망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요한일서 전체의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장 9절은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선언합니다.

 

더욱이 2장 1절은 성도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편지를 쓰지만, 만일 누가 죄를 범하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장을 해석할 때는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도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지속적으로 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개별적인 실수가 한 번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삶의 지배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저항하는 삶과, 죄를 거부하며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는 삶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4절은 죄를 불법이라고 정의합니다.

죄는 단지 실수하거나 기분이 나빠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신 것을 거부하며, 자신을 삶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점을 교통신호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빨간불은 멈추라는 기준입니다. 운전자가 신호를 잘못 보거나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하여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러나 빨간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기준 자체를 무시하고, 앞으로도 아무렇게나 운전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돌아올 기준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죄를 합리화하고 말씀의 기준 자체를 없애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차이는 단순히 실수의 횟수를 세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죄를 대하는 태도와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시편 37편 31절은 의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을 이끄는 기준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면허가 아닙니다. 죄에서 돌이켜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다는 은혜의 근거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는 죄와 싸워야 합니까?

요한일서 3장 5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다고 말씀합니다.

8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죄책감만 없애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용서를 베푸시고, 죄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며,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죄가 심각하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한 것이고, 은혜가 크기 때문에 죄와 싸울 힘을 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주의와 방종이라는 두 가지 극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율법주의는 자신의 노력과 성취를 구원의 근거로 삼습니다. 방

종은 은혜를 죄를 계속 지어도 괜찮다는 허가증처럼 사용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둘 다 거부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사지 않습니다. 동시에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이유로 거룩한 삶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을 함께 읽으면 이 균형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 구원은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삶으로 이어집니다.

 

존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참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가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성화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 성령께서 이루시는 변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질문은 “나는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았는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죄를 미워하고 있는가?”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하고 있는가?”

“말씀 앞에서 내 생각을 고치려 하는가?”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있는가?”

 

이 질문들이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게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씨를 설명할 때 우리는 거듭남으로 주어진 새로운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역사를 주목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은 우리가 썩지 아니할 씨, 곧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그 생명은 죄와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마치 씨앗이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듯, 새로운 생명은 삶의 방향과 열매를 변화시킵니다.

 

그 성장은 때로 더디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반복되는 죄 때문에 낙심하고 계십니까?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러나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죄를 자백하십시오. 필요한 경우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도움을 구하십시오. 잘못된 습관을 끊기 위한 구체적인 결단을 하십시오. 말씀과 기도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감추는 핑계가 아니라 죄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우리의 결심보다 크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4장. 가인의 길에서 어린양의 길로

요한일서 3장 10절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는 표지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의를 행하는가,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신앙을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나 종교적 소속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묻습니다.

 

이어서 11절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은 새로운 유행이 아닙니다.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은 이웃 사랑을 가르치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한 인물을 소환합니다. 가인입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은 가인처럼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아우를 죽였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일로 분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니 죄를 다스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경고를 외면하고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죄는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시기와 분노를 품고, 그 감정을 정당화하고, 마침내 상대방을 해치는 행동으로 옮길 때 죄는 관계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감정을 느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루기보다 죄가 이끄는 방향으로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분별을 배웁니다.

유혹을 받는 것과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다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는 것과 그 감정을 키워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다릅니다.

 

누구나 시기와 분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27절은 분을 내더라도 죄를 짓지 말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분노가 생겼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분노를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내 안에 어떤 욕심과 상처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든 분노와 모든 미움을 법적인 살인과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상대방의 존재를 지우고, 그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무시하는 미움의 뿌리를 폭로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21–22절에서 살인의 외적 행위만이 아니라 분노와 멸시의 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의 방향도 다루십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반대편에는 누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인은 자신을 위해 형제를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가인의 길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통해 자신을 지키려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길입니다.

이 두 길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 두 가지 방식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면 내가 잠시 편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드러내면 내가 더 나아 보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면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의 길입니다.

 

반대로 내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내 자존심을 내려놓으며, 진실을 말하되 사랑으로 말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해 먼저 다가가는 것은 예수님의 길을 닮아 가는 모습입니다.

 

물론 사랑은 불의를 묵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과 학대가 있는 관계에서는 안전을 확보하고 정당한 도움을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악을 감추거나 피해자에게 무조건 참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진실과 거룩함을 버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면서도 사람을 회복의 길로 이끄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나는 누군가의 실패를 기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상대방을 이겨야만 내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가인의 길에서 돌아서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사랑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5장. 십자가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은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요한은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추상적인 정의부터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는 기준은 세상의 유행이나 자신의 감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상대방이 자격을 갖추었는지부터 따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다가오는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3장 17절은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더 이상 막연한 감정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때 마음을 닫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낙심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거대한 행동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작은 돈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먼저 안부를 묻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큰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작은 친절에는 인색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큰일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늘 눈앞에 있는 사람의 필요는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우리에게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도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선행은 믿음의 대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랑은 그 믿음이 삶 속에서 열매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더하여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을 발견합니다. 상대방을 섬기면서 내 마음속의 교만을 보게 됩니다.

나누면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발견합니다. 용서하면서 내가 얼마나 쉽게 정죄하는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로마서 5장 5절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단순한 의지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성령께서 그 사랑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시는 은혜의 문제입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입니다.

기도하겠다는 말만 하고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돌아보아야 합니다.

돕겠다고 말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랑을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공동체의 약한 지체를 외면한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필요를 혼자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요청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사랑에는 지혜와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는데도 단지 귀찮고 손해 보기 싫다는 이유로 마음을 닫는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거대한 결심으로만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늘 누구에게 시간을 내어 줄 것입니까?

누구에게 먼저 연락할 것입니까?

누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까?

어떤 작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다른 사람을 살릴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6장. 자책하는 마음을 넘어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여기까지 들으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 믿음은 진실한가?’

 

우리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도와야 할 사람을 외면했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누군가를 정죄했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우리 자신을 책망합니다. 요한일서 3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죄와 동기까지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지, 얼마나 쉽게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지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확신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낙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과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계신 은혜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일서 3장 18–19절의 흐름을 보면,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자신이 진리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굳세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정죄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셋째, 잘못으로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책임을 지고 관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다시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끝없이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무조건 자신을 괜찮다고 여기는 것도 복음의 확신이 아닙니다.

참된 확신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보다 크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드는 데서 자랍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은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을 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삶과 기도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을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는다는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도 기도의 응답이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칩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만을 기도의 중심에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제 뜻대로 바꾸어 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제가 먼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제게 더 많은 것을 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제게 맡기신 것을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이 고난을 당장 없애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함께 “이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때 자신만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돌리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는 죄를 숨기지 말고, 회개한 뒤에는 은혜를 의심하며 그 자리에 계속 머물지도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되,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걸어가십시오.

우리의 마음보다 크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7장. 믿음과 사랑, 그리고 성령의 동행

요한일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은 앞서 살펴본 내용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23절은 하나님의 계명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두 중심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믿음만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외면하면 신앙은 입술의 고백에 머물 수 있습니다.

사랑만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면 사랑의 근원과 기준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과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이 말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구원의 공로를 쌓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는 대가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삶 속에서 맺는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3장 24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말씀하며,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를 알게 된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힘만으로 거룩해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도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인간의 의지력을 과시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면서 말씀에 순종하고, 죄와 싸우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자신을 포도나무에, 제자들을 가지에 비유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참된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수동적으로 기다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죄를 고백하십시오.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우십시오.

잘못했다면 사과하십시오.

지쳤다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도움을 구하십시오.

 

이 모든 행동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한 번의 뜨거운 결심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과 동행하고, 내일 다시 주님과 동행하며, 넘어지면 은혜를 의지해 일어나 다시 걷는 평생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힘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다.

 

 

8장. 결론 — 아버지가 준비하신 미래를 오늘 살아 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요한일서 3장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 놀라운 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세상의 평가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얼마나 완벽하게 살아왔는지가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넘어지고, 흔들리고, 때로는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회개와 순종을 통해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가인처럼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 주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말과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상처 입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진실을 말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실제적인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하루 세 가지를 실천해 보십시오.

 

첫째, 아침에 눈을 뜨면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름받은 자녀입니다. 나의 가치는 세상의 평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둘째, 오늘 자신의 삶에서 끊어야 할 죄 한 가지를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죄를 합리화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돌이키십시오.

 

셋째, 오늘 한 사람에게 실제적인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작은 도움이라도 좋습니다. 진심 어린 전화 한 통, 따뜻한 말 한마디, 필요한 사람에게 건네는 작은 나눔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자신의 힘만으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아버지가 주시는 기막힌 미래는 단순히 세상에서 성공하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사랑을 실천하고, 마침내 주님을 온전히 뵙게 되는 미래입니다.

 

오늘의 고난이 여러분의 마지막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의 실패가 여러분의 최종 정체성이 아닙니다.

지금의 부족함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이루실 일을 모두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허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미래를 믿기에 오늘 더욱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그 은혜 안에서 변화되고 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그분을 온전히 뵙고 그분을 닮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죄와 싸우십시오.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걸어가십시오.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길로 이끄십니다.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알면 현재를 다르게 살게 됩니다. 현재를 다르게 살면 미래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9장. 마무리 기도 —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미래를 바라보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요한일서 3장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어떤 미래를 향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자주 자신을 잊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평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실패 앞에서 낙심하고, 성공 앞에서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의 정체성은 세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주어졌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신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안에 있는 죄와 타협하지 않게 하옵소서. 잘못을 합리화하지 않게 하시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살피게 하옵소서.

 

죄를 지었을 때 숨지 않게 하시고, 변명하지 않게 하시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의지와 결심만으로 거룩해지려고 애쓰다가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가르쳐 주옵소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게 하시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가 되게 하시며, 상처 입은 사람에게 회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가인의 길을 버리고 예수님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필요한 치료를 허락하시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지친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보내 주옵소서. 관계의 상처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지혜와 회복의 길을 열어 주옵소서.

 

그 고난의 이유를 다 알지 못할 때에도 주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성급한 설명보다 따뜻한 동행을 제공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때에도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가심을 믿습니다.

오늘보다 내일 더 주님을 닮게 하시고,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게 하시며, 우리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마침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고 그분을 닮게 될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날을 소망하기 때문에 오늘을 거룩하게 살게 하시고, 그날을 기다리기 때문에 오늘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세상에 흘려보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시작이 은혜였고, 우리의 걸음이 은혜이며, 우리의 완성도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녀로 불러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