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은 왜 번성하는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훔 1:7)
들어가는 말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악한 사람은 잘되는 것처럼 보일까? 왜 정직한 사람이 더 고난을 받을까? 왜 하나님은 당장 심판하지 않으실까?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승진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더 큰 권력을 얻습니다.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이 다시 울려 퍼집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하박국 1:2)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해 하나님께서 나훔서를 주셨습니다.
나훔서는 단순히 한 도시의 멸망을 기록한 예언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훔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더 나아가 나훔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위로의 책입니다.
흥미롭게도 "나훔(Nahum)"이라는 이름 자체가 '위로(Comfort)'라는 뜻입니다.
왜 심판의 책이 위로일까요?
악이 영원히 승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훔서를 통해 두 가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첫째는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둘째는 자기 백성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두 모습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과 사랑을 함께 보여주는 하나의 진리입니다.
1.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본문은 매우 강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나훔 1:2)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은 좋아하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불편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절대로 한쪽만 말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설명합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그러나 벌 받을 자를 결단코 면죄하지 아니하고..." (출 34:6-7)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죄를 방치하지는 않으십니다. 나훔서는 바로 이 균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니느웨는 이미 한 번 은혜를 경험했다
나훔서를 이해하려면 먼저 요나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약 100년 전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니느웨는 회개했습니다.
왕부터 백성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봅니다. 그러나 약 한 세기가 흐르자 니느웨는 다시 이전보다 더 악해졌습니다.
역사가 증명합니다. 아시리아는 잔혹함으로 유명했습니다.
포로의 피부를 벗기고, 사람을 말뚝에 꽂고, 도시를 불태우며, 약한 민족을 철저히 학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잔혹함을 궁전 벽화에 새겨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느니라." (나훔 1:3)
브루스 월트키(Bruce K. Waltke)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심판의 부재가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언약적 인내라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무관심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역시 같은 진리를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베드로후서 3:9)
하나님의 침묵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거절하면 결국 심판이 찾아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반복하면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유예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질투와 진노는 거룩한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본문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질투는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칸나(qannā')'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죄와 우상에게 빼앗기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나훔서는 신약의 십자가와 연결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진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쏟아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갈라디아서 3:13)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가장 완전하게 만난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죄인을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공의는 만족되었고, 사랑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3. 하나님의 진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
나훔서는 심판으로 끝나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다운 복음을 선포합니다.
바로 나훔 1장 7절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이 심판 선언 한가운데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2절부터 6절까지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처럼 타오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 산을 녹이시는 하나님, 바다를 마르게 하시는 하나님
누가 그 진노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7절에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심판의 두 얼굴
동일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원수에게는 심판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홍해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애굽에게는 심판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홍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심판이었지만 방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구원이었습니다.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증거이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의 문입니다.
나훔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니느웨에게는 멸망이지만 유다에게는 위로였습니다.
피난처, "산성"이라는 단어의 깊은 의미
히브리어 "마오즈(מָעוֹז)"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닙니다. 난공불락의 요새를 의미합니다.
고대 전쟁에서 사람들은 평지에서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높은 산성으로 올라갔습니다. 성벽은 적이 쉽게 넘을 수 없었습니다.
나훔은 말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 산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의 신앙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1)
또한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시편 18:2)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피난처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피하는 자"를 아신다.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여기서 "안다"는 히브리어 야다(יָדַע) 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언약적 사랑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를 알매" 라고 할 때도 같은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은 "누가 나를 믿는지 알고 있다." 정도가 아닙니다. "나는 너를 끝까지 책임진다." 라는 언약의 표현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온 우주를 흔드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내 눈물을 아십니다. 내 상처를 아십니다. 내 두려움을 아십니다. 내 기도를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한복음 10:14)
나훔의 하나님은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와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4.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기 위한 수술
많은 사람들이 심판을 파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심판은 회복을 위한 수술입니다.
외과의사가 암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사용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제거하여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나훔 2장 2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아수르를 심판하는 이유는 유다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악을 무너뜨리는 이유는 의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니느웨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니느웨는 어디에 있습니까? 단지 고대 아시리아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도 니느웨는 존재합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세상, 돈이 정의보다 강한 세상, 권력이 양심을 짓누르는 세상, 생명이 물질보다 가볍게 여겨지는 세상
이 모든 것이 현대판 니느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혹시 내 안에도 작은 니느웨가 있지 않은가?
교만, 탐욕,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은밀한 죄, 사람보다 하나님을 덜 두려워하는 마음,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니느웨는 세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우리 안의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복음은 심판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심판이 사라진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은 반드시 있었습니다. 다만 그 심판이 우리에게 내리지 않고 예수님께 내려졌습니다.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The Cross of Christ』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를 희생시킨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사건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받을 심판을 예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들어갈 피난처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삶의 적용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두 가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회개할 죄를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둘째, 환난 가운데 다른 피난처를 찾지 말아야 합니다.
돈도, 권력도, 경력도, 사람도, 궁극적인 산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이것이 나훔이 절망의 시대에 선포했던 소망이며, 오늘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5. 하나님은 악을 무너뜨리심으로 그의 백성을 회복하신다
나훔 2장은 니느웨의 멸망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붉은 방패를 든 군사들이 몰려오고, 병거는 번개처럼 달리며, 강의 수문이 열리고, 견고하던 왕궁이 무너집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전쟁 기록이 아닙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세상은 강한 나라가 역사를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신다."
아시리아는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습니다. BC 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애굽까지 위협했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그들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성벽은 높았습니다. 경제력도 막강했습니다.
그러나 BC 612년,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니느웨는 단 한 번의 전쟁으로 무너졌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고대 역사학자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가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는 폭우로 인해 강이 범람하면서 성벽 일부가 무너졌고, 그 틈을 통해 연합군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나훔 2장 6절의 예언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100여 년 전에 선포된 예언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음을 보여줍니다(이사야 55:11)
6. 하나님의 심판은 우연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이다
나훔 2장의 중심 구절은 사실 전쟁 묘사가 아닙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왜 하나님은 니느웨를 심판하셨습니까? 단순히 악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언약 백성을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영광"은 단순한 번영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 예배의 회복,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아시리아는 유다의 경제만 빼앗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까지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다시 세우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출애굽에서도 애굽을 심판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도 죄를 심판하심으로 교회를 구원하셨습니다.
종말에도 바벨론을 심판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십니다. 심판과 회복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구약학자 O. Palmer Robertson은 나훔서를 "언약적 심판(covenantal judgment)"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감정적 보복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7. 니느웨는 오늘날 무엇을 상징하는가?
나훔 3장에 들어가면 니느웨는 더욱 철저하게 고발됩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나훔 3:1)
세 가지 죄가 반복됩니다.
첫째, 폭력입니다.
둘째, 거짓입니다.
셋째, 탐욕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든 제국의 특징입니다.
흥미롭게도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세상을 또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큰 바벨론"(요한계시록 17-18장) 바벨론은 역사 속 도시인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상 권세의 상징입니다.
나훔의 니느웨도 같은 의미입니다. 니느웨는 단순한 도시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세운 문명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에도 니느웨는 존재합니다.
경제가 하나님보다 우상이 되는 사회, 권력이 정의를 삼키는 정치, 쾌락이 진리를 대신하는 문화, 인공지능과 과학이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 이 모든 것이 현대의 니느웨입니다.
그러므로 나훔은 과거의 예언서가 아니라 오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8. 그러나 가장 큰 니느웨는 내 안에 있다
예수님은 언제나 화살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리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를 심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자신의 죄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니느웨를 비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도 작은 니느웨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교만, 비교하는 마음,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신뢰하는 마음.
바로 이것이 우리 안에 자라고 있는 니느웨입니다.
Christopher J. H. Wright는 구약의 심판 예언은 단지 열방을 향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자신도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도록 부르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나훔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지금 당신 안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
9.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나훔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 심판이 어디에서 완성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갈보리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타협되지 않았습니다.
죄는 반드시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이사야 53:5)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고린도후서 5:21)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를 포기한 사건이 아니라, 사랑이 공의를 완성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나훔의 심판은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나훔의 공의가 복음 안에서 완전히 해석되는 자리입니다.
10. 종말론적 완성 — 마지막 니느웨의 멸망
나훔은 BC 612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마지막 심판을 바라봅니다.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에는 모든 악이 완전히 제거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은 마지막 바벨론의 몰락을,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선포합니다.
이는 나훔의 메시지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악의 도시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히 세워집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결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실의 악을 보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고, 반드시 회복하시며,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11. 나훔서는 심판의 책이 아니라 '소망의 책'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훔서를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무서운 책이다." "심판 이야기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훔서를 절반만 읽은 것입니다.
나훔은 심판의 책이 아니라 소망의 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마지막 승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질문 앞에 살아갑니다.
- 왜 악인이 잘되는가?
- 왜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가?
-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 왜 기도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 것 같은가?
나훔은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계보다 하나님의 시계가 더 정확합니다. 전도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도서 3:11)
오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도 부활도 오순절도 모두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12. 오늘 우리의 삶에는 어떤 니느웨가 존재하는가?
나훔의 말씀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 우리의 니느웨는 무엇입니까?
교만입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권력입니까? 인정받고 싶은 욕망입니까? 혹은 용서하지 못하는 상처입니까?
무너져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먼저 내 안의 죄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안의 니느웨를 보여 주십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보다 규모를 자랑할 때, 거룩보다 성공을 추구할 때, 십자가보다 세상의 방법을 의지할 때,
교회 역시 니느웨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훔은 세상을 향한 메시지이기 전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베드로전서 4:17)
심판은 두려움만이 아니라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3. 예수 그리스도는 나훔서의 완성이다
나훔서를 읽으며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설 수 있는가?" 나훔은 대답합니다. 아무도 설 수 없습니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나훔 1:6)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놀라운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이 잔"은 단순한 고난의 잔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훔이 선포한 하나님의 공의를 몸소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값비싼 은혜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이며, 십자가 없는 은혜이다."
그러나 참된 은혜는 십자가를 통과한 은혜입니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14. 마지막 심판보다 더 큰 소망
성경은 마지막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심판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요한계시록 21:3)
나훔이 예언한 니느웨의 멸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게 합니다.
모든 눈물이 닦일 것입니다. 사망도 없을 것입니다. 애통도 없을 것입니다. 억울함도 끝날 것입니다.
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만 영원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훔서는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하나님은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회개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산성이 되십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신 영원한 피난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판보다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세상의 권세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듭니다.
오늘도 악은 여전히 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빈 무덤은 이미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훔 1:7)
이 약속을 붙들고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성 깊은 기도문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나훔서를 통하여 죄를 결코 묵인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는 세상의 악을 보며 분노하면서도, 정작 제 안에 숨겨진 교만과 탐욕과 불순종은 쉽게 지나쳤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있는 작은 니느웨를 성령의 빛으로 드러내시고,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게 하옵소서.
세상의 힘과 재물과 성공을 산성으로 삼지 않게 하시고, 오직 환난 날의 산성이신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잃지 않게 하시고, 눈앞의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바라보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가 받아야 할 진노를 대신 담당하시고 영원한 피난처가 되어 주셨음을 날마다 기억하게 하시며,
그 은혜에 합당한 삶으로 응답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거룩과 사랑, 진리와 공의가 함께 살아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시고,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는
약속을 붙들고 담대히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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