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자리》
제1부. 창조에서 십자가까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신 가장 위대한 성품
수천억 개의 별들이 질서 있게 움직입니다. 태양은 단 하루도 자신의 궤도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바다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를 넘지 않습니다. 산은 높지만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습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피조세계는 모두 창조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의 존재만이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의 첫 번째 죄는 단순히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이미 마음속에 하나의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창세기 3:5)
이 한 문장이 인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야고보서 4:6)
왜 하나님은 믿음보다 사랑보다 능력보다 겸손을 먼저 말씀하실까요?
왜 예수님은 "내 능력을 배우라" 하지 않으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앤드류 머레이가 평생을 연구한 고전『겸손(Humility)』그리고 성경 전체를 따라 그 비밀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1장. 겸손은 성품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이다
많은 사람들은 겸손을 예의 바른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한 사람. 말을 적게 하는 사람. 자신을 낮추는 사람.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책의 첫 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덕목의 뿌리이다."
이 한 문장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창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요한복음 1:4)
사도 바울도 아레오바고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사도행전 17:28)
인간은 자기 힘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능력으로 존재합니다.
머레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한 번만 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매 순간 그 생명을 공급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본질은 독립이 아니라 의존입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1) 하나님은 왜 인간을 의존하도록 만드셨는가
세상은 의존을 약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가장 강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요한복음 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요한복음 5:30)
"내 뜻대로 하려 함이 아니요." (요한복음 6:38)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8:50)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철저하게 아버지께 의존하며 사셨습니다.
머레이는 이것이야말로 겸손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2) 교만은 왜 모든 죄의 뿌리인가
"겸손을 잃는 것이 모든 죄와 악의 뿌리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신학과 정확히 같습니다. 어거스틴은 교만을 모든 죄의 어머니 라고 불렀습니다.
칼빈 역시 『기독교강요』에서 인간 타락의 본질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은 이를 창세기 3장에서 보여 줍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단 하나의 유혹만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이 말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라는 선언입니다.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고, 겸손을 잃었으며,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머레이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교만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영적 독립 선언이며,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제2부. 십자가는 하나님의 겸손이었다
인류는 창조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거짓말을 심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그 순간 인간은 피조물의 자리를 떠나 창조주의 자리를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 사건을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겸손의 상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교만이 사탄의 본질이며, 인간의 모든 비참과 갈등, 전쟁과 시기, 경쟁과 자기중심성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성공을 위해 자신을 높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낮아지는 길을 말합니다.
(1) 교만을 치료하는 유일한 길
인간은 스스로 교만을 고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자신의 교만을 치료하려는 순간조차, 자신의 노력과 성취를 자랑할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하는 정도가 아니라 새 생명을 주시는 구속을 계획하셨습니다.
머레이는 제2장에서 나무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뿌리가 병들면 가지를 고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류의 뿌리가 교만으로 오염되었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뿌리, 곧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예수님은 단지 죄의 형벌만 대신 지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되어, 잃어버린 겸손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2) 성육신은 하나님의 겸손이었다
빌립보서 2장은 복음의 중심을 보여 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머레이는 이 말씀을 설명하면서 놀라운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겸손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사건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종이 되신 분. 창조주이지만 피조물의 자리에 서신 분. 주인이지만 종이 되신 분.
그분의 모든 삶은 겸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3) 십자가는 순종의 절정이며 겸손의 절정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한 순종의 죽음입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
(히브리서 5:8)
머레이는 십자가를 단순히 속죄의 사건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겸손이 끝까지 순종한 자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누가복음 22:42)
겸손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겸손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자리였습니다.
(4) 하나님은 겸손을 높이신다
빌립보서는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립보서 2:9)
성경의 질서는 언제나 같습니다. 낮아짐이 먼저입니다. 영광은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를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승귀는 겸손이 면류관을 쓴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상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경쟁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을 가장 높이셨습니다.
(5) 예수님의 삶은 겸손의 학교였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반복해서 자신을 부인하십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5:41)
"내 뜻대로 하려 함이 아니요." (요한복음 6:38)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8:50)
머레이는 이러한 말씀들을 종합하며, 예수님의 겸손은 단순한 성품이 아니라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6)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람의 인정이 하나님의 인정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까?
섬기기보다 인정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계획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머레이는 참된 겸손은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 비로소 열매 맺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
겸손은 약함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십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야고보서 4:10)
제3부. 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가?
역사는 위대한 지도자들을 기억합니다. 황제들은 왕좌에 앉았습니다. 장군들은 군대를 거느렸습니다.
철학자들은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도자는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왕관 대신 수건을 드셨습니다. 보좌 대신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섬김의 미담이 아닙니다.
앤드류 머레이는『겸손』에서 이 사건을 예수님의 삶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겸손이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라, 성육신에서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삶의 본질이며, 제자들에게 남기신 가장 중요한
본이라고 강조합니다.
(1) 발을 씻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오늘날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1세기 유대 사회에서 발을 씻기는 일은 가장 낮은 종의 일이었습니다.
먼지투성이 길을 샌들을 신고 걸었던 사람들의 발은 더럽고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면 가장 신분이 낮은 종이 손님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담으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요한복음 13:4-5)
머레이는 이 장면을 설명하며 말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2) 예수님은 왜 마지막 밤에 이 일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밤입니다. 십자가를 하루 앞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유언을 남기셔야 했습니다. 우리는 아마 놀라운 예언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종말의 비밀. 천국의 구조. 하늘의 영광.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보다 먼저 행동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발을 씻기셨습니다.
머레이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에 겸손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새기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설명합니다.
(3) 베드로는 왜 거부했는가?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요한복음 13:6)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그 거절 속에도 자기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8)
머레이는 여기서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참된 겸손은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은혜를 받는 것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남을 도우려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은혜를 받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에는 서툽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돕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씻기시는 이야기입니다.
(4) 예수님의 겸손은 십자가를 향해 있었다
발을 씻기는 사건은 십자가의 예고편입니다. 더러운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곧 죄로 더러워진 영혼을 자신의 피로 씻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발을 씻기실 때에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머레이는 예수님의 겸손은 단순한 인격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실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사야 53:5)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겸손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자리였습니다.
(5) 교회는 겸손으로 세워진다
예수님은 발을 씻기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한복음 13:14)
머레이는 이 말씀을 교회의 본질로 해석합니다.
교회는 직분으로 높아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섬기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공동체입니다.
사도 바울도 권면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서 2:3)
겸손은 교회의 장식이 아닙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생명입니다.
(6) 오늘 우리의 발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누구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까?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섬김보다 인정받기를 더 원하지는 않습니까?
머레이는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겸손은 노력으로 꾸미는 외적인 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 낮아집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수록 자랑은 사라지고, 은혜만 남습니다.
세상은 성공한 사람을 높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자신을 비우는 사람을 높입니다.
세상은 왕좌를 추구하지만, 예수님은 수건을 드셨습니다. 세상은 지배를 말하지만, 예수님은 섬김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3:11)
참된 위대함은 얼마나 많은 사람 위에 서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해 무릎 꿇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에서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단순히 본받아야 할 모범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루시는 새로운 생명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인간의 의지로 완성되는 덕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 안에서 자라나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
그 초청에 순종할 때, 우리는 단지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제자로 변화되어 갑니다.
제4부. 겸손은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생명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있습니다. 더 성공하는 법.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법. 더 나은 리더가 되는 법.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겸손해지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놀라운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결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겸손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참된 겸손은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만 나타난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1) 왜 인간은 스스로 겸손해질 수 없는가?
많은 사람은 교만을 감추려고 합니다. 말을 조심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외적인 태도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태복음 15:8)
겉으로는 겸손해 보여도 속에는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욕망, 비교하려는 마음, 높아지고 싶은 자아가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머레이는 이것을 매우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교만은 단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2) 참된 겸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열매는 가지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흘러오기 때문에 맺히는 것입니다.
머레이는 바로 이 원리를 겸손에 적용합니다. 겸손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맺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져야지"라는 결심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지"라는 믿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3) 성령께서는 왜 먼저 자아를 깨뜨리시는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우리의 교만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실패는 베드로를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뢰하던 마음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낮추는 이유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머물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4) 은혜는 왜 겸손한 사람에게 머무는가?
야고보 사도는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야고보서 4:6)
베드로도 동일한 말씀을 반복합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베드로전서 5:5)
머레이는 여기서 중요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겸손은 은혜가 자라는 토양이다. 좋은 씨앗도 메마른 땅에서는 자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도 교만한 마음에서는 깊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겸손한 심령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밭입니다.
(5) 오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교만
교만은 반드시 큰소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상처받기 쉬운 자존심, 비교하는 습관,
자기 계획을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머레이는 이러한 모든 모습이 자아가 아직 십자가 앞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세상은 자신을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나는 할 수 있다"고 외치지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린도전서 15:10)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삶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 전체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겸손은 인간이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공로가 아닙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맺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주님, 저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제 안에 그리스도께서 더욱 살아 역사하게 하옵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초청을 삶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
그리스도를 바라볼수록 우리의 교만은 작아지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머무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제 5부. 하나님은 왜 겸손한 사람과 함께하시는가?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높은 곳을 향합니다. 더 높은 자리. 더 큰 성공. 더 많은 인정. 더 큰 영향력.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인간이 올라가는 길보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는 길을 성경의 중심으로 기록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찾아오셨고, 광야에서는 성막 가운데 거하셨으며,
베들레헴에서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고, 오순절에는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임하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낮아진 인간에게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비운 마음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역사하신다."
(1)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하시는가?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찾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권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를 돌보려니와."
(이사야 66:2)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사야 57:15)
놀라운 사실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마음에도 거하십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임재를 끌어오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마음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2) 은혜는 왜 낮은 곳으로 흐르는가?
자연을 보면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높은 곳에는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은혜도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야고보서 4:6)
베드로 역시 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5)
머레이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적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아를 왕좌에 앉히지만,
겸손은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왕좌를 내어드립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단 한 번도 독립적으로 수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반복되는 고백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요한복음 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요한복음 5:30)
"나는 내 뜻대로 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6:38)
예수님의 기적은 능력 이전에 순종의 열매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신성 이전에 겸손의 열매였습니다.
머레이는 "예수님의 겸손은 아버지의 뜻 안에 완전히 거하는 삶이었다"고 설명합니다.
(4)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사탄의 가장 큰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단순한 반역이 아닙니다. "내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이사야 14:13-14)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여기서 두 왕국이 갈립니다. 사탄은 높아지려다 추락했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셨기에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이 영적 원리를 선포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빌립보서 2:9)
머레이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이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강조합니다.
(5) 오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
오늘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사람보다 겸손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많이 아는 사람보다 많이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큰 사역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령께서는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을 통해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의 겸손이 당신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
겸손은 말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내 삶의 중심이 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곳에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곳에 은혜가 머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신 것은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었고, 사랑의 가장 깊은 모습은 겸손한 섬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마지막 초청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
겸손은 신앙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겸손은 창조의 질서이며, 구속의 비밀이며, 성화의 길이며, 하나님 나라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겸손한 심령 가운데 자신의 은혜와 영광을 가장 풍성하게 부어 주십니다.
제 6부. 겸손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간다
밤이 가장 깊을 때, 새벽은 시작됩니다. 겨울이 가장 차가울 때,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자아가 가장 깊이 낮아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마음을 가득 채우기 시작합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의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성품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누구를 닮아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1) 하나님 나라는 왜 겸손으로 시작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예수님은 부유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가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만 붙드는 사람입니다. 머레이는 이것이 바로 겸손의 시작이라고 설명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쁨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2) 십자가는 인간의 교만을 끝내는 자리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전서 1:31)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습니다.
목회자도, 장로도, 학자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오직 은혜로만 살아갑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선 피조물"로 이해하며, 참된 자기 인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머레이가 강조하는 겸손은 은혜를 아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열매라는 주장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우리의 교만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심는 자리입니다.
(3) 성령께서는 왜 겸손을 가장 먼저 이루시는가?
갈라디아서는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흥미로운 점은,
성령의 열매는 모두 자아를 높이는 방향이 아니라 자아를 비우는 방향으로 자랍니다.
머레이는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더 유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더 크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이 한 문장이 겸손의 가장 아름다운 정의입니다.
(4)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첫 번째 영성
오늘날 우리는 더 큰 교회, 더 많은 프로그램, 더 뛰어난 시스템을 고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찾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조직보다 먼저 마음을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머레이는 『겸손』을 통해 교회의 부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겸손한 공동체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세상의 권력을 닮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겸손을 닮는 데 있습니다.
(5) 겸손은 영성의 완성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면 겸손해진다." 그러나 머레이는 반대로 말합니다.
겸손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장한다. 겸손은 믿음의 마지막 계단이 아니라 첫 번째 계단입니다.
기도도, 말씀도, 예배도, 선교도, 섬김도, 모두 겸손이라는 토양 위에서만 건강하게 자랍니다.
야고보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관을 벗으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세상은 올라가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증명하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은 영광을 붙잡으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영광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이셨습니다.
(6) 마지막 적용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길을 초청하십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누군가를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정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은 자신을 작게 만드는 기술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크게 드러내는 삶입니다.
마치는 기도
하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안에 심어 주옵소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교만과 자기 의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게 하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날마다 고백하게 하옵소서.
사람의 인정과 세상의 성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주님처럼 낮아져 섬기며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겸손을 날마다 이루어 가시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겸손 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는 초청에 평생 순종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오직 하나님만 높이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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