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도 보좌는 비어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6:1-13)
들어가는 말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왕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무너집니다.
건강이 무너집니다.
직장이 무너집니다.
경제가 흔들립니다.
국가가 흔들립니다. 내가 의지했던 모든 것이 흔들릴 때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가?" 이 질문은 오늘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이사야도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사 6:1)
이 한 절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이사야 6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이사야 6장은 왜 중요한가?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 6장을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르심 받은 장' 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사야 6장은 심판과 은혜가 만나는 장 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장 이고,
복음의 구조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입니다.
더 나아가 신약은 이 장을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즉,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영광은 단순히 추상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장차 육신을 입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28장에서는 바울이 이사야 6장을 인용하며 "성령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이사야 6장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이루시는 구원의 경륜을 보여 주는 놀라운 본문입니다.
이사야 1장부터 5장까지의 흐름
이사야 6장은 갑자기 등장한 사건이 아닙니다. 1장부터 5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왜 유다를 심판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정성껏 가꾸셨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은 좋은 열매 대신 들포도를 맺었습니다(사 5:1-7).
정의가 있어야 할 곳에 폭력이 있었습니다.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억울한 피가 흘렀습니다.
참된 예배는 사라졌고, 우상숭배가 나라를 채웠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화 있을진저" 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타락한 백성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대언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바로 이사야 6장입니다.
첫 번째. 인간의 왕은 죽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영원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이 표현은 단순한 연도가 아닙니다. 웃시야 왕은 남유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왕하 15장; 대하 26장).
경제도 발전했습니다.
군사력도 강했습니다.
성벽도 견고했습니다.
농업도 번성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금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역대하 26장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다."
그는 제사장이 아닌데도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나병으로 치셨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떨어져 격리된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세상은 성공을 말했지만 하나님은 교만을 보셨습니다. 이것이 인간 왕국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왕들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웃시야만 그렇습니까? 세상의 모든 왕은 결국 죽습니다.
바벨론도 무너졌습니다. 앗수르도 무너졌습니다. 페르시아도, 헬라도, 로마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돈도, 권력도, 기술도, 건강도, 언젠가는 흔들립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진동하지 않는 나라" 를 말씀합니다. 세상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본즉"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환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는 여전히 강했습니다.
웃시야는 이미 죽었습니다. 유다는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이사야의 시야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본즉."
믿음은 환경이 먼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상황을 먼저 바꾸시기보다 우리의 시선을 먼저 바꾸십니다.
보좌는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여기서 '높이 들린'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나타냅니다. 땅의 왕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왕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셨습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빈 보좌를 바라보다가 하나님의 가득 찬 보좌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9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신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할 때 하나님께서 왕을 낮추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단 4장).
요한계시록 4장에서도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재난도, 심판도, 용도 아니라 보좌였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먼저 보좌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보좌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얼굴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언어와 공간으로는 다 담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옷자락만으로도 성전이 가득 찼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는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하여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던 장면(왕상 8:10-11)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공간을 채우고, 사람을 압도하며, 예배를 새롭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
우리도 웃시야 왕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의지했던 것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좌를 보라." 세상은 변합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환경은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문제가 없어지는 데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서 자랍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는 현실을 잊는 시간이 아니라, 현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경외합니다
(이사야 6:2-4)
이사야는 인간 왕이 사라진 자리에서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본 순간, 이사야가 경험한 것은 단순한 감동이나 황홀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모든 피조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이사야 6:2)
1. 스랍은 하나님의 영광을 섬기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스랍"이라는 존재는 성경에서 매우 독특한 천상의 존재입니다.
히브리어로 스랍(שָׂרָף, śārāf)은 "불타는 자"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 등장하는 불뱀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 정결함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본 떨기나무는 불타고 있었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하실 때도 산은 불과 연기로 덮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초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위대한 천사들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자신을 가립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왜 얼굴을 가렸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경외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너무 작게 보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단순히 어떤 행동을 잘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가장 깊은 뿌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입니다. 그러나 스랍들은 반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춥니다.
천상의 존재도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죄인인 우리는 얼마나 더 겸손해야 하겠습니까?
2. 발을 가린 것은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성경에서 발은 때때로 인간의 존재와 행위를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권리와 자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스랍이 발을 가린 것은 "나는 피조물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나옵니까?
경력입니까?
업적입니까?
봉사입니까?
신앙 연수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의 내려놓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하나님 나라는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3. 날개로 나는 것은 즉각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계속 말합니다.
"그 둘로는 날며"
스랍은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즉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필요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계산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상 3:10)
마리아도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었을 때 말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 1:38)
참된 믿음은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세요" 가 아니라 "하나님, 제가 주님의 뜻에 사용되게 하소서" 입니다.
4.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사야 6장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 6:3)
왜 세 번 반복합니까? 히브리어 성경에서 반복은 강조의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7장 4절의 "여호와의 성전이라" 라는 반복도 같은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완전하고 절대적이라는 선언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인 속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8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거룩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거룩한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거룩함 안에 존재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며 동시에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은 단순히 "더 좋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스랍들이 단순히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포합니다.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의 거룩은 성전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향합니다.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시편 19편 1절은 말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5. 성전이 흔들린 이유
4절을 보겠습니다.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사야 6:4)
스랍들의 찬양 때문에 성전이 흔들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하셨을 때도 산 전체가 크게 진동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은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하나님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전은 흔들렸지만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흔들립니다. 우리의 계획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
이사야가 본 첫 번째 장면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작게 보면 죄가 커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크게 보면 자신이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 상황이 얼마나 큰가?" 가 아닙니다. "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 입니다.
이사야는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 인간의 첫 고백은 이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정죄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제단의 숯으로 그의 입술을 만지시고, 죄 사함을 선언하십니다.
세 번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발견합니다
(이사야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발견된 죄인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높이 들린 보좌를 보았습니다. 스랍들의 찬양을 들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는 천상의 예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놀라운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감격의 외침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위대한 선지자라는 확신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5)
1.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면 먼저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 5장에서 그는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화 있을진저" 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5장에는 반복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이사야 5:11)
"화 있을진저 자기의 악을 선하다 하며..."
(이사야 5:20)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이사야 5:21)
이사야는 시대의 죄를 보았습니다. 백성의 타락을 보았습니다. 지도자들의 부패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였습니다.
이것이 참된 영적 각성입니다. 죄에 민감한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문제부터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먼저 자신을 살핍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시편 51:4)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숨겨진 죄를 드러냅니다
이사야는 이전에도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의 깊은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드러내듯,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죄를 드러냅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은 말씀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사람은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빛 앞에 서면 숨겨진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사야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백성을 판단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다."
3. 왜 이사야는 특별히 '입술'의 죄를 고백했을까요?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단순히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
왜 입술입니까?
이사야에게 입술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의 입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입은 마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
(마태복음 15:11)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마태복음 15:19)
입술의 문제는 단순한 말실수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입술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입니까?
아니면 불평하는 입술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입술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상처 주는 입술입니까?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서 3:10)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먼저 자신의 입술을 돌아봅니다. 왜냐하면 입술은 영혼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4. 이사야는 공동체의 죄에서 자신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 백성들이 문제입니다." "저 악한 사람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도 그 공동체 안에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함께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죄를 고백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느헤미야 1:6)
느헤미야 자신은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을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입니다.
5.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는 무너집니다
이사야는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의로 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가장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립보서 3:9)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선행도,
우리의 봉사도,
우리의 직분도,
우리의 신앙 경력도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세웁니다.
6.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신 후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복음의 놀라움이 시작됩니다.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시지만, 죄인을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기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보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죄를 제거하시는 분입니다.
시편 103편 12절은 말씀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제단에서 숯을 가져와 그의 입술을 만지십니다.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6:7)네 번째. 하나님은 죄인을 정죄에서 끝내지 않고 은혜로 회복시키십니다 (이사야 6:6-7)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달았습니다.
그의 고백은 절망이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러나 이사야 6장의 놀라운 복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죄를 드러내셨지만,
그를 죄책감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무너뜨리기 위해 거룩함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거룩함을 보여주셨습니다.
1. 하나님은 먼저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다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인간의 자기 의를 깨뜨리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할 때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서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죄를 짓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큰 비극은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백성의 죄를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먼저 보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참된 회개는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
라는 자리에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다"
라는 자리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2. 스랍은 제단에서 숯을 가져왔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이사야 6:6)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제단입니다.
스랍은 아무 곳에서 숯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제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서 제단은 속죄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죄 사함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은 말씀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죄의 문제는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교육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이사야의 죄가 제거된 것은 숯 자체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숯이 나온 곳,
즉 제단이 의미하는 속죄의 은혜 때문입니다.
3.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이미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사야 53:5)
이사야가 제단의 숯으로 정결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정결하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말씀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복음은 단순히
"죄를 조금 줄이는 것"
이 아닙니다.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
입니다.
4. 하나님은 죄를 제거하시고 새로운 정체성을 주십니다
스랍은 이사야의 입술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6:7)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노력하면 용서해 주겠다."
가 아닙니다.
"이미 네 죄가 사하여졌다."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의 선언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인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5. 정결함은 사명의 출발점입니다
본문의 순서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봅니다.
↓
자신의 죄를 깨닫습니다.
↓
정결함을 받습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
사명으로 나아갑니다.
많은 사람이 순서를 바꾸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 합니다.
먼저 봉사하려 합니다.
먼저 영향력을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먼저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하겠다."
사역보다 먼저 은혜입니다.
일보다 먼저 정체성입니다.
헌신보다 먼저 회복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0:42)하나님을 위한 일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6.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리고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이 고백은 자기 확신의 말이 아닙니다.
자신감 넘치는 영웅의 선언이 아닙니다.
은혜 받은 죄인의 감사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부정한 입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제 삶은 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바울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7. 진정한 헌신은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내가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사야의 "나를 보내소서"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외침이 아닙니다.
이미 인정받은 사람이 드리는 응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는 사명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봉사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열심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십자가보다 자신의 의를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먼저 우리를 제단 앞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죄가 사하여졌다."
"너는 내 것이다."
"이제 내가 너를 보내겠다."
우리의 사명은
깨끗해지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깨끗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의 종은 성공보다 말씀에 대한 충성으로 부름받습니다 (이사야 6:9-10)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시대 — 심판 가운데 남겨진 거룩한 씨
이사야는 마침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누구나 이런 응답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면 많은 사람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면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사명은 인간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사야 6:9)
1. 하나님의 부르심은 항상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공 중심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다."
"좋은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과 사람들이 즉시 반응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전에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노아를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를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
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세기 6:8)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0년 넘게 말씀을 전했지만
백성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실패한 선지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2.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말씀의 실패가 아닙니다
이사야 6장의 말씀은 매우 어려운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닫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은 반복된 불순종으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이사야 1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 1:15)문제는 말씀이 부족했던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말씀을 거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경고하셨습니다.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계속 거절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심판이 되었습니다.
3. 같은 말씀도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역사합니다
햇빛은 같은 햇빛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녹입니다.
어떤 것은 굳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같습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생명이 됩니다.
그러나 완악한 마음에는 심판이 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말씀은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반드시 역사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사람의 완악함을 드러냅니다.
4. 예수님도 이사야 6장을 인용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실 때 이사야 6장을 인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4-15절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동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적을 보았습니다.
병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문제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 하나님의 심판은 완악한 마음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6:11-12)
이사야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 6:11)이 질문은 단순한 기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 나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백성이 깨닫지 못합니까?"
"언제까지 심판이 계속됩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무겁습니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토지가 황폐하게 되며..."
(이사야 6:11)이것은 앗수르의 침략과
궁극적으로는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는 말씀입니다.
1. 죄의 결과는 결국 무너짐입니다
하나님은 즉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부하면
결국 그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사..."
(로마서 1:24)가장 무서운 심판은
하나님이 인간을 강제로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길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2. 영적 무감각은 가장 심각한 심판입니다
사람들은 질병이나 실패를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가장 심각한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감동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회개가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아픔이 없습니다.
이 상태가 가장 위험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은 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 51:11)
일곱 번째. 심판 가운데 하나님은 반드시 거룩한 씨를 남기십니다 (이사야 6:13)
이사야 6장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 6:13)여기에 복음의 희망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도 남은 자를 보존하십니다
성경에는 반복되는 하나님의 패턴이 있습니다.
심판 가운데 남은 자를 남기십니다.
노아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홍수 가운데 노아의 가족을 남기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기셨습니다.
포로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끝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실패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2. 거룩한 씨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6장의 "거룩한 씨"는 단순히 살아남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어가는 씨입니다.
이사야 1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잘린 나무처럼 보였던 다윗 왕조에서
메시아가 나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끝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무덤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 6장은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죽어가는 세상의 왕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의 보좌입니까?
둘째,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죄만 보고 있습니까?
셋째,
나는 은혜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이사야의 인생은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
사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다시 보내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사람, 은혜로 보내심 받은 사람 (이사야 6:1-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도 이사야가 살았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발전했습니다.
기술은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전쟁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가정이 흔들립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 깊어집니다.
교회 안에도 세속주의와 물질주의가 들어옵니다.
많은 사람이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그런데 이사야 6장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세상의 왕은 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1. 이사야 6장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사야 6장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사야가 위대한 사명을 받았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6장의 중심 인물은 이사야가 아닙니다.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성경은 먼저 인간 왕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줍니다.
왜입니까?
인간의 왕좌는 비어도 하나님의 보좌는 비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시야입니다.
문제가 커 보이는 이유는 문제가 너무 커서가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을 너무 작게 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믿음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죄를 드러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고백은 이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 6:5)왜 위대한 선지자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을 의롭게 생각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는 저 정도 죄인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사야는 백성의 죄를 지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깨달았습니다.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다."
참된 영적 부흥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3. 십자가의 은혜가 죄인을 새롭게 합니다
이사야가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행동하십니다.
스랍이 제단에서 숯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입술을 만집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 6:7)
중요한 것은 숯 자체가 아닙니다.
숯이 나온 곳이 중요합니다.
제단입니다.
제단은 희생이 드려지는 곳입니다.
죄 사함은 반드시 희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십자가는 죄인을 끝내는 장소가 아닙니다.
죄인을 새롭게 하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는 정죄의 자리가 아니라
회복의 자리입니다.
4. 용서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본문의 순서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봅니다.
↓
죄를 깨닫습니다.
↓
정결함을 받습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죄 사함 받은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6:8)그리고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은 자신감의 선언이 아닙니다.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부정한 입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 삶은 이제 제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19)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바뀐 사람입니다.
5. 하나님의 종은 결과가 아니라 충성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사야가 받은 사명은 놀라운 성공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사명이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이사야 6:9)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많은 사람이 너를 칭찬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말씀을 전하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숫자가 아닙니다.
인기가 아닙니다.
세상의 박수가 아닙니다.
충성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은 말씀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노아는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도 많은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충성된 종으로 인정하셨습니다.
6. 심판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거룩한 씨를 남기십니다
이사야서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13절은 희망을 선포합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나무가 잘렸습니다.
겉으로는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뿌리는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보존하셨습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눈에는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7.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까?
이사야 6장은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나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의 흔들림만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높이 들린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있습니까?
둘째,
나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서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죄만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까?
셋째,
나는 은혜 받은 사람으로 보내심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맺음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 6장은 한 사람의 변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시작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
십자가를 예표하는 제단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
사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무너지는 시대 속에서도 기억하십시오.
왕은 바뀌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흔들려도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약해 보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거룩한 씨를 남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아멘.
마침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웃시야 왕이 죽던 시대에도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눈이 세상의 흔들림만 바라보지 않고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교만과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날마다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용서받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은혜에 대한 순종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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