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우리의 삶에도 “그루터기”의 시간이 있습니다

knowledgeplatform100 2026. 8. 7. 14:35

제 1편. 잘린 그루터기에서 피어나는 소망

심판의 숲에서 메시아의 싹으로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이사야 11장 전체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크고 아름다운 곳에서 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많고, 자원이 많고, 영향력이 크고,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처음에는 강대국이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왕궁에서 시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왕을 일으키시는 자리도 화려한 왕궁이 아닙니다.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끝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만드십니다.

1. 이사야 11장을 이해하려면 이사야 10장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11장은 갑자기 등장한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이사야 10장과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사야 1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앗수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셨다고 해서 앗수르의 교만까지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앗수르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자랑합니다.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내가 이 일을 행하였다.”

이사야 10장 13절입니다.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음이라 나는 총명한 자라.”

 

여기에서 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공을 가지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의 교만을 심판하십니다.

이사야 10장 15절입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큰 체하겠느냐.”

 

얼마나 강력한 말씀입니까? 도끼가 나무를 찍으면서 자기가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톱이 나무를 켜면서 자기가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도끼를 사용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톱을 사용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앗수르가 바로 그 도끼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사용하셨을 뿐인데 앗수르는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2. 거대한 숲처럼 보였던 앗수르도 하나님 앞에서는 나무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이사야 10장 마지막 부분에서 앗수르는 거대한 숲으로 묘사됩니다. 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높은 나무와 큰 나무를 찍으십니다.

24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3절과 34절에서는 아주 강력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가지를 찍으시며 높은 자를 찍어 낮추시고…”

그리고

“그가 철로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앗수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군대가 있었습니다.

무기가 있었습니다.

성벽이 있었습니다.

경제력이 있었습니다.

정치력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앗수르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가 저 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앗수르는 거대한 숲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숲은 베어집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세상의 크기와 하나님의 크기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거대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한 것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역사를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이사야 11장은 완전히 다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사야 10장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잘려 나갑니다. 바로 이어지는 11장에서는 한 싹이 등장합니다.

1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거대한 숲은 잘렸지만 작은 싹은 살아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싹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대한 깊은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확장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시작하시고 친히 이루시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작은 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은 3백 명으로 미디안의 거대한 군대를 상대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병이어는 너무 작아 보였습니다. 겨자씨도 작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통하여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인간이 자기를 자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자랑을 위한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역사입니다.

4. 왜 “다윗의 줄기”가 아니라 “이새의 줄기”인가?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줄기”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새의 줄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새는 누구입니까?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새는 왕이 아닙니다. 왕궁의 중심에 있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베들레헴에서 아들들을 키우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불러 세웠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장남 엘리압에게 먼저 향했습니다.

키가 크고 외모가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리고 들에서 양을 치던 다윗을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이새의 집에서 시작된 왕권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다윗 왕조는 점점 하나님을 떠납니다.

 

왕들은 실패합니다. 나라가 분열됩니다. 북이스라엘은 무너집니다. 남유다도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다윗 왕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잘린 나무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이새의 줄기”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의 실패 이전,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 왕조가 인간적으로 성공해서 메시아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왕조의 실패가 극에 달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메시아를 일으키십니다.

5. 인간 왕의 실패가 하나님의 언약을 실패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 언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물론 이 약속은 다윗의 모든 후손이 완벽한 왕이 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 많은 왕들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왕들은 실패했지만 언약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신실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 3~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이것이 은혜의 놀라운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신실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완벽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의 삶이 흔들릴 때도 하나님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6. 그루터기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나무가 잘렸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살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땅속에는 생명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남은 자 신학의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심판은 언약을 폐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죄를 제거하고 거룩한 백성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사야 6장 13절에도 이와 같은 이미지가 나옵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루터기 안에 거룩한 씨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속에서도 씨를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7.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그루터기에서 나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신약성경으로 가면 이사야 11장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왜 이렇게 시작합니까?

예수님께서 단순한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의 성취로 오신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도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누가복음 1장 32~33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것은 이사야 11장의 메시아 왕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왕이 아닙니다.

다윗 언약을 완성하시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8.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왕과 너무 달랐습니다

세상은 왕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힘이 있어야 합니다.

군대가 있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자라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왕의 실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바로 그것이 왕의 승리였습니다.

빌립보서 2장 8~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예수님의 왕권은 십자가를 통과합니다.

그분의 왕관은 가시관이었습니다.

그분의 보좌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분의 칼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의 권세는 사랑과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이사야 11장이 보여주는 메시아 왕의 역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왕을 세우십니다.

9. 우리의 삶에도 “그루터기”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나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교리로만 듣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직접적으로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루터기의 시간이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했는데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었는데 배신당할 때가 있습니다. 계획했던 일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건강과 관계와 경제와 사역 가운데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제 끝났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정말 끝났는가?”

이사야 11장은 말합니다.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루터기를 남겨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뿌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에 나뭇가지를 바라보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봄이 되면 그곳에서 새싹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때로는 겨울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십니다.

10. 그래서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루터기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루터기를 똑바로 봅니다. 그러나 그루터기만 보지 않습니다. 그루터기에서 싹을 내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봅니다. 그러나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을 봅니다. 문제를 봅니다.

그러나 문제보다 크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실패를 봅니다. 그러나 실패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죽음을 봅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봅니다.

11. 이사야 11장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시선을 바꾸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큰 숲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싹을 보십니다.

세상은 권력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보십니다.

세상은 현재의 결과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성될 미래를 보십니다.

세상은 인간의 실패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 가운데서도 이루어 가시는 언약을 보십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패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사용하셨습니다.

세상은 무덤을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무덤에서 부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12.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세 가지 진리

첫째,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언약을 잊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다윗의 후손들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작은 싹을 통해 큰 구원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큰 것을 원합니다. 큰 교회, 큰 성공, 큰 영향력, 큰 결과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작은 싹에서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작아 보이는 순종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셋째, 그 싹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사야 11장의 소망은 결국 예수님을 향합니다. 그분이 이새의 뿌리에서 오신 왕이십니다.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그분이 성령으로 충만한 왕이십니다. 그분이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그분이 열방의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마침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왕이십니다.

맺는말 — 아직 보이지 않는 싹을 믿으십시오

오늘 이사야 11장은 우리에게 매우 아름다운 소망을 줍니다.

“잘렸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무너졌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루터기를 남겨두십니다. 그리고 그 그루터기에서 싹을 내십니다.

그 싹은 결국 메시아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눈앞에 어떤 그루터기가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환경의 회복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왕의 오심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 2편.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아 왕

지혜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11장 1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잘린 그루터기에서 피어나는 하나님의 소망”​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앗수르는 거대한 숲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숲을 베어버리셨습니다.

 

다윗 왕조 역시 역사적으로 실패하면서 잘린 그루터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그루터기에서 한 싹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2절부터는 그 싹에서 나올 메시아가 어떤 왕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단순히 다윗의 혈통을 이어가는 왕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한 왕입니다.

 

그리고 그의 통치는 세상의 왕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의 왕은 군대와 무력으로 통치합니다.

돈과 권력으로 통치합니다.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메시아 왕은 성령과 지혜와 공의와 성실로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1. 메시아 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여호와의 영”입니다

이사야 11장 2절을 보십시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시리니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라.”

여기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여호와의 영”​입니다. 메시아의 능력은 그분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십니다. 이것은 이사야 11장의 메시아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왕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특별한 사명을 맡은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사사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선지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왕들에게도 임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사무엘상 16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그러므로 이사야 11장은 다윗 왕권의 완성으로 오실 메시아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이 예언이 놀랍게 드러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께서 그분 위에 임하십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장면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메시아 약속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십니다. 누가복음 4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직접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성령의 기름 부음과 연결하십니다. 이것은 이사야 11장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바라보았던 성령 충만한 메시아가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3. 그런데 성령 충만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을 강렬한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체험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나타나는 특정한 현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감정과 체험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11장이 보여주는 성령 충만의 핵심은 훨씬 더 깊습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성령께서 임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혜입니다.

총명입니다.

모략입니다.

능력입니다.

지식입니다.

여호와 경외입니다.

 

즉 성령의 충만은 사람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단순히 능력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4. 지혜와 총명의 영

첫 번째로 “지혜와 총명의 영”입니다. 

성경에서 지혜는 단순히 지식의 양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총명은 사물의 본질을 분별하는 능력과 관련됩니다. 우리는 같은 사건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외모를 봅니다. 재산을 봅니다. 학력을 봅니다. 사회적 지위를 봅니다. 말을 잘하는지 봅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5.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와 소문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세리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품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받아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반대로 종교적으로 존경받던 사람들의 위선은 날카롭게 책망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실재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 24~25절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이것이 메시아 왕의 지혜입니다.

6. 우리는 왜 자꾸 잘못 판단합니까?

우리의 판단에는 죄의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과 경험과 편견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내게 유리하면 좋은 사람입니다.

내게 불리하면 나쁜 사람입니다.

나를 칭찬하면 좋은 사람입니다.

나를 비판하면 나쁜 사람입니다.

내 생각에 동의하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틀린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잠언 14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람의 눈에는 옳아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은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 생각을 검증합니다. 기도하면서 묻습니다.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질문입니다.

7. 모략과 재능의 영

두 번째는 “모략과 재능의 영”입니다.

여기에서 모략은 악한 음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올바른 계획과 판단을 의미합니다.

 

재능 또는 능력은 그 뜻을 실제로 실행할 힘입니다.

즉 메시아에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와 그것을 실행하는 능력이 함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계획은 있지만 실행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능력은 있지만 방향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있지만 지혜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왕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와 그 뜻을 실행하는 능력이 함께 있습니다.

8. 세상의 능력과 메시아의 능력은 다릅니다

앗수르는 말했습니다.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내가 이 일을 행하였다.” 그러나 메시아의 능력은 다릅니다.

메시아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이것은 예수님에게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독립적으로 세우는 왕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왕이십니다.

겟세마네에서도 동일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메시아의 능력입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키는 힘입니다.

9.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세 번째로 중요한 부분은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 지식이 많다고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적 지식은 관계적이고 언약적인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 행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삶입니다.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메시아의 즐거움입니다

이사야 11장 3절은 매우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여기에 참된 메시아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세상의 왕은 권력을 즐거워합니다. 돈을 즐거워합니다. 사람들의 박수를 즐거워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메시아 왕은 무엇을 즐거워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기준을 제공합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기쁩니까?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때입니까?

내 계획대로 일이 풀릴 때입니까?

내 이름이 높아질 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행했을 때입니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11. 참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보면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자기 과시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자기 영광이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자기중심적 권력욕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사람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내가 얼마나 특별한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입니다.

12. 메시아 왕은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이제 3절 후반부터 5절로 넘어갑니다.

이사야 11장 3~4절입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여기에서 메시아 왕의 통치 원리가 나타납니다. 공의입니다.

 

세상의 재판은 흔히 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유리합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나라는 다릅니다. 가난한 자도 공정하게 판단받습니다. 힘없는 자도 보호받습니다. 억울한 자의 권리를 회복하십니다.

13. 성경에서 공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한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항상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적 공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판단을 왜곡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권력자라고 특별한 기준을 적용해서도 안 되고, 약자라고 무조건 사실과 관계없이 편들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의 지위가 아니라 진실에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이것이 성경적 공의입니다.

14. 메시아 왕은 악을 그냥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11장 4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메시아의 평화는 악을 방치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평화를 갈등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참된 평화는 악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질서가 회복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평화에는 심판이 포함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을 그대로 두고는 완전한 평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그대로 두고 평화를 말할 수 없습니다.

거짓을 그대로 두고 진리를 말할 수 없습니다.

불의를 그대로 두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악을 심판하십니다.

15. 그런데 메시아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이사야는 특별히 “입”을 강조합니다. “그의 입의 막대기.” “그의 입술의 기운.” 즉 메시아의 통치는 말씀의 통치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면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5절입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여기에서도 입에서 나오는 검이 강조됩니다. 이 검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통치는 인간의 폭력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거짓을 드러냅니다.

말씀이 죄를 폭로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판단합니다.

말씀이 회개를 일으킵니다.

말씀이 새로운 삶을 만듭니다.

16.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말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세상이 돈으로 경쟁한다고 교회도 돈으로 경쟁하고, 세상이 권력으로 경쟁한다고 교회도 권력으로 경쟁하고,

세상이 인기와 영향력으로 경쟁한다고 교회도 인기와 영향력으로 경쟁한다면, 교회는 세상과 다른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무기는 말씀입니다.

복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성령입니다.

기도입니다.

거룩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말씀을 잃어버리면 세상과 똑같아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말씀을 붙들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17. 5절 — 공의와 성실이 그의 허리띠가 됩니다

이제 5절을 보십시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허리띠는 옷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메시아에게 있어서 허리띠는 공의와 성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의와 성실은 그분이 필요할 때만 꺼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분의 통치 자체를 구성하는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 진리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환영할 때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도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끝까지 신실하셨습니다.

18. 십자가는 메시아의 공의와 성실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의로우신 분입니다.

죄를 대충 덮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집니다.

그러나 죄인을 그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정죄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로마서 3장 26절입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죄인을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9. 그러므로 메시아 왕의 통치는 우리 삶의 주권을 요구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한다면,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에게는 주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 제가 힘들 때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제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시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돈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관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직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미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자녀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 감정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입으로 예수님을 왕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왕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 성령 충만은 주권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들어갑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단지 예배 시간에 뜨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끝난 월요일에도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용할 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볼 때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2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의 과시”보다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능력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작은 순종을 통해 기적보다 더 큰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큰 사역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 안에 거룩한 성품을 만드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도 신실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더 큰 능력을 주십시오.” 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게 주님의 뜻을 분별할 지혜를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능력을 주십시오.”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기뻐하게 하십시오.”

“제 삶의 주권을 예수님께 온전히 드리게 하십시오.”

22. 오늘 본문을 세 문장으로 정리하면

첫째, 메시아는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한 왕입니다.

그분의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둘째, 메시아는 외모와 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하는 왕입니다.

그분은 약자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악을 심판하십니다.

 

셋째, 메시아의 통치는 공의와 성실 위에 세워집니다.

그분의 왕권은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그분은 끝까지 신실하십니다.

23. 그리고 그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 11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단순히 “좋은 왕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역사 속에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오신 왕이십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죄와 악을 책망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왕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교회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메시아 왕을 단지 과거의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시며 통치하시는 왕을 믿습니다.

24.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오늘 말씀 앞에서 자신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첫 번째입니다.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습니까?

외모입니까? 소문입니까? 돈입니까? 학력입니까? 사회적 지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두 번째입니다. 나는 무엇을 가장 즐거워합니까?

사람의 인정입니까? 성공입니까? 내 뜻대로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세 번째입니다. 내 삶의 실제적인 왕은 누구입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결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욕망이 왕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돈이 왕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평가가 왕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다시 왕좌를 예수님께 내어드리십시오.


결론 — 성령으로 충만한 왕을 바라보십시오

이사야 11장의 메시아는 힘으로 군림하는 왕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왕입니다.

지혜로운 왕입니다. 공의로운 왕입니다. 신실한 왕입니다. 약자를 돌아보는 왕입니다. 악을 심판하는 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기뻐하는 왕입니다.

 

이 왕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왕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힘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왕이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왕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제 판단을 바꾸어 주옵소서.

사람의 외모와 소문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말씀으로 진리를 분별하게 하옵소서.

 

제 능력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기뻐하게 하시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이사야 11장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아 왕을 바라보고, 그 왕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 3편.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사는 나라

메시아가 회복하시는 새 창조와 참된 평화 (이사야 11장 6~9절)

 

오늘 우리는 이사야 11장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놀라운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까지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장면 가운데 하나를 보여줍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삽니다.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워 있습니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끕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습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고,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장면의 결론으로 9절이 선언됩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것은 단순히 동물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아름다운 그림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의 통치가 창조 세계 전체를 어떻게 회복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종말론적인 비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훨씬 더 큽니다.

 

복음은 죄로 인해 깨어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의 넓이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이사야 11장의 평화를 이해하려면 창세기부터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11장의 6~9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세상에는 어떤 모습이 있었습니까?

창세기 1장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본래 선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관계의 단절이 없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두려움과 경쟁이 없었습니다.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도 본래적인 질서가 있었습니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죄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죄는 단순히 인간의 마음속에만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죄는 창조 질서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인간과 땅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고통이 들어왔습니다.

두려움이 들어왔습니다.

저주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죄는 개인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우주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도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2. 죄는 관계를 파괴하고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갈등이 시작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형제가 형제를 죽입니다. 이것이 죄의 역사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지면 인간과 인간도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역사는 계속해서

전쟁,

폭력,

복수,

질투,

억압,

탐욕, 착취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사야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앗수르는 힘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았습니다.

제국은 군사력으로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메시아의 나라는 완전히 다릅니다.

앗수르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3. 이사야 11장은 창세기 3장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사야 11장의 놀라운 장면을 보십시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있습니다.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있습니다.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그들을 이끕니다. 단순히 동물의 생태가 바뀐다는 이야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창조 세계가 본래의 조화로운 질서를 회복하는 그림을 제시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죄가 창조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이사야에서는 메시아가 그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창세기에서는 죽음과 두려움이 들어왔습니다. 이사야에서는 해함과 상함이 사라집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이사야에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

 

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창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4. “이리와 어린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서 해석상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실제로 함께 살게 된다는 뜻인가?”

“아니면 인간 사회의 평화를 상징하는 시적인 표현인가?”

 

이 두 가지 해석이 역사적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일부 해석은 이것을 실제적인 창조 세계의 변화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포식자와 먹잇감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적대적인 인간 공동체와 민족들이 메시아 아래에서 화해하는

모습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을 지나치게 좁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메시지는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통치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의 깨어진 질서를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 자체가 그것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6절에서 “함께 살며”라는 평화의 이미지가 나오고, 9절에서는 그 이유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

 

이라고 설명됩니다. 즉 평화의 근원은 단순히 환경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5. 참된 평화의 근원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 9절은 오늘 본문의 절정입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기에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에 관한 정보가 많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의미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관계적 의미가 강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안다는 것처럼, 하나님과 언약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진다는 것은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입니다.

6. 평화는 환경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합니다.

법을 만듭니다. 제도를 만듭니다. 국제기구를 만듭니다. 협약을 맺습니다. 군사적 균형을 유지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사회의 질서를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제도만으로는 궁극적인 평화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문제는 제도보다 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은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제도만 바뀌어도 다시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먼저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된 사람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공동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7.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평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선포합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 이미 메시아를

“평강의 왕”

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무엇이라고 노래했습니까?

누가복음 2장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가져오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져오신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가 끝나는 평화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여기에서 복음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8. 십자가는 평화의 중심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만 회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 원수 되었던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여기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단지 평화를 가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인종의 담을 허셨습니다.

민족의 담을 허셨습니다.

사회적 신분의 담을 허셨습니다.

죄로 인해 생긴 분열의 담을 허셨습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평화입니다.

9. 그러므로 교회는 “화해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11장의 평화를 믿는 교회라면,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분열하고 미워하면서 세상에 평화를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공동체여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격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세대가 다릅니다.

경험이 다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하나 되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책임은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10. 이사야 11장의 평화는 약한 평화가 아닙니다

성경의 평화는 갈등을 무조건 덮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희생해서 평화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악을 방치해서 평화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 11장의 앞부분을 기억하십시오.

 

메시아 왕은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악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성경의 평화에는 정의가 포함됩니다.

 

악이 제거되어야 참된 평화가 옵니다.

거짓이 무너져야 평화가 옵니다.

죄가 해결되어야 평화가 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십자가 없는 평화는 성경적 평화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참된 화해의 길이 열렸습니다.

11. 메시아의 평화는 가장 약한 자가 안전한 평화입니다

이사야 11장 6~8절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가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어린아이”입니다.

6절에서

“어린아이가 그들을 이끌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도 젖 먹는 아이와 젖 뗀 아이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메시아 왕국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세상의 나라는 강한 자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강한 사람이 안전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목소리를 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돌아보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십니다. 나그네를 돌보십니다.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아이를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강함을 과시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겸손과 의존과 신뢰의 나라입니다.

12.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사야 11장 7절은 말합니다.

“사자는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이것은 메시아의 통치가 단순히 인간 사회의 정치적 변화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합니다. 이것은 신약의 여러 본문과 놀랍게 연결됩니다.

 

로마서 8장 19절부터 2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기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에서 놀라운 신학적 연결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고, 인간의 구속과 함께 창조 세계의 회복도 기대되고 있습니다.

13. 구원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가 매우 중요하게 회복해야 할 진리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구원을 너무 좁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죄 용서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 물론 이것은 복음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말하는 구원은 그것보다 훨씬 큽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공동체를 회복하시고, 마침내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십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보십시오.

“만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화목하게 하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주적 화해의 중심입니다.

14.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새 창조 안에 있습니까?

여기에 중요한 종말론적 긴장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미”와 “아직”을 동시에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을 경험합니다. 여전히 전쟁이 있습니다. 여전히 질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악이 존재합니다. 여전히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흔히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라고 설명합니다.

15. 예수님의 초림은 새 창조의 시작이고 재림은 새 창조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 창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새 창조의 완성이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습니다. 애통하는 것이 없습니다. 곡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픈 것이 없습니다. 이사야 11장의 궁극적인 성취입니다.

16. 이사야 11장의 평화는 요한계시록의 새 창조를 향합니다

성경은 처음에 창조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새 창조로 끝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입니다. 그 사이에 구속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본다면, 창조 → 타락 → 구속 → 새 창조 라는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장은 이 흐름 가운데서 메시아를 통한 새 창조의 도래를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17.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바다를 덮음 같이”

바다는 얼마나 넓습니까? 얼마나 깊습니까? 얼마나 충만합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의 지식이 그렇게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일부 지역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예루살렘만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여호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이사야 2장과도 연결됩니다. 이사야 2장 3절은 열방이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가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고 말합니다. 이사야 11장에서는 그 지식이 온 땅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왜 모든 민족입니까? 메시아는 모든 민족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18. 그러므로 선교는 이사야 11장의 성취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단순히 교인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복음 전도는 사람들이 참된 왕을 만나도록 초대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거짓 왕들에게서 돌아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돈이 왕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이 왕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왕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이사야가 바라보았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그 날을 향해 역사는 나아갑니다.

19. 그렇다면 오늘 교회는 어떤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이사야 11장의 완전한 평화를 아직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평화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현재의 삶에서 미리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을 품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높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20.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사는 나라를 교회가 먼저 보여주어야 

교회 안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대가 다릅니다.

성격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배경이 다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선언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것은 모든 차이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차이가 적대의 이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1. 우리가 화해할 때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봅니다

세상에서는 쉽게 용서하지 않습니다. 배신하면 끝입니다. 상처를 받으면 복수합니다. 손해를 보면 되갚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악이 승리할 것을 믿지 않습니다.

미움이 승리할 것을 믿지 않습니다.

죽음이 승리할 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현재의 삶에서 미리 살아냅니다.

 

용서가 그 미래를 증언합니다.

화해가 그 미래를 증언합니다.

섬김이 그 미래를 증언합니다.

정직이 그 미래를 증언합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그 미래를 증언합니다. 

22.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성령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11장은 처음부터 메시아 위에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충만한 왕이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그 통치 아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조입니다.

성령 → 메시아의 통치 → 공의 → 평화 → 창조의 회복 이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진정한 평화를 이루려면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 의지로는 어렵습니다. 상처가 있으면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손해를 보면 양보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무시한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가능합니다.

23. 성령은 우리 안에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은 성령을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성령은 장차 올 완전한 구원의 첫 열매와 연결됩니다.

로마서 8장 23절입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구원을 기다립니다.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아직 영광의 완성을 기다립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현재입니다.

24. 그러므로 성도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는 없나 보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현실의 고통을 무시하고 “다 잘될 것이다”

라고 쉽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봅니다.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사람들이 고통받습니다. 악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복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확신입니다.

25.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 평화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이제 말씀을 삶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첫째, 나는 누군가에게 이리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가진 힘으로 상대를 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말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나는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평가가 내 삶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셋째,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와 화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화해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6. “내가 먼저”라는 복음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그 사람이 먼저 사과하면 나도 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면 나도 손을 내밀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예수님께서 먼저 오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화해를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에게도 “네가 먼저 사랑하라.” “네가 먼저 용서하라.”  “네가 먼저 손을 내밀라.” 고 가르칩니다.

27. 이것이 메시아의 평화를 사는 방식입니다

이사야 11장의 평화는 먼 미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완성은 미래에 있지만, 그 시작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부 사이에서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시작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시작됩니다.

직장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소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용서 하나, 작은 배려 하나, 정직한 말 한마디,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행동 하나, 상처받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 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미리 보여주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28. 그러나 최종적인 평화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을 완전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화를 만들어도 죽음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의를 세워도 모든 악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노력 자체를 구원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완전한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9.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아직 이사야 11장의 완전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지 않습니다.

아직 전쟁이 있습니다. 

아직 죽음이 있습니다.

아직 질병이 있습니다.

아직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복음을 온 땅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에는 이사야 11장의 약속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30. 오늘 말씀의 핵심을 세 문장으로 기억하십시오

첫째, 죄는 하나님과 인간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창조 세계의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시고 새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고 창조 세계 전체가 완전한 평화 가운데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그 미래를 기다리면서 그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31.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을 점검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갈등을 만드는 사람인가?”

 

내 말은 사람을 살립니까?

아니면 상처를 줍니까?

내가 있는 곳에 화해가 일어납니까?

아니면 분열이 일어납니까?

내가 가진 힘을 약한 사람을 위해 사용합니까?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합니까?

 

나는 예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현재의 삶에서는 세상의 왕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사야 11장의 메시아 왕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의 평화를 살아라.”

“내가 너를 용서한 것처럼 용서하라.”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

“내가 너와 화목하게 된 것처럼 너도 화목하게 하라.”

맺는말 — 바다를 덮는 물처럼

언젠가 하나님의 지식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세상에 충만할 것입니다.

그날에는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 눈물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장벽이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적대가 사라질 것입니다.

창조 세계의 모든 탄식이 끝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 왕이 완전하게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다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갑니다.

용서합니다. 화해합니다. 사랑합니다. 섬깁니다. 약자를 보호합니다. 정의를 행합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아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세상에 보여줍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사는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는 미움보다 사랑을 선택하고, 복수보다 용서를 선택하며,

분열보다 화해를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다리는 왕은 힘으로만 세상을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원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신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왕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까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평화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4편. 열방을 모으시는 메시아 (이사야 11장 10~16절)

이새의 뿌리, 새 출애굽, 그리고 하나 되는 하나님의 백성

 

이사야 11장은 1절에서 아주 작은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

 

거대한 제국 앗수르는 무너졌습니다. 다윗 왕조 역시 잘려 나간 나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루터기에서 메시아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메시아 위에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그는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 되십니다.

그의 통치 아래 창조 세계에는 평화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10절에 이르면 놀라운 장면이 하나 더 펼쳐집니다.

 

이 메시아 왕에게 열방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10절입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서리니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라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이사야 11장의 시선이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만의 왕이 아닙니다. 유다만의 왕도 아닙니다. 다윗 왕조의 정치적 영광만을 회복시키는 왕도 아닙니다.

 

그는 만민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그 왕을 중심으로 흩어진 백성이 다시 모이고, 갈라졌던 백성이 하나가 되고, 막혔던 길이 열리고,

새로운 출애굽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결국 한 가지 위대한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해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으시고,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시며, 죄와 죽음과

세상의 권세 아래 갇혀 있던 사람들을 새로운 출애굽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1. “이새의 뿌리”로 오시는 왕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1절에서는 “이새의 줄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이새의 뿌리”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1절에서는 메시아가 이새에게서 나온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10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메시아가 단순히 이새의 후손이 아니라,

오히려 이새의 뿌리와 같은 근원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놀랍게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연결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예수님은 분명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시에 다윗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면서 질문하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만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론의 놀라운 깊이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시지만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십니다.

인간적으로는 다윗의 계보를 따라 오셨지만, 신적으로는 다윗보다 먼저 계셨던 분입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사야 11장의 메시아는 단순히 새로운 정치 지도자가 아닙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입니다.

2. 메시아는 “만민의 기치”가 되십니다

10절에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기치”입니다. 기치는 깃발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깃발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었습니다.

 

군대가 어디에 모여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지였습니다. 사람들은 깃발을 보고 자기 진영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만민의 기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사야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열방을 불러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11장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 메시아 자신이 깃발이 되어 열방을 자기에게로 모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던 구원의 계획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스라엘은 자기만 구원받기 위해 선택된 민족이 아닙니다. 열방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메시아에게 집중됩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다윗 언약으로 연결되고, 다윗 언약이 메시아에게 집중되고, 메시아를 통해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이것이 성경의 구속사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은 처음부터 열방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이스라엘만의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열방을 바라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열방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도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셨습니다.

시편은 계속해서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초대합니다.

시편 67편 2절입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그리고 이사야는 계속해서 열방을 바라봅니다. 이사야 2장에서는 열방이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옵니다.

이사야 11장에서는 열방이 메시아에게로 모입니다. 이사야 49장에서는 메시아의 사명이 이스라엘을 넘어 열방으로 확장됩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리고 신약에서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확하게 성취됩니다.

4. 예수님은 모든 민족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28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왜 모든 민족입니까?

예수님이 모든 민족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에서 복음의 방향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시작합니다. 유대로 갑니다. 사마리아로 갑니다. 그리고 땅끝으로 갑니다.

복음은 안으로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밖으로 흘러갑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만민의 기치이기 때문입니다.

5. 교회는 메시아의 깃발 아래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같은 장소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도 아닙니다.

비슷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도 아닙니다. 같은 세대의 사람들만 모이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하나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지만, 같은 왕을 섬깁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십자가 아래 섭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같은 복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중심에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메시아가 우리의 기치가 되어야 합니다.

6. 교회의 분열은 메시아의 기치를 가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 한국 교회에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교회가 사람 중심으로 움직이면 분열이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어떤 세력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어떤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입니다.

어떤 전통을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런 분열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

“나는 게바에게라.”

사람을 중심으로 교회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의 중심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교회의 중심은 특정한 장로나 집사도 아닙니다. 교회의 중심은 어떤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기치입니다. 그분이 왕입니다. 그분이 머리입니다.

7. 메시아는 흩어진 남은 자를 다시 모으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남은 백성”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남은 자, Remnant.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습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왕조는 잘릴 수 있습니다.

 

성전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8. “남은 자”는 인간의 우수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남은 자는 자기 힘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로웠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가운데서도 자기 약속을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0장 22절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많은 숫자가 구원의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붙들린 남은 자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생명은 숫자로만 측정할 수 없습니다.

 

큰 건물이 있다고 반드시 건강한 교회인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인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9. 하나님께서 “다시 손을 펴신다”는 말씀

11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손을 펴십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10장과 연결됩니다.

10장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심판을 위해 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1장에서는 같은 하나님의 손이 구원을 위해 펼쳐집니다.

 

이것이 놀랍습니다. 심판하시는 손과 구원하시는 손이 다른 하나님의 손이 아닙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심판 가운데서도 언약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십자가에서 이것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죄인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담당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10. 새 출애굽의 시작

이제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바다를 말리십니다. 강을 치십니다. 그리고 백성이 돌아올 길을 만드십니다.

16절입니다.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게.” 이것이 바로 새 출애굽의 이미지입니다.

 

과거 출애굽을 기억하게 합니다.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를 건넜습니다.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장차 하나님께서 또 한 번 놀라운 구원을 행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앗수르와 여러 나라에 흩어진 백성이 돌아옵니다. 새로운 출애굽입니다.

11. 출애굽은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출애굽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출애굽은 단순히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사하는 사건” 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났다는 것은 애굽의 주권에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정치적 해방이면서 동시에 영적 해방입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구원받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12. 오늘 우리에게도 새 출애굽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애굽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여러 형태의 “애굽”이 존재합니다.

돈이 왕이 되는 세상, 성공이 왕이 되는 세상, 쾌락이 왕이 되는 세상, 사람의 평가가 왕이 되는 세상, 자기 욕망이 왕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들의 통치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단순히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선언합니다.

“너의 왕이 바뀌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과거에는 죄가 왕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왕이십니다.

 

과거에는 자기 욕망이 왕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왕입니다. 과거에는 세상의 평가가 왕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다. 이것이 새 출애굽입니다.

13.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아니라 왕이 바뀐 사람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복음의 정의입니다.

기독교를 단순히 “세상을 떠나는 종교” 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지배를 받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의 가치가 왕이 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일하지만 돈이 왕이 되지 않습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지만 권력이 왕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만 사람의 인정이 왕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십니다.

14. 그래서 새 출애굽은 “주권의 이동”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핵심 문장으로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주권의 이동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한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에게서 하나님께로 주권이 이동했습니다.

 

죄의 종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이동했습니다. 죽음의 권세에서 생명의 왕에게로 이동했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말합니다.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불러내어” 그리고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구조입니다. 어둠에서 나옵니다.  빛으로 들어갑니다.

죄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로 들어갑니다.

15. 그런데 이사야 11장은 개인 구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11절부터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그리고 13절에서 특별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의 질투가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이 끊어지며…”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솔로몬 이후 나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입니다. 에브라임과 유다입니다. 서로 다른 왕국이 되었습니다. 서로 싸웠습니다.

서로 질투했습니다. 때로는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분열된 백성이 다시 하나가 됩니다.

16. 메시아의 구원은 원수 된 사람을 하나 되게 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을 구원하시지만, 개인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둘은 오랫동안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리고 16절에서는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11장의 에브라임과 유다의 화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메시아의 구원은 갈라진 백성을 하나로 만드는 구원입니다.

17. 그러므로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화해가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미워하고, 복음을 말하면서 계속해서 분열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의 자기 비하와 십자가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내가 옳으니 네가 나에게 맞춰라” 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18. 교회의 연합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왜 하나가 되어야 합니까? 그 이유가 이어집니다.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교회의 하나 됨은 단순히 교회 내부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교적 증언입니다.

교회가 하나 될 때 세상이 복음의 능력을 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세상은 묻습니다.

“어떻게 저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 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9. “바다의 장애물”도 하나님 앞에서는 길이 됩니다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치십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큰 길을 만드십니다. 여기에는 출애굽의 기억이 있습니다.

홍해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길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십니다. 이사야 11장은 바로 그 하나님이 다시 일하실 것을 선언합니다.

20. 하나님께서 길을 만드시면 인간이 길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길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길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계산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합니다.

우리의 방법이 막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방법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3장 19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분입니다.

21. 오늘 우리의 “홍해”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는 무엇입니까? 해결되지 않는 관계입니까?

오랫동안 계속된 상처입니까? 내 힘으로 끊을 수 없는 죄의 습관입니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가정의 문제입니까? 경제적인 문제입니까? 영적인 침체입니까? 혹은 “나는 이제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 라는 절망입니까?

 

이사야 11장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방식으로 열립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가 길을 만들겠다”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길을 내실 것을 신뢰하겠다” 는 것입니다.

22. 새 출애굽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새로운 출애굽의 중심입니다. 누가복음 9장 31절에는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헬라어로 “엑소도스”, 즉 출애굽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시는 분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시는 새로운 모세보다 크신 구원자이십니다.

23. 교회는 새 출애굽의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구입니까? 교회는 단순히 종교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출애굽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그리고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어둠에서 불러냄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시 어둠의 가치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24. 새 출애굽한 사람이 다시 애굽을 그리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어려움을 만나자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민수기 11장 5절에서는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때를 잊어버리고 애굽의 음식만 기억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적 기억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으면서도 때때로 죄의 옛 삶을 그리워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의 가치가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섬기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애굽으로 돌아가도록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을 향해 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25. 오늘 교회가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이사야 11장 10~16절을 통해 오늘 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치입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어 새로운 삶으로 보내십니다.

교회 안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6. 복음은 “모이는 것”과 “보내지는 것”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이사야 11장에서는 사람들이 메시아에게 모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교회는 다시 세상으로 보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교회는 모이는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보내지는 공동체입니다. 예배를 위해 모입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해 흩어집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모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 세상으로 나갑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 모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27. 오늘 우리의 삶에도 “새 출애굽”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 개인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무엇의 노예입니까?

사람의 인정입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분노입니까?

욕망입니까?

두려움입니까?

과거의 상처입니까?

중독적인 습관입니까?

자기 의입니까?

 

혹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왕의 통치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왕으로 받아들이라.” 이것이 새 출애굽의 시작입니다.

28. 주권을 내려놓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단지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나의 왕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시간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재정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인간관계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직업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계획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미래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몸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자녀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주권의 이동입니다.

29. 결국 이사야 11장의 핵심은 “왕”입니다

이사야 11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십시오.

1절에는 왕이 등장합니다.

2절에는 왕 위에 성령이 임합니다.

3~5절에서는 왕의 공의로운 통치가 나타납니다.

6~9절에서는 왕의 통치 아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10절에서는 왕에게 열방이 모입니다.

11~13절에서는 왕 아래 흩어진 백성이 하나가 됩니다.

14~16절에서는 왕의 통치 아래 대적이 무너지고 새 출애굽의 길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11장의 중심은 단순히 “평화로운 세상” 이 아닙니다. 평화를 가져오시는 왕입니다.

그 왕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0.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단순히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정치적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이 세상을 완전하게 만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리고 교회는 대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교회의 소망입니다.

31. 그날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날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말씀에 순종하고, 서로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고,

약자를 보호하고, 복음을 전하고, 열방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의 모습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미리 보여주어야 합니다.

32. 맺는말 — 하나님께서 길을 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 11장은 그루터기에서 시작했습니다. 잘려 버린 것처럼 보이는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싹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싹은 자라 메시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 왕에게 열방이 모입니다. 흩어진 백성이 돌아옵니다.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하나가 됩니다. 막힌 바다에 길이 열립니다.

새로운 출애굽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 땅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끝난 것 같은 자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것을 다시 모으십니다.

하나님은 갈라진 것을 다시 하나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막힌 곳에 길을 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은혜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자기 주권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옮기십니다.

이것이 새 출애굽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질문

오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세 가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첫째, 지금 내 삶의 왕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나 자신입니까?

 

둘째, 나는 누구와 화해해야 합니까?

메시아의 왕국은 분열이 아니라 하나 됨의 나라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보내고 계십니까?

나는 복음을 받은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새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아직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전해야 합니다.

결론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잘린 나무처럼 아무런 소망도 없어 보이는 자리에서 새로운 싹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메시아를 일으키시고 그분을 만민의 기치로 세우셔서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께로 부르시는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가치와 욕망을 왕으로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의 주권을 다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올려드리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분열과 미움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에브라임과 유다를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공동체에도 그리스도의 화평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되게 하시며,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서 화해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앞에 홍해와 같은 장애물이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께서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길을 주께서 열어 주시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주께서 붙들어 주시며,

우리가 볼 수 없는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세상 가운데 보내 주옵소서.

우리가 받은 복음을 우리 가족에게 전하게 하시고, 우리 이웃에게 전하게 하시고, 우리의 일터에서 나타내게 하시고,

땅끝까지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세상에 충만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작은 표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기치이시며, 우리의 평화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날마다 고백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왕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