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너지는 피난처,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 (이사야 17–19장)
하나님을 잊은 세상과 남은 자 그리고 열방의 회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이사야 17장부터 19장까지입니다.
“무너지는 세상의 피난처를 붙들 것인가, 아니면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붙들 것인가?”
우리는 불안할수록 무엇인가를 붙잡습니다.
돈을 붙잡습니다.
사람을 붙잡습니다.
경력을 붙잡습니다.
건강을 붙잡습니다. 정보를 붙잡고, 경험을 붙잡고, 조직과 제도를 붙잡습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가 찾아오면 군사 동맹을 만들고, 강대국과 손을 잡고, 외교적 협력을 구합니다.
그 자체가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궁극적인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이사야 17–19장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다메섹과 에브라임은 동맹을 맺었습니다.
구스는 사신을 보냈습니다. 애굽은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이었습니다.
애굽에는 지혜로운 자들이 있었고 정치가들이 있었으며 경제적 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나씩 흔드십니다. 왜입니까?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이 잘못된 피난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너뜨리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17장에서는 남은 자를 남기시고, 18장에서는 열방이 시온으로 나아오는 장면을 보여주시며, 19장에서는 놀랍게도 애굽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한 심판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 방향은 심판을 넘어 구원이며, 이스라엘을 넘어 열방이며, 현재의 역사에서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대신한 동맹은 결국 함께 무너집니다
이사야 17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다메섹은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에브라임과도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강력한 앗수르에 맞서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유다까지 그 동맹에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지하던 바로 그 동맹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단순히 군사전략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더 깊은 문제는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정치적 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대신 인간의 동맹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원리가 하나 나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돈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사람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자신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사회적 지위와 경력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정치적 힘이나 경제적 힘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본질은 단지 절에 가서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성경은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움을 받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돈을 사용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의존의 최종 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을 사랑하되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사용하되 물질을 하나님처럼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사용하되 능력을 구원자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2.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17장 10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여기서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으로 잊어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도 드렸습니다. 성전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제외하고 계산했습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신앙의 위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 결정에서는 하나님을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결정은 세상의 방식대로 합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안전은 돈에서 찾습니다.
성경은 읽지만 미래에 대한 최종적인 신뢰는 사람에게 둡니다.
하나님께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삶에서는 내가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실제적인 위기 속에서 누구를 가장 먼저 의지하는가?” 이 질문에 우리의 신앙 상태가 드러납니다.
3.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 남은 자를 남기십니다
여기에서 이사야 17장의 놀라운 복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지만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않으십니다.
5절과 6절은 추수와 감람나무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곡식을 거두고 나면 밭에 얼마의 이삭이 남습니다.
감람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다 거두고 나면 높은 가지에 두세 개가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의 신학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끝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구원의 계획은 심판 가운데서도 계속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은 자가 많으냐 적으냐가 아닙니다.
남은 자의 정체성은 숫자가 아니라 방향에 있습니다.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이 말씀이 남은 자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봅니까?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상에게서 눈을 돌립니다.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립니다.
세상의 힘에서 눈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립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미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붙들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4. 남은 자는 숫자가 아니라 시선으로 구별됩니다
오늘날에도 남은 자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적으면 남은 자입니까?
오래 교회 다니면 남은 자입니까?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남은 자입니까?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 남은 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의 본질은 하나님께 돌아선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크게 듣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을 잃어버린 성공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무리 달콤해도 하나님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것이 신약시대의 남은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반석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5.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한마디가 더 강합니다
이사야 17장 12절부터는 장면이 바뀝니다.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열방이 바다처럼 요란하게 움직입니다.
군대가 움직입니다. 정치가 움직입니다. 제국이 움직입니다. 사람들이 계획을 세웁니다. 세상의 소리가 커집니다.
그런데 13절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도망갑니다.
마치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고, 폭풍 앞의 티끌과 같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세상의 소리가 크다고 해서 세상이 주권자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계획이 복잡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보다 큰 것은 아닙니다.
열방이 아무리 소란스럽게 움직여도 역사의 최종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세상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닙니다
이제 이사야 18장으로 넘어갑니다. 구스가 등장합니다.
당시 구스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와 수단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해됩니다.
구스는 강력한 세력이었고, 앗수르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나라와 외교적인 움직임을 펼쳤습니다.
사신들이 오고 갑니다. 배들이 움직입니다. 사람들이 분주합니다. 모두가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세상은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조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무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왕의 침착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가장 정확한 때에 행동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빨리 움직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지금 해결해 주세요.” “오늘 응답해 주세요.” “당장 길을 열어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때때로 침묵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7. 기다림은 믿음의 수동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전문가의 도움도 받아야 합니다. 현실적인 계획도 세워야 합니다. 사람의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준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 수단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을 사용하는 것과 사람을 구원자로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돈을 사용하는 것과 돈을 피난처로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과 계획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제가 계획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계획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겠습니다. 제가 사람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하나님보다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잠언 3장 5절과 6절의 말씀처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8. 애굽의 문제는 하나님보다 좋은 것을 더 의지한 것입니다
이제 이사야 19장으로 들어갑니다. 19장은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애굽은 고대 세계에서 매우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우상도 많았습니다. 경제적 기반도 있었습니다. 나일강이 있었습니다.
지혜자들이 있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씩 흔드십니다. 우상도 흔들립니다. 정치도 흔들립니다. 사회질서도 흔들립니다. 나일강도 흔들립니다.
경제도 흔들립니다. 지혜자들의 지혜도 흔들립니다. 왜입니까?
하나님보다 의지하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상대화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일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경제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정치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우상이 됩니다.
우상의 가장 무서운 특징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좋은 것이기 때문에 더 쉽게 우상이 됩니다.
가족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이 하나님보다 중요해지면 우상이 됩니다.
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나의 궁극적인 안전이 되면 우상이 됩니다.
건강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건강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피난처가 되면 우상이 됩니다.
성공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9.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가장 위험한 지혜가 됩니다
이사야 19장은 애굽의 지혜자들을 매우 강하게 책망합니다. 그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정보가 부족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습니다.
인공지능도 있습니다. 전문가도 많습니다. 데이터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많은 것을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잠언 9장 10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그러므로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 제가 모릅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님은 보십니다. 제가 계산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계산하십니다.
그러므로 제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앞세우겠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지혜입니다.
10. 그런데 이사야 19장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가 오늘 말씀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입니다. 이사야 19장 16절 이후에는 반복해서 “그 날에”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심판받던 애굽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18절에는 애굽의 여러 성읍이 여호와를 섬기게 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19절에서는 애굽 땅 중앙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세워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20절에서는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23절 이하에서는 더욱 놀라운 말씀이 등장합니다.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함께하게 됩니다.
그리고 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그리고 25절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여러분, 이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원수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앗수르 역시 하나님의 백성을 압박했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 애굽.”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 “나의 기업 이스라엘.”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크기입니다.
11.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사야 전체의 신학적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2장에서는 열방이 여호와의 산으로 나아옵니다.
이사야 11장에서는 열방이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왕에게 나아옵니다.
그리고 19장에서는 애굽과 앗수르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마태복음 28장 19절입니다.
복음은 어느 한 민족만을 위한 복음이 아닙니다.
어느 한 문화만을 위한 복음도 아닙니다. 어느 한 나라만을 위한 복음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을 허무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19장의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연합은 단순한 국제정치적 평화의 예언을 넘어, 하나님께서 원수 되었던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는 구속사적 전망을 보여줍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
12. 십자가는 가장 놀라운 피난처의 역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사야 17–19장에서 사람들은 힘 있는 나라를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피난처들을 흔드십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참된 피난처를 보여주십니다.
그 피난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제국이 우리의 피난처가 아닙니다. 돈이 우리의 피난처가 아닙니다.
사람이 우리의 궁극적인 피난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시편 46편 1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것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을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경제적 위기보다 더 깊은 위기에 있습니다.
질병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적 불안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조력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주권자이시며 우리의 궁극적인 피난처이십니다.
13.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질문은 “무엇이 무너질까?”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세상이 무너질까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경제가 흔들릴까 두렵습니다. 건강이 흔들릴까 두렵습니다. 자녀의 미래가 흔들릴까 두렵습니다. 사회가 흔들릴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무엇을 붙들고 있느냐?”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아닌 것을 흔드실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저주라고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네가 의지할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네 구원자가 아니다.”
“그 돈은 네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 성공은 너의 정체성이 아니다.”
“네가 만든 요새는 영원하지 않다.”
“나에게 돌아오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4. 남은 자는 무너지는 세상에서 무엇을 붙드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흔들릴수록 남은 자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남은 자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더 크게 듣는 사람입니다.
남은 자는 위기를 만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위기를 만나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붙드는 사람입니다.
남은 자는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남은 자는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강함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남은 자는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의 남은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힘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성공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15.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말씀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계획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현실을 무시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핵심은 우선순위입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무엇을 최종적으로 의지합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계획을 앞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우리의 구원자로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의학적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최종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국가와 제도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16. 그러므로 이사야 17–19장의 마지막 메시지는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17장은 무너지는 다메섹과 에브라임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남은 자가 있습니다. 18장은 분주한 열방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용히 역사하십니다. 19장은 무너지는 애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애굽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립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향입니다. 심판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무너짐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실패가 마지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마지막 말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삶에 무너지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절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주님, 제가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습니까?”
“주님, 제가 무엇을 피난처로 삼았습니까?” “주님, 제 시선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18. 오늘 우리의 영적 건강을 점검합시다
마지막으로 세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나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합니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내가 무엇을 의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돈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까?
사람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까?
건강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까?
명예를 잃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까?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둘째, 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누구를 가장 먼저 찾습니까?
사람입니까?
정보입니까?
인터넷입니까?
전문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물론 사람과 전문가를 찾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의 첫 자리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셋째,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내가 이룬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평가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상의 성공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처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봅시다.”
결론 ― 무너지는 피난처를 내려놓고 영원한 반석을 붙드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 17–19장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칩니다.
첫째, 하나님을 대신하여 의지하는 모든 피난처는 결국 무너집니다.
다메섹도 무너집니다.
에브라임도 무너집니다.
구스의 정치적 계획도 무너집니다.
애굽의 우상도 무너집니다.
나일강을 의지하던 경제도 흔들립니다.
인간의 지혜도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궁극적인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남은 자를 보존하십니다.
남은 자는 숫자가 아닙니다. 남은 자는 시선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에서 눈을 돌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그 시선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심판을 넘어 열방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애굽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앗수르도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원수 되었던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세상의 안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바다처럼 소동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요새가 무너져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더 견고한 반석이 있습니다.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편 62편 6절의 고백처럼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오늘 우리의 고백이 이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붙들었던 것을 내려놓게 하소서.”
“주님, 세상의 소리보다 주님의 말씀을 크게 듣게 하소서.”
“주님, 무너지는 피난처가 아니라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소서.”
“주님, 이 시대의 남은 자로 살게 하소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가정이 흔들려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경제가 흔들려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건강이 흔들려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세상이 흔들려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무너지는 세상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 반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합시다.
우리의 마음을 말씀에 고정합시다.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 나라에 두십시다. 그리고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커도 이렇게 고백합시다.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반석이시며, 하나님 나라는 나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마치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사야 17장부터 19장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돈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우리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의지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의지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세상의 소리가 바다처럼 요란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조용히 계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가장 정확한 때를 기다리며 역사하고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게 하시고, 우리의 필요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하옵소서.
무너지는 피난처를 내려놓고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옵소서.
우리로 이 시대의 남은 자가 되게 하시되 숫자로 남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남게 하옵소서.
세상의 우상에서 눈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세상의 성공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게 하시며,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사야 19장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넘어 열방으로 흘러가게 하시고,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가 열방을 향한 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애굽도 부르시고 앗수르도 부르시며 원수 되었던 자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를 믿게 하옵소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 가운데 기다리게 하시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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