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술은 가까운데 마음은 멀다 (이사야 29장)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이사야 29장으로 “입술은 가까운데 마음은 멀다"
이 제목이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기도도 합니다.
찬송도 합니다.
헌금도 합니다.
성경도 읽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주 무서운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런데 네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
“저는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저는 성경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활동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문제를 다룹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티끌처럼 낮추십니다.
둘째, 그들을 혼수상태와 같이 만드십니다.
셋째, 그들의 영적인 눈을 닫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봉인하십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근본 원인이 13절에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여기에 오늘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입술만 가까운 신앙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운 신앙을 원하십니다.
1. 아리엘 — 거룩한 도시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이유
1절입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여기서 “아리엘”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아리엘”이라는 이름은 해석상 논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사자 같은 곳”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제단”, “번제단”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고전적인 주석 전통에서도 이 단어를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의 제단”이라는 두 방향에서 설명해 왔습니다.
특히 이사야 29장 전체의 제사와 심판이라는 문맥에서는 “제단”의 이미지가 매우 의미 있게 작용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아무 도시가 아닙니다. 다윗이 거했던 도시입니다. 성전이 있는 도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도시를 하나님께서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룩한 장소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 있는 사람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당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예배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찬송을 부른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성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있었지만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배는 있었지만 순종이 없었습니다. 제사는 있었지만 회개가 없었습니다.
입술은 하나님을 향했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경고입니다. 종교적 환경이 나의 영적 상태를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교회 안에 오래 있었다는 것이 믿음의 증거는 아닙니다. 직분을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과 가까운 증거도 아닙니다.
신앙 경력이 길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가?
2.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지만” — 반복되는 예배의 위험
1절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너희는 해마다 절기를 돌아오게 하라.”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절기를 지킵니다. 제사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종교적 반복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입니까?
예배가 반복될수록 마음이 더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무서움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예배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가 습관이 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말씀을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 감동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기도가 문장이 됩니다.
처음에는 찬송이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찬송이 예배 순서가 됩니다.
처음에는 헌금이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헌금이 종교적 의무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주 위험합니다.
신앙의 형식은 남아 있는데 신앙의 실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이 말씀은 단순한 예배 형식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예배 형식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찬송도 필요합니다.
기도도 필요합니다.
성찬도 필요합니다.
헌금도 필요합니다.
설교도 필요합니다.
예배의 질서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형식이 마음을 대신하는 순간입니다. 형식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닙니다.
형식은 마음의 믿음이 표현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형식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형식을 만들고, 형식은 마음의 고백을 표현합니다.
3. 첫 번째 심판 —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티끌로 낮추신다
2절부터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괴롭게 하시고 낮추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낮추어 티끌에서 말하게 하며.”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패배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는 데 익숙합니다.
“나는 괜찮아.” “나는 이 정도면 신앙생활 잘하고 있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지.”
“나는 교회도 다니고 봉사도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겠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흔드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자랑하던 것이 흔들립니다.
건강이 흔들립니다.
경제가 흔들립니다.
관계가 흔들립니다.
계획이 흔들립니다.
내가 의지하던 세상의 안전장치가 흔들립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질문합니다.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기능입니다.
고난 자체가 언제나 개인의 특정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거짓된 의존을 드러내십니다.
예루살렘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4. 두 번째 심판 — 영적으로 취하게 하시는 하나님
5절부터 8절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등장합니다.
유다를 공격하는 대적들이 티끌처럼 사라지고, 폭풍과 우레와 지진 같은 하나님의 개입이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역사까지도 주권적으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앗수르가 강해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이 강해서 역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애굽이 강해서 역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열방은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해 어떤 나라를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때가 되면 그 나라 역시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세상이 역사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여도 최종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가 그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정치적 계산을 했습니다.
군사적 계산을 했습니다. 외교적 계산을 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묻습니까?
아니면 사람에게 묻습니까?
말씀을 먼저 찾습니까?
아니면 인터넷을 먼저 찾습니까?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까?
아니면 내가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고 합니까?
여기에서 신앙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5. 세 번째 심판 — 영적 소경이 되는 무서움
9절과 10절은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랄지어다.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리고 10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들과 선견자들의 눈을 감기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짓게 만드신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흐름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거부한 백성에게 그들의 반역이 가져오는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경고하셨습니다.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계속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영적 소경입니다. 사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고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더 이상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찌르지 않는 상태입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예배를 빠져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교만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더 무서운 상태입니다.
6. 말씀을 거부하면 결국 말씀이 봉인된다
11절과 12절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봉인된 책처럼 묘사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그 말씀을 자기에게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성경은 집집마다 있습니다. 휴대전화에도 성경이 있습니다. 유튜브에도 설교가 넘쳐납니다.
책도 많습니다. 신학 강의도 많습니다. 성경공부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씀을 많이 접하면서도 삶은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 지식과 믿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신학적 정보와 거룩한 삶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많이 듣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묻습니다. “그 말씀을 네가 순종했느냐?”
7. 이 모든 심판의 원인은 13절에 있다
이제 본문의 중심에 도착합니다. 13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 29장의 신학적 핵심을 발견합니다. 죄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멀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위선입니다.
위선은 단순히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모습과 마음의 실제 상태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8. 예수님은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에게 다시 적용하셨다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사야 29장의 말씀이 구약시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이 말씀을 다시 가져오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그리고 이사야 29장 13절을 인용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사야의 책망이 단지 고대 유다의 역사적 문제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전통과 종교적 관습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모든 시대의 종교성을 겨냥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유대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나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9. “나는 괜찮겠지”라는 신앙의 가장 위험한 착각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런 신앙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괜찮겠지.”
교회에 다니니까 괜찮겠지. 예배를 드리니까 괜찮겠지. 기도하니까 괜찮겠지. 봉사하니까 괜찮겠지. 헌금하니까 괜찮겠지.
성경을 아니까 괜찮겠지.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으니까 괜찮겠지.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 마음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도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장로도 돌아봐야 합니다.
권사도 돌아봐야 합니다.
집사도 돌아봐야 합니다.
교사도 돌아봐야 합니다.
성도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는가? 아니면 예배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가?
10. 참된 예배는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마음이 있는 예배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예배 시간에 감정이 뜨거운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곧 참된 예배의 전부도 아닙니다. 감동적인 찬양을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예배는 교회 안에서 한 시간 동안 드리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주일의 예배가 월요일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찬송이 직장에서의 태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가 가정에서의 말로 이어져야 합니다.
말씀이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은혜가 섬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희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예배는 살아 움직입니다.
11. 은혜를 받은 사람의 반응은 감사와 순종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하는 기도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하나님께 해야 할 순종까지 하나님께 부탁하고 있음을 발견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깊은 영적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사랑하게 해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사랑하라.”
“하나님, 제가 용서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 용서하라.”
“하나님, 제가 섬기게 해 주세요.” “그러면 섬기라.”
“하나님, 제가 순종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 내 말씀에 순종하라.”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순종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요한 구조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주셨고, 우리는 그 은혜에 반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먼저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구원을 사기 위한 값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응답입니다.
12. 십자가는 마음이 멀어진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 데려온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29장의 문제는 단순한 생활습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 “예배를 잘 드려라.” “마음을 좀 더 진실하게 가져라.”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완벽한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실한 감정도 아닙니다.
우리의 봉사도 아닙니다.
우리의 경력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자기 의를 자랑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붙드는 자리입니다.
13. “마음이 있는 예배”는 성령께서 만드신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오늘부터 진실하게 예배해야지.” 결심한다고 마음이 자동으로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에스겔 36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는 인간의 자기개조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붙드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 앞에 자신을 열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4.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다섯 가지 질문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다섯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첫째,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예배라는 행사를 수행하고 있는가?
예배의 순서를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는지 돌아보십시오.
둘째,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가?
기도가 전부 나의 필요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감사와 순종이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셋째, 나는 말씀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을 소비하고 있는가?
설교를 많이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 앞에서 내가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 하나님보다 사람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13절은 “사람의 계명”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섯째, 내 삶에 순종의 열매가 있는가?
야고보서 1장 2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 말씀은 이사야 29장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말씀을 듣지만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15. 참된 예배의 모습
그러면 마음이 있는 예배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죄가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예배자는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주님, 제 마음이 멀어졌습니다.”
“주님, 제 예배가 습관이 되었습니다.”
“주님, 제 기도가 형식이 되었습니다.”
“주님, 제가 사람의 인정을 더 구했습니다.”
“주님, 말씀보다 내 생각을 더 믿었습니다.”
“주님, 은혜를 받았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다시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회개입니다.
16.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자를 버리기 위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사야 29장의 심판은 최종적인 파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회복을 준비하십니다.
이사야 29장 후반부를 통해 봉인된 말씀이 다시 열리고, 듣지 못하던 자가 듣고, 보지 못하던 자가 보며,
겸손한 자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회복을 연결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절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폭로하심으로써 참된 예배로 초대하십니다.
영적 소경됨을 드러내심으로써 눈을 열어 주십니다. 말씀이 봉인된 상태를 보여 주심으로써 다시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십니다.
17.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게 하소서.”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지 않게 하소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착각하지 않게 하소서.”
“입술의 신앙을 마음의 신앙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형식적인 기도를 살아 있는 기도로 바꾸어 주옵소서.”
“습관적인 찬송을 진실한 찬양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말씀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게 하옵소서.”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와 순종으로 응답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입니다.
18. 결론 —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보다 우리의 마음을 찾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 29장 1절부터 14절은 우리에게 아주 무서운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종교를 심판하십니다.
성전이 있다고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자동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반드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안다고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 사람은 형식적이야.”
“저 사람은 믿음이 없어.”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먼저 나를 향해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혹시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은 세상에 있습니까?
기도는 하지만 마음은 돈에 있습니까?
찬송은 하지만 마음은 사람의 인정에 있습니까?
성경은 읽지만 마음은 내 뜻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교회는 섬기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영광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정죄만 하지 않으십니다.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말씀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첫사랑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십시오.
마지막 선언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나는 괜찮겠지”라는 신앙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신 “주님, 오늘도 제 마음을 살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가 입술만 가까운 예배가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운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기도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성경 읽기가 지식을 쌓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찬송이 입술의 노래가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날마다 붙들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예배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완벽하게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입술만 가까운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이 주님께 가까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님, 형식만 남은 예배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삶으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은혜만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와 순종으로 응답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님, 나는 괜찮다고 말하기 전에 나의 마음을 살피게 하소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시고,
닫혔던 말씀의 문을 다시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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