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완악함! 말씀을 거스른 만큼 더 긴 길을 돌아가게 됩니다. (이사야 48장)

knowledgeplatform100 2026. 8. 19. 10:10

귀담아 들어라 (이사야 48장 1–22절)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음성

어둠이 짙게 깔린 밤입니다. 한 민족이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은 불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낯선 땅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이유는 단순히 바벨론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벨론보다 강한 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노골적인 무신론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입술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닫는 것.

 

성경은 이것을 한마디로 진단합니다. 완악함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48장에서 하나님은 이 완악함을 매우 충격적인 언어로 폭로하십니다.

“네 목은 쇠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강한 표현을 사용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악한 백성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사야 48장은 심판의 장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장입니다. 폭로의 장이면서 회복의 장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반복해서 들려주는 하나의 명령이 있습니다. 

 

“들으라.”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무겁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귀담아 들어라.”

바벨론보다 먼저 무너진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사야 47장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하십니다. 바벨론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교만이었습니다. “나는 여왕이라.” 바벨론은 자신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힘과 경제력과 군사력과 문명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교만을 무너뜨리십니다.

그런데 48장으로 넘어오면 카메라의 방향이 바뀝니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 이동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죄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지적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 백성의 마음을 다루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소속이 아니라 언약적 관계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후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자랑했습니다. 성전도 있었습니다. 제사도 있었습니다. 기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그들의 외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명령이 “회개하라”가 아니라 “들으라”​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회개는 듣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신앙생활의 주변부가 아닙니다.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제1장 — 이름은 이스라엘인데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이사야 48장 1절을 천천히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그들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정체성에 충격적인 평가를 덧붙이십니다. 

“진실과 공의가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것이 이스라엘의 비극이었습니다.

 

이름은 있었지만 실체가 없었습니다.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룩한 삶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배에 참석합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보신다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입술과 마음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사야 48장의 이스라엘과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이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2장 — 하나님께서 가장 두려워하시는 것은 귀머거리가 아니라 완악한 마음이다

4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네가 완악하며 네 목은 쇠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여기서 완악함은 단순히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기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완악함은 단순한 지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 반역의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얼마나 무서운 표현입니까? 귀가 있지만 듣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도 자기 주권을 포기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거부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주권의 문제입니다.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나입니까?

제3장 — 왜 하나님은 완악한 사람에게 계속 말씀하시는가?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완악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계속 말씀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까?

 

이사야 48장의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자격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시작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그리고 11절에서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이사야 48장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이 착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충분히 회개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렸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제4장 —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기심인가

여기서 현대인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것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영광과 다릅니다.

 

인간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은 피조물이 마땅히 누려야 할 선과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날 때 인간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단순한 자기중심성이 아닙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를 자랑하게 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9절은 말씀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리고 10절은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순서가 중요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행합니다.

공로가 은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순종을 만들어냅니다.

제5장 — 하나님은 과거를 기억하게 하시고 미래를 예언하신다

3절부터 8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역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증언하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예언적 주권이 나타납니다.

우상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우상은 역사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과 끝을 아십니다.

 

이사야 46장 10절의 말씀처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것이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관찰자가 아닙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제6장 — 고레스라는 이름 뒤에 계신 하나님의 손

그리고 이사야 48장은 다시 고레스를 바라봅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환경도 사용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사람만 보면 안 됩니다. 사람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직장이 바뀌었습니까? 사람이 바뀌었습니까? 계획이 무너졌습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믿음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능력입니다.

제7장 — 하나님은 세 번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48장 후반부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세 번 부르십니다.

첫 번째입니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들으라.”

두 번째입니다. “너희는 다 모여 와서 들으라.”

세 번째입니다.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왜 세 번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반복하시는 이유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창조주라는 사실을 들으라. 역사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들으라. 구원의 계획을 들으라.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들으라.”

“돌아오라.”

“내게로 오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멀리 밀어내기 위한 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오도록 부르는 음성입니다.

제8장 — “내가 거기 있었노라”: 구원은 태초부터 계획되었다

16절은 이사야 48장에서 특별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인 49장에서 여호와의 종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48장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여주면서 끝납니다. 그러나 4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한 종이 등장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다음 장에서 참된 종을 보여줍니다.

이 종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면서도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사명을 가집니다.

 

이것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평했던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이기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자리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말씀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므로 이사야 48장의 완악한 이스라엘과 이사야 49장 이후의 종의 등장은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불순종한 백성과 완전하게 순종하는 종. 그리고 그 순종하는 종을 통해 불순종한 백성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제9장 — “내가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는 하나님”

17절은 하나님의 이름을 네 가지로 보여줍니다.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마땅히 행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명령만 내리는 분이 아닙니다. 

가르치시는 하나님입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속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비극은 18절에 나타납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랬더라면.” 성경에서 가장 슬픈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랬더라면. 네 평강이 강 같았을 것이다.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다.

제10장 — 순종하지 않은 삶에는 반드시 길이 돌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법칙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말씀을 거스른 만큼 더 긴 길을 돌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길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 포로라는 긴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징계는 버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바른 길로 돌이키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제11장 — 평강은 상황이 아니라 방향이다

18절은 “네 평강이 강 같았을 것이며.” 여기서 평강은 단순히 마음이 편안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샬롬(shalom)​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누리는 온전함과 번영과 질서와 안녕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평강은 문제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상태입니다.

바벨론에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길이 있습니다. 바다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하면 평강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면 참된 평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22절은 이사야 48장을 매우 충격적으로 마무리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20절에서 이미 구원의 노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그런데 마지막에 갑자기 말합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은 단순히 환경의 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서 나왔다고 모두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포로에서 해방되었다고 마음의 우상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인 출애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출애굽이 필요합니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출애굽입니다.

제12장 —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벨론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20절입니다.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오며.” 이것은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구속사적 흐름에서 보면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 질서의 상징으로 점점 확대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큰 바벨론”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계속해서 하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라.”

문제는 몸이 바벨론에 있느냐가 아닙니다. 마음이 바벨론에 속해 있느냐입니다.

 

교회에 와 있으면서도 마음은 세상의 가치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예배하면서도 돈이 하나님보다 중요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사람의 인정이 하나님의 인정보다 중요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실제 결정은 세상의 논리를 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은 바벨론에 있는 것입니다.

제13장 — 다시 물이 터져 나온다

21절은 놀라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시며.”

 

이것은 출애굽의 기억을 다시 불러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이제 바벨론에서 나오는 새로운 출애굽에서도 하나님께서 물을 주십니다.

왜 같은 장면을 반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너희를 구원했던 하나님이고 지금도 너희를 구원할 하나님이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포로 귀환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포로 귀환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복잡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완악함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기 때문에 우리는 더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제14장 — 완악함의 반대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마음이 부드러워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적 회개는 반드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은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여기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삶이 움직여야 합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정직하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정직해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돌아오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들은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15장 — 하나님은 완악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이사야 48장의 복음이 다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완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반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신실함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3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불순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를 회개로 부릅니다.

로마서 2장 4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니까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진짜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제16장 — 이사야 48장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다

이제 우리는 이사야 48장을 복음의 중심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완악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9장부터 하나님은 참된 종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50장에서는 종의 순종이 더욱 선명해지고, 52–53장에서는 그 종이 고난받고 죽음에 이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됩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순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해방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8장의 “들으라”는 명령은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세상은 문제가 없어야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가 있어도 나와 함께하면 평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론 :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으라”고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너는 내 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순종하지 않고 있구나.” “너는 나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정할 때는 나보다 네 계산을 더 믿는구나.” “너는 평강을 원한다. 그러나 내가 가라고 하는 길은 걷지 않는구나.” “너는 나를 찾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의 인정과 세상의 안전을 더 찾는구나.” 이것이 완악함입니다.

완악함은 항상 큰 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주 조용하게 찾아옵니다. “이번 한 번만.” “나는 이미 알고 있어.” “이 정도는 괜찮아.”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야.”

“나중에 순종하지.” 바로 그 순간 마음이 조금씩 굳어집니다. 쇠 힘줄이 됩니다. 놋 이마가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려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 선언 — 귀담아 들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사야 48장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들으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돌아오게 하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중심은 “완악한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완악한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신실함에 달려 있었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오늘 그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한 걸음 순종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이사야 48장 18절의 의미를 조금씩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 같았겠고.”

강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강도 그렇습니다. 환경이 바뀌지 않아도 평강이 흐릅니다.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평강이 흐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평강이 흐릅니다. 왜냐하면 평강의 근원이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우리에게 엄숙한 경고를 남깁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주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내 감정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내 계획입니까?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귀담아 들어라.”

그리고 그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바벨론을 떠나십시오.

우상을 버리십시오.

완악함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스도께 돌아오십시오.

그곳에 참된 평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강은 강물처럼 흐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완악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들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길을 잃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갇혔지만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다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악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지만, 완악한 상태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들으라.”

그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억누르기 위한 명령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말씀이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결국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