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문제보다 먼저 말씀하시는가? (사사기 6장)
“큰 용사여!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은 왜 기도에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 하나님께 무엇을 구합니까?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님, 병을 고쳐 주십시오.”
“하나님,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님, 직장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교회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는 대개 문제 해결을 먼저 구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6장을 보면 아주 이상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7년 동안 미디안에게 짓밟혔습니다. 농사를 지어 놓으면 빼앗겼습니다. 양과 소와 나귀까지 약탈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산과 굴로 숨어들어가야 했습니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 사사기 6:6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는데도 곧바로 군대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기드온을 먼저 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름 없는 한 선지자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늘 사사기 6장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말씀하시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사사기 6장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단순한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영혼의 방향 전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모르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뿌리를 아시기 때문에 말씀하십니다.
1. 사사기 6장의 첫 번째 메시지 — 고난의 뿌리는 환경보다 깊다
사사기의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납니다.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의 손에 넘기십니다. 이스라엘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다시 평안해지면 또 하나님을 떠납니다. 이것이 반복됩니다.
사사기 6장도 “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그런데 사사기 6장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즉시 사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사사기 6장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왜 선지자입니까?
왜 전쟁 영웅이 아닙니까?
왜 기적이 아닙니까?
왜 군대가 아닙니까?
왜 즉각적인 구원이 아닙니까?
말씀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말씀을 보면 반복해서 “내가”라는 주어가 등장합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했다.”
“내가 너희를 이 땅으로 인도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땅을 주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사사기 6:10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미디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문제가 반드시 우리의 가장 깊은 문제는 아닙니다.
돈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갈등이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직장의 어려움이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가정의 갈등이 문제의 전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지금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느냐?”가 아니라,
“너는 지금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느냐?” 이것을 물으십니다.
2. 부르짖음과 회개는 다르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은 계속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부르짖음이 반드시 회개는 아닙니다.
아파서 소리치는 것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다릅니다.
문제가 없어지기를 원하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것도 다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것만 해결해 주시면 제가 잘 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다. 내가 먼저 네 삶의 중심을 고쳐야 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전에 우리의 기도를 교정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먼저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꾸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만지십니다.
우리가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문제 해결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약한 사람을 찾아가신다
그리고 11절부터 장면이 완전히 바뀝니다. 하나님의 카메라가 이스라엘 전체에서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그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타작 장소가 아닙니다. 포도주 틀 안에서 타작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미디안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밀을 빼앗길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사사기 6장 12절입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여러분, 이 장면을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보셨을 때 인간적인 평가를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너는 용감하구나.”
“너는 준비가 잘 되었구나.”
“너는 리더십이 있구나.”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드온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이것은 단순한 칭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이루어질 미래를 향한 선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기드온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4. 큰 용사란 누구인가?
그러면 질문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큰 용사는 누구입니까?
강한 사람입니까?
능력이 많은 사람입니까?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까?
사람을 많이 모으는 사람입니까?
성공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사사기 6장이 보여주는 큰 용사는 자기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강함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기드온은 15절에서 말합니다.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기드온은 자기 약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약함을 아는 것 자체가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약합니다.”
여기에서 멈추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연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고백합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리고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왜입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강함은 자기 능력의 극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존의 극대화입니다.
5.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약함이 자격이 된다
기드온이 계속 자신의 약함을 말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함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사실 강하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사기 6장 16절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여기서 복음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없애신 후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가운데 함께하심으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모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나는 못 갑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네가 충분히 잘할 수 있다.”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패턴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가장 중요한 자격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보다 먼저 하나님 자신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자꾸 자기 능력을 계산합니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이 몇 명이나 필요하지?”
“돈은 얼마나 들지?”
“내가 경험이 있나?”
물론 계획도 필요합니다. 준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출발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가?”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는가?”
“내가 충분한가?” 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가?”
“사람이 몇 명인가?” 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에 맞는 일을 맡기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기드온 이야기의 중요한 신학적 원리입니다.
7. 그런데 기드온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드온을 너무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기드온은 의심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뒤에서는 양털을 가지고 또 확인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계속 확인합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기드온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 인내하셨습니다.
기드온이 제물을 준비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는 그것을 불로 태우셨습니다. 그제야 기드온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사기 6장 23절입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기드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름을 붙입니다. 여호와 샬롬. “여호와는 평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 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8.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여기서 “여호와 샬롬”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적 평안은 단순히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미디안은 아직 존재합니다.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은 여전히 약합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왜입니까?
상황이 평안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평안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깊은 차원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문제가 없어지면 평안할 것이다.”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문제 가운데서도 평안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기독교의 평안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평안입니다. 부활을 바라보는 평안입니다.
9.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전쟁보다 먼저 우상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이제 사사기 6장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가 나옵니다. 우리는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첫 번째 전투 명령은 미디안과 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라는 것입니다.
사사기 6장 25절부터 26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외부의 적을 무너뜨리기 전에 내부의 우상을 제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더 깊은 문제는 바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첫 번째 전쟁은 군사전쟁이 아니라 예배의 전쟁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내 환경을 바꿔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물으실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의 제단은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
10. 현대의 우상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는 바알 신상을 세워놓고 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명예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직업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역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붙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제단을 헐어라.” 그리고 기드온은 밤에 그것을 행합니다.
왜 밤입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드온의 믿음을 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두려웠지만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크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11. “여룹바알” — 하나님은 우상과 타협하지 않으신다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무너뜨리자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놀라운 말을 합니다.
사사기 6장 31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바알이 신이라면 스스로 싸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새로운 이름이 붙습니다.
여룹바알.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이름입니다.
기드온은 약한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우상의 거짓됨을 드러내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인간이 보호해야 하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켜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12. 거룩한 갈등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갈등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적인 싸움과 분열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거룩한 갈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폭력을 조장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반드시 우상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거짓과 충돌합니다.
거룩이 죄와 충돌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세상의 가치와 충돌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언제나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도 필요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필요합니다.
“이것만큼은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겠습니다.”
“이 습관은 끊겠습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이 욕심은 내려놓겠습니다.” 이런 거룩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13. 그 다음에야 성령께서 임하신다
사사기 6장 33절 이후 미디안이 다시 모입니다. 이제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사기 6장 34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여기서 중요한 순서를 보십시오.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죄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약함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상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기드온에게 임하십니다.
말씀 → 회개 → 순종 → 성령의 능력 → 사명
이 흐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단순히 “내가 원하는 일을 성공시키는 힘”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말씀을 기록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단순히 감정이 뜨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삶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14. 양털의 표징 — 믿음인가, 연약함인가?
사사기 6장 마지막 부분에서 기드온은 또 표징을 구합니다. 양털을 놓고 하나님께 확인합니다.
첫 번째에는 양털에만 이슬이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두 번째에는 반대로 양털은 마르고 땅에만 이슬이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이 장면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양털을 깔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일반적인 신앙 공식으로 만들면 위험합니다.
성경은 기드온의 양털 사건을 기록하지만, 그것을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표준적인 방법으로 명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드온의 반복적인 표징 요구는 그의 믿음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특별한 표징을 보여주십시오.” 보다 먼저 “하나님, 이미 주신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이 이미 분명히 말하는 것이라면 표징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정직하라고 하셨다면 정직해야 합니다.
거룩하라고 하셨다면 거룩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15. 사사기 6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열린다
여기서 우리는 사사기 6장을 단순한 “기드온처럼 용감해집시다”라는 자기계발식 메시지로 끝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은 완전한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도 약했습니다.
기드온도 의심했습니다.
기드온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사사기 전체를 보면 사사들은 결국 이스라엘의 근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사기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반복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므로 사사기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기드온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기드온보다 더 위대한 왕이 필요하다.”
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사들은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압제를 무너뜨렸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기드온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주어진 약속,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충만하게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마태복음 28:20
구약에서 기드온에게 주셨던 “함께하심”의 약속이 신약에서는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16. 그러므로 “큰 용사”의 진짜 의미
이제 오늘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큰 용사란 누구입니까?
큰 용사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큰 용사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큰 용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큰 용사는 자기 능력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큰 용사는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큰 용사는 “나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7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질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보배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질그릇입니다.
깨지기 쉽습니다.
때로는 두렵습니다.
때로는 의심합니다.
때로는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17.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까?
가정입니까?
자녀입니까?
직장입니까?
경제입니까?
건강입니까?
교회입니까?
미래입니까?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오늘 사사기 6장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말씀을 들으라.”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 이 문제를 통해 제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라고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저 사람을 바꿔 주세요.” 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 제 안에서 무엇을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교회를 부흥시켜 주세요.” 라고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 교회가 먼저 버려야 할 우상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질문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오늘 순종해야 할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18. 오늘 우리의 포도주 틀은 무엇인가?
기드온은 포도주 틀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의 두려움이 만든 공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포도주 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상처 때문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실패 때문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안 돼.”
“나는 부족해.”
“나는 나이가 많아.”
“나는 경험이 없어.”
“나는 이미 실패했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없어.”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큰 용사여.”
왜입니까? 네가 이미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현재가 여러분의 최종 정체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여러분의 최종 정체성입니다.
기드온이 자기 자신을 보았을 때는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보셨을 때는 “큰 용사”였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실패한 사람입니까?
부족한 사람입니까?
무너진 사람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시선 앞에 다시 서십시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19. 오늘부터 기억할 사사기 6장의 다섯 문장
오늘 말씀을 다섯 문장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문제보다 먼저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때때로 구원보다 먼저 진단하십니다.
둘째,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나 약함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셋째,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붙드십시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자격입니다.
넷째, 삶의 우상을 제거하십시오.
미디안과 싸우기 전에 바알의 제단부터 무너뜨려야 합니다.
다섯째, 성령의 능력으로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힘만으로 감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클로징 — 하나님은 오늘도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오신다
사사기 6장은 어두운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무너졌습니다. 미디안은 강했습니다. 기드온은 약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중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포도주 틀 안에 숨어 있는 한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용사여.”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기도하면서도 의심하고 있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많은 사람.
하나님께서 바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그 약속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보다 하나님을 크게 보십시오.
자신의 약함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보십시오.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크게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 보여주시는 한 걸음을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강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함을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포도주 틀에서 나오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바알 제단을 무너뜨리십시오.
오늘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것이 큰 용사의 시작입니다.
영성 깊은 마침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사기 6장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는 듣지 못했던 때가 많았습니다.
환경은 바꾸어 달라고 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바꾸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람은 변화시켜 달라고 하면서 우리 안의 교만과 욕심과 두려움은 붙들고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스라엘처럼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면서도 진정한 회개로 돌아가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먼저 말씀하여 주옵소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말씀을 듣게 하시고, 응답을 받기 전에 회개하게 하시고, 사명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안의 우상을 무너뜨리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기드온처럼 약합니다. 두렵습니다. 의심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도 다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 크게 보게 하옵소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신 그 말씀을 붙들게 하옵소서.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의지하게 하시고,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게 하시며,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보여주옵소서.
돈을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않게 하시고, 사람의 인정을 하나님보다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며,
성공을 하나님보다 높이지 않게 하시고, 자녀와 가족과 직업과 사역조차도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안의 모든 우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게 하옵소서.
주님,
기드온이 밤에 두려움 가운데서도 바알의 제단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우리도 두려워하면서 순종하게 하옵소서.
두렵지 않아서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크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도 우리가 포도주 틀 안에 숨어 있다면 그곳으로 찾아와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큰 용사여.” 우리의 귀에 그 음성을 들려주옵소서.
그리고 이어서 들려주시는 그 한마디를 평생 붙들게 하옵소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주님,
우리가 약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만은 결코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두려움이 평안으로 바뀌게 하시고, 우리의 포도주 틀이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하시며,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에도 기드온이 세웠던 그 제단의 이름처럼 “여호와 샬롬”의 고백이 있게 하옵소서.
환경이 평안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평안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문제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문제 가운데서도 주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평안히 걸어가게 하옵소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선을 기드온에게 머물게 하지 마시고 기드온보다 크신 참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하게 하옵소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며,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우리의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가 고백합니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와 함께하십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충분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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