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능력을 낭비한 사람, 삼손 (사사기 16장)
정체성을 잃으면 강한 사람도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사사기 16장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삼손입니다.
삼손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강한 사람입니다.
힘이 센 사람입니다.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 사람입니다.
성문을 뽑아 어깨에 메고 산으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삼손을 단순히 “힘센 사람”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무서운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 능력을 받은 사람이 그 능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삼손은 강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체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사람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과 자기 복수를 위해 하나님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첨부하신 원고가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삼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으로 온전히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 16장은 삼손의 힘이 사라지는 이야기라기보다 삼손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살고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시간과 재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나 자신을 섬기고 있는가?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낭비한 사람, 삼손”
그리고 오늘 말씀의 결론은 매우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 삼손의 문제는 힘이 아니라 방향이었습니다
사사기 1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여기서 삼손의 삶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보고.”
삼손은 계속해서 눈에 이끌립니다.
사사기 14장에서도 삼손은 부모에게 말합니다.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데려다가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삼손의 삶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보고, 원하고, 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눈이 앞섭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망이 앞섭니다.
하나님의 언약보다 자신의 감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삼손의 문제는 단순히 “여자를 좋아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삼손의 삶에서 하나님보다 자기 욕망이 더 큰 권위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최근 사사기 16장에 대한 연구에서도 들릴라 이야기를 단순히 “악한 이방 여인에게 빠진 삼손”이라는 틀로만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들릴라의 민족적 정체성 자체는 본문에서 명시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삼손이 인간적인 사랑과 욕망에 눈이 멀어 여호와와의 관계를 훼손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빠져 있는가?”
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무엇에 사로잡혀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고 있는가?”
입니다.
돈일 수 있습니다.
성공일 수 있습니다.
자녀일 수 있습니다.
직장일 수 있습니다.
명예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일 수 있습니다.
유튜브의 조회수와 좋아요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사역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보다 좋은 것을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상이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좋은 것이 바로 우상이 됩니다.
2. 삼손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사사기 13장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구별되었습니다.
사사기 13장 5절입니다.
“그는 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주신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삼손은 우연히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지만, 자신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는 잊었습니다.
이것이 영적 타락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분 선언이 아닙니다.
정체성은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 몸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시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재능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직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가정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영향력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 질문은
“내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
입니다.
삼손은 힘이 없어서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다.
힘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훨씬 위험합니다.
약한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강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돈이 있으면 하나님 없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면 하나님 없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많으면 하나님 없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많으면 하나님 없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역의 열매가 많으면 하나님 없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다릅니다.
3. 삼손의 가장 무서운 순간은 힘을 잃은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떠나신 것을 몰랐던 순간입니다
사사기 16장 20절은 삼손 이야기에서 가장 두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가장 무서운 말은
“여호와께서 떠나셨다”
만이 아닙니다.
“깨닫지 못하였더라.”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는데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영적 감각이 죽은 것입니다.
예배는 드리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읽는데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하나님보다 내 뜻을 관철하려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마음은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역은 하는데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상태는 죄를 짓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삼손은 “전과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과 같이.”
예전에도 이겼습니다.
예전에도 힘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줄을 끊었습니다.
예전에도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전과 같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과거의 은혜를 현재의 능력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어제의 기도가 오늘의 영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어제의 은혜가 오늘의 순종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어제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다고 오늘도 자동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요한복음 15:4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한복음 15:5
삼손의 비극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면서도 자신이 여전히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4. 삼손에게 들릴라는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사기 16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본문은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언약적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첨부 원고가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에서 분리된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중요한 성경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랑은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결국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에서 이웃 사랑이 나옵니다.
그런데 삼손은 순서를 뒤집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욕망을 앞세웠습니다.
그 결과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우상화입니다.
5. 중독은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택입니다
삼손은 들릴라가 세 번이나 자신을 결박하려 했는데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거짓말.
두 번째 거짓말.
세 번째 거짓말.
그리고 결국 네 번째에 진실을 말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성경이 보여주는 삼손의 상태는 일종의 영적 중독입니다.
첨부 원고에서도 이 부분을 “중독”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며, 사람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중독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것을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나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선택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나를 선택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핸드폰을 봅니다.
나중에는 핸드폰이 나를 부릅니다.
처음에는 내가 돈을 관리합니다.
나중에는 돈이 나를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나중에는 사람들의 평가가 나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욕망을 사용합니다.
나중에는 욕망이 나를 사용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로마서 6:16
그러므로 죄의 문제는 단순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죄는 결국 사람을 종으로 만듭니다.
삼손은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욕망의 노예였습니다.
6. 삼손이 머리카락을 잃은 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여기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중요한 신학적 사실이 있습니다.
삼손의 힘이 머리카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머리카락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삼손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능력이었습니다.
사사기 16장 17절에서 삼손은 자신의 머리카락과 나실인 정체성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능력의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된 나실인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였습니다.
관련 연구에서도 머리카락 자체가 힘의 원천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삼손의 봉헌과 연결된 표지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머리를 잘렸다는 것은 단순한 미용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끝까지 지키지 않은 그의 영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성경은 결정적인 문장을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본문은 “힘이 떠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떠나셨다”고 말합니다.
삼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관계였습니다.
은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였습니다.
7. 눈이 밝았던 삼손이 결국 눈을 잃었습니다
삼손 이야기에는 매우 놀라운 문학적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삼손은 계속해서 여자를 “보았습니다.”
눈으로 선택했습니다.
눈으로 욕망했습니다.
눈으로 자신의 길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두 눈을 뽑았습니다.
사사기 16장 21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두 눈을 빼고 그를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삼손은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적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육체의 눈까지 잃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서운 경고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계속 바라보느냐가 결국 우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은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성도의 삶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을 계속 바라보면 세상을 닮습니다.
욕망을 계속 바라보면 욕망을 닮습니다.
사람의 평가를 계속 바라보면 사람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를 닮아갑니다.
8. 그런데 사사기 16장에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사사기 16장 22절입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이 한 문장은 사사기 16장에서 복음의 작은 빛처럼 보입니다.
삼손은 실패했습니다.
무너졌습니다.
눈을 잃었습니다.
자유를 잃었습니다.
명예를 잃었습니다.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이것은 머리카락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한 사람에게도 다시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것을 값싼 회복의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삼손의 죄의 결과는 실제적이었습니다.
눈을 잃었습니다.
자유를 잃었습니다.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실패가 하나님의 주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실패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큽니다.
우리가 넘어졌다고 하나님의 계획까지 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기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 디모데후서 2:13
삼손의 이야기는 인간의 신실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9. 삼손의 마지막 기도는 믿음인가, 복수인가?
사사기 16장 28절을 보십시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삼손은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를 자세히 보면 여전히 자기 중심성이 남아 있습니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원수를 갚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이것은 믿음의 기도입니까?
완전한 회개의 기도입니까?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도 있지만, 개인적인 복수의 욕망도 함께 섞여 있습니다.
이것이 삼손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은혜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히브리서 11장은 삼손을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삼손이 왜 여기 들어갔을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입니다.
히브리서가 삼손의 모든 삶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의 삶에는 분명히 심각한 죄와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완전한 사람의 믿음조차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놀라운 원리를 발견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완전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삼손은 완전한 믿음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실패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이면서 동시에 큰 경고입니다.
위로는,
“내가 실패했다고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시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경고는,
“그렇다고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10. 삼손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얼마나 다른가?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삼손의 마지막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단순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첨부 원고에서도 삼손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모형으로 보는 해석에는 주의가 필요하며, 오히려 두 인물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죽으면서 원수를 갚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으면서 원수를 용서하셨습니다.
삼손은 자기 눈을 뺀 사람에게 복수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삼손의 죽음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다.
삼손은 자기 사명을 자주 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삼손은 자기 욕망에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차이입니다.
삼손은 자기 뜻을 위해 힘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삼손은 힘을 가지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
삼손은 가장 강한 사사였지만 가장 비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 십자가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우니라.”
십자가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패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승리였습니다.
삼손의 힘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삼손은 자기 생명을 잃으면서 원수를 무너뜨렸지만,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1. 그러므로 삼손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말아야지”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쉽게 삼손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어리석을 수 있을까?”
“왜 들릴라에게 계속 속았을까?”
“왜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낭비했을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삼손을 비난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삼손을 발견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능력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는 말을 잘합니다.
누군가는 가르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업의 능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음악의 재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람을 섬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리더십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지혜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건강과 시간이라는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나만을 위해서입니까?
내 가족만을 위해서입니까?
내 성공만을 위해서입니까?
내 명예만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첨부 원고가 마지막에 강조하는 핵심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능력과 재능을 의도적으로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하나님의 능력을 낭비하지 않는 삶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성공보다 관계가 먼저입니다.
사역보다 관계가 먼저입니다.
돈보다 관계가 먼저입니다.
건강보다 관계가 먼저입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기 전에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둘째,
무엇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살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무엇 없이는 불안한가?”
“나는 무엇을 얻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무엇을 잃으면 내 인생이 끝났다고 느끼는가?”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 있다면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반복되는 죄의 패턴을 발견해야 합니다.
죄는 갑자기 폭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복되는 작은 선택에서 자랍니다.
어떤 장소에서 넘어집니까?
어떤 시간에 넘어집니까?
어떤 감정일 때 넘어집니까?
외로울 때입니까?
스트레스를 받을 때입니까?
칭찬받고 싶을 때입니까?
화가 날 때입니까?
그 패턴을 발견해야 합니다.
넷째,
혼자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고립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말합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숨겨진 죄는 힘을 얻습니다.
빛 가운데 드러난 죄는 약해집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삼손과 정반대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삼손은 능력을 가지고 자기 욕망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것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게 하소서.”
13. 오늘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삼손은 눈으로 시작해서 눈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히브리서 12장 2절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을 바라보던 눈이
하나님의 인정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돈을 바라보던 눈이
하나님의 공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문제를 바라보던 눈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능력을 바라보던 눈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강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14. 사랑하는 여러분, 삼손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 16장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읽는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 가운데
“나는 너무 많이 실패했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삼손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도 다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혹시
“나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너무 많이 낭비했습니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돌아오십시오.
회복은 오늘 시작할 수 있습니다.
혹시
“나는 무엇인가에 너무 깊이 빠져 있습니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혼자 숨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오십시오.
혹시
“나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고 느끼십니까?
그 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은혜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결론 — 강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삼손은 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을 때 무너졌습니다.
삼손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삼손은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거룩하게 사는 삶으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마지막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마지막 기도까지도 당신의 섭리 가운데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손에게서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삼손의 반대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삼손은 자기 욕망을 위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삼손은 자기 원수를 갚기 위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도 자기 중심적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삼손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능력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답합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결단은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
제가 가진 것을 낭비하지 않게 하소서.
제 시간도,
제 건강도,
제 재능도,
제 돈도,
제 경험도,
제 영향력도,
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제가 강한 사람이 되기보다 주님께 붙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강함은 결국 약함이지만,
하나님께 붙어 있는 약함은 오히려 강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저를 강하게 해주십시오.”
에서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더 깊은 기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삼손의 힘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의 성공보다 중요한 것도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능력보다 중요한 것도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사역보다 중요한 것도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인생보다 중요한 것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거두고 예수를 바라봅시다.
나를 위해 사는 삶을 내려놓고 이웃을 위해 살아갑시다.
하나님께 받은 능력을 나의 장난감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합시다.
그리고 넘어졌다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갑시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순종도,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삼손처럼 능력을 낭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사사기 16장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깊은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아멘.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는데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했던 우리의 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받은 능력을
나 자신을 위해 사용했던 우리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하나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성령께서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돈에 중독되지 않게 하시고,
사람의 인정에 중독되지 않게 하시고,
쾌락에 중독되지 않게 하시고,
성공에 중독되지 않게 하시고,
내 뜻에 중독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지 보게 하옵소서.
삼손처럼
“여호와께서 떠나신 줄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매일 말씀 앞에 서게 하시며
매일 기도하게 하시고
매일 성령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건강과 경험을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게 하옵소서.
삼손의 삶을 통해 경고받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우리의 길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혹시 넘어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일으켜 주시고,
혹시 죄에 묶여 있는 사람이 있다면
복음의 능력으로 자유하게 하시고,
혹시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이 있다면
다시 아버지께 돌아오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지막이
삼손처럼 낭비된 인생의 끝이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강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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