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가시나무 왕 (사사기 9장)

knowledgeplatform100 2026. 8. 24. 10:22

하나님이 없는 야망은 어떻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가 (사사기 9장)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과 하나님의 주권

 

여러분, 사람은 무엇 때문에 무너질까요? 외부의 적 때문일까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일까요? 환경이 나빠서일까요?

물론 그런 것들도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훨씬 더 무서운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가장 깊이 무너뜨리는 것은 때로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라난 욕망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이 서로를 죽이고, 동역자가 서로를 배신하고, 공동체가 서로를 이용하고, 지도자가 공동체를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할 때, 그 공동체는 외부의 공격이 없어도 스스로 무너집니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사사기 9장입니다. 사사기 9장에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위대한 사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왕이 되려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아비멜렉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설득합니다. 친족을 이용합니다. 돈을 사용합니다. 불량배를 고용합니다. 자기 형제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그렇게 왕이 된 것이 진짜 성공인가?”

 

사사기 9장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권력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칼이 됩니다. 

 

그리고 사사기 9장은 우리에게 아주 무서운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내 안에도 아비멜렉이 있지 않은가?”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없는 야망은 어떻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가?”

 

1. 사사기 9장은 사사기 8장의 결과입니다

사사기 9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사사기 8장을 보아야 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은혜로 미디안을 물리쳤습니다. 이스라엘은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승리 이후에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말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그때 기드온은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이것은 정확한 신앙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왕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아내를 두고, 아들을 많이 낳고, 자신을 위하여 금으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사사기 8장 27절은 그 에봇이 결국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8장 마지막에는 이런 비극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바알들을 따라가고, 여룹바알 곧 기드온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죄는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섬겼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끝까지 왕으로 남아 있었는가입니다.

 

기드온은 입으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말했지만, 그의 삶에는 인간적인 왕권의 그림자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아비멜렉에게 이어집니다.

 

우리는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타협한 작은 것이 

내 자녀에게는 거대한 영적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나를 높인 것이 다음 세대에게는 하나님 없는 야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죄의 가장 무서운 특징은 현재의 죄가 미래의 구조가 된다는 것입니다.

 

2. 아비멜렉의 가장 큰 문제는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사사기 9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는 세겜으로 갑니다.

왜 갑니까? 

왕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에게 아주 교묘한 질문을 합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좋겠느냐,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좋겠느냐?”

겉으로 보면 상당히 합리적인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선동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칠십 명보다 한 명이 낫지 않습니까?”

그리고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의 골육임을 기억하라.” 즉, “나는 너희 편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비멜렉의 정치가 시작됩니다. 신앙이 아니라 혈연으로 사람을 묶습니다.

진리가 아니라 이해관계로 사람을 묶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편”이라는 논리로 사람을 묶습니다.

 

결국 세겜 사람들은 그에게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가져옵니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돌 위에서 죽입니다.

 

사사기 9장 5절의 장면은 성경에서 가장 참혹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왕이 되기 위해 형제를 죽였습니다.

 

6절에서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웁니다.

본문은 세겜의 정치적 왕권 형성이 바알브릿 신전의 자금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아비멜렉의 죄는 왕이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왕권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왕이 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 없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직분을 통해 내가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회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를 통해 내가 인정받으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장로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장로라는 직분을 통해 나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모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녀를 통해 나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순간, 사역은 야망으로 변합니다.

 

3. 하나님 없는 리더십은 공동체를 살리지 않고 이용합니다

아비멜렉의 리더십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을 섬기지 않습니다. 사람을 이용합니다. 친척을 이용합니다. 세겜 사람들을 이용합니다.

돈을 이용합니다. 불량배를 이용합니다. 형제들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왕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리더십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도구가 됩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 사람이 내 편인가?” “이 사람이 나를 지지하는가?” “이 사람이 내 영향력을 키워주는가?”

이것이 인간적인 정치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논리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그리고 주님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왕이신 분이 종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기 위해 형제를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두 왕권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아비멜렉의 왕권은 타인의 피 위에 세워졌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자신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아비멜렉은 “너희가 나를 위해 죽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해 죽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 리더십은 권력의 확대가 아니라 십자가의 자기비움입니다.

 

4. 요담은 산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요담입니다. 기드온의 막내아들입니다. 그는 형제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담은 군대를 모으지 않습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처럼 정치적 세력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심산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왜 산으로 올라갑니까?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요담에게는 군대가 없습니다. 왕좌가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정치적 조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힘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담은 우화를 말합니다. 

 

나무들이 왕을 세우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감람나무에게 갑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주십시오.”

감람나무가 대답합니다. “내가 어찌 나의 기름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다음은 무화과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도 거절합니다. 포도나무도 거절합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열매를 맺는 사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제공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제공합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주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왕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열매 맺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요담의 우화가 던지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5. 열매 없는 사람일수록 왕이 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겠다는 나무가 하나 나타납니다.

가시나무입니다. 가시나무는 즉시 말합니다.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 여기에는 엄청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큰 그늘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시가 사람을 찌릅니다. 더 무서운 것은 불이 붙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나무가 말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요담의 우화에서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을 풍자합니다.

이 우화의 핵심은 왕권 그 자체보다 잘못된 욕망과 상호 파괴적인 권력관계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열매를 맺는 사람은 자리를 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사람은 자리를 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리 자체가 자기 존재를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열매를 원하는가?” 아니면 “나는 자리를 원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가?” “나는 교회를 섬기고 싶은가?”

 

아니면 “교회 안에서 나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은가?”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역과 야망은 겉모습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열심히 합니다.

둘 다 말합니다.

둘 다 움직입니다.

둘 다 사람을 만납니다.

둘 다 조직을 만듭니다. 

 

그러나 뿌리가 다릅니다.

사역은 하나님을 높입니다.

야망은 나를 높입니다.

사역은 사람을 살립니다.

야망은 사람을 이용합니다.

사역은 열매를 남깁니다.

야망은 상처를 남깁니다.

 

6. 사사기 9장은 “내가 아비멜렉은 아닌가?”를 묻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면 안 됩니다. “아비멜렉 같은 사람이 우리 교회에 있다.”

“저 사람은 정치적이다.” “저 사람은 사람을 이용한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말씀의 칼끝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먼저 나를 향합니다. “너는 어떠한가?” 우리도 아비멜렉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을 끌어들입니다. 내 편을 만듭니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을 멀리합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하면 마음이 상합니다. 내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면 섭섭합니다.

내 이름이 빠지면 화가 납니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의 영광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영적 자기기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기독교의 위대함은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질 수 있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영적 권위는 사람을 누르는 힘이 아니라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힘입니다.

 

7.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지만 악의 주인이 되지 않으십니다

사사기 9장 23절은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신학적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만드셨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승인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자신들의 악을 따라가도록 내버려 두시면서 그 악조차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서 발견됩니다. 로마서 1장 24절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이것이 무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막아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붙들어주시는데도 계속 죄를 선택하면,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선택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그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죄의 가장 무서운 심판은 고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8.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를 이용하다가 서로를 파괴합니다

사사기 9장 22절 이후를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비멜렉이 3년 동안 통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십니다.

 

왜입니까?

24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아들 칠십 명을 죽인 피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악에 가담했던 세겜 사람들에게도 책임을 물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끼리 손을 잡는다고 공동체가 안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목적을 위해 연합한 사람들은 그 목적이 끝나면 서로의 적이 됩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을 이용했습니다. 세겜 사람들도 아비멜렉을 이용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바뀌자 서로를 공격합니다.

 

가알이 등장합니다. 세겜 사람들이 가알을 중심으로 아비멜렉에게 반역합니다.

그런데 그 반역조차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권력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가알은 사실상 “내가 왕이라면 더 잘했을 것이다.” 라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의 부하 스불은 다시 아비멜렉에게 붙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이용합니다.

 

결국 세겜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죽고, 성읍에는 소금이 뿌려집니다. 

사사기 9장 45절의 소금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도시의 황폐와 저주를 상징하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정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서로를 파괴합니다.” 

 

9. 하나님 없는 공동체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욕망 때문에 무너집니다

사사기 9장의 독특한 점은 이것입니다. 미디안이 없습니다. 블레셋이 없습니다. 가나안 군대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외부의 대적이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적이 항상 밖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 “내가 옳다.” “내가 더 인정받아야 한다.”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라는 마음이 커지면, 교회는 내부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서로 이기려고 하면 가정은 집이 있어도 공동체가 아닙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협력하지 않고 서로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면 조직은 겉으로 커져도 내부에서는 썩어갑니다.

 

그리고 교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복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정치가 들어오기 쉽습니다.

여기서 정치라는 말은 사회의 정치제도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공적 책임과 정치적 영역 자체를 죄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보다 인간의 이해관계가 우선되는 방식입니다.

교회가 복음보다 사람의 세력에 의해 움직일 때, 직분이 섬김보다 영향력의 수단이 될 때,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에 대한 무대가 될 때, 교회 안에도 아비멜렉의 그림자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10. 그런데 하나님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사사기 9장의 가장 위대한 신학적 메시지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서로 정치합니다. 아비멜렉이 움직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가알이 움직입니다. 스불이 움직입니다.

군대가 움직입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의 움직임 뒤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사기 9장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자기 손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역사의 최종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혼란을 볼 때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둘째,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은 충성입니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11. 요담은 결과를 통제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요담은 선포하고 도망갑니다. 그는 왕좌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복수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세력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고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전체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맡겨진 자리에서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의 미래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자녀에게 복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맡은 직분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의와 사랑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결과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12.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사사기 9장 마지막은 놀라운 결론으로 끝납니다. 57절입니다.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기에서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갚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악행도, 세겜 사람들의 악행도,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죄를 심으면 죄의 열매를 거둡니다.

 

교만을 심으면 파괴를 거둡니다.

미움을 심으면 관계의 죽음을 거둡니다.

거짓을 심으면 신뢰의 붕괴를 거둡니다.

그러나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용서를 심으면 관계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복음을 심으면 생명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13. 아비멜렉의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인정 욕구를 폭로합니다

아비멜렉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는 데베스에 가서 전쟁을 합니다. 사람들이 망대로 피합니다. 

아비멜렉은 또 불을 지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맷돌을 던집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의 두개골이 깨집니다.

죽어가면서 아비멜렉이 무엇을 합니까? 자신이 여인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사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자존심이었습니다. 평생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살았던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합니다.

 

이것이 너무나 비극적입니다.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은 그가 죽자 각자 자기 처소로 돌아갑니다. 사사기 9장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아주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죽은 후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보시는가?”

 

14.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정이 삶의 중심이 되면 문제가 됩니다.

사람의 칭찬이 나의 기쁨이 되고, 사람의 비판이 나의 절망이 되고, 사람이 나를 인정하면 행복하고,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면, 나는 사람의 종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말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은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라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신앙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알려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공로가 드러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중심에 서는 것보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15. 사사기 9장과 복음

여기에서 우리는 사사기 9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해야 합니다.

사사기의 문제는 단순히 “나쁜 사람 아비멜렉처럼 살지 말자.” 가 아닙니다. 그렇게만 설교하면 도덕주의가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더 깊은 문제를 보여줍니다. 인간에게는 참된 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잘못된 왕을 선택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계속해서 죽음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경은 우리를 참된 왕에게 인도합니다.

그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기 위해 형제를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왕좌를 얻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왕좌에 오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의 통치는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옵니다.

아비멜렉은 사람을 자기 아래에 두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아비멜렉은 “나를 높여라.” 라고 말하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시는 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9절부터 11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16.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비멜렉의 왕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끊임없이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 내가 옳고 싶습니다. 직장에서 내가 인정받고 싶습니다. 교회에서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한 일을 기억해 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희생한 것을 인정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정말 네가 왕이어야 하느냐?” 아닙니다.

우리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좌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내 자존심의 왕좌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내 욕망의 왕좌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내 인정 욕구의 왕좌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내 통제 욕구의 왕좌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17. 사사기 9장이 주는 다섯 가지 영적 점검

이제 오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보다 나를 앞세우고 있지 않은가?

아비멜렉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의 계획,

나의 성공,

나의 명예,

나의 영향력,

나의 자녀,

나의 사역,

나의 교회,

나의 직분이 하나님보다 커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둘째, 나는 사람을 섬기고 있는가, 이용하고 있는가?

사람을 볼 때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를 물어야 합니다.

 

셋째, 나는 열매보다 자리를 원하는가?

감람나무처럼 “내가 가진 것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리보다 사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직분보다 충성을 선택해야 합니다. 인정보다 열매를 선택해야 합니다.

 

넷째, 나는 요담처럼 내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말해야 할 때 말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섬겨야 할 때 섬겨야 합니다.

용서해야 할 때 용서해야 합니다. 잘못을 발견했을 때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충성은 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다섯째,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악이 커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분노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복수하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충성하십시오

반면 가시나무는 왕이 되기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나무들을 자기 그늘 아래로 부릅니다.

이는 아비멜렉의 무익하고 파괴적인 통치를 풍자하며, 잘못된 권력욕이 공동체를 불태울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19. 결론 — 가시나무의 왕좌를 내려오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사사기 9장은 단순히 먼 옛날 한 사람의 실패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아비멜렉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도 왕이 되고 싶지 않은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지 않은가?

사람들의 중심에 서고 싶지 않은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지 않은가?

내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은가?

 

그때 복음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왕이 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왕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왕좌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내 자존심의 왕좌에서 내려오십시오.

내 욕망의 왕좌에서 내려오십시오.

내 인정 욕구의 왕좌에서 내려오십시오.

내 통제의 왕좌에서 내려오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가정이 달라집니다.

교회가 달라집니다.

관계가 달라집니다.

일터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사기 9장의 비극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왕이 되려고 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기쁨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종이 되셨다는 데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셨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왕권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내가 왕이 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내 삶의 왕좌를 내려놓겠습니다.”

“주님, 내가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섬기게 하소서.”

“주님, 자리를 탐하지 않고 열매를 맺게 하소서.”

“주님,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게 하소서.”

“주님, 세상의 정치적 힘보다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공의를 이루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요담처럼 말씀을 붙들고, 감람나무처럼 열매를 맺으며, 가시나무처럼 왕좌를 탐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십시오.

 

[마지막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사기 9장의 아비멜렉을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도 하나님보다 나를 높이려는 마음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으며, 내 뜻대로 사람과 상황을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주님, 우리 안의 아비멜렉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의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왕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감람나무와 같은 마음을 주옵소서.

자리를 탐하지 않고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인정을 탐하지 않고 충성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충실하게 감당하되,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녀에게도 우리의 욕망을 물려주지 않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믿음을 물려주게 하옵소서.

 

우리의 사역을 통해 우리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가시나무처럼 다른 사람을 찌르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고백했던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입술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