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신앙으로 (사사기 11장)
입다의 성공과 비극,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
사사기 11장은 성경에서 가장 불편하고, 가장 충격적이며, 동시에 가장 깊은 영적 질문을 던지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의 승리가 행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승리 뒤에는 눈물이 있고, 그의 서원 뒤에는 비극이 있으며, 그의 신앙적 언어 뒤에는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가?”
겉으로는 기도하고, 예배하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관철하려는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11장은 바로 그 모습을 입다를 통해 폭로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이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내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오늘 말씀 앞에서 점검하기 원합니다.
1. 버림받은 입다 —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에 매이지 않으신다
사사기 1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성경은 입다를 처음 소개하면서 그의 능력보다 먼저 그의 출생 배경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출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그의 이복형제들이 그를 쫓아냅니다.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입다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차별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결국 입다는 돕 땅으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그곳에 “잡류”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공동체에서 밀려났고, 그 공동체 바깥에서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하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정해 놓은 자격 조건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나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자격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모세는 말이 둔했습니다. 다윗은 형제들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은 스스로를 가장 약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격을 넘어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입다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입다를 사용하셨다는 사실과 입다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승인하셨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사기 11장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셨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함께 붙드는 성경적 균형입니다.
2. 위기가 오자 하나님이 아니라 입다를 찾았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그러자 길르앗 장로들이 누구를 찾아갑니까?
자기들이 쫓아냈던 입다를 찾아갑니다.
사사기 11장 6절입니다.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평소에는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오자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입다는 그들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협상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장로들은 하나님께 먼저 묻지 않습니다. 입다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필요를 계산합니다.
“우리는 네 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의 지도자가 되겠다.” 결국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거래가 중심이 됩니다.
본문의 이 부분은 오늘 교회에도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필요할 때만 찾습니까?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병이 생기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다시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이것이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 결정하는 신앙입니다.
기도는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세요.”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통보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3. 입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사사기 11장 12절부터 28절까지 보면 입다는 암몬 왕과 외교적 협상을 합니다.
놀랍게도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고, 에돔과 모압을 침범하지 않았으며, 아모리 왕 시혼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셨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특히 23절에서 입다는 중요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그리고 27절에서는 말합니다.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얼마나 신앙적인 말입니까? 입다는 성경의 역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도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인 문장을 잘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친밀한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잘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성경대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입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포도나무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나무의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신앙은 정보가 아닙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신앙은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완성됩니다.
4.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 성령의 임재와 인간의 책임
이제 사사기 11장 29절에 놀라운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서원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것은 사사기 11장의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 죄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령이 입다에게 임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입다를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입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성령께서 직접 지시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을 사용하시면서도 그 인간의 죄를 승인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사용하셨지만 앗수르의 교만을 심판하셨습니다. 바벨론을 사용하셨지만 바벨론 역시 심판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통해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유다의 배신이 의로운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용하셨다”와 “하나님이 승인하셨다”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5. 입다의 서원 — 기도는 하나님을 조종하는 기술이 아니다
입다의 서원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하나님, 승리를 주시면 제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거래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해주시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번 시험에 합격시켜 주시면 헌금하겠습니다.”
“하나님, 사업이 잘되게 해주시면 봉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평생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서원과 헌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서원의 엄중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한 거래로서의 서원은 성경적 신앙이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 뜻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번째 방향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십시오.” 에서 “하나님, 제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로 변화됩니다.
6. 가장 무서운 신앙 —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신앙
입다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 제사를 명백하게 금지합니다.
레위기 18장 21절은 자녀를 몰렉에게 넘기는 행위를 금합니다.
신명기 12장 31절도 이방 민족의 자녀 희생을 명백하게 가증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입다의 서원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사기 시대의 영적 혼란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특히 사사기 전체의 중심 문장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입다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결국 자기 소견대로 행동합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반드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 자기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자기 욕망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결정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가장 교묘한 형태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지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내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만드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7. 입다의 딸 —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제 사사기 11장의 가장 어려운 장면에 도착합니다.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누가 가장 먼저 집에서 나옵니까? 자기의 외동딸입니다.
사사기 11장 34절은 그녀가 입다의 “유일한 자녀”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녀가 소고와 춤을 추며 아버지를 맞이합니다. 입다는 자기 옷을 찢습니다.
“슬프도소이다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그리고 자신의 서원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에 대해서 기독교 역사와 현대 성서학에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논의되어 왔습니다.
첫째는 입다가 실제로 딸을 번제로 바쳤다는 해석입니다.
둘째는 딸을 죽인 것이 아니라 평생 하나님께 봉헌하여 결혼과 출산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해석입니다.
후자의 해석은 특히 37절과 38절에서 딸이 자신의 “죽음”보다 “처녀 됨”을 슬퍼한다는 표현과
39절의 “그가 남자를 알지 못하고”라는 설명에 주목합니다. 일부 복음주의 해설도 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가장 자연스러운 문맥과 “번제”라는 표현, 그리고 사사기의 하강 구조를 종합하면 실제 희생으로 읽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존 커리드의 해설은 본문의 표현을 그대로 따라가면 입다가 인간 희생을 실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평가하며, 이를 사사기의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영적 타락의 절정으로 연결합니다.
Tamie S. Davis의 「The Condemnation of Jephthah」 역시 문학적 맥락과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서
입다를 아브라함의 “역전된 모습”, 곧 믿음의 영웅이 아니라 불순종의 반면교사로 읽을 강력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 제사를 요구하신다는 생각은 성경 전체의 계시와 충돌합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 큰 것을 바쳐야 한다”는 모범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열심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8. 입다의 비극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못 알았다는 것이다
입다는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암몬은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입다의 인생은 승리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자기 집에서는 무너졌습니다.
원하던 승리를 얻었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성공과 하나님의 뜻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잘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역이 커졌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기적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 과정이 모두 옳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매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것이 신앙의 가장 무서운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했는데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을 수 있습니다.
9. 입다와 아브라함 — 두 아버지, 두 제사, 완전히 다른 이야기
사사기 11장을 창세기 22장과 비교하면 본문의 신학적 의미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순종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은 대신 숫양을 준비하십니다.
반면 입다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딸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입다가 스스로 서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입다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제물을 준비하십니다. 입다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자기 제물을 만들어냅니다.
이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복음의 빛이 비칩니다.
성경의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쳐서 하나님을 만족시킨다” 가 아닙니다.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제물을 준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조종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이 복음입니다.
입다의 종교는 “하나님, 제가 이것을 드릴 테니 승리를 주십시오.” 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거래가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10. 입다의 딸과 그리스도 — 인간의 희생과 하나님의 자기희생은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입다의 딸의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순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입다는 자신의 욕망에서 서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입다는 자기 딸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인간의 잘못된 종교성이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만들어낸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을 달래기 위해 인간이 바친 제물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신 사건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사기의 비극이 복음의 빛을 향해 열립니다. 사사기는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 타락을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자로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11. 사사기 11장의 핵심 질문 — 나는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가?
이제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가져와야 합니다.
입다를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끝나면 이 설교는 실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다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합니까?
“하나님, 이것을 주세요.” “하나님, 저 사람을 변화시켜 주세요.”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하나님, 성공하게 해주세요.”
물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아니면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박국 3장 17-18절은 믿음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12. 믿음은 표현이 아니라 순종이다
“믿음은 표현력이 아닙니다. 화려한 설득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순종이며, 깨달은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표현이 너무 많은 시대를 살아갑니다.
말을 잘합니다. 기도를 잘합니다. 성경구절도 잘 압니다. 신앙적인 언어도 능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말했는지를 먼저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말씀에 순종했는지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입니까?
가정에서도 그리스도인입니까?
직장에서도 그리스도인입니까?
돈을 사용할 때도 그리스도인입니까?
사람을 대할 때도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삶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주일의 예배가 월요일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결정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가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13.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신앙은 어떻게 다릅니까?
첫째,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게 하소서.”
둘째,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결과를 붙잡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거래를 제안합니다.
“이것을 주시면 이것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주님,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넷째,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성공을 하나님의 승인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성공보다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합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14. 사사기 11장이 오늘 교회에 주는 경고
오늘 교회도 입다의 모습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반드시 영적 부흥은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것이 반드시 복음의 능력은 아닙니다.
말을 잘하는 지도자가 반드시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성과가 있다고 해서 그 과정이 모두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이것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얼마나 크게 만들었느냐?” 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크게 만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오히려 이것입니다. “너희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며 내 말씀에 순종했느냐?”
교회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도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봉사도 자신의 명예를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헌금도 하나님과의 거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도 하나님을 조종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15.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오늘 사사기 11장을 세 문장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보다 크신 분입니다.
입다는 버림받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함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나는 부족합니다.”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부족함보다 큽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러므로 자격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은혜를 자랑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신앙은 결국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합니다.
입다는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 뒤에는 깊은 비극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내 욕망의 수단으로 만들면 결국 신앙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괴하는 종교적 욕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물으십시오. “하나님, 제가 주님을 이용하고 있습니까?”
셋째,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믿음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받아내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믿음입니다.
맺는말 —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입다의 이야기는 단순히 옛날 한 사사의 실패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까? “하나님, 이것만 이루어 주시면…”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거래가 아니라 관계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나에게 무엇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에게 네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을 기억하십시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입다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거래를 제안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응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조종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거래를 제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십시오.
오늘 우리의 기도가 바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세요.” 에서 “하나님, 제가 주님의 뜻을 알게 하소서.” 로.
“하나님, 제 계획을 축복해 주세요.” 에서 “하나님, 제 계획이 주님의 뜻과 다르다면 내려놓게 하소서.” 로.
“하나님, 나를 성공하게 해주세요.” 에서 “하나님, 성공하든 실패하든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로.
이것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으로 옮겨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바쳐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려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구원의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더 이상 주님을 이용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손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기보다 주님 자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결과보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하시고, 내 성공보다 주님의 영광을 구하게 하소서.
그리고 입다처럼 하나님을 말하면서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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