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 취함이 아니라 성령 사건이다 (사도행전 2장)
성령이 임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사도행전 2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런데 놀라움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현상을 보고 조롱합니다.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말합니다.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베드로는 곧바로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펼칩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보라.”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는지 보라.”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사건이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의 성취임을 설명했습니다.
오순절 사건을 단순한 감정적 체험으로 설명하지 않고,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설명하면서 말씀으로 사건을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오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달라집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진짜라면 그 결과는 어디로 나타나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아주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1. 오순절은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만들어 냈는가?”가 아닙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제자들은 기다렸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제자들이 열흘 동안 한 일은 자기들의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기도하며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아주 깊은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보다 앞서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기도 전에 문을 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자기 확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다렸습니다. 왜입니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주도권을 돌려드리는 시간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단순히 찬양하고 말씀 듣는 행위만이 아닙니다. 예배의 중심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2. 성령은 우리의 낡은 공기를 바꾸시는 하나님의 새 바람입니다
사도행전 2장 2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성령께서 임하실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미지가 바람입니다. 성경에서 바람과 성령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는 마른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죽어 있던 뼈들이 살아납니다. 군대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기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바람은 단순한 자연현상을 구경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죽어 있는 것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살아 있어도 영혼이 메마를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마음이 굳어질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보다 문제만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심장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성령의 새 바람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낡은 생각이 흔들립니다.
굳어진 마음이 열립니다.
잃어버렸던 사랑이 회복됩니다.
기도가 다시 살아납니다.
예배가 다시 살아납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생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다시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는 지금 어떤 공기가 가득합니까?
두려움의 공기입니까?
염려의 공기입니까?
비교와 경쟁의 공기입니까?
상처와 분노의 공기입니까?
자기 사랑과 자기 의의 공기입니까?
오늘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의 낡은 공기를 몰아내시고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의 불은 우리의 한계를 태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도행전 2장 3절입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바람 다음에는 불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불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는 불이 각 사람 위에 임합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불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만 임하지 않았습니다.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특정한 엘리트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요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요엘의 예언은 자녀와 젊은이와 늙은이를 함께 언급합니다. 성별과 세대와 사회적 위치를 넘어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성령은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모세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갈렙은 85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늦은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는 나이가 절대적인 한계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늦었다.” “나는 이미 실패했다.” “나는 이제 쓸모없다.” “나는 능력이 없다.”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의 한계는 실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가 하나님의 한계는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부족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부족함을 넘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4. 성령 충만은 황홀경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변화입니다
사도행전 2장 4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에서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성령 충만은 단순히 감정이 뜨거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우리의 감정을 만지실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기쁨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감정의 강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우리의 전인격을 다스리시는 상태입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행동이 달라집니다. 관계가 달라집니다. 삶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배 시간에만 뜨거운 사람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달라집니다. 직장에서도 달라집니다. 말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화를 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돈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용서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고난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달라집니다.
왜입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5. 오순절의 방언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사람들이 여러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사도행전 2장 11절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여기에서 오순절 방언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큰 일.” 방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을 단순히 “신비한 언어 현상”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큰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순절의 선교적 의미가 있습니다.
6. 바벨의 인간은 자기 이름을 높였지만, 오순절의 성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고.” 바벨의 정신은 이것입니다. “내가 나를 높이겠다.” “내 이름을 알리겠다.”
“내 힘으로 올라가겠다.” “내가 하나님 없이도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겠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오순절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벨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려고 한 사건입니다. 오순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바벨에서는 인간의 이름이 중심입니다. 오순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중심입니다.
바벨에서는 인간이 주어입니다. 오순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작아지고 예수님이 커지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7. 그런데 베드로는 성령의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합니까?
이것이 오늘 설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설명한 다음 갑자기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2장 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16편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시편 110편을 인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왜 그렇습니까?
성령 사건은 예수 사건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건을 독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에 연결해야 하며,
성령께서는 결국 예수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학문적으로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크게 세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엘을 통해 성령 강림을 설명합니다.
둘째, 시편 16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셋째, 시편 110편을 통해 부활하시고 높임받으신 예수께서 성령을 부어주셨음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만으로 설교가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왜 임하셨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8.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는 영이 아니라 예수를 드러내는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13–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이 말씀은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가리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드러내시는 영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결국 예수님이 선명해집니다.
성령 충만한 설교는 결국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성령 충만한 찬양은 결국 예수님을 높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결국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성령을 많이 경험했다.”
“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이런 능력이 있다.” 이것이 신앙의 중심이 되는 순간 위험해집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신 일을 가지고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는데 사람이 더 커진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는데 예수보다 사역자가 더 유명해진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는데 교회의 프로그램만 남고 십자가와 복음이 사라진다면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예수께로 데려갑니다.
9. 성령 충만의 최종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보십시오.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러나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선언합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리고 33절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여기에는 놀라운 신학적 연결이 있습니다. 십자가 → 부활 → 승천 → 성령 강림 → 복음 증거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의 구조입니다.
성령 강림은 독립된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높임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의 목적은 증인입니다.
10.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관심이 작은 것에서 하나님의 큰 것으로 이동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작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갑니까?
누가 나를 인정했는가. 누가 나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벌었는가. 무엇을 샀는가. 누가 나보다 앞서갔는가. 누가 나를 무시했는가. 내 자존심이 상했는가. 내 계획이 이루어졌는가.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관심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내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현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보다 더 큰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보입니다.
영혼의 가치가 보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보입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이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작은 성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시선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11. 성령이 임하면 세대가 다시 살아납니다
요엘의 예언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의 공동체에는 세대의 폐쇄성이 없습니다.
아이도 하나님의 역사의 주체가 됩니다. 청년도 하나님의 비전을 봅니다. 장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꿉니다.
성령의 공동체에서는 아무도 “나는 이제 끝났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중년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노년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인간적인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입니다. 복음을 위한 꿈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비전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꿈입니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꿈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세대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12. 성령의 역사는 결국 회개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립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찌릅니다. 죄를 깨닫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됩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진정한 기적은 불과 바람만이 아닙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죄인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절망한 사람이 소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가장 놀라운 역사입니다.
13.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능력 자체만 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불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 자체만 구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충만함 자체만 구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더 사랑하고 더 증거하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주님, 내 안에 성령의 바람을 불어 넣어 주십시오.”
“주님, 내 안의 죄와 교만과 자기중심성을 태워 주십시오.”
“주님,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려 주십시오.”
“주님, 내가 내 이름을 높이지 않고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하십시오.”
“주님,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이것이 오순절의 기도입니다.
결론 ― 술 취함이 아니라 성령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도 어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요엘의 말씀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삼천 명이 예수께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닙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오순절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오순절은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오순절은 복음의 세계적 확장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순절은 부활하시고 높임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성령의 교회는 예수님을 높입니다.
성령의 설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영혼을 살립니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를 증인으로 만듭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성령의 새 바람이 불기를 바랍니다.
굳어진 마음에 생기가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식어버린 사랑이 다시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다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장년과 노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꿈을 꾸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역보다 예수님이 더 커지고, 우리의 명예보다 복음이 더 중요해지고, 우리의 성공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든, 우리는 담대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은 술 취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와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고백이 이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 “오직 부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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