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지우면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3장 1–26절)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의 제목은 “나를 지우면 더 강해진다”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
“내가 더 인정받아야 한다.”
“내가 더 유명해져야 한다.”
“내가 더 많은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역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을 크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지우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크게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내가 작아질수록 그리스도가 커집니다.
내 이름이 내려갈수록 예수의 이름이 올라갑니다.
내 능력을 자랑하지 않을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나를 지우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해진다.”
왜 그렇습니까?
내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힘의 한계만큼만 살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내려놓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1.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냥 성전에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사도행전 3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무엇이 있었습니까? 기도가 있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기 전에 기도하러 가는 두 사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적을 원하지만 기도의 사람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능력은 원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깊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원하지만 그 결과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은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능력은 사람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뒤집습니다. 우리는 자꾸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묻습니다. “네가 나를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신앙의 출발점은 나의 가능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충분하심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지우는 첫 번째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기도할수록 내가 작아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작아질수록 믿음은 커집니다.
내가 작아질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보입니다.
내가 작아질수록 예수님이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진짜 강한 사람은 자기 힘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2. 베드로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한 사람이 그들을 만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했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한마디로 말하면 “한계에 갇힌 인생”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그 자리에 데려다주어야 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반복이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그 자리. 사람들이 지나가면 구걸. 저녁이 되면 다시 그 자리. 다음 날 다시 그 자리.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그를 바라봅니다. 사도행전 3장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았지만 보지 않았습니다. 매일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사람. 구걸하는 사람. 불쌍한 사람. 그저 배경처럼 존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를 보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가 이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내 문제만 보이던 눈에 다른 사람의 고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성공만 보이던 눈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 보입니다.
내 필요만 보이던 눈에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보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3. 그런데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고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깁니다.
그가 일어납니다. 걷습니다. 뜁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보기 시작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보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3장 11절입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나아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합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면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즉시 그 시선을 끊어버립니다. 12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말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여러분,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때, “왜 나를 주목하지?” 라고 생각하지 말고 “왜 나를 주목합니까? 예수님을 보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높일 때, 내가 그 영광을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받은 은사를 내 이름을 높이는 데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받은 직분을 내 권력을 만드는 데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받은 영향력을 내 브랜드를 만드는 데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능력의 주체는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베드로가 한 말을 자세히 보십시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오늘날 교회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교회는 돈이 필요합니다. 건물도 필요합니다. 조직도 필요합니다. 좋은 시스템도 필요합니다. 미디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자산은 은도 아니고 금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무엇이 있었습니까? 예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이름”은 단순한 주문이나 신비한 문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권위, 주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베드로 자신의 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위 아래서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고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하신다. 내 이름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 사역의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5. 나를 지우면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나를 지우는 것”을 자기를 비하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자기혐오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이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 자신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여기에 기독교의 위대한 역설이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내 자아가 왕좌에서 내려와야 예수님이 왕이 되십니다. 내 뜻이 내려가야 하나님의 뜻이 올라옵니다.
내 명예가 내려가야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옵니다. 내 이름이 내려가야 예수의 이름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것이 바울의 인생 목표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유명해지는가?” 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성공하는가?” 도 아니었습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가?” 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방향입니다.
6. 복음은 내용과 방법이 일치해야 합니다
복음의 내용과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이 서로 충돌하면 복음의 증언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방법이 어떻습니까?
돈을 의지합니다. 사람의 인기를 의지합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합니다. 권력을 의지합니다.
사람의 평가에 목을 맵니다. 그러면 세상은 묻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예수는 정말 그렇게 능력 있는 분입니까?
그런데 왜 당신들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합니까? 왜 예수님보다 사람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여기에 교회가 대답해야 합니다.
복음의 내용만 예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방법도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의 베드로는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예수님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아온 영광을 예수님께 돌렸습니다.
내용과 방법이 일치했습니다.
7. 예수님을 전한다면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말하는 데 익숙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섬기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복음의 내용과 우리의 삶 사이에서 충돌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복음은 단지 입으로 전달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삶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내가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평화가 생기고, 용서가 생기고, 사랑이 생기고, 회복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묻게 됩니다. “당신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때 우리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8. 구원은 나 혼자 복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3절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내가 복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내가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다면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살아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면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용서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소망을 주셨다면 나를 통해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소망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일으키셨다면 나를 통해 누군가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는 단순히 한 사람이 병 고침을 받은 사건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회복이 공동체 전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변화된 몸이 설교가 되었습니다. 그가 걷는 것이 설교였습니다. 그가 뛰는 것이 설교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설교였습니다.
9.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3장의 중심은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표적입니다. 표적은 자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어딘가를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3장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기적을 설명하면서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3장 16절은 말합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를 보십시오.
“그 이름.”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요한이 아닙니다. 그들의 경건이 아닙니다.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3장 19절에서 베드로는 결국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기적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회개입니다.
기적의 목적지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예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기적을 말하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은사를 말하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성공을 말하면서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축복을 말하면서 회개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에게서 시작해서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10. “나를 지운다”는 것은 십자가의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존재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감정이 최종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욕망이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명예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는 주인이 아니다.” 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가?” 가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강하게 드러나는가?”
를 묻는 삶입니다.
11. 나를 지울 때 오히려 나의 진짜 모습이 살아납니다
여러분, 이것은 역설입니다.
내가 나를 붙들면 오히려 내가 무너집니다. 내가 나를 증명하려고 하면 지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사람들의 말에 흔들립니다. 내가 내 능력을 의지하면 실패할 때 함께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지하면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근거가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완벽한가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내가 잘해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입니다.
“내가 의로워져야 구원받는다.” 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의를 이루셨기에 믿음으로 그분을 붙든다.”입니다. 것이 은혜입니다.
12. 그러므로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을 가장 잘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말합니다. “너 자신을 증명하라.”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라.”
세상은 말합니다. “네 이름을 높여라.”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높여라.”
세상은 말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라.”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라.”
세상은 말합니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라.”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하신지 보여주라.”
그래서 세례 요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그분은 커지고 나는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은 커지고 내 뜻은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은 커지고 내 영광은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높아지고 내 이름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하면 내가 사라지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 진짜 내가 살아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목적대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13. 오늘 우리에게도 ‘미문’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의 미문은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미문이 있습니다.
가정의 미문이 있습니다. 직장의 미문이 있습니다. 교회의 미문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군가의 인생에도 미문이 있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매일 지나갑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입니다. 실패한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병든 사람입니다. 낙심한 사람입니다. 희망을 잃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잊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을 보라.”
우리는 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물론 물질도 줄 수 있습니다. 필요하면 돈도 주어야 합니다. 음식도 주어야 합니다. 병원도 연결해야 합니다. 실질적인 도움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14. 우리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우리에게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명예입니까? 성공입니까? 자녀의 성공입니까? 좋은 집입니까? 안정된 노후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제 삶을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성도의 궁극적인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서도 예수님을 드러내고,
내가 늙어서도 예수님을 드러내고,
내가 병들어도 예수님을 드러내고,
내가 실패해도 예수님을 드러내고,
내가 죽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1)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자유입니까?
내 인생의 가치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를 드러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를 내려놓읍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자아가 아닙니다. 더 큰 명성이 아닙니다. 더 많은 인정도 아닙니다.
더 깊은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내가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정받으셔야 합니다.
내가 박수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기적의 중심에 있었지만 기적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예수님을 가리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지만 우리가 그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파이프와 같습니다. 물이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물이 나온다고 파이프를 마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우리를 통해 은혜를 경험했다면 우리를 붙잡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붙들게 해야 합니다.
결론 ― 나를 지우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나를 지우면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이 보이면 세상이 살아납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지웠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능력을 부인했을 때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걷기 시작했습니다. 뛰기 시작했습니다.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사람이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나를 없애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주님의 손에 온전히 드리게 해주십시오.
내 자아가 왕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게 하십시오.
내 이름을 높이려 하지 않게 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십시오.
내 능력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십시오.
내가 인정받으려고 애쓰기보다 예수님을 드러내게 하십시오.
내가 받은 은혜를 나 혼자 누리지 말게 하시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통로가 되게 하십시오.
내가 가는 곳마다 복음이 말로만 들리지 않고 내 삶을 통해 보이게 하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게 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지우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멸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작아지는 순간 예수님이 커집니다.
내가 내려가는 순간 예수님의 이름이 올라갑니다.
내가 죽는 순간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나를 지우면 더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마지막으로 다시 마음에 새깁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오늘 우리의 고백이 이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쇠하고 예수님은 흥하게 하소서.”
“나는 가려지고 예수님이 드러나게 하소서.”
“내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살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절망하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고, 상처받은 사람이 회복되고, 낙심한 사람이 소망을 얻고,
죄인이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만 높임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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