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배신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디모데후서 4장 9–18절)

knowledgeplatform100 2026. 9. 1. 14:49

배신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디모데후서 4장 9–18절)

사람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람 때문에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하나님까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나를 떠났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배신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내 곁에 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도 내 곁을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떠날 수 있지만 주님은 떠나지 않으신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1.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기록한 편지입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여기에서 바울의 시선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자기를 배신한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자기를 공격했던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눈은 마지막 날에 오실 의로우신 재판장,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인생의 최종 평가입니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내 인생의 결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최종 결론입니다.

 

2. 그런데 바울의 마지막에는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사역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사도였는데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떠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가 떠났습니다. 그리고 14절에는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그리고 16절에서는 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바울의 마지막 법정 변론의 순간에 아무도 곁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누구입니까?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혼자였습니다. 이것이 복음 사역의 현실입니다.

 

충성한다고 해서 항상 사람들이 나를 충성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항상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섬긴다고 해서 반드시 인정받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끝까지 내 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에게 실망할 수는 있지만, 사람 때문에 하나님에게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3.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하나님처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동역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친구를 사랑해야 합니다. 배우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자리에 하나님을 대신 앉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사람은 실수합니다. 사람은 때로 배신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완전함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고, 하나님께는 믿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하나님께는 나의 영혼을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되, 하나님에게는 나의 인생 전체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사람에게 실망할 때마다 신앙까지 무너집니다.

 

 

4. 바울은 사람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에게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장 놀라운 문장이 있습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여기까지만 읽으면 너무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할렐루야.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중심입니다. 사람은 떠났지만 주님은 서 계셨습니다. 

사람은 약해졌지만 주님은 강하셨습니다.

 

사람은 바울을 버렸지만 주님은 바울을 붙드셨습니다. 사람이 바울에게 힘을 주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힘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어서 내가 끝난 것이 아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끝나지 않았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홀로 남겨진 사실을 숨기지 않지만, 그 고독보다 더 중요한 현실이

“주께서 내 곁에 서셨다”​는 사실임을 증언합니다.

 

5. 그러므로 배신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믿음의 방향을 점검하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우리가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이 나를 배신했을까?” 이 질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까?

사람에게 나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 나의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까?

사람의 인정이 끊어지면 내 인생도 끝난다고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습니까?

여기서 믿음이 드러납니다.

 

6. 데마는 바울을 미워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해서 떠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람이 데마입니다. 데마는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데마는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 바울의 동역자로 언급됩니다. 즉 처음부터 바울을 적대했던 사람이 아니라 한때는 바울과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는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서 24절에서도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들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에 와서는 달라졌습니다. 왜입니까?

 

성경은 아주 정확하게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데마가 바울을 싫어했다”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가 무엇을 사랑했는가를 말합니다. 그는 현재의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신앙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면서 무너질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도 사랑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점점 좋아집니다. 처음에는 사명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편안함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현재의 안정과 성공이 더 중요해집니다.

 

처음에는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희생을 싫어하게 됩니다. 결국 무엇이 드러납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7.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나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물론 우리의 미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선택을 통해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사랑합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사람의 인정입니까? 성공입니까? 쾌락입니까? 안정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여러분의 발걸음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도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의 현재 마음을 보면 됩니다.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 보면 됩니다.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보면 됩니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지 보면 됩니다.

 

무엇을 잃었을 때 가장 크게 무너지는지 보면 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8.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의 배신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더 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모든 공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면, 사람이 나를 채워주지 않아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에게 인정해 주지 않아도 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도와주지 않아도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과 가치와 미래의 근원이 사람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공급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면 나머지는 제자리를 찾습니다.

 

9. 바울은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이 정말 놀랍습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바울은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복수하지 않습니다.

상처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주하지 않습니다.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이미 자신의 재판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여기서 바울은 “내가 갚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갚으신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도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왜 그렇습니까? 내가 재판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이십니다.

내가 모든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최종적인 결과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받은 상처를 주님께 맡깁니다.

제가 받은 억울함을 주님께 맡깁니다. 제가 받은 배신을 주님께 맡깁니다. 제가 복수하려는 마음까지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판단해 주십시오.” 이것이 영적 자유입니다.

 

10. 그러나 용서는 경계가 없는 무방비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용서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무조건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알렉산더에 대해서 디모데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너도 그를 주의하라.”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적 사랑은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용서는 악을 악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지혜는 용서하되 분별하고, 사랑하되 경계하며, 복수하지 않되 악에 다시 이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를 한 번 배신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배신당한 경험을 통해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신뢰는 시간 속에서 검증될 수 있습니다.

동역은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신뢰는 열매를 통해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하나님처럼 의지하지 마십시오.

 

11. 마가를 보십시오.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데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도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 말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왜냐하면 마가에게도 과거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마가는 선교 여행 중에 바울과 바나바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크게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바울이 말합니다.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이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현재 모습만 보고 그의 미래를 최종 판결해서는 안 됩니다.

 

변화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면서 사랑과 지혜로 돕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청년은 사람을 보는 눈보다 하나님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청년의 때에는 사람 때문에 많이 흔들립니다.

친구 때문에 흔들립니다. 

연애 때문에 흔들립니다.

교회 사람 때문에 흔들립니다.

직장 사람 때문에 흔들립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무너집니다.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면 천국 같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무시하면 지옥 같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의 리모컨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내 감정이 움직이고,

누군가의 태도 하나에 내 신앙이 움직이고,

누군가의 배신 하나에 내 사명이 무너진다면,

나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크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나의 힘의 근원이 아니다.”

시편 121편 1–2절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도움이 어디에서 옵니까? 사람에게서 최종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13. 바울의 가장 위대한 고백은 “사람이 없었다”가 아니라 “주께서 서셨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것입니다.

“사람이 없었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계셨다는 것이 답이었다.”

16절: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17절: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나”​입니다.

 

사람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셨습니다. 환경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셨습니다. 법정에서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셨습니다. 죽음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14.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다”

17절의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바울은 자기 힘으로 버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목적이 있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바울의 고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홀로 서 있는 그 자리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신학적 원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편안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명을 완성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곁에 서시는 이유는 단순히 “괜찮아. 힘들었지?” 하고 위로만 해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시 사명으로 세우십니다. 

 

“일어나라.

다시 걸어라.

내 복음을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고난 이후 더 강한 사람이 됩니다.

 

15. 예수님도 홀로 서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바울이 홀로 남겨졌던 것은 그리스도의 길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도 홀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고독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도 그 길을 먼저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말씀입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떠나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합니까?

사람은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약속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16. 배신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배신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배우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배신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살다 보면 반드시 누군가가 나를 실망시킵니다.

친구가 떠날 수 있습니다. 동역자가 떠날 수 있습니다. 교회 사람이 나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가 사람을 너무 크게 보았습니다.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습니다.

사람이 나를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다시 주님께 돌아갑니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봅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을 구합니다.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배신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17. 그리고 우리 자신도 누군가의 데마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설교를 다른 방향으로 한 번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가 나를 배신했는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내가 누군가를 배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내가 데마가 아닙니까?

혹시 내가 세상을 사랑해서 사명을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편안함 때문에 십자가를 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돈 때문에 믿음을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사람의 인정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공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경험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 자신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넘어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거야.” 라고 자신하지 말고, “주님, 제 마음을 지켜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8. 결국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 대한 싸움입니다

잠언은 말씀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거기에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향해 갑니다.

말씀을 사랑하면 말씀을 향해 갑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을 향해 갑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향해 갑니다.

사람의 인정을 사랑하면 인정받는 곳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를 바꾸고 싶다면 먼저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미래를 바꾸는 가장 깊은 방법은 현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19. 진짜 강함은 사람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배신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배신을 당해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처가 있어도 하나님께 가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울면서도 사명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도 주님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배신 때문에 낙심하면 성도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놓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실망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떠나지 마십시오.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20. 마지막으로 바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만듭시다

18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이 바울의 마지막 시선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배신자가 아닙니다. 알렉산더가 아닙니다. 데마가 아닙니다.

자신의 외로움도 아닙니다. 천국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 인생의 결론을 사람에게서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자신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사랑해야 하지만 하나님처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둘째, 내 힘의 근원을 사람에게서 찾지 마십시오.

바울은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셋째, 무엇을 사랑하는지 점검하십시오.

데마는 바울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원인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을 따라갑니다. 사람의 인정을 사랑하면 사람의 인정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오늘 여러분이 배신 때문에 힘들다면 사람을 계속 바라보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람이 떠났다면, “주님, 이제 주님을 더 깊이 바라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님,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사람이 나를 버렸다면, “그러나 주님은 내 곁에 서 계십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바울처럼 말하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고백도 이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끝까지 사랑했는가.

사람이 나를 인정했느냐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믿음을 지켰는가.

사람이 내 곁에 끝까지 있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주님 곁에 끝까지 있었는가.

 

배신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상처는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억울함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만 믿으십시오.

사람에게서 힘을 찾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지키십시오.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내 미래도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떠나도 주님은 서 계십니다.

사람이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붙드십니다.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주님은 나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다시 걸으십시오.

다시 사랑하십시오.

다시 섬기십시오.

다시 복음을 전하십시오.

왜냐하면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런 믿음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