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힘의 함정'에서 열리는 기회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때로 가로막으시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을 막으시는가?”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면 길이 열려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일이 꼬이는가?”
“기도했는데 왜 문이 닫히는가?”
“최선을 다했는데 왜 기회가 사라지는가?”
“분명히 좋은 일인데 왜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열린 문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닫힌 문을 통해서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정확한 응답은 “가라”가 아니라 “가지 마라”일 수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를 주시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게 하시는 데에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사도행전 19장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9장 8절부터 20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도행전 16장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처음부터 바울이 계획했던 사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 내가 계획하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일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가고 싶은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6장 6절을 보면 놀라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성령께서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라고 기록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아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셨다고 해서 그 일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악한 일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비두니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악한 일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옳은 일이 항상 지금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좋은 길이 항상 하나님께서 지금 가라고 하시는 길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할 것인가’와 ‘어디에서 할 것인가’도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나중에 아시아의 중심 도시 에베소에서 놀라운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16장의 막으심은 “바울아, 에베소에는 영원히 가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차이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문이 닫히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지금 이 문을 닫으셨을까?”
2. 하나님의 막으심은 실패가 아니라 섭리입니다
바울은 자기 계획 속에 에베소를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과 시간표 속에는 다른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인도하셨고, 결국 에베소에서 장기간 머물며 큰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섭리란 무엇입니까?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잠언 16장 9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여러분, 계획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계획하십시오. 기도하면서 계획하십시오. 최선을 다하십시오. 꿈을 가지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섭리가 크다는 사실입니다.
내 시간표보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정확합니다.
내가 보는 길보다 하나님이 보시는 길이 넓습니다.
내가 원하는 문보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문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계획을 세우되 계획에 자신을 묶어놓지 않습니다. 계획은 세우되 하나님께 맡깁니다.
3. 에베소는 바울의 실패한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 잠시 들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바울에게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떠납니다. 사도행전 18장 21절에서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바울은 에베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바울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일정을 맡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은 다시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부터 에베소는 바울의 사역 가운데 매우 중요한 중심지가 됩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약 3년 동안 사역합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을 세우고,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결국 그 영향력이 아시아 지역으로 퍼져 나갑니다.
학계에서도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사역은 바울의 선교 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으로 다루어집니다. 특히 바울이 회당에서 시작했다가 두란노의 공간으로 이동하여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말씀을 가르친 점이 강조됩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원했던 곳보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인도하신 곳에서 더 큰 열매가 맺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계획이 틀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 있습니다.
기회가 사라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기회를 준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직장의 문이 닫혔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명의 문을 준비하실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닫힌 문 자체가 아니라 닫힌 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19장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막힘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8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석 달 동안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9절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복음을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웁니다.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합니다. 여기에서 오늘 말씀의 핵심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회당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떠납니다.
그리고 두란노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아무 문도 남기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 문을 닫으시면서 더 넓은 문으로 우리를 옮기실 수 있습니다.
5. 회당에서 두란노로 — 익숙함을 떠나 사명으로
회당은 바울에게 익숙한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바울의 정체성과 배경에도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복음이 막히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계속 그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다. 떠났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회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당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익숙해서 떠나지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미 끝내셨는데 내가 계속 붙들고 있는 것, 과거에는 은혜였지만 지금은 집착이 되어버린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회당은 과거의 성공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과거의 관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과거의 직장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과거의 명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예전에 이만큼 했는데…” 라는 기억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때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었는데…” 라는 미련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반드시 이것을 이루어야 해.” 라는 자기 욕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셨는데도 계속 그 문 앞에 서 있으면 새로운 문으로 갈 수 없습니다.
6. 가시가 은혜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면 그것을 ‘가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이 가시를 제거해 주세요.”
“이 문제만 해결되면 제가 잘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만 없어지면 제가 편안하게 살겠습니다.”
“이 환경만 바뀌면 제가 제대로 신앙생활 하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때때로 가시를 제거하시는 대신 가시 가운데서 은혜를 주십니다.
가시가 있어서 겸손해집니다. 가시가 있어서 기도합니다. 가시가 있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가시가 있어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가시가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약함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가시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시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으시는 은혜일 수 있고, 동시에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7. 성령 충만한 사람은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영성의 기준을 하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강한 사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며, 돌아가라고 하시면 돌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고집과 믿음은 다릅니다. 고집은 “나는 이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고집은 문이 닫혀도 계속 밀어붙입니다.
믿음은 문이 닫히면 기도합니다. “주님, 혹시 제가 다른 길로 가야 합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8. 성령께서 막으신 길이 결국 더 큰 길을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다시 보십시오. 아시아로 가려 했습니다. 막혔습니다. 비두니아로 가려 했습니다. 또 막혔습니다.
결국 바울은 드로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밤에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고 요청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하고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그 결과 복음은 유럽으로 확장됩니다. 여러분, 하나의 닫힌 문이 역사적으로 엄청난 복음의 확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인생에서도 “왜 막혔습니까?”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시려고 막으십니까?”
입니다.
9. 두란노의 핵심은 ‘날마다’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 9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단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날마다” 입니다. 바울은 두란노에서 날마다 강론했습니다.
이것이 에베소 사역의 힘이었습니다.
특별한 한 번의 집회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의 감동적인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의 뜨거운 기도회가 아니었습니다.
날마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의 감동으로만 성장시키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날마다 듣게 하십니다.
기도를 날마다 하게 하십니다.
회개를 날마다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날마다 배우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광야의 만나도 하루하루 주어졌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루의 은혜를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10. 영적 성장은 한 번의 결단보다 매일의 순종에서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언젠가 크게 변화해야지.”
“언젠가 제대로 기도해야지.”
“언젠가 성경을 많이 읽어야지.”
“언젠가 헌신해야지.”
그러나 성경의 방식은 다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루가 쌓여 한 달이 됩니다.
한 달이 쌓여 일 년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생각이 우리의 선택을 바꾸고,
선택이 우리의 습관을 바꾸고,
습관이 우리의 인격을 바꾸며, 결국 삶 전체가 변화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11.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20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부흥은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말씀의 권위가 사람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그 결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복음이 지역 전체로 확산됩니다.
10절은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둘째, 악한 세력이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복음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셋째, 우상과 돈에 대한 가치관이 무너집니다.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책들을 가져와 사람들 앞에서 불태웁니다.
그 가치는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돈보다 복음이 귀해졌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망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귀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짜 부흥입니다.
12. 부흥은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을 생각할 때 “교회가 커지는 것” “사람이 많이 오는 것” “능력이 나타나는 것” 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9장을 깊이 보면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돈이 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이 더 귀합니다.
전에는 우상이 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더 귀합니다.
전에는 자기 방식이 귀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귀합니다.
이것이 진짜 변화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경험해야 할 가장 큰 기적은 건물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 우상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13. 하나님께서 닫으신 문 앞에서 계속 울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닫힌 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붙들고 있는 회당은 무엇입니까?
끝났는데도 계속 붙들고 있는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 계속 붙들고 있는 욕심이 있습니까?
이미 지나간 성공을 붙들고 있습니까?
이미 닫힌 기회를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때 그 직장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기회가 있었다면…”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과거의 문을 다시 붙잡으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앞으로 부르십니다.
이사야 43장 18절과 19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이어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닫힌 문을 보면서 인생이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새로운 문을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막힘’을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는 신학적으로 반드시 균형이 필요합니다.
모든 장애물이 자동으로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이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막힘은 우리의 실수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막힘은 죄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막힘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막힘은 단순히 인간 세계의 한계와 현실적인 조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막혔으니까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쉽게 결론내려서는 안 됩니다.
대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앞에서 점검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뜻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성경 말씀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거룩함과 사랑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15. 성취하는 능력과 받아들이는 수용능력
복음 안에는 성취하는 능력과 받아들이는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 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성취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노력합니다. 공부합니다. 일합니다. 도전합니다. 문을 엽니다. 목표를 세웁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성경도 게으름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또 하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받아들이는 수용능력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열 수 없는 문 앞에서 멈출 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16. 바울의 위대한 능력은 ‘가라’는 명령만 들은 것이 아니라 ‘멈추라’는 명령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조건 앞으로만 달린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막으시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사명자의 야성입니다.
야성은 무조건 돌진하는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방향을 전환하는 힘입니다.
가야 할 때 가는 용기. 멈춰야 할 때 멈추는 용기.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용기.
새로운 곳으로 옮겨갈 때 옮겨가는 용기. 이것이 사명자의 실력입니다.
17. 사울을 붙들고 있지 말고 다윗을 향하여 가십시오
사무엘상 16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물으시는 것은 “왜 사울을 사랑했느냐?” 가 아닙니다.
“왜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느냐?” 입니다. 과거를 슬퍼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상실을 애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도와 집착은 다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과거에 사는 것도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는데 과거의 문 앞에 계속 서 있다면 새로운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사울을 내려놓아야 다윗을 볼 수 있습니다. 회당을 떠나야 두란노를 볼 수 있습니다.
18. 여러분의 ‘두란노’는 어디입니까?
이제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두란노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새롭게 열어 주신 장소가 어디입니까?
새로운 사역입니까?
새로운 공부입니까?
새로운 섬김입니까?
새로운 사람입니까?
새로운 관계입니까?
새로운 기도의 자리입니까?
새로운 말씀의 자리입니까?
혹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입니까?
두란노는 반드시 물리적인 장소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세우시는 새로운 순종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붙들고 있는 회당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두란노를 보여 주십시오.”
19. 골방에서 열방으로
에베소의 두란노는 작은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날마다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에베소를 넘어 아시아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골방에서 열방으로.
작은 순종이 큰 역사를 만듭니다.
작은 방에서 시작된 말씀이 도시를 변화시킵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가정을 바꿉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공동체를 바꿉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다음 세대를 바꿉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현재가 작아 보인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작은 공간은 열방을 향한 선교의 기지가 될 수 있습니다.
20. 하나님은 우리에게 묵은 은혜가 아니라 오늘의 은혜를 주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날 필요한 만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오늘의 은혜 를 주십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버티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제의 기도만 가지고 오늘을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제 받은 은혜만 반복해서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오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오늘 말씀을 들으십시오.
오늘 기도하십시오.
오늘 순종하십시오.
오늘 회개하십시오.
오늘 감사하십시오.
오늘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신앙의 능력은 한 번의 폭발보다 매일의 지속성에서 나옵니다.
21. 막힘을 만났을 때 기억해야 할 다섯 가지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막혔다고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길을 막으셨지만 그것은 선교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향 전환이었습니다.
둘째, 닫힌 문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닫힌 문 뒤에서도 일하십니다.
셋째, 익숙한 회당을 떠날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신 것을 우리가 계속 붙들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두란노로 가야 합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명, 새로운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섯째,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사도행전 19장의 능력은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날마다 강론”하는 지속적인 말씀 사역에서 나타났습니다.
22. 결론 — 막힌 문 뒤에는 하나님의 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막힌 문이 있습니까?
기도해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습니까?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막혔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셨다면 그 막으심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문을 닫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는 더 좋은 길로 보내기 위해 닫으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닫으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교만을 꺾기 위해 닫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우상을 내려놓게 하기 위해 닫으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두란노로 보내기 위해 닫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닫힌 문 앞에서 울고만 있지 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살펴보십시오.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물으십시오.
“하나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하나님, 제 인생의 두란노는 어디입니까?”
마지막으로 꼭 기억하십시오
회당의 문이 닫혔다고 복음의 문이 닫힌 것이 아닙니다. 한 길이 막혔다고 모든 길이 막힌 것이 아닙니다.
내 계획이 무너졌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내 계획이 내려가는 순간 하나님의 계획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내가 붙들던 문이 닫히는 순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것이 무너지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더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제가 원하는 문만 열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문을 알아보는 눈을 주십시오.”
“주님, 제가 가고 싶은 길만 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길을 가게 하십시오.”
“주님, 닫힌 문을 원망하지 않게 하시고 그 문 뒤에 계신 하나님의 손을 보게 하십시오.”
그리고 회당을 떠나 두란노로 가게 하십시오.
그곳에서 날마다 말씀을 듣게 하십시오.
날마다 기도하게 하십시오.
날마다 순종하게 하십시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개인의 삶 가운데,
우리 가정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우리 다음 세대 가운데,
사도행전 19장 20절의 말씀이 다시 성취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닫힌 문이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문이 마지막 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 넓은 자리,
더 깊은 자리,
더 거룩한 자리,
더 큰 사명의 자리로 옮기시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막힘을 실패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막힘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십시오.
닫힌 회당을 떠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두란노로 나아가십시오.
그곳에서 날마다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곳에서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그곳에서 날마다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골방을 통하여
가정을 살리시고,
교회를 살리시고,
다음 세대를 살리시고,
마침내 열방을 향하여 복음이 흘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닫힌 문 뒤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막힌 길 뒤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닫으신 문은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회당을 떠나 두란노를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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