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이름 없이 함께 걸어준 동역자 (사도행전 21장)

knowledgeplatform100 2026. 9. 10. 09:32

믿음으로 갈 길을 결정하라! 이름 없이 함께 걸어준 동역자를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십니다(사도행전 21장)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걷는 사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우리 인생에는 결정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어느 일을 선택해야 할지, 어떤 사람과 함께해야 할지, 어떤 사명을 붙들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경입니다. 조건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돈이 되는가, 안전한가, 손해를 보지는 않는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래가 보장되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가?”

이것이 믿음의 질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21장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환경이 좋아서 길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길을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바울 앞에는 꽃길이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결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오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로마로 가는 죄수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길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1. 믿음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기준으로 길을 결정합니다

 

사도행전 21장부터 28장까지를 읽어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초기 사도행전에는 놀라운 부흥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합니다. 병자가 일어납니다. 수천 명이 회개합니다. 교회가 성장합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지고, 이방 세계로 확장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후반부에 들어오면 바울의 환경은 점점 나빠집니다.

바울은 자유인이 아니라 죄수가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데 결박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로마로 압송됩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것을 실패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환경에 의해 실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바울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사도행전 28장 30–31절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여기서 놀라운 표현이 있습니다.  “거침없이.”

바울은 묶여 있는데 복음은 묶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죄수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죄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바울을 결박했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결박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신학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막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환경이 나빠졌다고 하나님의 뜻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환경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더 선명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2. 믿음은 “안전한 길”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길”을 선택합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무것도 모르고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2–24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다만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서 바울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누구를 따라갈지는 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려주십시오.”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주십시오.”

“안전하다는 보장을 해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미래의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믿음은 미래의 모든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믿음

시편 23편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골짜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누가 함께 계십니까?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골짜기가 없어질 것이다.” 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를 지나도 주님이 함께하신다.” 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기도 내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어린 믿음은 “하나님, 문제가 없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성숙한 믿음은 “하나님, 문제가 있어도 주님을 놓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어린 믿음은 “꽃길을 열어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성숙한 믿음은 “십자가의 길이라도 주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4. 두로에서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도행전 21장 4절을 보면 바울은 두로에서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믿음은 혼자만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왜 모여야 합니까? 서로의 믿음을 살려주기 위해서입니다. 혼자 있으면 작은 문제가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의 크기가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혼자 있으면 “나는 못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게 됩니다.

혼자 있으면 “끝났습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을 만나면 “아직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닙니다. 믿음을 서로에게 공급하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두로의 성도들이 바울을 배웅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장면은 이것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환난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무릎 꿇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 그러나 믿음은 사람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우선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긴장이 발생합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으며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결박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사도행전 21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리고 14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아주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경고와 인간의 두려움은 구별해서 분별해야 합니다.

 

본문은 아가보의 예언 자체를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가보는 성령을 통해 바울에게 일어날 일을 알립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히 “성령의 음성과 인간의 감정”이라는 이분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본문은 우리에게 더 깊은 분별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알려주셨다고 해서 반드시 고난을 피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고난을 알려주시는 이유는 “피하라” 가 아니라 “준비하라.” 일 수 있습니다.

 

환난과 결박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아는 것은 피하기 위한 정보가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통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을 보여주셨다고 해서 “그러면 그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구나.” 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아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고난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이 나의 안전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6. 믿음은 “알고도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몰랐기 때문에 간 것이 아닙니다. 알고도 갔습니다. 

결박이 기다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환난이 기다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의 가능성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갑니다. 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1장 13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심입니다. 내가 편하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로마서 14장 8절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말씀을 진짜 믿는 사람에게는 삶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내가 손해 보는가?” 보다 “주님께 영광이 되는가?” 를 묻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는가?” 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를 묻게 됩니다. “안전한가?” 보다 “순종하는가?” 를 묻게 됩니다.

 

7.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꽃길’이 아니라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꽃길만 걸으세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꽃길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에게도 꽃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꽃길은 평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탄하다고 하나님의 뜻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험난하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라고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렇게 물으십시오. “하나님, 이 상황 속에서 제가 무엇에 순종해야 합니까?” 이 질문이 믿음의 질문입니다.

 

8.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보다 복음을 선택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바울에게 또 다른 어려움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 잘못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버리라고 가르친다.” “할례를 하지 말라고 한다.” 

“율법을 폐기하라고 한다.” 등의 오해가 퍼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한 행동을 제안합니다.

여기서 바울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 자신을 낮춥니다.

이것은 바울의 선교신학과 연결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0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아닌 문화적 문제에서는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자존심을 복음보다 작게 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9. 신앙은 전략보다 크지만, 복음은 지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전략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지혜로운 계획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전략이 하나님의 뜻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인간적인 힘만 의지할 때 반복해서 넘어졌습니다.

 

반대로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울 역시 상황을 지혜롭게 사용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사용했고, 헬라어를 사용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법적 권리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무계획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만 최종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전략이 주인이 되면 인간의 계산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이 되면 전략도 사명의 도구가 됩니다.

 

10. 바울의 상처는 사명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오해도 받았습니다. 배신도 당했습니다. 매도 맞았습니다.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죽음의 위기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상처와 대화하며 인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상처보다 사명에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3–14절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상처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처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상처를 정체성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다.” 에서 멈추지 말고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로 나아가야 합니다. 

상처는 과거에 속하지만, 사명은 미래를 향합니다. 

 

상처는 뒤를 바라보게 하지만, 사명은 앞을 바라보게 합니다.

상처는 나를 중심에 세우지만, 사명은 예수님을 중심에 세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상처를 부정하지 말되 상처에게 인생의 운전대를 맡기지 마십시오.

 

11. 사도행전 21장의 마지막 비밀 — 나손이 함께 갑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나손이라는 제자가 함께합니다.

사도행전 21장 16절입니다.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러 함이라.”

 

여기서 나손의 이름은 짧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매우 귀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울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꽃길을 걷는다고 생각해서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위험한 길을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갑니다.

이것이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성경은 혼자 위대한 영웅이 되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모세에게 아론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바나바가 있었고, 실라가 있었고, 디모데가 있었고, 누가가 있었고, 이름도 크게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이름이 유명한 사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름 없이 함께 걸어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손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로 가는가?” 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길이라면 나도 함께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믿음으로 갈 길을 결정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에도 두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이 허락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입니다.

 

환경이 허락하는 길은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은 때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인생을 결정하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사람입니까?

경력입니까?

자녀입니까?

안전입니까?

환경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사도행전 21장의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환경을 보고 길을 결정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말만 듣고 길을 결정하지 마십시오.”

“두려움 때문에 길을 결정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길을 결정하십시오.”

 

13. 믿음으로 결정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세 가지

오늘 말씀을 세 문장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은 환경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봅니다.

환경이 어렵습니까?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주님이 길을 아십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까? 주님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둘째, 믿음은 고난을 피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무조건 피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어려움을 무조건 찾아가지도 마십시오.

말씀을 보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공동체와 함께 분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다면 순종하십시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제거해 주시기보다 고난을 통과할 힘을 주십니다.

바울에게도 그랬습니다. 결박은 사명을 막지 못했습니다. 감옥은 복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권력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지 못했습니다.

셋째, 믿음은 혼자 가지 않고 믿음의 동역자와 함께 갑니다.

두로의 성도들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빌립처럼 과거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아가보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나손처럼 위험한 길에도 함께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처럼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십시오.

 

14.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질문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고 길을 결정하느냐?”

환경입니까? 사람입니까? 돈입니까? 두려움입니까? 과거의 상처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환경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앞에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 가십니다.”

“죽음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은 죽음보다 큽니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강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론 — 믿음으로 길을 결정하십시오

사도행전 21장의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였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얻었을 때 그는 움직였습니다.

그 길에 결박이 있었습니다.

환난이 있었습니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폭력이 있었습니다.

감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뚫고 복음은 로마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마지막에서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봅니다.

바울은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묶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죄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롭게 달려갑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결정한 인생의 결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조건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믿음입니다. 많은 자원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사람들의 인정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꽃길보다 중요한 것은 사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사명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간다면, 어떤 길도 헛되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도 사명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환경이 아니라 믿음으로 결정하게 하소서.”

“주님, 안전이 아니라 순종을 선택하게 하소서.”

“주님, 꽃길이 아니라 사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주님,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주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게 하소서.”

그리고 바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읍시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영성 깊은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사도 바울의 믿음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환경을 보고 결정했습니다.

돈이 있으면 가고, 사람이 찬성하면 가고, 안전하면 가고, 내가 손해 보지 않으면 순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했는지를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믿음을 주옵소서. 

 

환경보다 하나님을 크게 보게 하시고, 사람의 목소리보다 말씀을 더 크게 듣게 하시고,

두려움보다 주님의 약속을 붙들게 하옵소서.

 

우리 앞에 환난이 있다면 피할 길만 찾지 말게 하시고, 그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고만 묻지 않게 하시고,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무엇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묻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상처가 우리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하옵소서.

과거의 실패가 미래의 사명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시고,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하나님께 받은 부르심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존심보다 복음을 크게 하시고, 우리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크게 하시고, 

우리의 편안함보다 주님의 영광을 크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두로의 성도와 같은 믿음의 동역자를 허락하여 주시고, 빌립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하게 하시며,

나손처럼 다른 사람이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서로의 믿음을 살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의 사명을 격려하고, 누군가 힘들 때 곁을 떠나지 않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우리 안에 “오직 예수” 의 믿음을 세워 주옵소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며,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길이 꽃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됩니다. 우리 앞에 환난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아시면 됩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길 되신 예수님을 붙들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다시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의 미래를 맡깁니다. 가정을 맡깁니다. 교회를 맡깁니다. 사명을 맡깁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님, 내가 원하는 길보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선택하게 하소서.”

“환경으로 결정하지 말고 믿음으로 결정하게 하소서.”

“두려움으로 물러서지 말고 순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살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고, 마지막까지 복음의 사명을 완주하게 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