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영성 칼럼] '열심'의 방향,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 (사도행전 26장 14절)

knowledgeplatform100 2026. 9. 10. 14:50

「복음에 미친 사람」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사도행전 26장)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26장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완전히 뒤집힐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 바울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법정에 서 있습니다. 그 앞에는 총독 베스도가 있고, 아그립바 왕이 있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누가 누구를 심문하고 있는지 모호합니다. 겉으로 보면 바울이 죄수이고, 왕과 총독이 재판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죄수의 모습으로 서 있지만 복음의 대사로 서 있습니다.

왕은 왕좌에 앉아 있지만 복음 앞에서는 심판받아야 할 인간입니다.

 

총독은 바울의 죄를 찾으려고 하지만 오히려 바울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듣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세상은 “누가 높은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누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묻습니다. 세상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엇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사람의 인정입니까?

자존심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1. 바울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절에서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합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바울은 손을 들어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변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보통 법정에 선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석방해 주십시오.”

 

그것이 정상적인 법정 변론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의 무죄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법정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강단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보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여기까지 보내셨는가?” 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명의 사람과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차이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모든 사건을 자기 인생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합니까?” “왜 하나님은 나를 이런 곳에 보내셨습니까?”

 

그러나 사명을 받은 사람은 질문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바울에게 감옥은 실패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선교 현장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입니다. 직장이든 가정이든 병원이든 학교든 사업장이든 법정이든,

그곳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자리라면 그곳은 선교지가 될 수 있습니다.

 

2. 복음의 중심은 내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본래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전통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지금 심문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이것이 사도행전 26장의 중심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단순한 윤리적 변화가 아닙니다.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은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바울이 믿는 복음은 단순한 마음의 위안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역사 속에 개입하셨다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은 장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복음의 중심입니다.

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실패한 한 의인의 비극적 죽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 부활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는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십자가는 죄의 값을 치른 사건이고, 부활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3. 복음은 우리의 열심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열심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죽이는 일에 찬성했습니다. 회당에서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열심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열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문제는 열심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생활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열심히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해야 합니다. “내 열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0장 2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열심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열심에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헌신에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사명에는 말씀의 방향이 필요합니다.

 

4. 그래서 예수님은 바울에게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하늘에서 빛이 비칩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리고 사도행전 26장 1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여기서 “가시채”는 짐승을 앞으로 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뾰족한 막대기를 가리킵니다.

 

짐승이 그것을 거부하고 뒤로 발길질하면 오히려 자기 몸을 다치게 됩니다.

당시 헬라 문학에도 유사한 속담이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 말씀은 아주 강력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가시는 방향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끄시는데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맞습니다.”

하면서 계속 버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 붙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미워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라고 하시는데 자존심을 붙들 수 있습니다.

기다리라고 하시는데 조급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섬기라고 하시는데 인정받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이 됩니다.

열심히 하는데 상처가 납니다.

달려가는데 평안이 없습니다.

성공하는 것 같은데 영혼은 메말라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방향이 하나님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5. 진짜 회심은 단순히 종교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신 후 놀라운 사명을 주십니다. 사도행전 26장 16절부터 18절을 보면, “일어나 네 발로 서라.”

그리고 바울을 종과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특별히 18절이 중요한데 바울을 보내시는 목적은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의 구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구원은 단순히 상황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질병이 사라지는 것만도 아닙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훨씬 깊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죄에서 거룩으로. 자기중심성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하나를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6. 바울의 간증은 “내가 얼마나 특별한 경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의 다메섹 사건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간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빛 자체가 아닙니다. 음성 자체도 아닙니다. 기적 자체도 아닙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이 간증의 핵심입니다.

 

간증은 단순히 “내가 이런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체험도 귀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간증의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 인생에는 내가 죽은 이야기가 있는가?”

내 자존심이 죽은 이야기.

내 고집이 죽은 이야기.

내 욕심이 죽은 이야기.

내가 옳다는 집착이 죽은 이야기.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죽은 이야기.

그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가 살아난 이야기. 그것이 진짜 간증입니다.

 

7.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완전히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똑같이 어려움을 당해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까요?

환경의 차이만은 아닙니다.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앞으로 로마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면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자기 인생의 중심에 자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자기 의를 붙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칭찬받지 못해도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충성할 수 있습니다. 손해를 보아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치가 사람의 평가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8. “복음에 미쳤다”는 것은 정신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가장 큰 가치를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에서 베스도가 바울에게 외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얼마나 재미있는 장면입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자 베스도가 말합니다. “너 미쳤구나.”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미쳤다는 비난에 흥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변호하면서 사람과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분하게 진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이상합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봉사하지?

왜 저렇게까지 용서하지?

왜 손해를 보면서도 정직하지?

왜 아무도 보지 않는데 저렇게 충성하지?

왜 돈보다 사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왜 명예보다 예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사람들이 보면 이상합니다. “왜 저 밭을 사지?” 그러나 그 사람은 압니다. 그 밭의 진짜 가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본 사람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9. 복음에 미친 사람은 “무엇을 할까?”보다 “누구를 위해 살까?”를 먼저 묻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성공할까?”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까?”

 

그러나 복음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느냐?”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엄청난 선언입니다.

먹는 것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일하는 것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업하는 것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을 돌보는 것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을 사용하는 것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운동하는 것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만이 아닙니다. 왜 하느냐입니다.

 

복음이 중심에 있으면 일상이 예배가 됩니다.

반대로 예배를 드리면서도 삶의 중심에 욕심과 자기 영광이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분리된 신앙이 됩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진짜 예배는 주일 한 시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배당에서 시작해서 월요일의 직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찬송을 부르는 입술에서 끝나지 않고 회의하는 방식으로, 돈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약속을 지키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 그것이 복음에 사로잡힌 삶입니다.

 

10. 복음의 사람은 “선택”의 중심에 말씀을 둡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선택합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

어디에 시간을 쓸 것인가.

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정직할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이 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는가?”

본능입니까?

욕심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사람의 평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잠언 3장 5–6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복음은 우리의 판단력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말씀 앞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한 사람의 삶입니다.

 

11. 바울의 담대함은 객기가 아니라 부르심에서 나온 확신이었습니다

바울은 두려움이 없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인간입니다. 매를 맞았습니다. 돌에 맞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그가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6장 19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이 한 문장이 바울의 인생을 설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스르지 않았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모든 것이 이해된 다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결국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은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물론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참된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참된 믿음은 순종을 낳습니다. 참된 복음은 삶을 바꿉니다.

 

12.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바울은 마침내 아그립바에게 직접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대답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리고 바울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이 장면이 사도행전 26장의 절정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당신처럼 왕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의 자리를 갖고 싶습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합니다.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왜입니까?

바울에게 진짜 행복은 자유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행복은 왕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행복은 돈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묶여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몸은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반대로 아그립바는 왕이지만 복음 앞에서는 아직 결단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누가 진짜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세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성경은 후자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13. “거의 그리스도인”은 결국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6장에는 아주 두려운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아그립바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울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아그립바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복음을 듣는 것과 복음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감동받는 것과 회개하는 것도 다릅니다.

 

“좋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주님, 제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날에도 “거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익숙합니다.

성경도 압니다.

찬양도 좋아합니다.

설교도 듣습니다.

기독교 문화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자기 인생의 왕좌를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지식과 믿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14.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가능성이 높은 사람”만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만 골라서 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전도의 원리가 나옵니다.

전도의 결과는 우리의 책임이 아니지만, 증언하는 순종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우리는 씨를 뿌립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전합니다.

사람이 받아들이면 감사한 일입니다. 거절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고 해서 우리의 사명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충성하면 됩니다.

 

15. 복음에 미친 사람은 결국 “복음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복음에 미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극단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을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정직하게 일하게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게 합니다. 약한 사람을 섬기게 합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진리를 붙들게 합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높이지 않게 합니다. 사람의 인정에 노예가 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삶의 모든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미친 사람에게는 삶의 구분이 사라집니다. “여기까지는 신앙이고, 여기부터는 내 인생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도 주님의 것입니다.

가정도 주님의 것입니다.

재정도 주님의 것입니다.

시간도 주님의 것입니다.

재능도 주님의 것입니다.

관계도 주님의 것입니다.

미래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생명도 주님의 것입니다.

 

16.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는 “십자가를 통과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세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 나는 지금 무엇에 가장 열심입니까?

그 열심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성공과 인정과 욕심을 향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나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놓으라고 하시는 것을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 번째 내 인생의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내가 중심입니까?

돈이 중심입니까?

자녀가 중심입니까?

성공이 중심입니까?

건강이 중심입니까?

사람의 인정이 중심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모든 것이 뒤집혔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위해 죽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성도를 잡으러 갔습니다. 이제는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과거에는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붙잡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께 붙잡힌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내 뜻이 내려가고, 하나님의 뜻이 올라옵니다. 내 영광이 내려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옵니다. 내 계획이 내려가고, 하나님의 사명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결론 — 당신도 복음에 미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더 많이 가져라.”

“더 높아져라.”

“더 인정받아라.”

“더 성공해라.”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세상은 말합니다. “네 인생은 네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세상은 말합니다. “자신을 증명하라.” 그러나 십자가는 말합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다.”

그러므로 더 이상 사람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받았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합니다.

인정받기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인정받았기 때문에 섬깁니다.

 

이것이 복음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보여준 삶입니다.

복음에 미친 사람.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 부활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삶 전체를 예배로 드리는 사람.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사는가?” 라고 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아, 저 사람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구나.” 라는 답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삶이 복음을 증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성공보다 우리의 충성이 복음을 증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소유보다 우리의 나눔이 복음을 증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힘보다 우리의 겸손이 복음을 증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까지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다시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도 때로는 바울처럼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 열심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내 뜻을 붙들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면서 내 욕심을 붙들었습니다.

열심이라고 하면서 내 자존심을 붙들었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더 이상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인생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가시는 방향으로 가게 하시고, 주님께서 멈추라 하시면 멈추고,

주님께서 내려놓으라 하시면 내려놓고, 주님께서 가라 하시면 두려워하지 않고 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게 하시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복음으로 새롭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통과한 이야기가 있게 하옵소서.

자존심이 죽은 이야기가 있게 하시고,

욕심이 죽은 이야기가 있게 하시고,

교만이 죽은 이야기가 있게 하시고,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난 이야기가 있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사람의 인정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직장이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공부가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사업이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재정이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관계가 예배가 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도 바울처럼 어떤 자리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높은 사람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낮은 사람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기회가 있을 때뿐 아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언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결과를 책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충성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뜻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한 사람을 용서하게 하시고,

한 사람을 섬기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인생의 중심에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 주옵소서.

 

돈이 중심이 되지 않게 하시고, 명예가 중심이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람의 평가가 중심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마지막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 제가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라고 말하기보다 “주님, 제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이 복음의 증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이 복음의 증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일터가 복음의 증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