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로마”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2-23장)
우리 인생에는 평생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잘된 순간도 있고, 실패한 순간도 있습니다.
사람을 얻은 순간도 있고 사람을 잃은 순간도 있습니다.
기도했더니 길이 열린 순간도 있고, 아무리 기도해도 길이 보이지 않았던 순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인생의 모든 순간이 똑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잘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때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길이 막히고, 앞이 보이지 않는데 오히려 그때 하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적으로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평안할 때 어디를 보고 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내 인생이 뒤집혔을 때 나는 어디를 바라보는가?”
1. 바울은 인생이 뒤집힌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줍니다.
그의 간증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는 자기 자랑부터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말합니다.
길리기아 다소 출신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받았으며, 율법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놀랍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간증의 중심이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첫째,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나.
둘째, 예수님을 만난 사건.
셋째,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된 나.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중심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간증의 본질입니다. 간증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가” 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간증에는 반드시 복음이 들어갑니다.
2. 바울은 눈이 멀었을 때 오히려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인생에서 가장 역설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6절 이하에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늘로부터 큰 빛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 순간 바울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자기가 잘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기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눈이 닫힙니다. 사도행전 22장 11절입니다.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보던 사람이 못 보게 되고, 못 보던 사람이 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모든 것을 자기 판단으로 결정했습니다.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
“누구를 잡을 것인가?”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
“무엇이 옳은가?”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묻습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이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3. 진짜 회심은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회심은 단순히 종교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회심은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를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를 묻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 있습니다.
신앙은 내 계획에 하나님을 끼워 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으로 내 인생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짜 만나면 장소는 같아도 목적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원래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같은 다메섹으로 가지만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직장인데 의미가 달라집니다.
같은 가정인데 의미가 달라집니다.
같은 학교인데 의미가 달라집니다.
같은 사업인데 의미가 달라집니다.
같은 재능인데 의미가 달라집니다.
같은 돈인데 의미가 달라집니다.
같은 시간을 보내는데 의미가 달라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인생의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4.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늘의 관점으로 보는 인생
골로새서 3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은 현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을 하늘의 관점으로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땅을 봅니다.
돈을 봅니다.
건강을 봅니다.
사람을 봅니다.
성공을 봅니다.
실패를 봅니다.
문제를 봅니다.
그런데 인생이 뒤집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이제 무엇이 보이느냐?”
바울은 눈이 멀었을 때 하나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줍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어떤 것을 빼앗아 가심으로써 더 중요한 것을 보게 하십니다.
건강 때문에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사업이 흔들려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관계가 무너져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계획이 실패해서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내가 의지하던 것이 무너져야 비로소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래서 고난 자체가 은혜라는 말은 아닙니다. 고난은 고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은혜를 만들어 내시는 분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약속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5. 눈먼 인생에서 사명을 바라보는 증인의 인생으로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 자기 문제만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사명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 사도행전 22:21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목적은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회심의 완성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증인이 됩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증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바울의 삶은 이 말씀의 구체적인 실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증언했고, 그 증언 때문에 고난을 받았고, 그 고난 가운데서도 계속 증언했습니다.
6. 성령의 지혜는 군중 속에 숨어 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에서 바울을 향한 군중의 반응은 극단적입니다.
사도행전 22장 22–23절에서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이 그들의 우상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의 주권을 흔듭니다.
“내가 주인이다.” 라고 말하는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 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회개를 요구합니다.
장면을 군중과 익명성이 결합될 때 나타나는 인간의 무책임과 광기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성령의 지혜를 이름을 가지고 책임지는 삶으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온라인에서는 익명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합니다. 책임지지 않고 비판합니다.
군중이 되면 개인의 양심이 약해집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를 익명의 군중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신 앞의 단독자”라는 개념이 여기서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진정한 신앙은 “다들 그렇게 하니까” 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입니다.
7. 바울은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힘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서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사용합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채찍질하려 하자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권력을 사용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목적이 아니라 사명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독교 정치·윤리의 원리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제도와 권리를 무조건 거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적 권리와 사회적 자원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적 권력관이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내가 얼마나 위에 있는가?” 를 묻습니다. 복음의 권력은 “내가 누구를 얼마나 살리고 섬길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마태복음 20:26
진짜 힘은 약자를 누르는 힘이 아니라 약자를 살리는 힘입니다.
8. 사도행전 23장 ― 진리는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이제 바울은 공회 앞에 섭니다. 사도행전 23장 1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그리고 대제사장과 충돌합니다. 이후 바울은 매우 전략적인 말을 합니다.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러자 공회가 둘로 갈라집니다. 왜입니까? 부활 때문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은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결국 바울이 부활을 선포하자 그들 사이에 논쟁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분별을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마태복음 10:3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폭력을 명령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이 인간의 거짓된 평화를 깨뜨린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들어오면 진실과 거짓이 갈라집니다. 빛과 어둠이 갈라집니다. 거룩과 죄가 갈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 사랑을 말해야 하지만, 동시에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 없는 사랑은 결국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진리 안에 있습니다.
9. 그런데 진리를 증언한 바울에게 밤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다시 로마 군대의 영내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십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여러분,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날 밤 바울에게 천사가 나타났다” 고만 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바울 곁에 서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 없는 인생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문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 을 약속하십니다.
시편 23편 4절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골짜기로 가지 마라” 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골짜기에서도 내가 너와 함께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10. “담대하라” ― 하나님은 지친 사람에게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통찰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사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명을 아는 것과 사명을 감당할 힘이 있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지칠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지칩니다. 선교사도 지칩니다. 부모도 지칩니다. 교사도 지칩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지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도 지칩니다. 엘리야도 지쳤습니다.
갈멜산에서 놀라운 승리를 경험했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탈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먹이시고 쉬게 하시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지친 종에게 “왜 이렇게 약하냐”고 책망하기 전에 다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11. 과정은 모르지만 끝은 압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알려주겠다” 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끝을 알려주셨습니다. 바울은 과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목적지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입니다. 우리는 내일의 모든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12. 그래서 사도행전 23장의 40명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23장 후반부를 보십시오. 40명이 바울을 죽이려고 모입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 고 맹세합니다.
얼마나 집요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더 큽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이 누군가에게 알려집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의 조카입니다.
바울의 조카가 이 음모를 듣고 바울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백부장이 이 말을 듣고 천부장에게 연결해 줍니다.
그리고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병력을 동원합니다.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 총 470명입니다.
40명의 암살 음모에 맞서 470명의 로마 병력이 바울을 안전하게 가이사랴로 호송하는 장면으로 펼쳐집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미리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호하실지도 몰랐습니다.
누가 자신을 도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13.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때 “하나님, 이렇게 도와주세요.” 라고 방법까지 정해 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도우십니다. 바울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조카를 사용하셨습니다. 백부장을 사용하셨습니다.
천부장을 사용하셨습니다. 로마 제국의 군대를 사용하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잡아 가두었던 제국의 법과 질서까지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기적처럼 보이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주 평범한 사람을 통해 나타납니다.
때로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통해 나타납니다.
때로는 내가 싫어했던 사람을 통해 나타납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상황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14.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상황만 보고 인생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누가 보아도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이려고 합니다. 재판을 받습니다.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무엇입니까? 로마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감옥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선교의 통로였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결박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로마로 가는 이동 경로였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실패였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사명의 성취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막혀 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늦어졌다고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고난이 있다고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15. “하늘을 본다”는 말의 영적 의미
우리는 평소에 땅만 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바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의 문제는 땅의 필요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땅의 필요가 하나님보다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의 인생을 뒤집으십니다.
계획을 뒤집으십니다.
관계를 뒤집으십니다.
환경을 뒤집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의지하던 것을 흔드십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이제 나를 보겠느냐?”
16. 눈이 보이지 않을 때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도행전 9장의 바울을 보면 매우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울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 후 기도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 바울이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의 시야가 닫힐 때 오히려 하나님께 집중하는 영적 전환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잘 보일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가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그래서 기도는 문제 해결의 도구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시선을 교정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반드시 즉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문제를 바라보는 내가 변화됩니다.
17. 성령의 지혜란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뒤집힌 인생에서 하늘을 볼 수 있습니까?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앞서가고 우리가 따라가는 삶”은 바늘과 실의 관계입니다.
바늘이 먼저 가면 실이 따라가듯이, 성도가 말씀을 앞세우면 삶이 말씀을 따라 정렬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내 생각대로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이 아닙니다.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말씀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조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빛이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 길을 정하고 말씀을 들고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길을 비추면 내가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18. 성령의 위로는 우리를 다시 일으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에게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위로를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바울 곁에 서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기독교의 위로는 “괜찮아질 거야.” 라는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위로는 “주님이 함께하신다.” 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 “나는 왜 이렇게 약하지?” 라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들으십시오.
“담대하라.” 하나님께서는 지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다시 말씀하시고, 다시 세우시고,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19. 여러분의 인생에도 “로마”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로마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목적지 '로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로마”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교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선교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음 세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할 친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사명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공통된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맡기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 내게 맡기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20. 간증을 준비하십시오
언젠가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물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때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여러분의 간증을 정리해 놓으십시오.
첫째, 예수님을 만나기 전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둘째,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가?
셋째, 예수님을 만난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 세 가지를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간증의 중심에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21. 우리의 이야기가 “그분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간증에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내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면 간증이 자랑이 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면 간증이 복음이 됩니다.
바울은 자기 과거를 말했지만 결국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자기가 당한 고난을 말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은혜를 말했습니다.
자기의 약함을 말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삶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이 바울의 간증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신다.”
22. 고난은 사명을 취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선명하게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만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그런데 바울을 보십시오. 고난이 올수록 그의 사명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고난은 사명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이 사명을 통과하는 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과하셨듯이, 바울도 결박을 통과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고난을 통해 복음을 확장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있다 = 하나님이 없다” 라는 공식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가 성경적 고백입니다.
23. 대적보다 하나님의 섭리가 큽니다
사도행전 23장에는 40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470명의 군사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숫자 싸움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섭리의 방향입니다.
대적은 계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이 문을 닫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문을 여십니다.
사람이 길을 막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길을 만드십니다.
사람이 죽이려 합니다. 하나님은 보호하십니다.
사람이 결박합니다. 하나님은 그 결박을 복음의 통로로 바꾸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봐야 합니다. 시편 121편 7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모든 환난에서 지켜 주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의 보호는 “아무런 문제가 없게 만드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인생이 뒤집혀 있다면
혹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이 뒤집혀 있습니까?
계획이 뒤집혔습니까?
건강 때문에 마음이 흔들립니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까?
가정의 문제로 힘듭니까?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뒤집힌 인생이 반드시 실패한 인생은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하나님께서 하늘을 보게 하시는 중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아직 네 사명이 끝나지 않았다.” “너는 가야 할 곳이 있다.” “내가 너를 붙들겠다.”
결론 ― 하늘을 보는 사람은 다시 걸어갑니다
바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결박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박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사명은 갇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혼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곁에 서셨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을 모두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목적지는 알았습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증언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길을 미리 보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고 한 걸음씩 걷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이 땅만 보고 있다면 하늘을 보십시오.
돈만 보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십시오.
문제만 보고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보십시오.
사람만 보고 있다면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미래가 두렵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뒤집힌 인생은 끝난 인생이 아닙니다. 뒤집힌 인생은 하늘을 볼 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본 사람은 다시 일어납니다.
다시 기도합니다.
다시 말씀을 붙듭니다.
다시 사명을 붙듭니다.
다시 복음을 전합니다.
다시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곁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핵심 메시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땅입니까? 아니면 하늘입니까?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 내 능력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정한 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길입니까?
오늘 사도행전 22–23장이 우리에게 주는 대답은 분명합니다.
“뒤집힌 인생에서도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말씀을 붙드십시오. 성령의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향해 다시 걸어가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그리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로마”가 있습니다. 그곳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영성 깊은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이 너무 자주 땅을 바라보았음을 고백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얻을까,
어떻게 성공할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의 시선을 다시 하늘로 들어 올려 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인생이 뒤집힐 때 원망하지 않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길이 막힐 때 주님이 다른 길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사람이 떠날 때 주님께서 곁에 서 계심을 알게 하옵소서.
힘이 빠질 때 “담대하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하시고, 우리의 귀를 열어 주옵소서.
세상의 수많은 소리보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시고,
나의 성공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게 하시며, 나의 영광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간증을 주옵소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그리고 주님을 만난 후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우리의 삶으로 증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이야기가 자랑이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병든 자에게 힘을 주시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에게 길을 열어 주시고, 가정의 문제로 눈물 흘리는 자에게 위로를 주시고,
사람에게 상처받은 자에게 하늘의 평안을 주시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모든 과정을 알려 달라고 요구하기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과정은 몰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바울을 죽이려 했던 40명의 음모보다 바울을 보호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더 컸던 것처럼,
우리 앞에 놓인 어떤 대적보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로마를 향하여 오늘도 한 걸음씩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이 선교지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직장이 선교지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일상이 예배가 되게 하시며, 우리의 만남이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마지막까지 “주님,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묻게 하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한 걸음을
오늘 순종하게 하옵소서.
뒤집힌 인생 가운데서 하늘을 보게 하시고, 하늘을 본 사람답게 다시 일어나게 하시며, 다시 말씀을 붙들고,
다시 기도하고, 다시 사랑하고, 다시 섬기고, 다시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 곁에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과거는 주님의 긍휼에 맡기고,
우리의 현재는 주님의 은혜에 맡기며,
우리의 미래는 주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는지 다 알지 못하지만 주님이 함께하시면 걷겠습니다.”
“주님, 제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를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의 인생이 뒤집혀도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시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성칼럼] 복음 들여다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성 칼럼]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왜 바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가? (사도행전 28장) (0) | 2026.09.15 |
|---|---|
| [영성 칼럼] '열심'의 방향,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 (사도행전 26장 14절) (0) | 2026.09.10 |
| [영성 칼럼] 이름 없이 함께 걸어준 동역자 (사도행전 21장) (0) | 2026.09.10 |
| [영성 칼럼]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장) (0) | 2026.09.10 |
| [영성 칼럼] 선물 같은 사람 (사도행전 18–19장) (0) | 2026.09.09 |